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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부터






1화

프롤로그





4월의 어느 화창한 아침. 길거리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각자 친구, 가족, 형제, 애인 등 소중한 사람들과 길을 거닐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은재, 새 광고 찍었나 봐.”
“그런가 보네. 진짜 잘생기긴 했어. 이번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도 재밌던데.”
“그치? 나 요즘 그 드라마 보는 맛에 산다니까.”
맞은편 건물에 달린 전광판으로 광고를 보던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들리는 ‘주은재’라는 이름에 신호등 앞에 서 있던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신호등 불이 바뀌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반대편 인도로 건너가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연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그녀만 홀로 시간이 멈춰 버린 듯했다.
신호등이 깜빡거렸다. 급히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여자가 우두커니 서 있는 연수를 툭 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그제야 연수는 정신을 차리고 전광판에서 눈을 뗐지만 신호등은 이미 빨간색으로 바뀐 후였다. 그녀는 아쉬운 듯 신호등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두통에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어? 주은재다.”
이번엔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두 명이 신호등 앞에 서서 전광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이름은 떠날 듯하면서도 그녀의 곁에 항상 머물러 있었다. 벌써 5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이름.
주은재.
연수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읊조리다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자신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이 모두 허상과 착각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녀는 눈 주위가 시큰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달려온 시간이 무색하게 그의 이름은 또 그녀의 곁에 찾아왔다. 아물어 가는 상처를 그 이름이 자꾸만 건드렸다. 잊고 지냈던 기억 속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 또다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chapter 1 모든 불행은 너로부터 시작되었다.





벚꽃이 만개한 4월의 어느 날. 디자인3팀 사무실 안은 도희의 높은 언성으로 가득했다. 화창한 날씨에 웃음꽃이 만발할 법도 한데 직원들의 표정은 장마철 하늘처럼 어두침침했다.
“정신을 어디다 팔고 일을 하면 이런 실수를 해요?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어떡할 거예요? 서연수 씨 때문에 주요 거래처랑 틀어지게 생겼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에 연수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인처럼 도희 앞에 서 있는 연수의 모습에 우진과 해리는 자신들이 혼나는 것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
“서른이나 돼서 들어왔으면 일이라도 잘할 것이지. 누가 낙하산 아니랄까 봐…….”
도희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 주먹을 꾹 쥔 연수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숙였던 고개를 들며 차분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외람되지만, 제가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는 건 근거 없는 말인데요. 대리님.”
“뭐, 뭐라고요?”
“서른이란 나이에 막내로 들어와 제대로 일하지 못한 건 맞는데, 낙하산은 정말 아니에요.”
연신 사과만 해 대던 그녀가 처음으로 도희의 말을 받아쳤다. 지켜보던 우진과 해리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참다 참다 터지는 건가?
도희와 연수는 동갑이었지만 직급은 확연히 달랐다. 도희는 입사 5년 차 대리였고, 연수는 갓 두 달 된 신입 디자이너였다. 히스테리가 남다른 도희였지만 동갑이라는 이유로 유난히 연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건 직원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난 이번에 연수 씨가 제대로 터트린다에 만 원 건다.”
“그럼 저는 다른 변수가 생긴다에 3만 원 걸겠습니다.”
우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무슨 변수가 생긴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려던 찰나, 연수와 도희 사이에 낮은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서연수 씨.”
재화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매서운 표정으로 연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실수로 인해 위에서 한바탕 깨지고 온 모양이었다.
“잠깐 나 좀 봐요.”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먼저 쌩하니 팀장실로 들어갔다. 평소 같으면 별일 아니라고 위로해 줬을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지켜보던 직원들 모두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연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팀장실로 들어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재화가 재킷을 벗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져 연수는 이제 입에 붙어 버린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뜨거운 거, 차가운 거.”
“……네?”
“커피 어떤 종류로 마실 거냐고.”
“아, 전 괜찮아요.”
“그래. 그럼 앉아.”
연수는 쭈뼛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대체 회의에서 무슨 말이 나왔기에 이렇게 목소리가 무거운 것일까. 설마 오늘 한 실수 때문에 해고당하는 것은 아닐까?
연수의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른 살에 신입 디자이너로 들어갈 수 있는 회사는 드물었다. 그래서 이곳이 목숨보다 소중했다. 만약 해고를 당한다면 또 몇 년을 취업 준비생으로 살아야 할지 몰랐다.
“저, 제가 다시 거래처와 얘기해 보겠습니다. 꼭 설득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대로 해고당할 순 없었기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매달리는 심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심각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연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화를 보았다. 그제야 그가 장난을 치기 위해 괜히 무게를 잡았다는 것을 눈치챈 연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선배!”
“미안, 미안. 박 대리랑 네가 한바탕할 것 같아서 일부러 무게 좀 잡아 봤는데 이렇게 완벽히 속을 줄은 몰랐네.”
“뭐예요, 진짜. 혼나는 줄 알고 잔뜩 겁먹었는데.”
“나까지 회낼 필요 있어? 박 대리가 모진 말 다 해 줬을 텐데.”
속았다는 생각에 툴툴거렸지만 자신의 실수에 대한 걱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팀에게 피해가 있었기에 팀장인 재화도 상사에게 쓴소리를 들었을 것 같았다.
“거래처는 어떻게 됐어요?”
“좋게 해결됐어. 해고당할 일 없을 테니까 안심하고.”
정말 잘 끝났는지 아닌지 그의 말만 듣고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워낙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상부에 보고할 때 연수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모두 다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했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재화는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 왔다. 대학에 늦게 입학해 스무 살 어린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 할 때, 유일하게 연수에게 다가와 준 사람이었다.
첫 출근 날, 그녀는 그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 회사에 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수로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요, 선배.”
“뭐?”
“저 정말 낙하산 아닌 거죠?”
도희에게는 딱 잘라 낙하산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연수는 항상 의문을 갖고 있었다.
디자인 업계는 위계질서가 엄한 편이라 신입은 무조건 기존의 디자이너보다 어린 쪽을 선호했다.
그런데 수없이 탈락을 맛보던 그녀를 유일하게 받아 준 이곳에는 재화가 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혹여나 그가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썼다면 낙하산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연수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재화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낙하산으로 들어오게 할 만큼 대단한 직급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재화는 혀를 끌끌 차며 연수의 이마를 툭 밀쳤다. 그녀는 알싸한 아픔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앞으로 누가 수군대면 당당하게 말해. 너는 절대 낙하산이 아니니까.”
재화의 확신에 찬 대답에 연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너 오후에 특별한 일 없지?”
“네, 크게 바쁜 일은 없어요.”
“잘됐네. 광고기획팀이랑 같이하는 광고 촬영 회의, 천 주임이랑 참여해.”
“네? 그거 선배가 하는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중요한 미팅이 잡혔어. 부탁 좀 할게. 내용은 알지?”
“아침 회의 때 들었으니 알긴 알죠. 그런데…….”
연수는 굳은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재화가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그럼, 천 주임이랑 같이 한번 들어가 봐.”
“네?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천 주임님이랑 저랑 둘이서 어떻게…….”
“걱정 마. 내가 볼 땐 둘이서 충분히 할 수 있어.”
“설마…… 이거 이번 실수에 대한 벌이에요?”
“어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점심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재화는 어깨에 올린 손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리더니 도망치듯 팀장실을 빠져나갔다. 연수는 왠지 낚인 것 같은 기분에 한숨을 푹 쉬며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나섰다.

* * *

회사 근처 한식당에 둘러앉은 디자인3팀 사람들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는 무조건 함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재화 때문에 도희와 연수는 으르렁거리고 나서도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연수가 일하는 곳은 대한민국 유명 의류 브랜드 레임(Raim)이었다. 레임은 심플하고 유니크한 디자인으로 20대뿐만 아니라 3·40대에게까지 사랑받고 있었다.
입사 지원서를 넣으면서도 기대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었는데, 기적처럼 합격 통보를 받았다. 사실 두 달이 흐른 지금까지도 얼떨떨했다.
서른 살에 신입 딱지를 달고 디자이너가 된 연수에게는 그녀보다 어린 해리와 우진이 ‘주임님’, 동갑인 도희가 ‘대리님’이었다.늦게 공부를 시작한 자신의 탓이었기에 어린 상사를 뒀다고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희를 제외한 디자인3팀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속으로 자신을 낙하산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연수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