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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주진욱
※“ ”는 한국어,「 」는 영어입니다.
1화
prologue 첫눈에
아, 나는 어쩌자고 이 수업을 듣겠다고 했단 말인가. 수강 신청 패배자는 구석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협상의 기술’. 강의명에 혹해서 수강 신청 버튼을 눌렀고 강의실에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정신줄은 교수가 앞으로 내줄 수많은 과제와 팀플에 대한 설명을 하자마자 놓은 상태였다.
그래, 오늘은 수강 정정 기간 마지막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튀어 나가서 드롭하면 돼!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교수님께 집중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이것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했다.
하아…… 지금 나가 버릴까. 다리가 가볍게 떨리고 무릎 위에선 양손이 서로의 손톱을 사정없이 긁고 있었다. 당장 나가고 싶었다. 으앙.
“그럼 설명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시범 강의가 끝나기 30분 전이었다. 그래, 아직 정식 개강도 아니니 빨리 끝내 주시겠지! 좋아! 지금 나가서 당장……!
“지금 팀을 정하고 종이에 팀원들 이름과 학번을 적어서 제출하세요.”
하마터면 잘 쓰지도 않는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교수님…… 왜 벌써부터 팀을 정하고 그러시죠. 아직 정정 기간인데요…… 교수님? 지금이라도 튈까? 아니야. 지금 나가면…… 아…… 어떡하지. 주여, 강의실에 들어오면서도 깨달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아는 선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하, 망했어.
게다가 다들 강의를 들을 생각인지 크게 토를 다는 사람도 없었다. 말도 안 돼.
한참을 그렇게 멍때리고 앉아 있을 때였다. 누가 부르는 것 같아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눈에 초점을 맞췄다. 교수님이었다.
“학생, 뭐하고 앉아 있나? 어서 일어나서 팀 찾아 돌아다니게.”
“네? 아! 네!”
세린은 교수의 말에 주문이라도 걸린 듯 벌떡 일어나 고개를 휘휘 돌려 주위를 돌아봤다.
딱 보기에도 나이가 있는 선배들 조는 들어가기 죄송했다. 그다지 관심이 없는 수업이었고 무임승차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런데 선배들로만 구성된 조가 상당수였다. 쩝. 차라리 교수님한테 죄송하지만 드롭할 생각이라 말하고 나가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저 교수님…….”
“교수님.”
크진 않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귀에 또렷이 박혔다. 세린은 자연스레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본 순간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지고 단 한 가지 생각만 가득해졌다.
‘멋있다.’
그래, 그 남자는 정말 빛이 나도록 멋있었다. 손질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런 헤어스타일, 그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이마와 짙은 눈썹, 깊은 눈매와 오뚝한 콧날, 굳게 다문 입술. 유명한 배우나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가 입고 있는 검은색 니트는 큰 키와 탄탄한 어깨를 부각시켜 주고 있었다.
댕. 댕.
귀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세린은 입를 앙다물었다. 안 그러면 꺅 하고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기에.
“괜찮다면 저희가 데려오고 싶습니다.”
오…… 물론이죠. 오브 코얼스. 얼마든지. 갑자기 이 강의가 무척 듣고 싶어졌다. 한 학기 내내 지옥을 경험할 것 같은 과제들이라 해도 저 사람과 함께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락이 아니라 꽃길을 걷듯 행복한 일이 될 것만 같았다.
“학생, 어떤가?”
교수님, 뭐하러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세요. 콜!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순 없었기에 세린은 ‘네’ 하고 수줍게 대답한 뒤 가방을 챙겨 그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조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보이고 들리는 것이라곤 ‘반가워요’ 하고 손을 내미는 그의 얼굴과 목소리뿐이었다.
“주진욱이에요. 잘 부탁해요.”
팀플에서 후배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자신을 소개하는 선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멋있었다. 세린은 그가 내민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박세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분 좋은 심장 소리가 귓가를 타고 울려 퍼졌다. 어쩌면 마주 잡은 손을 통해 그도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지는 않을까 긴장됐다.
그의 시원한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차가운 자신의 손과 달리 따뜻한 손도 마음에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잘생긴 눈, 코, 입, 아니, 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진심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주진욱 씨.
그날로부터 10년 뒤, 헛것을 본 것처럼 얼이 빠진 내게 그는 또다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박세린 맞지?”
* * *
“반갑습니다, 주진욱 앵커님 맞으시죠?”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와 악수를 하기 위해 내밀어진 손. 진욱은 세린이 내민 손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뉴스를 마치고 급하게 달려온 이곳에서 마주한 그녀의 냉담한 태도에 그는 한숨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성격만큼 쭉 뻗은 그녀의 손은 그가 잡고 싶었던 바로 그 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손은 그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젠장.
악수를 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주진욱 껌딱지’ 박세린은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진욱은 그게 슬프면서도 짜증이 났다.
chapter 1 그래, 너
“한국이 낳은 최고의 구두 디자이너! 박세린 씨를 박수로 모시겠습니다!”
MC 서찬희의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가득 울렸다. 세계적인 명품 Z 브랜드의 동양인 최초 수석 디자이너. 그녀의 귀국 소식에 패션계와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그녀가 겨우 만들어 낸 한 달간의 휴가는 인터뷰와 방송 출연으로 빽빽이 차고 말았다. ‘서찬희 쇼’는 그녀의 마지막 공식 스케줄이었다.
“어서 오세요, 세린 씨.”
“반갑습니다.”
깔끔한 블랙 페미닌 슈트와 그에 어울리는 에나멜 펌프스를 신은 세린의 당당한 모습을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담았다. 가슴을 덮는 흑발과 음영이 진한 메이크업이 그녀를 더욱 고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온 슈퍼 루키. 세상 사람들은 세린을 그렇게 불렀다. 정식 디자이너 데뷔 6년 만에 그녀는 세계가 인정하는 구두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다.
“디자인을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특별하던데. 그 얘기 좀 해 주시죠.”
서찬희의 진행은 재미있고 매끄러웠다.
세린이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신인 연기자에 불과했던 그는 독특한 연기로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입지를 굳혔다.
입담이 뛰어난 그는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토크쇼 진행도 하게 되었는데, 주위의 염려와 달리 시청률이 날로 상승하고 있는 중이었다.
“악바리 정신과 약간의 운, 그리고 인복(人福). 제 경우엔 이 세 가지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 같은데요?”
쇼가 진행될수록 객석 여기저기에서 자연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침데기일 것 같은 첫인상과 걸쭉한 말투가 대조를 이뤄 신선함을 더했기 때문이다.
세린은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틈만 나면 구두를 그렸다.
5학기 중간고사를 끝내고 기분 전환이나 해 볼까 하는 심정으로 Z 브랜드의 구두 디자인 공모전에 참가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작품이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고 브랜드 디자이너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되었다. 감격적이었지만 동시에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은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라며 한사코 그 자리를 거절했다. 그러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회사 측은 아파트 비용과 생활비, 그리고 디자인 공부에 필요한 학비까지 일체 부담하겠다는 파격적인 추가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화제가 된 그녀의 작품이 화면에 비춰지자,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특히 여성 관객들은 저 구두 디자인이 한때 전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휩쓸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디자이너 캐스팅 작업에 현 Z 브랜드의 수장, 마크 필립이 관여했다고 전해지던데 사실인가요?”
“네, 맞아요. 필립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마크 필립은 Z 브랜드의 수장을 맡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직접 디자이너 캐스팅 작업을 진행했다. 사이코 같은 그의 추진력과 안목이 아니었다면 세린에 대한 Z 브랜드의 파격적인 행보는 어려웠을 것이다.
화면에 또 다른 사진 한 장이 비춰졌다. 네 명의 남녀가 우스꽝스런 포즈를 짓고 있는 사진 위에 각각의 이름과 소개 자막이 나타나자, 방청객에서 우와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가슴 위에서 팔을 교차해 고고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쥔 필립과, 기가 차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며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세린, 그리고 우습기로는 별반 다르지 않는 두 남녀는 Z 브랜드의 패션과 코스메틱을 총괄하는 디자이너 겸 디렉터인 알리샤와 알랭이었다.
겨우 한 장의 사진 안에 Z 브랜드를 움직이고 세계 패션을 주름잡는 젊은 거장들이 서로의 친분을 드러내며 모여 있었다.
“와아. 사진 한번 어마어마한데요?”
“하하, 그런가요. 아무래도 회사 내에서 가장 독한 사람들이 재밌게 놀아야 분위기가 밝아지더라고요.”
※“ ”는 한국어,「 」는 영어입니다.
1화
prologue 첫눈에
아, 나는 어쩌자고 이 수업을 듣겠다고 했단 말인가. 수강 신청 패배자는 구석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협상의 기술’. 강의명에 혹해서 수강 신청 버튼을 눌렀고 강의실에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정신줄은 교수가 앞으로 내줄 수많은 과제와 팀플에 대한 설명을 하자마자 놓은 상태였다.
그래, 오늘은 수강 정정 기간 마지막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튀어 나가서 드롭하면 돼!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교수님께 집중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이것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했다.
하아…… 지금 나가 버릴까. 다리가 가볍게 떨리고 무릎 위에선 양손이 서로의 손톱을 사정없이 긁고 있었다. 당장 나가고 싶었다. 으앙.
“그럼 설명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시범 강의가 끝나기 30분 전이었다. 그래, 아직 정식 개강도 아니니 빨리 끝내 주시겠지! 좋아! 지금 나가서 당장……!
“지금 팀을 정하고 종이에 팀원들 이름과 학번을 적어서 제출하세요.”
하마터면 잘 쓰지도 않는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교수님…… 왜 벌써부터 팀을 정하고 그러시죠. 아직 정정 기간인데요…… 교수님? 지금이라도 튈까? 아니야. 지금 나가면…… 아…… 어떡하지. 주여, 강의실에 들어오면서도 깨달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아는 선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하, 망했어.
게다가 다들 강의를 들을 생각인지 크게 토를 다는 사람도 없었다. 말도 안 돼.
한참을 그렇게 멍때리고 앉아 있을 때였다. 누가 부르는 것 같아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눈에 초점을 맞췄다. 교수님이었다.
“학생, 뭐하고 앉아 있나? 어서 일어나서 팀 찾아 돌아다니게.”
“네? 아! 네!”
세린은 교수의 말에 주문이라도 걸린 듯 벌떡 일어나 고개를 휘휘 돌려 주위를 돌아봤다.
딱 보기에도 나이가 있는 선배들 조는 들어가기 죄송했다. 그다지 관심이 없는 수업이었고 무임승차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런데 선배들로만 구성된 조가 상당수였다. 쩝. 차라리 교수님한테 죄송하지만 드롭할 생각이라 말하고 나가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저 교수님…….”
“교수님.”
크진 않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귀에 또렷이 박혔다. 세린은 자연스레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본 순간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지고 단 한 가지 생각만 가득해졌다.
‘멋있다.’
그래, 그 남자는 정말 빛이 나도록 멋있었다. 손질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런 헤어스타일, 그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이마와 짙은 눈썹, 깊은 눈매와 오뚝한 콧날, 굳게 다문 입술. 유명한 배우나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가 입고 있는 검은색 니트는 큰 키와 탄탄한 어깨를 부각시켜 주고 있었다.
댕. 댕.
귀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세린은 입를 앙다물었다. 안 그러면 꺅 하고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기에.
“괜찮다면 저희가 데려오고 싶습니다.”
오…… 물론이죠. 오브 코얼스. 얼마든지. 갑자기 이 강의가 무척 듣고 싶어졌다. 한 학기 내내 지옥을 경험할 것 같은 과제들이라 해도 저 사람과 함께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락이 아니라 꽃길을 걷듯 행복한 일이 될 것만 같았다.
“학생, 어떤가?”
교수님, 뭐하러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세요. 콜!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순 없었기에 세린은 ‘네’ 하고 수줍게 대답한 뒤 가방을 챙겨 그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조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보이고 들리는 것이라곤 ‘반가워요’ 하고 손을 내미는 그의 얼굴과 목소리뿐이었다.
“주진욱이에요. 잘 부탁해요.”
팀플에서 후배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자신을 소개하는 선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멋있었다. 세린은 그가 내민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박세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분 좋은 심장 소리가 귓가를 타고 울려 퍼졌다. 어쩌면 마주 잡은 손을 통해 그도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지는 않을까 긴장됐다.
그의 시원한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차가운 자신의 손과 달리 따뜻한 손도 마음에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잘생긴 눈, 코, 입, 아니, 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진심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주진욱 씨.
그날로부터 10년 뒤, 헛것을 본 것처럼 얼이 빠진 내게 그는 또다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박세린 맞지?”
* * *
“반갑습니다, 주진욱 앵커님 맞으시죠?”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와 악수를 하기 위해 내밀어진 손. 진욱은 세린이 내민 손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뉴스를 마치고 급하게 달려온 이곳에서 마주한 그녀의 냉담한 태도에 그는 한숨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성격만큼 쭉 뻗은 그녀의 손은 그가 잡고 싶었던 바로 그 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손은 그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젠장.
악수를 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주진욱 껌딱지’ 박세린은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진욱은 그게 슬프면서도 짜증이 났다.
chapter 1 그래, 너
“한국이 낳은 최고의 구두 디자이너! 박세린 씨를 박수로 모시겠습니다!”
MC 서찬희의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가득 울렸다. 세계적인 명품 Z 브랜드의 동양인 최초 수석 디자이너. 그녀의 귀국 소식에 패션계와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그녀가 겨우 만들어 낸 한 달간의 휴가는 인터뷰와 방송 출연으로 빽빽이 차고 말았다. ‘서찬희 쇼’는 그녀의 마지막 공식 스케줄이었다.
“어서 오세요, 세린 씨.”
“반갑습니다.”
깔끔한 블랙 페미닌 슈트와 그에 어울리는 에나멜 펌프스를 신은 세린의 당당한 모습을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담았다. 가슴을 덮는 흑발과 음영이 진한 메이크업이 그녀를 더욱 고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온 슈퍼 루키. 세상 사람들은 세린을 그렇게 불렀다. 정식 디자이너 데뷔 6년 만에 그녀는 세계가 인정하는 구두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다.
“디자인을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특별하던데. 그 얘기 좀 해 주시죠.”
서찬희의 진행은 재미있고 매끄러웠다.
세린이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신인 연기자에 불과했던 그는 독특한 연기로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입지를 굳혔다.
입담이 뛰어난 그는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토크쇼 진행도 하게 되었는데, 주위의 염려와 달리 시청률이 날로 상승하고 있는 중이었다.
“악바리 정신과 약간의 운, 그리고 인복(人福). 제 경우엔 이 세 가지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 같은데요?”
쇼가 진행될수록 객석 여기저기에서 자연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침데기일 것 같은 첫인상과 걸쭉한 말투가 대조를 이뤄 신선함을 더했기 때문이다.
세린은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틈만 나면 구두를 그렸다.
5학기 중간고사를 끝내고 기분 전환이나 해 볼까 하는 심정으로 Z 브랜드의 구두 디자인 공모전에 참가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작품이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고 브랜드 디자이너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되었다. 감격적이었지만 동시에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은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라며 한사코 그 자리를 거절했다. 그러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회사 측은 아파트 비용과 생활비, 그리고 디자인 공부에 필요한 학비까지 일체 부담하겠다는 파격적인 추가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화제가 된 그녀의 작품이 화면에 비춰지자,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특히 여성 관객들은 저 구두 디자인이 한때 전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휩쓸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디자이너 캐스팅 작업에 현 Z 브랜드의 수장, 마크 필립이 관여했다고 전해지던데 사실인가요?”
“네, 맞아요. 필립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마크 필립은 Z 브랜드의 수장을 맡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직접 디자이너 캐스팅 작업을 진행했다. 사이코 같은 그의 추진력과 안목이 아니었다면 세린에 대한 Z 브랜드의 파격적인 행보는 어려웠을 것이다.
화면에 또 다른 사진 한 장이 비춰졌다. 네 명의 남녀가 우스꽝스런 포즈를 짓고 있는 사진 위에 각각의 이름과 소개 자막이 나타나자, 방청객에서 우와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가슴 위에서 팔을 교차해 고고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쥔 필립과, 기가 차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며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세린, 그리고 우습기로는 별반 다르지 않는 두 남녀는 Z 브랜드의 패션과 코스메틱을 총괄하는 디자이너 겸 디렉터인 알리샤와 알랭이었다.
겨우 한 장의 사진 안에 Z 브랜드를 움직이고 세계 패션을 주름잡는 젊은 거장들이 서로의 친분을 드러내며 모여 있었다.
“와아. 사진 한번 어마어마한데요?”
“하하, 그런가요. 아무래도 회사 내에서 가장 독한 사람들이 재밌게 놀아야 분위기가 밝아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