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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2
아라의 패턴은 늘 똑같았다. 소개팅을 하고 난 다음날이면 매번 상대방이 전 애인보다 괜찮은 남자라며 들떠 있었지만 번번이 만남은 실패로 끝나 버렸다. 그러고 나면 한 이틀쯤은 깊은 상실감에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가 또다시 소개팅을 한다며 들떠 있기를 반복해 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안 되겠어.”
이수는 기대감을 품은 채 눈을 깜빡이고 있는 아라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예정에도 없던 그런 약속이 반갑지도 않을 뿐더러 아라의 연애놀음에 기꺼이 조연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아, 왜요? 선배도 남자친구 없다면서요.”
“귀찮아. 괜히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머리 아프고.”
“그래 봐야 딱 한 번이잖아요.”
“미안하지만 지금 남자 만나 시시덕거릴 기분 아니거든.”
“기분 우울하세요? 그럼 기분 전환한다 생각하고 같이 가요. 네? 딱 한 번만!”
한번 조르기 시작한 아라는 찰거머리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양치를 하러 화장실에 갈 때도 아라는 이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케이라는 대답을 요구했다.
“선배님∼”
코맹맹이 소리가 섞인 선배님 소리를 수십 번은 족히 듣고 있으려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어렵게 잡은 소개팅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아라의 엄살에 지친 이수가 결국 딱 한 번이라는 조건으로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하고 나서야 아라는 스토커 짓을 멈추며 이수를 해방시켜 주었다.
“선배님 복 받으실 거예요.”
가벼운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가는 아라의 뒷모습을 보며 이수는 낮은 한숨을 토해 냈다.
“하. 귀찮게 돼 버렸네.”
마지못해 허락을 해 놓고도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었다. 작업을 위해 스케치북을 펼쳐 들었던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들어갔다. 차를 마실 생각에 전기포트에 물을 붓고는 사물함에서 컵을 꺼내 들었다.
“…….”
버릇처럼 집어 든 건 튤립 모양으로 만들어진 노란 잔이었다. 손에 들린 머그컵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이수의 눈빛이 어둡게 짙어졌다. 언젠가 은재가 유럽으로 출장을 다녀오며 사다 준 컵이었다. 차를 좋아하는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건네던 은재의 웃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이수는 들었던 컵을 제자리에 놓아두고 무늬가 없는 하얀 컵을 꺼냈다. 녹차 티백 두 개를 넣고 물을 붓자 이내 향긋한 향이 퍼지며 물은 손을 담그면 푸른 물이 들 것만 같은 짙은 녹색으로 변하였다.
뜨거운 찻잔을 들고 제자리로 돌아온 이수의 눈에 탁상 달력이 들어왔다.
“…….”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 버린 걸까. 날짜가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바쁘게 살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한 달 분량의 일을 해치워 버린 느낌이다.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던 것을 증명하듯 뽑아낸 디자인들이 수북하게 책상에 쌓여 있었다.
카페에서 언성을 높이고 헤어졌던 다음날 은재는 출장을 떠났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돌아올 날이 가까워질수록 이수의 근심도 깊어졌다. 같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왜 사내연애를 꺼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돌아오면 회사 어디서든가 부딪히게 될 텐데 대체 은재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까.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할 수가 있을까.
한성가구 디자인실에서 근무하는 이수는 주로 주니어가구의 디자인을 맡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공방을 다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방이 문을 닫아 버려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었다. 그때 은재가 소개한 곳이 여기 한성가구였다. 경력이 변변치 않아 기대도 못했던 입사는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합격 전화를 받고 얼떨떨해하던 이수가 혹시 자신이 낙하산은 아닐까 의구심을 품었을 때 은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고작 팀장이나 하는 사람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며 오로지 이수의 실력 덕분이라고 그녀를 치켜세웠었다.
여기를 그만둬야 할까.
며칠째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을 떠올리며 쥐고 있던 연필을 책상에 내려놓은 이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자신했었는데 이번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 안 좋은 징조였다. 더 깊어지기 전에 멈추려면 잘라야 한다. 업무 때문에 자꾸만 부딪히는 공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몇 달째 붓고 있는 적금을 깨면 당분간 생활은 해결이 될 것이고 그동안 취직을 하면 된다. 운이 좋으면 작은 공방에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수는 잘라내듯 혼란을 털어 내고는 그리다 만 디자인으로 눈길을 돌렸다.
순간 모니터 하단의 노란불이 깜빡거렸다. 손을 움직여 클릭을 하자 떠오른 메신저에 은재의 이름이 보였다. 그가 돌아온 모양이다.
<이수야.>
“…….”
<송이수.>
무시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숨는 건 그녀의 방식이 아니다. 가끔은 진저리가 날 정도로 지독하게. 그게 송이수의 방식이니까.
<언제 왔어?>
<지금. 퇴근하고 잠깐 만나.>
<약속 있어.>
<취소해.>
<그럴 수 없는 자리야.>
<그럼 다녀와. 집에서 기다릴게.>
대답도 듣지 않고 로그아웃 상태가 되어 버린 은재의 이름을 이수는 넋이 나간 얼굴로 오래도록 보았다.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었다는 걸 알면 은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스케치북을 누르고 있던 연필심이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아라와의 약속을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하던 이수는 집에서 보자던 은재의 말을 무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질질 끌 필요는 없다. 무를 잘라내듯 깨끗하고 단숨에. 그건 자신 스스로가 정해 놓은 선이기도 했다. 상처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 같은 것. 그어진 선을 넘는 순간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한다는 걸 이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꽤 유명한 이태리 음식점 안쪽 테이블에 네 명의 젊은 남녀가 마주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첫 만남이라 어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시종일관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자신의 파트너가 된 남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들떠 보이는 아라의 눈빛이 조명에 반짝거렸다. 펀드매니저를 하고 있다는 남자는 꽤 준수한 생김새에 예의 바른 말씨를 지닌 남자였는데 그도 아라에게 호감이 있어 보였다. 잘 어울려 보이는 그들을 지켜보던 이수는 다행이다 싶었다. 이번에 잘되면 아라는 더 이상 소개팅 자리를 전전하며 우울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더불어 자신에게 오늘처럼 귀찮게 구는 일도 없을 테니까.
“음식이 입에 안 맞으세요?”
상념을 깨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가물가물한 기억에 이수의 미간이 슬쩍 찡그려졌다.
“죄송해요. 잠깐 딴 생각을 좀 하느라고.”
“입에 안 맞으시면 다른 걸로 바꿔 드릴게요.”
남자의 말에 접시를 살피자 다른 이들이 식사를 마치는 동안 자신만 아직 반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수는 머쓱함에 들고 있던 포크로 적당히 익은 스테이크 조각을 찍어 입에 물며 싱긋 웃었다.
“훌륭한 음식을 밀쳐 낸다는 것은 음식에 대한 도리가 아니죠.”
이수의 상대가 된 남자는 선한 인상이었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못하게 생긴, 그래서 살아가는 내내 많은 손해를 볼 것 같은 남자. 이수가 웃어 보이자 남자도 덩달아 웃었다. 이수를 바라보는 그의 볼이 슬쩍 붉어졌다.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수 씨, 웃는 모습이 참 예쁘세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지자 이수는 문득 아라의 부탁 때문에 억지로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 괜히 미안해졌다.
“예쁘게 봐 주셔서 고마워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남자 때문에 시간은 어색하지 않고 즐겁게 흘러갔다. 가끔 이수를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번 한 번만 만날 사람이니까.
저녁을 먹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식당을 나오며 간절한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오는 아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언니. 나중에 봐요. 이수 언니 좀 잘 부탁해요.”
제 파트너를 데리고 사라져 가는 아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선 이수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 가서 차나 한잔 더 하실래요?”
여기서 그만 헤어지자는 말을 할 셈이었는데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껏 들떠 있는 남자의 표정에 이수는 미안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혹시 걷는 것 좋아하세요?”
“예? 예. 걷는 것 자신 있습니다.”
“그럼 소화도 시킬 겸 집까지 좀 걸을래요?”
밥을 먹었던 장소에서 집까지는 다섯 정거장이 넘는 거리였다. 흔쾌히 들려오는 허락에 이수가 앞장서 걷기 시작하자 남자는 냉큼 옆으로 다가와 이수를 안쪽으로 보내고 자신이 차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매너가 자연스레 몸에 밴 모습이었다.
밤공기는 꽤 쌀쌀했다. 며칠 사이 가을은 무르익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은 노랗게 물이 들어 까만 밤하늘을 수놓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춤을 추듯 너울거리며 도로 위로 떨어져 내렸다.
“가을은 점점 짧아져 가는 것 같아요.”
“아쉬움이 큰 만큼 애틋한 계절이기도 하죠.”
“설악산에도 단풍이 들었을까요?”
“지금쯤이면 온 산이 붉지 않을까요?”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걷기를 30여 분. 멀리 길 건너에 오피스텔 건물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이수는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미안하게도 한번 잊어버린 그의 이름은 그때까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 고마웠어요.”
이수의 인사에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김태수. 그의 이름을 확인하듯 속으로 되뇌는 이수의 귓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수 씨.”
마주본 그의 얼굴은 어둠속에서도 붉어 보였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그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
“연락 기다려도 됩니까?”
정중한 그의 물음에 가방을 쥔 이수의 손에 바짝 힘이 실렸다. 발걸음을 돌려 그를 마주보니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표정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적당히 얼버무려 이 상황을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혹시 라는 기대감을 남겨 자신을 기다릴 남자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떨어지지 않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것처럼 달콤한 고문과도 같은 일이니까.
“죄송합니다. 그러시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그녀의 거절에 남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태수 씨, 충분히 멋진 분이세요.”
“이유를 물어도 실례가 안 되겠습니까?”
이 남자를 만나지 않을 이유. 가져다 붙이려 들면 얼마든지 이유쯤은 만들어 내겠지만 그건 변명에 불과한 것들뿐이다. 이수의 성격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건 어울리지도 않다.
“함께 나오기로 했던 사람이 못 오게 된 자리였어요. 전 그냥 그 자리를 채웠을 뿐이고요.”
“혹시…… 남자친구 있으십니까?”
남자의 물음에 이수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둑한 밤공기 사이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현재에서 과거로 바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헤어진 거라면, 이수 씨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꽤 집요한 사람이다. 끈질기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요구하는 모습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태수 씨는 사랑을 믿으세요?”
“……믿습니다.”
“전 세상에서 쓸모없는 감정이 그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장하고는 전부를 내준 상대를 잔인하게 배신하죠. 그 사랑에 전부를 걸 만큼 전 낙천적이지도, 따듯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상처를 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죠.”
“…….”
“끝까지 좋은 모습으로 남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태수 씨에겐 다가올 겨울을 함께 할 부드럽고 따뜻한 여자가 분명 생길 거예요. 오늘은 감사했어요.”
굳은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선 이수를 그는 붙잡지 않았다. 하긴, 자신이라도 싫겠다. 이런 성격 파탄자를 어느 누가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입가에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등에 와 닿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꼿꼿한 모습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괜한 짓을 벌였구나. 옅은 후회감이 밀려들었다. 문득 올려다본 까만 밤하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 묘하게 서글펐다.
벨이 울리고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를 울리는 익숙한 구두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차츰 느려지는 소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은재 앞에 멈춰 섰다.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자 낯익은 구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넘어질까 불안해 보이는 높은 힐과 한 줌밖에 되지 않을 가느다란 발목. 이수가 돌아온 모양이다.
1-2
아라의 패턴은 늘 똑같았다. 소개팅을 하고 난 다음날이면 매번 상대방이 전 애인보다 괜찮은 남자라며 들떠 있었지만 번번이 만남은 실패로 끝나 버렸다. 그러고 나면 한 이틀쯤은 깊은 상실감에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가 또다시 소개팅을 한다며 들떠 있기를 반복해 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안 되겠어.”
이수는 기대감을 품은 채 눈을 깜빡이고 있는 아라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예정에도 없던 그런 약속이 반갑지도 않을 뿐더러 아라의 연애놀음에 기꺼이 조연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아, 왜요? 선배도 남자친구 없다면서요.”
“귀찮아. 괜히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머리 아프고.”
“그래 봐야 딱 한 번이잖아요.”
“미안하지만 지금 남자 만나 시시덕거릴 기분 아니거든.”
“기분 우울하세요? 그럼 기분 전환한다 생각하고 같이 가요. 네? 딱 한 번만!”
한번 조르기 시작한 아라는 찰거머리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양치를 하러 화장실에 갈 때도 아라는 이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케이라는 대답을 요구했다.
“선배님∼”
코맹맹이 소리가 섞인 선배님 소리를 수십 번은 족히 듣고 있으려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어렵게 잡은 소개팅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아라의 엄살에 지친 이수가 결국 딱 한 번이라는 조건으로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하고 나서야 아라는 스토커 짓을 멈추며 이수를 해방시켜 주었다.
“선배님 복 받으실 거예요.”
가벼운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가는 아라의 뒷모습을 보며 이수는 낮은 한숨을 토해 냈다.
“하. 귀찮게 돼 버렸네.”
마지못해 허락을 해 놓고도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었다. 작업을 위해 스케치북을 펼쳐 들었던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들어갔다. 차를 마실 생각에 전기포트에 물을 붓고는 사물함에서 컵을 꺼내 들었다.
“…….”
버릇처럼 집어 든 건 튤립 모양으로 만들어진 노란 잔이었다. 손에 들린 머그컵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이수의 눈빛이 어둡게 짙어졌다. 언젠가 은재가 유럽으로 출장을 다녀오며 사다 준 컵이었다. 차를 좋아하는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건네던 은재의 웃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이수는 들었던 컵을 제자리에 놓아두고 무늬가 없는 하얀 컵을 꺼냈다. 녹차 티백 두 개를 넣고 물을 붓자 이내 향긋한 향이 퍼지며 물은 손을 담그면 푸른 물이 들 것만 같은 짙은 녹색으로 변하였다.
뜨거운 찻잔을 들고 제자리로 돌아온 이수의 눈에 탁상 달력이 들어왔다.
“…….”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 버린 걸까. 날짜가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바쁘게 살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한 달 분량의 일을 해치워 버린 느낌이다.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던 것을 증명하듯 뽑아낸 디자인들이 수북하게 책상에 쌓여 있었다.
카페에서 언성을 높이고 헤어졌던 다음날 은재는 출장을 떠났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돌아올 날이 가까워질수록 이수의 근심도 깊어졌다. 같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왜 사내연애를 꺼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돌아오면 회사 어디서든가 부딪히게 될 텐데 대체 은재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까.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할 수가 있을까.
한성가구 디자인실에서 근무하는 이수는 주로 주니어가구의 디자인을 맡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공방을 다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방이 문을 닫아 버려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었다. 그때 은재가 소개한 곳이 여기 한성가구였다. 경력이 변변치 않아 기대도 못했던 입사는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합격 전화를 받고 얼떨떨해하던 이수가 혹시 자신이 낙하산은 아닐까 의구심을 품었을 때 은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고작 팀장이나 하는 사람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며 오로지 이수의 실력 덕분이라고 그녀를 치켜세웠었다.
여기를 그만둬야 할까.
며칠째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을 떠올리며 쥐고 있던 연필을 책상에 내려놓은 이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자신했었는데 이번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 안 좋은 징조였다. 더 깊어지기 전에 멈추려면 잘라야 한다. 업무 때문에 자꾸만 부딪히는 공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몇 달째 붓고 있는 적금을 깨면 당분간 생활은 해결이 될 것이고 그동안 취직을 하면 된다. 운이 좋으면 작은 공방에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수는 잘라내듯 혼란을 털어 내고는 그리다 만 디자인으로 눈길을 돌렸다.
순간 모니터 하단의 노란불이 깜빡거렸다. 손을 움직여 클릭을 하자 떠오른 메신저에 은재의 이름이 보였다. 그가 돌아온 모양이다.
<이수야.>
“…….”
<송이수.>
무시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숨는 건 그녀의 방식이 아니다. 가끔은 진저리가 날 정도로 지독하게. 그게 송이수의 방식이니까.
<언제 왔어?>
<지금. 퇴근하고 잠깐 만나.>
<약속 있어.>
<취소해.>
<그럴 수 없는 자리야.>
<그럼 다녀와. 집에서 기다릴게.>
대답도 듣지 않고 로그아웃 상태가 되어 버린 은재의 이름을 이수는 넋이 나간 얼굴로 오래도록 보았다.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었다는 걸 알면 은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스케치북을 누르고 있던 연필심이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아라와의 약속을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하던 이수는 집에서 보자던 은재의 말을 무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질질 끌 필요는 없다. 무를 잘라내듯 깨끗하고 단숨에. 그건 자신 스스로가 정해 놓은 선이기도 했다. 상처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 같은 것. 그어진 선을 넘는 순간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한다는 걸 이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꽤 유명한 이태리 음식점 안쪽 테이블에 네 명의 젊은 남녀가 마주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첫 만남이라 어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시종일관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자신의 파트너가 된 남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들떠 보이는 아라의 눈빛이 조명에 반짝거렸다. 펀드매니저를 하고 있다는 남자는 꽤 준수한 생김새에 예의 바른 말씨를 지닌 남자였는데 그도 아라에게 호감이 있어 보였다. 잘 어울려 보이는 그들을 지켜보던 이수는 다행이다 싶었다. 이번에 잘되면 아라는 더 이상 소개팅 자리를 전전하며 우울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더불어 자신에게 오늘처럼 귀찮게 구는 일도 없을 테니까.
“음식이 입에 안 맞으세요?”
상념을 깨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가물가물한 기억에 이수의 미간이 슬쩍 찡그려졌다.
“죄송해요. 잠깐 딴 생각을 좀 하느라고.”
“입에 안 맞으시면 다른 걸로 바꿔 드릴게요.”
남자의 말에 접시를 살피자 다른 이들이 식사를 마치는 동안 자신만 아직 반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수는 머쓱함에 들고 있던 포크로 적당히 익은 스테이크 조각을 찍어 입에 물며 싱긋 웃었다.
“훌륭한 음식을 밀쳐 낸다는 것은 음식에 대한 도리가 아니죠.”
이수의 상대가 된 남자는 선한 인상이었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못하게 생긴, 그래서 살아가는 내내 많은 손해를 볼 것 같은 남자. 이수가 웃어 보이자 남자도 덩달아 웃었다. 이수를 바라보는 그의 볼이 슬쩍 붉어졌다.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수 씨, 웃는 모습이 참 예쁘세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지자 이수는 문득 아라의 부탁 때문에 억지로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 괜히 미안해졌다.
“예쁘게 봐 주셔서 고마워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남자 때문에 시간은 어색하지 않고 즐겁게 흘러갔다. 가끔 이수를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번 한 번만 만날 사람이니까.
저녁을 먹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식당을 나오며 간절한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오는 아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언니. 나중에 봐요. 이수 언니 좀 잘 부탁해요.”
제 파트너를 데리고 사라져 가는 아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선 이수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 가서 차나 한잔 더 하실래요?”
여기서 그만 헤어지자는 말을 할 셈이었는데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껏 들떠 있는 남자의 표정에 이수는 미안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혹시 걷는 것 좋아하세요?”
“예? 예. 걷는 것 자신 있습니다.”
“그럼 소화도 시킬 겸 집까지 좀 걸을래요?”
밥을 먹었던 장소에서 집까지는 다섯 정거장이 넘는 거리였다. 흔쾌히 들려오는 허락에 이수가 앞장서 걷기 시작하자 남자는 냉큼 옆으로 다가와 이수를 안쪽으로 보내고 자신이 차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매너가 자연스레 몸에 밴 모습이었다.
밤공기는 꽤 쌀쌀했다. 며칠 사이 가을은 무르익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은 노랗게 물이 들어 까만 밤하늘을 수놓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춤을 추듯 너울거리며 도로 위로 떨어져 내렸다.
“가을은 점점 짧아져 가는 것 같아요.”
“아쉬움이 큰 만큼 애틋한 계절이기도 하죠.”
“설악산에도 단풍이 들었을까요?”
“지금쯤이면 온 산이 붉지 않을까요?”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걷기를 30여 분. 멀리 길 건너에 오피스텔 건물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이수는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미안하게도 한번 잊어버린 그의 이름은 그때까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 고마웠어요.”
이수의 인사에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김태수. 그의 이름을 확인하듯 속으로 되뇌는 이수의 귓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수 씨.”
마주본 그의 얼굴은 어둠속에서도 붉어 보였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그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
“연락 기다려도 됩니까?”
정중한 그의 물음에 가방을 쥔 이수의 손에 바짝 힘이 실렸다. 발걸음을 돌려 그를 마주보니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표정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적당히 얼버무려 이 상황을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혹시 라는 기대감을 남겨 자신을 기다릴 남자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떨어지지 않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것처럼 달콤한 고문과도 같은 일이니까.
“죄송합니다. 그러시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그녀의 거절에 남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태수 씨, 충분히 멋진 분이세요.”
“이유를 물어도 실례가 안 되겠습니까?”
이 남자를 만나지 않을 이유. 가져다 붙이려 들면 얼마든지 이유쯤은 만들어 내겠지만 그건 변명에 불과한 것들뿐이다. 이수의 성격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건 어울리지도 않다.
“함께 나오기로 했던 사람이 못 오게 된 자리였어요. 전 그냥 그 자리를 채웠을 뿐이고요.”
“혹시…… 남자친구 있으십니까?”
남자의 물음에 이수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둑한 밤공기 사이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현재에서 과거로 바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헤어진 거라면, 이수 씨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꽤 집요한 사람이다. 끈질기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요구하는 모습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태수 씨는 사랑을 믿으세요?”
“……믿습니다.”
“전 세상에서 쓸모없는 감정이 그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장하고는 전부를 내준 상대를 잔인하게 배신하죠. 그 사랑에 전부를 걸 만큼 전 낙천적이지도, 따듯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상처를 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죠.”
“…….”
“끝까지 좋은 모습으로 남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태수 씨에겐 다가올 겨울을 함께 할 부드럽고 따뜻한 여자가 분명 생길 거예요. 오늘은 감사했어요.”
굳은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선 이수를 그는 붙잡지 않았다. 하긴, 자신이라도 싫겠다. 이런 성격 파탄자를 어느 누가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입가에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등에 와 닿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꼿꼿한 모습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괜한 짓을 벌였구나. 옅은 후회감이 밀려들었다. 문득 올려다본 까만 밤하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 묘하게 서글펐다.
벨이 울리고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를 울리는 익숙한 구두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차츰 느려지는 소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은재 앞에 멈춰 섰다.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자 낯익은 구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넘어질까 불안해 보이는 높은 힐과 한 줌밖에 되지 않을 가느다란 발목. 이수가 돌아온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