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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세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서찬희는 게스트를 편하게 해 준다더니 정말이었다. 이미 여러 매체에서 했던 말들을 꼭두각시처럼 반복할 생각에 녹화 전부터 괜히 진이 빠졌었는데 그것이 무색할 만큼 만족스러웠다.
찬희 덕분에 재미있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녹화를 마칠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멋진 행보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함께해 주신 박세린 씨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몰려드는 방청객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스튜디오를 나서는 세린을 따라온 막내 작가가 붙임성 있게 팔짱을 꼈다. 사전 미팅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여러 스태프들과 친해진 세린은 거부감 없이 활짝 웃어 보였다.
“언니! 저랑 같이 회식 장소로 이동하시면 돼요!”
한눈에 봐도 대학을 갓 졸업한 티가 나는 막내 작가가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아담한 체구의 그녀는, 원래도 작지 않은 키에 높은 힐까지 신은 세린의 옆에 있으니 한 팔에 쏙 들어올 만큼 자그마해 보였다.
홍조를 띠며 오늘 녹화에 대해 칭찬을 하던 작가가 엄지를 척 치켜들자 세린은 키득거렸다.
‘한 번쯤은 나도 그 사람한테 저렇게 귀여워 보였을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생각에 세린은 흠칫 놀랐다.
“짐 챙겨서 나오세요. 저도 금방 정리하고 올게요!”
싹싹한 막내 작가가 활기차게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세린은 얼이 빠진 채 잠시 멍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제 생각이 저도 모르게 누군가에게로 흘러가 버린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방송국 어딘가에 그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있겠지. 그는 SBC 방송국 최연소 수석 앵커이니까.
진욱이 이 방송국의 앵커가 되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 대학 동기들이 당연한 것처럼 그의 소식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한국 최고의 방송사 SBC의 최연소 수석 앵커. 재작년, 주진욱은 서른두 살이라는 나이에 보도국 부장 자리도 맡았다고 했다. 여러 운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몸을 사리지 않고 취재하는 그의 열정과 실력, 그리고 인기가 크게 작용했었다고.
기뻤다. 그의 소식을 듣고 세린이 처음 한 생각은 그거였다. 아, 잘 살고 있었구나. 역시 주진욱이구나. 대학생 때부터 언론 고시를 준비하더니 그때나 지금이나 참 바른 길을 걸으며 사는 멋진 사람이구나. 원하던 꿈을 이뤄 참 잘됐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다음으로는 어쩌면 방송국에서 한 번쯤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저 멀리 상념을 털어 내려 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며 눈은 슬쩍 보도국이 몇 층에 있는지를 확인했고, 분장을 받는 동안 거울에 비친 저 문을 열고 그가 들어오진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긴장을 했다. 방송보단 8년 만에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가슴이 부풀었었다.
‘바보같이.’
세린은 화장대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거울에 비친 분장실 문이 열리진 않을까. 그 반듯한 얼굴로 잘 지냈느냐고 안부 인사를 건네진 않을까. 같은 학교 후배였는데, 좀 친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친했던 후배가, 어? 여기서 녹화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인사 한번 하러 올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분장실에 놓인 TV에서 흘러나오는 광고처럼 세린의 마음속은 시끄럽기만 했다. 그녀는 입술을 비죽이며 마지막으로 딱 10까지만 숫자를 세 보기로 했다.
“10, 9, 8…….”
똑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세린은 허억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진짜 온 걸까?
세린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어떻게 그에게 인사를 할지 생각했다.
‘어머, 선배 안녕하셨어요?’ 반갑게 인사할까. 아니면 ‘누구…… 혹시 주진욱 선배님?’ 도도하게 내숭 좀 부려 볼까.
그 짧은 시간 이런저런 인사말을 만들어 내고 있을 때, 철커덕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세린은 드라마틱하게 머리카락을 휘날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이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은 짜게 식고 말았다.
“회식 장소로 이동하시죠.”
문을 열고 들어선 건 한국 지사에서 붙여 준 비서였다. 조용히 비죽거리던 입술을 집어넣고 대기실을 나서는 그녀의 구둣발 소리는 무겁기만 했다.
그 사람과 관련된 일이라면 김칫국부터 들이켜고 보는 이 망할 습관은 8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깟 짝사랑이 뭐라고. 마음처럼 무겁게 닫힌 문 뒤로 TV 뉴스 시그널이 흘러나왔다. 9시 정각이었다.
* * *
꼴깍, 꼴깍, 꼴깍.
차가운 서리가 낀 잔에 탄산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맥주가 한 모금씩 비워질수록 몰린 눈동자들이 반짝거렸다. 보기만 해도 이마가 찡해지고 온몸이 짜릿해지는 기분에 소리 없는 탄식이 좌중을 메웠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깔끔하게 비운 세린이 탕 하고 맥주잔을 내려놓자 ‘와아아!’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세린 정도의 초특급 게스트는 녹화만 하고 쌩하니 사라지는 게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술자리에 흥을 더하고 호탕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스태프들은 환호했다.
“언니, 애인 있으세요?”
저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막내 스태프가 씩씩하게 질문을 했다. 멀리 앉은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실례되게 뭘 그런 걸 묻느냐, 역시 막내라 그런지 패기 봐라, 여러 말들이 웃음과 함께 나왔지만 모두 귀를 쫑긋 세우며 세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 그녀는 입매를 늘였다.
“아니요. 저 모솔이에요.”
느긋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당사자와 달리 주위는 삽시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모솔이라고요? 제가 아는 그 모태 솔로?”
“에이. 농담이시죠?”
“헐! 왜요?”
세린은 냄비처럼 들끓어 오르는 그들에게 ‘진짠데’ 하고 응수하며 씩 웃어 보였다.
“그럼 데이트도 안 해 보셨어요?”
경악의 시발점을 제공한 막내 스태프가 또다시 우렁차게 질문을 했다.
“하하. 그건 아니고. 데이트는 여러 번 해 봤는데 바쁘기도 하고, 딱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래서 아직 제대로 된 연애는 못 해 봤어요.”
그녀의 대답에 스태프들은 그제야 관심의 불씨를 사그라트렸다. 완전한 금남의 생활을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를 그들을 보며 세린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화제는 자연스레 연애 이야기로 넘어갔다.
‘연애’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아닐까. 어떤 사람과 어떠한 연애를 해 봤고 어떻게 끝이 났는지. 달콤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연애 이야기는 최고의 안줏거리였다.
스태프들은 ‘박세린의 성공 스토리’보다 ‘박세린은 누구와 데이트를 했는가’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경험 부족으로 딱히 풀 만한 연애담이 없었지만, 세린은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자신의 데이트 이야기를 풀어냈다.
세계 최정상급 모델의 차에 올랐는데 차 안 깊숙이 찌들어 있는 담배 냄새에 5분도 못 가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마칠 때쯤, 웃으며 듣고 있던 서찬희가 입을 열어 장단을 맞췄다.
그의 연애사야 이미 매체를 통해 알려져 유명했지만, 세린의 이야기에 흥이 났는지 찬희는 자신의 연애담에 시동을 걸었다.
“일반인이었을 때와는 많이 다르죠.”
얼마 전 연예 뉴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에 대해 얘기하던 서찬희에게 질문이 날아왔다. 일반인일 때와 셀러브리티 대열에 합류한 지금의 연애는 많이 다르다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린 역시 조용히 동조했다.
연애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짧은 데이트마저도 누군가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 칼 라거펠트, 안나 윈투어만큼의 유명세를 떨치고 있진 않지만 그녀 역시 세계에서 인정받는 디자이너였다.
옆에 앉아 있는 서찬희처럼 얼굴을 드러내는 직업은 아니지만 패션 관련 매체에 수도 없이 얼굴이 오르내렸다.
벌써 몇 년째 그녀의 이름 앞에 붙는 ‘Z 브랜드의 동양인 최초 수석 디자이너’라는 수식어만으로도 화젯거리인데 스캔들이 터진다면? 가십난에 오르기 딱 좋은 헤드라인이 완성될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디자이너로 성공한 후 크게 변한 점은 겉모습에 이끌려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명품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라는 간판에 매혹되고, 또 누군가는 동양인에 대한 신비로움과 호기심에 매료되었다.
한국을 떠나 있던 지난 8년의 시간 동안, 세린은 때때로 그 남자를 무작정 따라다녔던 그때를 회상했다. 조건과 잇속 없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전하게 한 사람을 좋아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가끔씩 그립기도 했다.
가족 경조사를 챙기러 잠깐잠깐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과의 뜻밖의 재회를 바랐고, 그의 흔적을 찾았다.
한국에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 한 번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아니, 그런 걸 바라다간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할걸. 그 생각은 항상 세린이 자조적인 웃음을 짓도록 했다.
무르익었던 자리가 차츰 속도를 늦춰 갈 즈음, 세린은 클러치 백을 들고 조용히 복도로 나왔다. 비서를 퇴근시켰으니 직접 회식비를 계산할 생각에서였다.
복도로 나오느라 잠깐 열린 미닫이문 사이로 건넛방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넘어왔다. 그 방 안 사람들은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분위기였다.
“어후, 저긴 어딘데 이제 시작이야.”
“지금 시간이면 빤하죠. 보도국 아니에요?”
“어어. 보도국 맞아. 9시 뉴스 마치고 온 걸 거야.”
아무리 그래도 10시가 넘었는데 이제 시작이라니. 화장실에 가기 위해 세린을 따라 밖으로 나왔던 작가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서찬희는 게스트를 편하게 해 준다더니 정말이었다. 이미 여러 매체에서 했던 말들을 꼭두각시처럼 반복할 생각에 녹화 전부터 괜히 진이 빠졌었는데 그것이 무색할 만큼 만족스러웠다.
찬희 덕분에 재미있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녹화를 마칠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멋진 행보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함께해 주신 박세린 씨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몰려드는 방청객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스튜디오를 나서는 세린을 따라온 막내 작가가 붙임성 있게 팔짱을 꼈다. 사전 미팅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여러 스태프들과 친해진 세린은 거부감 없이 활짝 웃어 보였다.
“언니! 저랑 같이 회식 장소로 이동하시면 돼요!”
한눈에 봐도 대학을 갓 졸업한 티가 나는 막내 작가가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아담한 체구의 그녀는, 원래도 작지 않은 키에 높은 힐까지 신은 세린의 옆에 있으니 한 팔에 쏙 들어올 만큼 자그마해 보였다.
홍조를 띠며 오늘 녹화에 대해 칭찬을 하던 작가가 엄지를 척 치켜들자 세린은 키득거렸다.
‘한 번쯤은 나도 그 사람한테 저렇게 귀여워 보였을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생각에 세린은 흠칫 놀랐다.
“짐 챙겨서 나오세요. 저도 금방 정리하고 올게요!”
싹싹한 막내 작가가 활기차게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세린은 얼이 빠진 채 잠시 멍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제 생각이 저도 모르게 누군가에게로 흘러가 버린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방송국 어딘가에 그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있겠지. 그는 SBC 방송국 최연소 수석 앵커이니까.
진욱이 이 방송국의 앵커가 되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 대학 동기들이 당연한 것처럼 그의 소식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한국 최고의 방송사 SBC의 최연소 수석 앵커. 재작년, 주진욱은 서른두 살이라는 나이에 보도국 부장 자리도 맡았다고 했다. 여러 운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몸을 사리지 않고 취재하는 그의 열정과 실력, 그리고 인기가 크게 작용했었다고.
기뻤다. 그의 소식을 듣고 세린이 처음 한 생각은 그거였다. 아, 잘 살고 있었구나. 역시 주진욱이구나. 대학생 때부터 언론 고시를 준비하더니 그때나 지금이나 참 바른 길을 걸으며 사는 멋진 사람이구나. 원하던 꿈을 이뤄 참 잘됐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다음으로는 어쩌면 방송국에서 한 번쯤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저 멀리 상념을 털어 내려 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며 눈은 슬쩍 보도국이 몇 층에 있는지를 확인했고, 분장을 받는 동안 거울에 비친 저 문을 열고 그가 들어오진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긴장을 했다. 방송보단 8년 만에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가슴이 부풀었었다.
‘바보같이.’
세린은 화장대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거울에 비친 분장실 문이 열리진 않을까. 그 반듯한 얼굴로 잘 지냈느냐고 안부 인사를 건네진 않을까. 같은 학교 후배였는데, 좀 친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친했던 후배가, 어? 여기서 녹화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인사 한번 하러 올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분장실에 놓인 TV에서 흘러나오는 광고처럼 세린의 마음속은 시끄럽기만 했다. 그녀는 입술을 비죽이며 마지막으로 딱 10까지만 숫자를 세 보기로 했다.
“10, 9, 8…….”
똑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세린은 허억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진짜 온 걸까?
세린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어떻게 그에게 인사를 할지 생각했다.
‘어머, 선배 안녕하셨어요?’ 반갑게 인사할까. 아니면 ‘누구…… 혹시 주진욱 선배님?’ 도도하게 내숭 좀 부려 볼까.
그 짧은 시간 이런저런 인사말을 만들어 내고 있을 때, 철커덕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세린은 드라마틱하게 머리카락을 휘날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이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은 짜게 식고 말았다.
“회식 장소로 이동하시죠.”
문을 열고 들어선 건 한국 지사에서 붙여 준 비서였다. 조용히 비죽거리던 입술을 집어넣고 대기실을 나서는 그녀의 구둣발 소리는 무겁기만 했다.
그 사람과 관련된 일이라면 김칫국부터 들이켜고 보는 이 망할 습관은 8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깟 짝사랑이 뭐라고. 마음처럼 무겁게 닫힌 문 뒤로 TV 뉴스 시그널이 흘러나왔다. 9시 정각이었다.
* * *
꼴깍, 꼴깍, 꼴깍.
차가운 서리가 낀 잔에 탄산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맥주가 한 모금씩 비워질수록 몰린 눈동자들이 반짝거렸다. 보기만 해도 이마가 찡해지고 온몸이 짜릿해지는 기분에 소리 없는 탄식이 좌중을 메웠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깔끔하게 비운 세린이 탕 하고 맥주잔을 내려놓자 ‘와아아!’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세린 정도의 초특급 게스트는 녹화만 하고 쌩하니 사라지는 게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술자리에 흥을 더하고 호탕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스태프들은 환호했다.
“언니, 애인 있으세요?”
저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막내 스태프가 씩씩하게 질문을 했다. 멀리 앉은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실례되게 뭘 그런 걸 묻느냐, 역시 막내라 그런지 패기 봐라, 여러 말들이 웃음과 함께 나왔지만 모두 귀를 쫑긋 세우며 세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 그녀는 입매를 늘였다.
“아니요. 저 모솔이에요.”
느긋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당사자와 달리 주위는 삽시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모솔이라고요? 제가 아는 그 모태 솔로?”
“에이. 농담이시죠?”
“헐! 왜요?”
세린은 냄비처럼 들끓어 오르는 그들에게 ‘진짠데’ 하고 응수하며 씩 웃어 보였다.
“그럼 데이트도 안 해 보셨어요?”
경악의 시발점을 제공한 막내 스태프가 또다시 우렁차게 질문을 했다.
“하하. 그건 아니고. 데이트는 여러 번 해 봤는데 바쁘기도 하고, 딱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래서 아직 제대로 된 연애는 못 해 봤어요.”
그녀의 대답에 스태프들은 그제야 관심의 불씨를 사그라트렸다. 완전한 금남의 생활을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를 그들을 보며 세린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화제는 자연스레 연애 이야기로 넘어갔다.
‘연애’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아닐까. 어떤 사람과 어떠한 연애를 해 봤고 어떻게 끝이 났는지. 달콤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연애 이야기는 최고의 안줏거리였다.
스태프들은 ‘박세린의 성공 스토리’보다 ‘박세린은 누구와 데이트를 했는가’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경험 부족으로 딱히 풀 만한 연애담이 없었지만, 세린은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자신의 데이트 이야기를 풀어냈다.
세계 최정상급 모델의 차에 올랐는데 차 안 깊숙이 찌들어 있는 담배 냄새에 5분도 못 가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마칠 때쯤, 웃으며 듣고 있던 서찬희가 입을 열어 장단을 맞췄다.
그의 연애사야 이미 매체를 통해 알려져 유명했지만, 세린의 이야기에 흥이 났는지 찬희는 자신의 연애담에 시동을 걸었다.
“일반인이었을 때와는 많이 다르죠.”
얼마 전 연예 뉴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에 대해 얘기하던 서찬희에게 질문이 날아왔다. 일반인일 때와 셀러브리티 대열에 합류한 지금의 연애는 많이 다르다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린 역시 조용히 동조했다.
연애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짧은 데이트마저도 누군가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 칼 라거펠트, 안나 윈투어만큼의 유명세를 떨치고 있진 않지만 그녀 역시 세계에서 인정받는 디자이너였다.
옆에 앉아 있는 서찬희처럼 얼굴을 드러내는 직업은 아니지만 패션 관련 매체에 수도 없이 얼굴이 오르내렸다.
벌써 몇 년째 그녀의 이름 앞에 붙는 ‘Z 브랜드의 동양인 최초 수석 디자이너’라는 수식어만으로도 화젯거리인데 스캔들이 터진다면? 가십난에 오르기 딱 좋은 헤드라인이 완성될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디자이너로 성공한 후 크게 변한 점은 겉모습에 이끌려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명품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라는 간판에 매혹되고, 또 누군가는 동양인에 대한 신비로움과 호기심에 매료되었다.
한국을 떠나 있던 지난 8년의 시간 동안, 세린은 때때로 그 남자를 무작정 따라다녔던 그때를 회상했다. 조건과 잇속 없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전하게 한 사람을 좋아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가끔씩 그립기도 했다.
가족 경조사를 챙기러 잠깐잠깐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과의 뜻밖의 재회를 바랐고, 그의 흔적을 찾았다.
한국에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 한 번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아니, 그런 걸 바라다간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할걸. 그 생각은 항상 세린이 자조적인 웃음을 짓도록 했다.
무르익었던 자리가 차츰 속도를 늦춰 갈 즈음, 세린은 클러치 백을 들고 조용히 복도로 나왔다. 비서를 퇴근시켰으니 직접 회식비를 계산할 생각에서였다.
복도로 나오느라 잠깐 열린 미닫이문 사이로 건넛방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넘어왔다. 그 방 안 사람들은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분위기였다.
“어후, 저긴 어딘데 이제 시작이야.”
“지금 시간이면 빤하죠. 보도국 아니에요?”
“어어. 보도국 맞아. 9시 뉴스 마치고 온 걸 거야.”
아무리 그래도 10시가 넘었는데 이제 시작이라니. 화장실에 가기 위해 세린을 따라 밖으로 나왔던 작가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