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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앞의 너

1화


prologue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영재의 회사가 있는 혜화동이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던 희재는 발길을 끊은 지 꽤 오래됐음에도 동네가 익숙하게 느껴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매일같이 이 길을 지나, 삼촌의 회사로 향하던 10대 때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 옆에는 항상 인하가 있었다. 기타를 메고 항상 제 손을 놓지 않았던 그가.
희재는 다시 조심스레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인하와 함께 가던 음식점, 오락실, 카페까지. 이 동네 골목골목에는 아직도 그가 있었다.
희재는 주먹을 꼭 쥔 채 고개를 떨어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웬만하면 이 거리를 걷기 싫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골목마다 인하가 있어서. 그래서 자꾸만 그가 곁에 없는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닌 것같이 느껴져서.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린 희재가 회사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휘청거리며 살짝 뒷걸음질을 친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 부딪힌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하?”
언뜻 본 익숙한 얼굴에 놀라고, 자신이 내뱉은 이름에 놀라 제 입을 손으로 얼른 막았다.
그녀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리는 남자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떼어 냈다.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혹여나 놓칠세라 희재의 시선은 멀어지는 남자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당연히 그가 아닐 거라는 사실을 아는데, 그럴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멈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골목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에 그녀도 급하게 코너를 돌았다. 언덕을 올라가려 하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남자가 놀란 얼굴로 희재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녀의 시선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죄, 죄송합니다.”
남자를 붙잡았던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는 가던 길을 재촉했고, 희재는 입술을 깨물며 제 이마를 툭툭 쳤다. 대체 뭘 기대한 건지 모르겠다. 당연히 인하일 리가 없는데.
“죽었잖아. 이미 죽었잖아. 그런데 대체 뭘 기대한 거야. 바보 등신…….”
희재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사고였다. 아주 불행한 사고. 벌써 7년 전 일인데도, 아직 그녀는 과거에 머물러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01



마지막 문장을 확인한 희재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기지개를 쭉 펴고 온몸을 비틀며 괴성을 지르자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던 효주가 놀라 몸을 움찔했다.
“끝났다!”
희재의 입가에 생기 있는 미소가 번졌다. 한 달 넘게 마감에 시달리느라 오로지 원고만 바라보던 피로한 눈은 이미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마감을 끝냈다는 성취감이 온몸을 감쌌다.
“축하한다. 그 화가 비위 맞추느라 고생했고.”
효주가 갓 내린 커피를 내밀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오르자 희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난생처음 맡은 자서전 집필이었는데 하필 엄청나게 까다롭다고 소문난 화가가 걸리고 말았다. 까다로우면 얼마나 까다롭겠냐며 콧방귀를 뀌던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희재는 받아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저녁 7시가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띠운 희재가 효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야, 장효주, 우리…….”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려던 찰나,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의 액정에 뜬 ‘이해승’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재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지금쯤 마감이 딱 끝났겠지?
어우, 귀신. 정확한 예측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희재가 입을 뗐다.
“너 회사에 몰래카메라 설치했냐?”
─지긋지긋한 마감에서 벗어났으니 기분 좋게 커피를 마시고 있을 테고.
희재의 손이 허공에 멈칫했다. 마침 책상 위에 올려 둔 머그잔을 다시 집으려던 참이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쳐 희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 내 스토커냐?”
─에이, 또 퉁퉁거린다.
“왜 전화해서 사람을 이렇게 오싹하게 만드는 건데?”
─마감 끝낸 누나, 기분 좋게 술 사 주려고 전화했지.
“……술?”
술이란 말에 희재가 본능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빨리 내려와. 오늘 내가 거하게 쏠 테니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간 희재는 커튼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익숙한 승용차 한 대와 함께 선글라스와 모자로 중무장한 해승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리저리 손을 흔드는 그의 행동에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두 사람은 해승이 즐겨 가는 바(Bar)로 향했다. 그의 친구가 운영하는 이곳은 커튼이 달린 룸 형태라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하게 룸 안으로 들어선 해승은 답답하다는 듯이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어 던지고 소파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맞은편에 자리한 희재가 매우 피곤해 보이는 그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너 오늘도 하루 종일 촬영했다며.”
“응. 메이크업 지우자마자 누나한테 달려온 거야. 기특하지 않아?”
“피곤하면 집에 가서 쉴 것이지. 뭐하러 나한테 와?”
“에이, 그래도 누나 마감 끝낸 거 축하해 줘야지. 나 아니면 같이 술 마셔 줄 사람도 없잖아.”
“야, 나도 친구 있거든? 오늘 안 그래도 효주랑 한잔하려고 했는데 네가 초를 친 거야.”
“그럼 효주 누나도 부르지, 왜 혼자 나왔대? 보니까 효주 누나 아직 퇴근 안 한 거 같던데.”
해승의 말에 희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물었다.
때마침 해승의 친구 은성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그 틈에 화제를 돌리려는 희재의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해승이 먼저 정곡을 찔렀다.
“효주 누나, 또 애인 만난다고 누나 버렸구나?”
희재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배시시 웃는 해승을 아니꼽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술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그 모습에 큭큭거리며 함박웃음을 짓던 해승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누나도 애인 만들라니까?”
“됐거든? 애인 만들 생각 전혀 없거든?”
“난 어때?”
해승이 얼굴을 들이밀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희재가 똥 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확, 얼굴에 술 부어 버리기 전에 입 닫아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코웃음을 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입을 삐죽거리며 몸을 뒤로 빼고 자세를 바로 했다.
“진짜 이해 안 돼. 세상 사람들은 다 나를 좋아하는데, 왜 누나만 날 안 좋아하지?”
“어우, 이 자뻑아. 어떻게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널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 있냐?”
“얼굴 되지, 성격 되지, 노래 잘하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으니 당연한 거잖아.”
해승이 어깨를 으쓱이자 희재는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 술을 홀짝였다.
희재에게서 면박을 듣는 해승이었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각종 음반 차트를 석권할 정도의 실력과 훈훈한 외모를 갖춘 가수. 거기다 넘치는 끼 때문에 예능만 나갔다 하면 온종일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끊이질 않았다.
“빠지는 게 왜 없어? 키가 빠졌잖아, 키가.”
하지만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그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은 있었다. 바로 170cm에 간당간당한 그놈의 키였다.
“아, 누나!”
정곡을 찔리자 발끈한 해승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 희재는 키득키득 웃으며 술을 원샷하곤 익숙하게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겉으로는 여리여리하기 짝이 없는 희재는 사실 알아주는 주당이었다. 술은 다 좋아했지만 특히 와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그는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쪼로록, 소리와 함께 가득 찬 술을 보며 해승은 다시 몸을 앞으로 당겨 해맑게 웃었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희재는 몸을 뒤로 물리며 의심스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또. 그 눈빛은?”
“에이, 알면서 왜 이러실까.”
해승이 능청스럽게 받아치자 희재는 텁텁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안 해.”
단호하기 그지없는 한마디에 해승이 미간을 구겼다. 그러자 들고 있던 술잔을 매섭게 테이블에 내려놓은 희재가 그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석 달 전에도 분명히 안 한다고 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어.”
“인간적으로 생각이란 걸 해 보긴 한 거야?”
“생각할 마음 없다고 석 달 전에 말했을 텐데. 같은 말 자꾸 반복하는 거 지겹지도 않냐?”
워낙 꼿꼿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인지라 한 번 안 한다고 하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승은 희재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었다.
해승이 조금 진지해진 시선으로 희재를 바라보았다. 평소 장난기가 넘치는 그인지라 진지한 모습을 볼 일이 없었기에 그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빈 잔에 술을 따라 한 모금 홀짝인 그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누나, 내가 누나한테 왜 계속 이런 제안을 한다고 생각해?”
“당연히, 삼촌이 시켜서.”
술술 나오는 대답에 해승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누나, 내가 그렇게 주관 없는 사람으로 보여?”
“응. 그래 보여.”
“아, 진짜. 누나!”
“이런 말 할 거면 그냥 갈게. 난 그 얘기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