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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1-3
“늦었네.”
몸을 일으키던 은재가 낮은 신음을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던 탓에 다리가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몇 시나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했던 것이 8시였으니까 한 10시쯤 되었을까.
“…….”
엉덩이를 툭툭 손바닥으로 털어 내며 그가 이수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아 들었다. 며칠 만에 누르는 비밀번호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미치는 줄만 알았다. 송이수가 벌써 담을 쌓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들려 닫힌 문을 주먹으로 내리쳐 버렸다. 그러고는 달라지지 않을 줄 알면서도 허망한 눈으로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번호는 왜 바꾼 건데?”
은재의 물음에 대꾸도 없이 이수는 문을 열고 들어가 신을 벗었다. 숫제 무시라도 하겠다는 심산인 모양이다.
“내 말 안 들려?”
뒤따라 들어온 은재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휙 돌려세우자 이수는 비틀거렸다. 뿌리칠 사이도 없이 그와 벽 사이에 갇혀 버렸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불빛에 거친 호흡을 뿜어내는 은재의 표정은 어두웠다.
“번호 왜 바꿨는지 물었어.”
“너 들어오지 말라고 바꿨어. 됐니?”
“…….”
일주일 만에 마주한 은재의 얼굴은 까칠해 보였다. 대체 밥은 제대로 먹고 살았던 걸까. 잠은 제대로 잤던 걸까. 불쑥 치밀어 오르는 걱정에 이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눈에 힘을 주었다. 헤어지자고 해 놓고 걱정이라니.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다. 제발 분명히 해. 이수는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참 잔인하다, 송이수.”
이수를 내려다보는 은재의 눈빛은 삭막했다. 언제나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시선. 헌데 그렇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붙잡고 매달렸던 전화가 무시됐을 때부터 그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온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계속 붙잡고 있을 거야? 좀 아픈데.”
한참을 이어지던 신경전은 그녀의 말에 어깨를 잡은 손이 헐거워지면서 일단락이 되었다. 은재를 가볍게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선 이수는 들고 있던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마셨다. 한 잔을 비우고 또 한 잔을 따라 반쯤 마시고 나자 갈증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현관 앞에 앉아 있는 은재를 발견했을 때부터 말라 있던 입술을 축이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언제 왔어?”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은재는 여전히 현관 앞에 선 채였다. 늘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 주던 은재의 무거운 표정에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달갑지 않다. 이런 낯선 느낌도, 은재와의 거리감도.
“저녁은 먹고 기다린 거야?”
분위기를 바꿔 볼 요량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퇴근을 하자마자 분명 여기로 달려와 바뀐 번호를 보고 망연한 얼굴로 서 있었을 테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어쩌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그렇게 기다렸겠지.
외투와 스카프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 두고 냉장고를 뒤적였다. 김치와 계란을 꺼내고 싱크대 한편에 차곡차곡 정리해 둔 참치 캔 하나를 찾아 능숙한 솜씨로 볶음밥을 만든 이수는 음식을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냈다.
잘 익은 물김치와 밑반찬을 꺼내 상을 차린 그녀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은재를 불렀다.
“와서 앉아.”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는 은재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이수가 그의 등을 떠밀어 의자에 앉히고 손에 수저를 쥐어 주었다.
“먹어.”
“…….”
“후우. 나한테서 동정을 이끌어 내고 싶은 거라면 틀렸어. 내 눈앞에서 말라 죽는다고 해도 나 꿈쩍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잖아. 얼른 먹어.”
“훗, 내가 그렇게 쓸모도 없는 놈인지 몰랐네.”
“이러지 마.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 밥부터 다 먹고 해. 안 그러면 나 한마디도 안 할 거니까.”
“…….”
“황은재.”
조금 높아진 목소리에 볶음밥을 죽일 듯이 쳐다보던 은재는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입안이 까슬까슬해 모래알 씹는 느낌이었다. 맛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꾸역꾸역 입으로 밥을 밀어 넣었다. 식탁 맞은편에 무릎을 괴고 앉아 있던 이수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물을 따라 앞으로 밀어 주었다.
“정말 고문도 가지가지다. 잘 하면 밥 먹다 질식사로 죽을 수도 있겠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식사를 마친 은재가 익숙한 손길로 식탁을 치우고 그릇을 씻어 선반에 가지런하게 올려놓는 동안 이수는 과일을 깎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차분히 손을 놀리는 그녀의 시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담담해졌다.
“방어할 준비됐으니까 앉아.”
은재의 등이 움찔했다. 그를 알아 왔던 오랜 시간 동안 오늘처럼 말이 없던 것도 처음이었다. 이수는 대부분 듣는 쪽이었고 은재는 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쪽이었다. 은재의 어깨에 기대어 두런두런 말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샌가 잠이 들고는 했었다. 다시 그럴 수 있을까. 낯선 침묵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은재에게 맛이 잘 든 사과 한 쪽을 포크로 찍어 내밀었다. 잠깐 부딪힌 손끝을 타고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생각엔 아직도 변함이 없는 거냐?”
담담한 말투로 은재가 물었다.
“응. 더 늦기 전에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만큼이나 담담하게 대답을 하는 이수의 목소리에 은재의 턱 끝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이수가 자신의 연락 받기를 거부했던 지난 일주일은 그에게 지옥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피가 말랐었다. 국내 어딘가에 있었더라면 밤길을 마다치 않고 주저 없이 달려왔을 텐데 그는 하필이면 차로는 올 수 없는 바다 건너 중국에 있었다.
수십 번의 전화가 걸려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으면서 넌 그동안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웃었을 테고, 밥을 먹었을 테고, 잠을 잤겠지. 내 마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겠지. 그냥 죽은 듯이 옆에 있는 것도 더 이상은 허락을 못하겠다고 하면 이제 나한테 남은 방법은 뭘까.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려 꽉 움켜쥐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던 은재가 결심을 끝낸 듯 입을 열었다.
“난 그동안 너한테 뭐였냐?”
“…….”
“친구? 애인? 섹스파트너?”
“굳이 골라야 해?”
“아니. 아니, 됐어. 고르지 마.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낫겠어.”
셋 중에 이수가 친구라는 말과 섹스파트너라는 말을 고르면 미친 듯이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이야기를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낼 수는 없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부딪힌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나만 묻자. 너와 내가 이 관계를 끝내면 친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은재의 질문에 이수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돌아갈 수…… 있을까?
열아홉에 처음 만나 어느덧 스물아홉이 되었다. 그 10년 중 9년을 친구로 살아왔었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을 때,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했을 때, 누군가의 축하가 필요했을 때마다 근처엔 늘 은재가 있었다. 은재에게서 위로를 받았고, 은재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었고, 은재로부터 축하를 받았었다. 어떤 기억에든 은재가 함께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지난 열 달 동안 품고 살았던 송이수를 친구로 생각 안 해. 세상 사람 전부하고 친구를 한다 해도, 널 그 범주에 끼우고 싶은 마음 없어. 친구? 아니. 네가 선을 긋고 우리 관계가 끊어지는 그 순간부터 너와 난 완전히 남남이야.”
감정이 격해지는지 가끔씩 끊어졌다 이어지는 은재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은재와 영영 남이 된다는 것. 그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이기적인 말이겠지만 늙어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어떤 관계로든 남아 있을 거라고 믿어왔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은재만큼은 제 곁에 남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도.
“은재야. 난…….”
의자에서 일어선 은재가 좁은 주방 안을 바짝 독이 오른 짐승처럼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이수의 뒤에서 걸음을 멈춘 그가 두 팔로 식탁을 짚어 그녀를 가두고는 귓가에 씨근거리는 숨을 내쉬었다.
“너, 정말 나쁜 년이야.”
뺨을 간질이는 호흡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벌어진 옷 속까지 이어졌다. 애무처럼 이어지는 숨결의 터치. 지난 몇 달 동안 연인의 손길에 익숙해져 버린 몸이 상황도 인지하지 못하고 달아올랐다. 언제나처럼 뜨겁게 다가올 손길을 기다리는 심장이 요동쳤다. 하지만 은재는 움직이지 않았고 뺨 위로 뿌려지는 호흡은 여전히 규칙적이었다.
“법이 바뀌어도 유예기간이라는 것이 있어. 적응하려면 뭐든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
“나, 네 마음 내키는 대로 가졌다가 버릴 수 있는 사람 아냐. 적어도 친구로라도 남길 바란다면 내 마음 정리할 시간을 줬었어야지. 단칼에 베어 내면 내가 떨어져 나갈 거라고 생각했냐? 내가 그 정도로 머저리처럼 보였어?”
“그런 거 아냐.”
등을 감싸고 있던 은재의 온기가 멀어져 갔다. 허전함이 무섭게 다가왔다. 거실로 나간 은재가 장식장 위에 놓아둔 함께 찍은 사진을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된 기념으로 여행을 갔던 태국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커플티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내려다보며 무겁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적응할 시간을 줘. 일종의 유예기간. 여자에서 친구로 돌려놓으려면 그 정도의 배려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
“선택은 네가 해. 내가 널 정리할 시간을 주든가, 내가 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영영 모르는 사람이 되든가. 그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해 줄 테니까.”
은재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진지했다. 자신이 싫다고 하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은재를 잃어버린다고? 황은재를 잃는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자신에게 그런 결정을 하라는 건 가혹했다.
“시간?”
“그래.”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그럼 당장 꺼져 버리라고 소리라도 지르던가.”
“…….”
“내가 아무리 송이수한테 미쳐 있던 놈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저 혼자 살겠다고 날 차 버린 여자 옆에서 그 전처럼 히죽거리고 있을 용기 없어. 차라리 저 문을 열고 뛰쳐나가 몇 날 며칠을 널 잊는답시고 술에 절어 사는 편이 낫다고.”
“그 시간을 얼마나 달라는 건데?”
“올해가 끝나는 날까지. 너와 내가 시작했던 날. 그날 끝내자.”
“훗, 시작했던 날 끝을 내자……. 날을 받아 두고 헤어질 날을 기다리라는 건 너무 잔인해. 차라리 화를 내든가, 소리를 질러. 이런 식으로 사람 괴롭히지 말고.”
“잔인? 그건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네 마음 편하자고 버림받아야 하는 내게 넌 얼마나 더 잔인할 건데? 그깟 두 달 버티기가 버려지는 나보다 힘들 것 같아?”
점점 가라앉는 은재의 목소리에 이수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침울해진 눈동자를 마주보던 그녀가 낮은 한숨을 토해 내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자신 없으면 지금 소리 질러. 꺼져 버리라고.”
음울하게 압박해 오는 은재의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그가 이겼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패를 그는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
“좋아. 대신 하나만 약속해 줘. 그때가 지나면 예전의 황은재로 돌아오겠다고.”
“너도 약속해. 그날까지는 절대 돌아서지 않겠다고. 내 방식을 받아들이겠다고.”
“그래. 그럴게.”
“좋아. 거래는 끝났어. 송이수, 이리 와.”
이수에게서 원하는 답을 받아 낸 은재는 팔을 벌렸고 착잡한 얼굴로 이수는 빨려 들어가듯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으스러지게 껴안는 은재의 품 안에서 이수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송이수. 올해까지는 완전한 내 소유야.”
“…….”
“그때까지는 도망치지 마. 도망치면, 그땐 내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모르겠어. 널 부숴 버리고 싶어질지도, 날 부숴 버릴지도 모르겠어.”
그의 말에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허튼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은재라면, 은재니까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와의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 충동적으로 마음먹었던 그날 이후 머릿속은 거듭되는 고민들로 포화상태였다.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마음. 그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완강하게 거절하지도 못하는 중간쯤. 잘 벼린 칼날과도 같았던 마음은 어느 틈엔가 무뎌져 있었다. 귓가에 울리는 은재의 심장 소리에 이수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
너한테 빠지는 것이 두려워. 헌데 널 잃어버리는 건 더 두려워. 어중간하게 멈춰서 버린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니, 은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