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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술잔을 간단하게 비워 낸 희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해승이 그녀의 앞을 막아서곤 주머니에서 CD 케이스 하나를 꺼내 들었다. 희재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가 쥔 CD로 향했다.
“누나는 이게 뭔지 알지?”
꽤나 손때가 묻은 듯한 CD 케이스를 본 희재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가 누나 실력도 모르고 제안할 성격이야? 나 그래도 내 일에 대해선 신중한 사람이거든. 누구의 부탁도 아니고 순전히 내가 누나를 선택한 거야. 누나 노래가 좋으니까. 날 위해서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되는 거야?”
희재는 말없이 CD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그녀에게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는 모난 그녀의 성격을 잘 맞춰 줬다.
도움 받은 것도 많았고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부탁을 하는데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일에 관해선 예외였다.
“그거 어디서 났어? 삼촌이 줬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희재의 입술 사이로 자잘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조금 어두워진 낯빛에 해승은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나.”
해승이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녀는 됐다는 듯 그의 손을 쳐 내었다. 그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해승아, 진짜 미안한데 아무리 그래도 난 안 해. 난 지금 내 일이 좋고, 다시는 그 일 하고 싶은 생각 없어. 그러니까 이제 그런 제안 안 했으면 좋겠다.”
단호한 희재의 태도에 해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았을 때가 돼서야 해승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땅이 무너지는 거친 발소리에 이어 현관문을 열고 희재가 들어서자,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영재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쿵쾅거리는 발소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미 해승에게 들었기에 그는 어색하게 손 인사를 건넸다.
“조, 조금 늦었네?”
뭐라 소리칠 줄 알았건만 희재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했다. 영재를 바라보는 시선에 약간의 원망이 담기긴 했지만 말이다. 다가와 그의 맞은편에 앉은 희재가 입을 열었다.
“삼촌.”
“으응?”
“이제 그만하지? 지금 해승이한테 확실히 말하고 오는 길이야. 그러니까 삼촌도 그만해. 지금 일에 만족하고,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
희재의 눈빛은 진실을 말하는 듯 보였지만 영재는 그것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영재가 팔짱을 끼더니 침묵을 깨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해승이가 밝은 척하고 있지만 이번 앨범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러니까 기획사 대표인 삼촌이 잘 도와주면 되겠네.”
희재는 뜻을 꺾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다시 시작할 마음 전혀 없는 거야?”
“없어.”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제 할 말은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희재는 2층으로 올라갔고, 영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방으로 들어선 희재는 문에 등을 기대고 나직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그녀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몇 잔 마신 술 때문인지, 아니면 마감에 지쳐서인지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 * *

이른 아침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은 아직 봄이 다가오기엔 이르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따뜻한 커피를 여유롭게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희재는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출근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녀 때문에 숙모도 언제나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해 주는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집 안이 조용했다.
낯선 느낌에 희재는 삼촌과 숙모의 방문을 노크한 뒤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침부터 어디 간 거야? 운동 갔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문을 닫은 희재는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해승이었다. 얼마 전에 찍었다던 화보 촬영에 동행한 연예 뉴스 리포터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벌써 다음 앨범을 준비하신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어요. 많은 신경을 쓰신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네, 좋은 프로듀서와 함께 프로듀싱을 진행할 예정이에요. 또 제가 무지 존경하는 싱어 누나와 작업을 할 예정이라 기대도 많이 되고요.
─아, ‘싱어 누나’라면 현직 가수분이신 건가요?
─아니요. 저희 회사 식구예요. 작사도 맡으실 거고 피처링도 해 주실 겁니다. 워낙 실력이 좋으셔서 이번에 간곡히 부탁했어요. 이번 앨범은 많은 기대를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허, 저거 미친 거 아니야?”
희재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싱어 누나’라는 지칭의 대상은 분명 자신이 틀림없었다. 허락을 한 적도 없는데 방송에서 저렇게 말을 해 버리다니. 어이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 의사는 안중에도 없었네.”
한숨을 내쉰 희재는 계속해서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방긋방긋 웃는 해승의 모습에 괘씸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얼마나 간절했으면 인터뷰에서조차 저 얘기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탁이라곤 생전 안 하는 그가 한 첫 부탁임에도 선뜻 도와줄 수 없는 게 마음이 쓰였다. 괜히 심란해진 기분에 텔레비전 전원을 꺼 버린 희재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 집 앞을 두리번거렸다.
“대체 어디 간 거야. 삼촌이랑 숙모.”
언제 올지 모르는 두 사람을 기다리다간 회사에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자 아침밥을 먹기로 결정한 희재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식탁 위에 맛있게 차려진 아침상을 발견했다.
“뭐야, 아침밥 차려 놓고 나갔네?”
의아한 시선으로 식탁 위를 훑던 희재는 밥그릇 옆에 놓인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조심스레 내용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는 얼른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들어 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그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조카! 일어났어? 삼촌이 지금 비행기를 타야 해서 전화할 시간이 별로 없는데, 얼른 용건만 간단히 말하렴.
태연한 목소리에 희재는 헛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해외여행을 간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어제까지 아무런 말도 없었잖아. 어제 해승이가 앨범 작업으로 힘들어한다고 그래 놓고 소속 가수를 내버려 두고 여행을 가시겠다고?”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리고 굳이 미리 말해서 뭐하냐? 너 이제 해승이 앨범 작업으로 바빠질 텐데 우리만 여행 간다는 얘기를 어떻게 면전에다 대고 할 수 있겠어.
“아, 삼촌!”
─어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자세한 건 회사 가서 해승이한테 듣도록 하고, 로밍 안 했으니까 연락하지 마! 한 달 뒤에 보자, 조카!
끊겨 버린 전화를 한동안 멍하게 바라보고 서 있던 희재는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이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저 지금 상황이 당혹스럽고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도 회사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희재였다. 평소 같으면 휴게실에서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김동윤 시인의 시집을 읽었을 테지만 오늘은 오자마자 넋을 놓고 앉아 영재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기 바빴다.
“어제는 그렇게 해승이 걱정하는 척을 하더니.”
늘어지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손으로 눈두덩이를 힘주어 눌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 여겼던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책상에 엎드린 채 희재는 울림 없는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효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재에게로 다가와 눈앞에 손바닥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희재는 그제야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왔어?”
“뭐냐? 무슨 고민 있어?”
“어, 삼촌 때문에.”
“왜? 무슨 일 생기셨어?”
“오늘 아침에 갑자기 해외여행을 가셨다.”
“진짜? 야, 그럼 좋은 일 아니야? 당분간 너 괴롭힐 사람 없잖아.”
“그건 그런데, 해승이가 걱정되니까 그렇지. 앨범 준비 때문에 힘들어 보이던데 회사 대표라는 사람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해외로 놀러 간다는 게 말이 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희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맞다. 너 좋아할 만한 소식 있는데.”
“무슨 소식?”
“김동윤 시인 다음 작품, 우리 출판사에서 하게 됐다.”
“뭐? 김동윤 시인?”
“응. 이 언니가 몇 날 며칠을 따라다닌 끝에 결국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들었지.”
효주는 손가락으로 승리의 브이를 그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희재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김동윤 시인 작품 맡아 보는 건 어때?”
“내가?”
효주의 제안에 입가에 진한 웃음이 번졌지만 그녀의 낯빛은 곧 어두워졌다. 예상과 다른 희재의 반응에 효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김동윤 시인이랑 작업할 생각하니까 너무 떨려?”
“아니, 그게 아니라…….”
희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김동윤 시인과 작업을 하는 건 그녀가 출판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꿈꿔 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봤던 해승의 인터뷰 장면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
“일단 생각 좀 해 볼게.”
“뭐? 야,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어디 있어. 네가 그렇게 사모하는 김동윤 시인이라니까?”
“알아. 아는데……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또다시 한숨을 내쉰 희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문을 등지고 선 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진짜. 이해승 엄청 신경 쓰이게 하네.”
그때,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꺼내 액정에 뜬 해승의 이름을 본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얼른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