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티, 팀장님. 저보고 지금 그 회의에 참여하란 말씀이신 건가요?”
“막내를 혼자 보낼 순 없잖아요.”
재화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대답하자 우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팀장이 하라면 하는 게 당연지사 순리였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 다른 분들은 안 되시는 거예요? 해리 씨는…….”
“난 외근 나가야 돼요.”
해리가 새침한 목소리로 말하며 싱긋 웃었다. 우진은 바로 도희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그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나 오늘 미팅 있는 거 알잖아.”
우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화를 다시 한 번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누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을 만든 걸까? 우진은 상사만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재화의 면상에 침을 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광고기획 팀장님, 자기보다 직급 낮으면 생트집 잡는 거요.”
“둘이서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재화가 오지 않았다고 짜증을 부리는 광고기획 팀장의 얼굴이 우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걱정 말고 밥 먹어요, 천 주임.”
재화의 말에도 여전히 우진은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연수는 그런 그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우진은 벌써 몇 시간째 긴장한 얼굴로 서류를 검토하며 중요 사항들을세심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해리가 그런 우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힘내, 우진 씨. 난 외근 나갔다가 바로 퇴근할게.”
미소를 띠며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해리의 모습에 우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연수 씨, 저 갈게요.”
“네, 수고하세요.”
해리가 사라지는 것을 본 우진은 책상에 얼굴을 박은 채 소리를 내질렀다. 연수가 깜짝 놀라 바라보자 그는 기합을 넣은 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가요. 연수 씨.”
“네? 아, 네!”
우진이 사무실을 나서자 연수도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긴 복도 끝에 광고기획팀 푯말이 보였다. 한숨을 푹 내쉬는 우진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잠시만요. 연수 씨.”
우진은 뒤돌아 손으로 가슴을 툭툭 내려쳤다. 그리고 긴장되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네. 어서 들어갑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진은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문고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광고기획 팀장이 안에서 나왔다. 놀란 우진이 뒷걸음질 치자 광고기획 팀장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진 씨? 아, 이제 승진했으니 천 주임인가? 여긴 웬일이죠?”
“저, 저희 팀장님께서 시간이 안 되셔서 제가 대신…….”
“뭐? 우진 씨가?”
업신여기는 듯한 말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녀가 우진에게서 눈을 돌려 연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비딱하게 팔짱을 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디자이너입니다.”
“참나,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촬영 회의에 무슨 신입을 보내
짜증 섞인 그녀의 한마디에 인사를 하려고 허리를 구부리던 연수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다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디자인3팀 사원 서연수입니다.”
광고기획 팀장에게서 돌아오는 인사는 없었다. 연수는 민망한 듯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팀장은 그들에게서 몸을 돌리고는 사무실을 나서는 누군가를 향해 하이톤 목소리를 냈다.
“어머, 벌써 가시게요?”
“이야기는 다 들은 것 같으니 이만 가도록 하죠.”
“아직 계약서 뒷부분을…….”
“그건 저희가 알아서 검토하겠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죠.”
시큰둥한 목소리에 광고기획 팀장은 우진과 연수에게 했던 것과는 백팔십도 다른 모습으로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진과 연수도 덩달아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광고기획 팀장의 행동으로 보아 꽤나 중요한 인물임은 틀림없었다.
그때, 또 다른 이가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진과 연수는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꼭 같이 작업해 봤으면 좋겠어요. 부탁해요.”
광고기획 팀장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우진과 연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헐, 주은재다.”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은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말에 은재의 시선이 움직였다. 놀란 우진은 황급히고개를 숙였지만, 옆에 서 있던 연수는 마치 굳어 버린 것처럼 눈만 깜박였다.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은재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흔들렸다.
“어머, 이게 누구야?”
은재의 뒤에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글라스를 벗으며 다가온 여자는 선영이었다.
우진은 그녀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톱스타이자 서른 살이라는 나이에 소속사 대표 자리에 앉아 있는 서선영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이건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연수잖아? 서연수 맞지?”
선영이 활짝 웃으며 아는 체를 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연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선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몇 년 만이야, 연수야.”
선영이 반갑다는 듯 손을 잡아 오자 연수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사람들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선영도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넌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어깨를 으쓱한 선영은 옆에 서 있는 은재의 팔짱을 꼈다.
“그럼 우리 은재도 반갑지 않겠다.”
연수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은재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얼굴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반갑지 않을 리가.”
5년 만에 만난 세 사람의 머릿속에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누나,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 빠듯해요.”
꽤 오랜 정적이 흘렀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 누구도 뭐라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던 그 정적을 깬 것은 꼿꼿하게 광고기획 팀장을 대하던 매니저였다. 살살 기는 목소리로 그가 말하자, 선영은 그제야 연수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가야지. 연수야, 또 보자.”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지으며 선글라스를 다시 쓴 선영이 긴 복도를 앞질러 걸어갔다. 연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은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똑바른 시선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형.”
매니저가 팔을 잡아당기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연수를 지나쳐 갔다. 연수는 선영과 다르게 은재의 뒷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를 등진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켜 냈다.
“아, 저…….”
선영과 은재가 사라지자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다. 우진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기 위해 입을 열 때였다. 광고기획 팀장이 앙칼진 목소리로 연수에게 물었다.
“서연수 씨라고 했나?”
“네.”
“저 사람들과 어떤 사이지?”
어떤 사이? 연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글쎄, 우리가 무슨 사이였을까. 그 어떤 단어로도 규정지을 수 없었기에 쉽사리대답할 수가 없었다. 연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냥 조금, 아는 사이입니다.”
우진은 그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조금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선영의 태도가 너무도 친절했다. 물론 그것이 가식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지만.
“음, 그래?”
턱을 매만지며 연수를 바라보는 광고기획 팀장의 눈빛은 여전히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온 우진은 긴 심호흡을 하며 정리해 온 자료들을 펼쳤다.
“일단 이 팀장이 보낸 자료는 대충 봤는데…….”
광고기획 팀장이 고개를 내저으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자 우진은 각오했다는 듯 서류를 꽉 움켜쥐었다.
“저희 쪽에서 이런 식으로 1안과 2안을 잡아 봤는데요.”
“이번 신상, 마음에 들지 않는데 꼭 써야 하는 거야? 나는 이 재킷이 콘셉트에 맞는 것 같은데.”
광고기획 팀장이 서류 한 장을 휙 던지며 말했다.
“아…….”
우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너무 어이가 없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온 소리였다.
우진이 들고 있는 서류를 힐끗 본 연수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광고기획 팀장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팀장님.”
“뭐죠?”
“재킷을 메인으로 쓰실 생각이신가요?”
연수의 질문에 광고기획 팀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가방이 광고의 주 상품인 거 모르나요? 아니, 아무리 신입이라도 그렇지. 회의 내용도 모르고 들어오면 어떡하자는 거야?”
광고기획 팀장이 언성을 높이자 우진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러나 연수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이 제안하신 재킷을 입고 촬영하면 가방이 묻혀 버릴 것 같은데요? 가방 디자인이 화려하니 그것을 돋보이게 해 줄 수 있는 옷을 선택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팀장님께서도 그걸 고려해서 이 시안을 제안하신 거고요.”
광고기획 팀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재킷을 추천한 이유는 그 재킷의 디자이너가 친한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쉽게 채택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신입 디자이너가 말대답을 하며 반대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을 이어 갔다.
“연수 씨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가방이 주 상품이면 옷은 안 팔 거예요? 가방뿐만 아니라 재킷도 눈에 띄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팀장님께서 제시하신 시안은 재킷과 가방 모두에게 역효과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하, 연수 씨. 일한 지 얼마나 됐어요?”
“두 달 조금 넘었습니다.”
“업무에 대해서 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광고기획은 내가 전문이에요. 이 회사에서만 벌써 20년째라고. 알아?”
광고기획 팀장이 흥분하기 시작하자 우진은 움찔거리며 연수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연수 씨…….”
그가 이쯤에서 그만하라는 간절한 눈빛을 연수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읽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읽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연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팀장님, 잠시만 컴퓨터 좀 쓰겠습니다.”
그녀가 테이블 한켠에 놓인 컴퓨터를 만지자 광고기획 팀장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새파란 신입의 패기 어린 행동에 어떻게 그녀를 혼내 줄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컴퓨터로 무언가를 출력한 연수가 팀장의 앞에 조심스레 그것들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