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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비서를 잡아라!
1화
프롤로그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갈 자격이 제게 없음을 알기에. 아니, 어쩌면 늘 그녀에게 다가갈 정당한 이유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호 오빠한테 부탁하려고. 이 여자 좀 유혹해 달라고.”
그 정당한 이유는 뜻밖의 인물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배다른 동생 혜란이 내미는 사진 속 여자는 그가 몰래 지켜보던 그 여자였다.
“미친 짓도 적당히 해.”
“그러면 어떻게 해? 이제 내년이면 도훈 오빠 한국 들어올 텐데. 이 여자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
익숙한 이름에 강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뭘 어쩔 생각인데?”
“어쩌긴. 이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만들면 돼. 도훈 오빠가 다시 돌아와도 흔들리지 않도록.”
배다른 남매였지만, 사랑 앞에서 잔혹함은 그와 빼닮은 혜란이었다.
“그러니까 좀 도와줘. 내가 보기엔 수호 오빠만 한 인물이 없어. 연애 경험 풍부하고, 얼굴도 그만하면 잘생겼고.”
유일한 친구 수호의 이름에 강욱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소중한 친구였지만 이 여자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세상 그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는 남자들 중엔 쓸 만한 사람이 없단 말이야. 오죽하면 내가 오빠한테 부탁을…….”
강욱은 매끈한 손을 뻗어 혜란이 쥐고 있는 사진을 뺏어 들었다.
“도와줄 거야? 수호 오빠한테 부탁할 거지?”
“내가 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혜란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그러니까 그 이상한 놈, 이 여자 주변에 붙일 생각하지 마.”
“뭐야. 진짜 나 도와주는 거야? 오빠가 웬일이야? 직접 나서서 도와주기까지 하고.”
혜란은 몰랐다. 그가 이 여자에게 얼마나 큰 집착을 하고 있었는지.
“시끄러우니까, 그만 가.”
무작정 제 집에 쳐들어온 혜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강욱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여자에 대해 알아야 유혹을 하든, 뭘 하든 할 거 아니야.”
“알아.”
“뭐?”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네 설명 따위 필요 없어.”
세상에 그보다 더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 알던 사이였어?”
“알 거 없다고 했지.”
“알았어. 뭐, 나야 오빠가 도와준다면 땡큐지. 그럼 부탁해, 오빠.”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떠는 혜란을 강욱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사진 속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찾았다. 그녀에게 다가갈 정당한 이유를.
이제 그 이유를 찾았으니 결코 멈출 생각은 없었다. 설사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1
새로 부임한 이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희영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훤칠한 키. 새까만 머리카락. 그 새까만 머리카락과 너무 잘 어울리는 반짝이는 까만 눈. 손바닥으로 가려질 정도의 작은 얼굴.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분명 그 녀석이 맞았다.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비단 희영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함께 근무했던 다른 직원들 역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비서실 인턴이었던 강욱이 이사 자리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으니까.
“많이들 놀라셨죠? 그동안 본의 아니게 속인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강욱의 까만 눈에 반달 눈웃음이 번졌다.
눈빛이 순한 녀석이라고 좋아했었는데, 완전 속았다. 어떻게 이리도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속일 수가 있단 말인가!
주먹을 꽉 쥐며 희영은 애써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올해 나이 서른하나. 이 바닥에서 나름 잔뼈가 굵은 그녀였기에 이런 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마친 강욱이 비서실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희영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 오고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머! 희영아. 너도 눈치 못 챘어? 너 최강욱 사수였잖아. 그런데도 몰랐어?”
간신히 자리로 돌아와 책상을 붙잡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 희영의 곁으로 수진이 다가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몰랐어. 전. 혀!”
이를 악문 희영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웬일이니. 우리 비서실 꽃돌이가 회장 아들이었다니! 아, 알았으면 진작 잘 보이는 건데! 그래도 희영이 넌 좋겠다. 최강욱이랑 친하게 지냈잖아.”
“잠시만, 나 잠시만 좀 쉬고 올게.”
민망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서실을 벗어난 희영은 옥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으아악!”
옥상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희영은 억눌렀던 분노를 터트리듯 두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럼에도 민망한 감정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미쳤어, 미쳤어! 정희영! 이제 어떡하니!”
머리를 세차게 쥐어박으며 희영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초조한 눈빛으로 엊그제 밤 있었던 강욱의 송별회를 떠올렸다.
* * *
“어우, 아쉬워서 어떡해! 우리 꽃돌이 이제 못 봐서!”
“그러니까요. 강욱 씨, 그래도 종종 연락해요.”
회사 근처 호프집에서 송별회를 마치고 나오며 직원들은 모두 아쉬운 얼굴로 강욱을 향해 한마디씩 했다.
생글거리는 얼굴로 비서실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강욱이 희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응, 강욱 씨. 이제 못 본다니 아쉽네.”
그동안 사수로서 엄격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똑똑하고, 일 처리 빠르며, 서글서글한 강욱이 희영은 꽤 마음에 들었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 일을 그만둔다고 하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죠?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데 저 술 한잔만 더 사 주시면 안 돼요?”
“그래? 그럼 다른 사람들…….”
“둘이서 조용히 마시고 싶어요.”
아무래도 그는 사수인 그녀에게 더 각별한 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강욱의 어깨를 툭 친 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갈까?”
“선배님 좋아하는 포장마차 어때요?”
“좋았어. 가자!”
두 사람은 회사 근처 포장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밤공기가 참으로 상쾌했다.
“이모! 저 왔어요.”
“아이고, 예쁜 처자 왔구먼! 예쁜 총각이랑 같이.”
종종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기에 두 사람을 알아본 주인아주머니가 웃는 얼굴로 반겼다.
“소주랑 오돌뼈 주세요.”
주문을 마친 두 사람은 포장마차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 새로 일할 곳은 구했고?”
따스한 시선으로 묻는 희영에게 강욱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려고요.”
그땐 그의 아버지 회사가 그저 작은 규모의 사업장일 거라 생각했다. M 리조트같이 거대한 규모의 기업체가 아니라!
“오, 강욱 씨. 있는 집 자식이었구나?”
“그럭저럭요.”
“좋겠네. 그럼 애초에 아버지 회사에서 바로 일하지, 왜 우리 회사로 들어온 거야?”
“실무 경험 좀 쌓으려고요. 모든 업무의 기본을 배울 수 있는 곳이잖아요, 비서실이.”
“그렇긴 하지.”
희영은 소주병을 들어 강욱의 잔에 술을 따르고, 습관처럼 자작을 하려 했다.
“아, 또 이러신다. 자작하지 말라 그랬죠. 앞에 있는 사람 솔로로 늙어 죽이시려고.”
강욱은 커다란 손을 뻗어 희영에게서 소주병을 뺏어 들었다.
“미안. 습관이 돼서.”
“가뜩이나 모태 솔로라 힘든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됩니다.”
희영의 잔에 소주가 채워졌다.
“모태 솔로였어? 그 외모에?”
자신보다 두 살 어렸기에 남자로 안 봤을 뿐이지, 그의 꽃미모는 희영 역시 인정하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에게 대시한 회사 여직원들이 꽤 많다던데. 그런 강욱이 모태 솔로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 외모가 어떤데요?”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서글서글하게 물어 오는 강욱의 말에 희영은 손을 들어 이마를 살짝 긁었다.
“잘생겼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닐걸. 비서실 여직원들 최강욱 씨 모태 솔로인 거 알면 다 기절하겠다.”
“다른 여직원들 생각은 별로 관심 없어요.”
무심하게 툭 내던지는 강욱의 대답에 순간 희영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술이 너무 과했던 걸까? 별 의미도 없는 그의 말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두 살 어린 강욱에게 심장이 뛴 게 왠지 모르게 민망해 희영은 재빨리 소주잔에 손을 뻗었다.
“어? 짠도 안 하시고.”
단숨에 입안에 술을 털어 넣는 희영을 보며 강욱은 뒤늦게 소주잔을 들었다.
“미안. 이것도 습관이 돼서.”
머쓱한 얼굴로 희영이 사과의 말을 던졌다.
“다시 제대로 짠 하죠?”
강욱은 소주병을 들어 다시 희영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래. 음, 강욱 씨 솔로 탈출을 위해. 건배!”
“건배.”
쨍. 소주잔과 소주잔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소주를 단숨에 마신 두 사람은 동시에 어묵 국물을 향해 숟가락을 뻗었다.
“내가 소개팅이라도 시켜 줄까?”
“그럴래요?”
생글거리며 묻는 강욱을 향해 희영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강욱 씨 정도면 믿고 소개시켜 줄 수 있지. 이상형이 어떻게 돼?”
“음, 이상형이라.”
강욱의 검은 눈이 생각에 잠긴 듯 더욱 짙어졌다.
“키는 165 정도에…….”
뜨끈한 어묵 국물을 먹으며 희영은 강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계란형 얼굴에 하얀 피부. 눈 색깔은 갈색이면 좋겠고, 입술은 붉었으면 좋겠고.”
꽤나 구체적으로 이상형을 나열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희영은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목소리는 조곤조곤하지만 웃음은 경쾌하고. 외모는 좀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포장마차를 좋아하고, 커피를 물보다 자주 마시며, 연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
희영의 갈색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강욱이 말하고 있는 이상형의 여자가 자신이라는 걸 그제야 눈치챈 것이다.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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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갈 자격이 제게 없음을 알기에. 아니, 어쩌면 늘 그녀에게 다가갈 정당한 이유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호 오빠한테 부탁하려고. 이 여자 좀 유혹해 달라고.”
그 정당한 이유는 뜻밖의 인물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배다른 동생 혜란이 내미는 사진 속 여자는 그가 몰래 지켜보던 그 여자였다.
“미친 짓도 적당히 해.”
“그러면 어떻게 해? 이제 내년이면 도훈 오빠 한국 들어올 텐데. 이 여자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
익숙한 이름에 강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뭘 어쩔 생각인데?”
“어쩌긴. 이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만들면 돼. 도훈 오빠가 다시 돌아와도 흔들리지 않도록.”
배다른 남매였지만, 사랑 앞에서 잔혹함은 그와 빼닮은 혜란이었다.
“그러니까 좀 도와줘. 내가 보기엔 수호 오빠만 한 인물이 없어. 연애 경험 풍부하고, 얼굴도 그만하면 잘생겼고.”
유일한 친구 수호의 이름에 강욱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소중한 친구였지만 이 여자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세상 그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는 남자들 중엔 쓸 만한 사람이 없단 말이야. 오죽하면 내가 오빠한테 부탁을…….”
강욱은 매끈한 손을 뻗어 혜란이 쥐고 있는 사진을 뺏어 들었다.
“도와줄 거야? 수호 오빠한테 부탁할 거지?”
“내가 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혜란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그러니까 그 이상한 놈, 이 여자 주변에 붙일 생각하지 마.”
“뭐야. 진짜 나 도와주는 거야? 오빠가 웬일이야? 직접 나서서 도와주기까지 하고.”
혜란은 몰랐다. 그가 이 여자에게 얼마나 큰 집착을 하고 있었는지.
“시끄러우니까, 그만 가.”
무작정 제 집에 쳐들어온 혜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강욱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여자에 대해 알아야 유혹을 하든, 뭘 하든 할 거 아니야.”
“알아.”
“뭐?”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네 설명 따위 필요 없어.”
세상에 그보다 더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 알던 사이였어?”
“알 거 없다고 했지.”
“알았어. 뭐, 나야 오빠가 도와준다면 땡큐지. 그럼 부탁해, 오빠.”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떠는 혜란을 강욱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사진 속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찾았다. 그녀에게 다가갈 정당한 이유를.
이제 그 이유를 찾았으니 결코 멈출 생각은 없었다. 설사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1
새로 부임한 이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희영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훤칠한 키. 새까만 머리카락. 그 새까만 머리카락과 너무 잘 어울리는 반짝이는 까만 눈. 손바닥으로 가려질 정도의 작은 얼굴.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분명 그 녀석이 맞았다.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비단 희영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함께 근무했던 다른 직원들 역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비서실 인턴이었던 강욱이 이사 자리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으니까.
“많이들 놀라셨죠? 그동안 본의 아니게 속인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강욱의 까만 눈에 반달 눈웃음이 번졌다.
눈빛이 순한 녀석이라고 좋아했었는데, 완전 속았다. 어떻게 이리도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속일 수가 있단 말인가!
주먹을 꽉 쥐며 희영은 애써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올해 나이 서른하나. 이 바닥에서 나름 잔뼈가 굵은 그녀였기에 이런 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마친 강욱이 비서실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희영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 오고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머! 희영아. 너도 눈치 못 챘어? 너 최강욱 사수였잖아. 그런데도 몰랐어?”
간신히 자리로 돌아와 책상을 붙잡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 희영의 곁으로 수진이 다가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몰랐어. 전. 혀!”
이를 악문 희영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웬일이니. 우리 비서실 꽃돌이가 회장 아들이었다니! 아, 알았으면 진작 잘 보이는 건데! 그래도 희영이 넌 좋겠다. 최강욱이랑 친하게 지냈잖아.”
“잠시만, 나 잠시만 좀 쉬고 올게.”
민망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서실을 벗어난 희영은 옥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으아악!”
옥상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희영은 억눌렀던 분노를 터트리듯 두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럼에도 민망한 감정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미쳤어, 미쳤어! 정희영! 이제 어떡하니!”
머리를 세차게 쥐어박으며 희영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초조한 눈빛으로 엊그제 밤 있었던 강욱의 송별회를 떠올렸다.
* * *
“어우, 아쉬워서 어떡해! 우리 꽃돌이 이제 못 봐서!”
“그러니까요. 강욱 씨, 그래도 종종 연락해요.”
회사 근처 호프집에서 송별회를 마치고 나오며 직원들은 모두 아쉬운 얼굴로 강욱을 향해 한마디씩 했다.
생글거리는 얼굴로 비서실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강욱이 희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응, 강욱 씨. 이제 못 본다니 아쉽네.”
그동안 사수로서 엄격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똑똑하고, 일 처리 빠르며, 서글서글한 강욱이 희영은 꽤 마음에 들었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 일을 그만둔다고 하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죠?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데 저 술 한잔만 더 사 주시면 안 돼요?”
“그래? 그럼 다른 사람들…….”
“둘이서 조용히 마시고 싶어요.”
아무래도 그는 사수인 그녀에게 더 각별한 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강욱의 어깨를 툭 친 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갈까?”
“선배님 좋아하는 포장마차 어때요?”
“좋았어. 가자!”
두 사람은 회사 근처 포장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밤공기가 참으로 상쾌했다.
“이모! 저 왔어요.”
“아이고, 예쁜 처자 왔구먼! 예쁜 총각이랑 같이.”
종종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기에 두 사람을 알아본 주인아주머니가 웃는 얼굴로 반겼다.
“소주랑 오돌뼈 주세요.”
주문을 마친 두 사람은 포장마차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 새로 일할 곳은 구했고?”
따스한 시선으로 묻는 희영에게 강욱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려고요.”
그땐 그의 아버지 회사가 그저 작은 규모의 사업장일 거라 생각했다. M 리조트같이 거대한 규모의 기업체가 아니라!
“오, 강욱 씨. 있는 집 자식이었구나?”
“그럭저럭요.”
“좋겠네. 그럼 애초에 아버지 회사에서 바로 일하지, 왜 우리 회사로 들어온 거야?”
“실무 경험 좀 쌓으려고요. 모든 업무의 기본을 배울 수 있는 곳이잖아요, 비서실이.”
“그렇긴 하지.”
희영은 소주병을 들어 강욱의 잔에 술을 따르고, 습관처럼 자작을 하려 했다.
“아, 또 이러신다. 자작하지 말라 그랬죠. 앞에 있는 사람 솔로로 늙어 죽이시려고.”
강욱은 커다란 손을 뻗어 희영에게서 소주병을 뺏어 들었다.
“미안. 습관이 돼서.”
“가뜩이나 모태 솔로라 힘든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됩니다.”
희영의 잔에 소주가 채워졌다.
“모태 솔로였어? 그 외모에?”
자신보다 두 살 어렸기에 남자로 안 봤을 뿐이지, 그의 꽃미모는 희영 역시 인정하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에게 대시한 회사 여직원들이 꽤 많다던데. 그런 강욱이 모태 솔로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 외모가 어떤데요?”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서글서글하게 물어 오는 강욱의 말에 희영은 손을 들어 이마를 살짝 긁었다.
“잘생겼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닐걸. 비서실 여직원들 최강욱 씨 모태 솔로인 거 알면 다 기절하겠다.”
“다른 여직원들 생각은 별로 관심 없어요.”
무심하게 툭 내던지는 강욱의 대답에 순간 희영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술이 너무 과했던 걸까? 별 의미도 없는 그의 말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두 살 어린 강욱에게 심장이 뛴 게 왠지 모르게 민망해 희영은 재빨리 소주잔에 손을 뻗었다.
“어? 짠도 안 하시고.”
단숨에 입안에 술을 털어 넣는 희영을 보며 강욱은 뒤늦게 소주잔을 들었다.
“미안. 이것도 습관이 돼서.”
머쓱한 얼굴로 희영이 사과의 말을 던졌다.
“다시 제대로 짠 하죠?”
강욱은 소주병을 들어 다시 희영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래. 음, 강욱 씨 솔로 탈출을 위해. 건배!”
“건배.”
쨍. 소주잔과 소주잔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소주를 단숨에 마신 두 사람은 동시에 어묵 국물을 향해 숟가락을 뻗었다.
“내가 소개팅이라도 시켜 줄까?”
“그럴래요?”
생글거리며 묻는 강욱을 향해 희영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강욱 씨 정도면 믿고 소개시켜 줄 수 있지. 이상형이 어떻게 돼?”
“음, 이상형이라.”
강욱의 검은 눈이 생각에 잠긴 듯 더욱 짙어졌다.
“키는 165 정도에…….”
뜨끈한 어묵 국물을 먹으며 희영은 강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계란형 얼굴에 하얀 피부. 눈 색깔은 갈색이면 좋겠고, 입술은 붉었으면 좋겠고.”
꽤나 구체적으로 이상형을 나열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희영은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목소리는 조곤조곤하지만 웃음은 경쾌하고. 외모는 좀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포장마차를 좋아하고, 커피를 물보다 자주 마시며, 연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
희영의 갈색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강욱이 말하고 있는 이상형의 여자가 자신이라는 걸 그제야 눈치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