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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초조하거나 당혹스러운 일이 있을 때면 손톱을 깨물고.”
어느새 손톱 끝을 깨물고 있던 희영은 재빨리 붉은 입술에서 손을 떼어 냈다.
“강욱 씨.”
“눈치챘어요?”
희영은 씩 웃으며 답지 않게 능글거리는 얼굴로 물어 오는 강욱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 이상형이 선배님이라는 거.”
“농담 그만해.”
“농담 아니에요. 선배님 마음에 담은 지 꽤 오래됐어요.”
두 살 어린 연하남의 저돌적인 고백에 희영은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물론 그가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너 너무 많이 마셨나 보……!”
강욱은 커다란 손을 들어 희영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당겨 붉은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갰다. 이내 천천히 떨어지는 그의 입술을 느끼며 희영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농담 아니라고 했잖아요.”
웃음기 하나 없는 강렬한 검은 눈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처음이었다. 첫사랑이었던 지도훈과 5년을 사귀고 헤어진 이후, 키스에 이런 전율이 일어난 것은.
도훈과 헤어진 후, 몇 번의 연애를 해 보았지만 그 누구와의 키스에서도 이런 전율은 일지 않았었다. 그런데 짧고 서투른 입맞춤 한 번에 이런 전율을 느끼다니.
“키스가 너무 어설퍼.”
술에 취한 게 분명했다. 자신이 이런 말을 내뱉다니. 그걸 인지하면서도 희영은 순간 불붙은 욕망을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다.
희영은 두 손을 뻗어 강욱의 작은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살짝 입술만 붙였다 멀어지는 그런 입맞춤이 아닌, 조금 더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희영은 세차게 강욱의 혀를 휘어 감고 깊이 빨아 당겼다.
어차피 내일이면 안 볼 사이였다. 키스 한 번 했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란 말이었다.
그의 아랫입술을 세차게 빨던 희영은 서서히 입술을 떼어 냈다.
“키스는 이렇게 하는 거야. 더 배워 와. 풋내 나는 녀석이랑 연애하고 싶은 생각, 난 없으니까.”
손을 뻗은 희영은 새까만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중에 경험치가 더 쌓이면 연락해. 그때 다시 생각해 볼게.”
자연스레 강욱의 고백을 거절한 희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그와 했던 키스는 나쁘지 않았다. 뒤돌아선 희영은 얼얼한 입술을 손끝으로 살짝 만지며 스스로 했던 대범한 행동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키스에 대해 떠올리던 희영은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그런 키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쳤지, 미쳤어. 아무리 굶었어도 그렇지! 도대체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희영은 옥상 난간을 꽉 붙잡았다. 앞으로 회사에서 강욱의 얼굴을 마주할 것을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애초에 단둘이 술을 마시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지잉. 또다시 한숨을 내뱉던 순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어 댔다.
“네. 비서실 정희영 대리입니다.”
비서실에서 걸려 온 전화임을 확인한 희영은 재빨리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김 과장님 호출이에요. 빨리 내려오세요.
과장님 호출이라는 말에 희영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비서실이 있는 8층으로 내려온 희영은 화장실에 들어가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무슨 일로 호출한 걸까.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어 등골이 서늘했다.
“아, 정 비서.”
“네, 과장님.”
비서실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김 과장을 향해 희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정희영 씨가 새로 온 경영전략 이사님의 비서로 일하게 됐어.”
“네?”
“축하해. 다들 노리던 자리라고. 회장님 아들인 거 알지? 특별히 잘 모셔.”
머리가 빙빙 돌았다. 어디선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하는 노랫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부러워하는 다른 여비서들의 시선이 등 뒤에 꽂혔지만 그런 것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희영의 머릿속은 복잡해져 가고 있었다.
* * *
필름이 끊긴 척할까? 아니, 그건 너무 비겁하다. 술에 취해 실수였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쿨하게 정면 돌파?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희영은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피해자였다. 이렇게 강욱과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것도 자신의 상사로.
초조하게 이사실 앞을 서성이던 희영은 비장한 얼굴로 문고리를 붙잡았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자. 죄를 지은 건 자신이 아니라, 강욱이다. 앞으로 상사로서 깍듯하게 그를 대하면 될 것이다.
다짐을 해 봤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문고리를 돌려 이사실 안으로 들어선 희영의 눈에 화이트 톤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는 내부 공간이 들어왔다.
책상 위에 챙겨 온 짐을 내려놓은 희영은 유리문으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강욱의 집무실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아, 맞다. 임원 회의 시간이지?”
텅 빈 이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던 희영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고 있었다.
희영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 강욱의 집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중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LP판이었다.
“음악 좋아했었나?”
묘하게 그녀와 취미가 맞았다. 스물두 살 때까지 피아노를 전공했던 희영은 사고로 인해 손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피아노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비서학과로 편입해 M 그룹에 입사를 했지만, 여전히 이루지 못한 꿈인 피아노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다.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진 못했지만 희영은 음악 듣는 걸 즐겼다. 손을 다치면서 꿈도 무너지고, 유일한 사랑이었던 도훈과도 처절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지탱해 준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학교 근처 LP 카페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희영은 LP의 매력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CD처럼 선명한 음색을 내지는 못하지만 지지직거리는 LP 특유의 잡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 아래에서 다친 마음을 위로받았다.
그때부터였다. LP 음반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비싼 음반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가끔 헌책방에 가 저렴한 LP판을 사 들고 오는 것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취미였다.
그런데 강욱의 진열장에는 비싸서 구경도 못 했던 희귀 음반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회사에 LP판과 턴테이블 세트까지 구비해 놓다니, 그 역시 LP 음악을 듣는 걸 즐기는 듯했다.
“듣고 싶은 곡 많다.”
희귀한 LP판을 둘러보며 희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쪽에 놓여 있는 턴테이블이 그녀를 유혹했지만, 보스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써 유혹을 이겨 내며 LP판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고개를 돌리니 책상 한쪽에 귀여운 장난감 피규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것도 좋아하는구나. 어쩐지 어울리네.”
소년과 남성의 얼굴이 뒤섞여 있는 서글서글한 강욱의 얼굴을 생각하던 희영의 머릿속에 엊그제 밤 그와 나누었던 키스가 멋대로 떠올랐다.
그때 그의 얼굴은 소년보다 남성에 더 가까웠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던 희영은 재빨리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 그건 또 왜 떠올려?”
재빨리 피규어에서 시선을 거두며 멋대로 머릿속을 침범한 그날의 생각들을 날려 버렸다.
이렇게 잡생각이 들 때는 일이 최고였다. 자리에 앉은 희영은 강욱에게 보고해야 할 일정 파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건 일단 끝났고…….”
중간중간 걸려 오는 전화 응대까지 해 가며 여유롭게 파일 정리를 마친 희영은 우편물 쪽으로 눈을 돌렸다. 베테랑답게 능숙한 손길로 우편물 정리까지 끝낸 후,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슬쩍 쳐다보았다.
오전 10시 50분. 곧 회의가 끝날 시간이었다.
탕비실 안으로 들어간 희영은 커피머신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에스프레소 좋아한다고 그랬었지?”
회의를 마치고 오면 그가 바로 마실 수 있게 커피를 내렸다. 그때 이사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기도문을 외우듯 그 말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희영은 탕비실 문을 열고 나갔다.
“아, 선배?”
자신을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거는 강욱을 희영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네. 여기서 선배를 다시 보니까 반가운데요? 많이 놀랐죠?”
서글서글한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묻는 강욱의 모습에 희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남자, 여유로워도 너무 여유로웠다. 좋아한다 고백했던 그 사람이 맞는 걸까?
그렇게 차였으면 조금 부끄럽고 창피할 만도 한데, 오히려 자신보다 더 여유로워 보이는 강욱의 모습에 희영은 초조해졌다.
혹시 그냥 농담으로 한 말에 자신이 오버한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의 키스는 후회되었다.
“선배?”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강욱의 목소리에 희영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앞으론 그냥 정 비서라고 불러 주시죠? 이사님이 그렇게 부르시는 거 부담스럽습니다.”
정중하되 냉정한 목소리로 희영이 말했다.
“그래요? 뭐, 정 비서님이 부담스럽다고 하니까 앞으로 호칭은 주의하도록 하죠.”
생글거리는 얼굴로 바로 호칭을 고친 강욱은 별다른 말없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아, 에스프레소 한 잔 부탁해요, 정 비서님.”
“네, 알겠습니다.”
태연한 얼굴로 집무실 안으로 사라지는 강욱의 뒷모습을 슬쩍 보던 희영은 다시 탕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고백한 사람 맞아?”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 말에 휩쓸려서 키스를 하다니.
“하아.”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희영은 미리 내려놓은 커피를 에스프레소 잔에 담았다.
“차라리 잘됐어.”
괜히 좋아한다 어쩐다 해서 사람 불편하게 하는 것보다 이게 나았다. 물론 자신도 키스를 하긴 했지만 그전에 강욱이 먼저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고백을 받아 준 것도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거절했으니 이렇게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해서 자연스럽게 상사로서 강욱을 대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 그거면 돼.”
혼잣말을 하며 커피와 함께 먹을 쿠키를 쟁반에 담은 희영은 자신의 자리로 가 일정표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발걸음을 옮겨 집무실 앞에 섰다.
“들어와요.”
유리문을 두드리자 부드러운 강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희영은 커피와 쿠키가 담긴 접시를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들고 들어온 일정표를 내밀었다.
“초조하거나 당혹스러운 일이 있을 때면 손톱을 깨물고.”
어느새 손톱 끝을 깨물고 있던 희영은 재빨리 붉은 입술에서 손을 떼어 냈다.
“강욱 씨.”
“눈치챘어요?”
희영은 씩 웃으며 답지 않게 능글거리는 얼굴로 물어 오는 강욱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 이상형이 선배님이라는 거.”
“농담 그만해.”
“농담 아니에요. 선배님 마음에 담은 지 꽤 오래됐어요.”
두 살 어린 연하남의 저돌적인 고백에 희영은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물론 그가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너 너무 많이 마셨나 보……!”
강욱은 커다란 손을 들어 희영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당겨 붉은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갰다. 이내 천천히 떨어지는 그의 입술을 느끼며 희영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농담 아니라고 했잖아요.”
웃음기 하나 없는 강렬한 검은 눈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처음이었다. 첫사랑이었던 지도훈과 5년을 사귀고 헤어진 이후, 키스에 이런 전율이 일어난 것은.
도훈과 헤어진 후, 몇 번의 연애를 해 보았지만 그 누구와의 키스에서도 이런 전율은 일지 않았었다. 그런데 짧고 서투른 입맞춤 한 번에 이런 전율을 느끼다니.
“키스가 너무 어설퍼.”
술에 취한 게 분명했다. 자신이 이런 말을 내뱉다니. 그걸 인지하면서도 희영은 순간 불붙은 욕망을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다.
희영은 두 손을 뻗어 강욱의 작은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살짝 입술만 붙였다 멀어지는 그런 입맞춤이 아닌, 조금 더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희영은 세차게 강욱의 혀를 휘어 감고 깊이 빨아 당겼다.
어차피 내일이면 안 볼 사이였다. 키스 한 번 했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란 말이었다.
그의 아랫입술을 세차게 빨던 희영은 서서히 입술을 떼어 냈다.
“키스는 이렇게 하는 거야. 더 배워 와. 풋내 나는 녀석이랑 연애하고 싶은 생각, 난 없으니까.”
손을 뻗은 희영은 새까만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중에 경험치가 더 쌓이면 연락해. 그때 다시 생각해 볼게.”
자연스레 강욱의 고백을 거절한 희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그와 했던 키스는 나쁘지 않았다. 뒤돌아선 희영은 얼얼한 입술을 손끝으로 살짝 만지며 스스로 했던 대범한 행동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키스에 대해 떠올리던 희영은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그런 키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쳤지, 미쳤어. 아무리 굶었어도 그렇지! 도대체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희영은 옥상 난간을 꽉 붙잡았다. 앞으로 회사에서 강욱의 얼굴을 마주할 것을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애초에 단둘이 술을 마시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지잉. 또다시 한숨을 내뱉던 순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어 댔다.
“네. 비서실 정희영 대리입니다.”
비서실에서 걸려 온 전화임을 확인한 희영은 재빨리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김 과장님 호출이에요. 빨리 내려오세요.
과장님 호출이라는 말에 희영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비서실이 있는 8층으로 내려온 희영은 화장실에 들어가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무슨 일로 호출한 걸까.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어 등골이 서늘했다.
“아, 정 비서.”
“네, 과장님.”
비서실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김 과장을 향해 희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정희영 씨가 새로 온 경영전략 이사님의 비서로 일하게 됐어.”
“네?”
“축하해. 다들 노리던 자리라고. 회장님 아들인 거 알지? 특별히 잘 모셔.”
머리가 빙빙 돌았다. 어디선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하는 노랫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부러워하는 다른 여비서들의 시선이 등 뒤에 꽂혔지만 그런 것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희영의 머릿속은 복잡해져 가고 있었다.
* * *
필름이 끊긴 척할까? 아니, 그건 너무 비겁하다. 술에 취해 실수였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쿨하게 정면 돌파?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희영은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피해자였다. 이렇게 강욱과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것도 자신의 상사로.
초조하게 이사실 앞을 서성이던 희영은 비장한 얼굴로 문고리를 붙잡았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자. 죄를 지은 건 자신이 아니라, 강욱이다. 앞으로 상사로서 깍듯하게 그를 대하면 될 것이다.
다짐을 해 봤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문고리를 돌려 이사실 안으로 들어선 희영의 눈에 화이트 톤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는 내부 공간이 들어왔다.
책상 위에 챙겨 온 짐을 내려놓은 희영은 유리문으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강욱의 집무실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아, 맞다. 임원 회의 시간이지?”
텅 빈 이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던 희영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고 있었다.
희영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 강욱의 집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중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LP판이었다.
“음악 좋아했었나?”
묘하게 그녀와 취미가 맞았다. 스물두 살 때까지 피아노를 전공했던 희영은 사고로 인해 손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피아노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비서학과로 편입해 M 그룹에 입사를 했지만, 여전히 이루지 못한 꿈인 피아노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다.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진 못했지만 희영은 음악 듣는 걸 즐겼다. 손을 다치면서 꿈도 무너지고, 유일한 사랑이었던 도훈과도 처절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지탱해 준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학교 근처 LP 카페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희영은 LP의 매력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CD처럼 선명한 음색을 내지는 못하지만 지지직거리는 LP 특유의 잡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 아래에서 다친 마음을 위로받았다.
그때부터였다. LP 음반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비싼 음반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가끔 헌책방에 가 저렴한 LP판을 사 들고 오는 것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취미였다.
그런데 강욱의 진열장에는 비싸서 구경도 못 했던 희귀 음반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회사에 LP판과 턴테이블 세트까지 구비해 놓다니, 그 역시 LP 음악을 듣는 걸 즐기는 듯했다.
“듣고 싶은 곡 많다.”
희귀한 LP판을 둘러보며 희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쪽에 놓여 있는 턴테이블이 그녀를 유혹했지만, 보스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써 유혹을 이겨 내며 LP판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고개를 돌리니 책상 한쪽에 귀여운 장난감 피규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것도 좋아하는구나. 어쩐지 어울리네.”
소년과 남성의 얼굴이 뒤섞여 있는 서글서글한 강욱의 얼굴을 생각하던 희영의 머릿속에 엊그제 밤 그와 나누었던 키스가 멋대로 떠올랐다.
그때 그의 얼굴은 소년보다 남성에 더 가까웠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던 희영은 재빨리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 그건 또 왜 떠올려?”
재빨리 피규어에서 시선을 거두며 멋대로 머릿속을 침범한 그날의 생각들을 날려 버렸다.
이렇게 잡생각이 들 때는 일이 최고였다. 자리에 앉은 희영은 강욱에게 보고해야 할 일정 파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건 일단 끝났고…….”
중간중간 걸려 오는 전화 응대까지 해 가며 여유롭게 파일 정리를 마친 희영은 우편물 쪽으로 눈을 돌렸다. 베테랑답게 능숙한 손길로 우편물 정리까지 끝낸 후,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슬쩍 쳐다보았다.
오전 10시 50분. 곧 회의가 끝날 시간이었다.
탕비실 안으로 들어간 희영은 커피머신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에스프레소 좋아한다고 그랬었지?”
회의를 마치고 오면 그가 바로 마실 수 있게 커피를 내렸다. 그때 이사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기도문을 외우듯 그 말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희영은 탕비실 문을 열고 나갔다.
“아, 선배?”
자신을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거는 강욱을 희영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네. 여기서 선배를 다시 보니까 반가운데요? 많이 놀랐죠?”
서글서글한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묻는 강욱의 모습에 희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남자, 여유로워도 너무 여유로웠다. 좋아한다 고백했던 그 사람이 맞는 걸까?
그렇게 차였으면 조금 부끄럽고 창피할 만도 한데, 오히려 자신보다 더 여유로워 보이는 강욱의 모습에 희영은 초조해졌다.
혹시 그냥 농담으로 한 말에 자신이 오버한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의 키스는 후회되었다.
“선배?”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강욱의 목소리에 희영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앞으론 그냥 정 비서라고 불러 주시죠? 이사님이 그렇게 부르시는 거 부담스럽습니다.”
정중하되 냉정한 목소리로 희영이 말했다.
“그래요? 뭐, 정 비서님이 부담스럽다고 하니까 앞으로 호칭은 주의하도록 하죠.”
생글거리는 얼굴로 바로 호칭을 고친 강욱은 별다른 말없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아, 에스프레소 한 잔 부탁해요, 정 비서님.”
“네, 알겠습니다.”
태연한 얼굴로 집무실 안으로 사라지는 강욱의 뒷모습을 슬쩍 보던 희영은 다시 탕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고백한 사람 맞아?”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 말에 휩쓸려서 키스를 하다니.
“하아.”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희영은 미리 내려놓은 커피를 에스프레소 잔에 담았다.
“차라리 잘됐어.”
괜히 좋아한다 어쩐다 해서 사람 불편하게 하는 것보다 이게 나았다. 물론 자신도 키스를 하긴 했지만 그전에 강욱이 먼저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고백을 받아 준 것도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거절했으니 이렇게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해서 자연스럽게 상사로서 강욱을 대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 그거면 돼.”
혼잣말을 하며 커피와 함께 먹을 쿠키를 쟁반에 담은 희영은 자신의 자리로 가 일정표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발걸음을 옮겨 집무실 앞에 섰다.
“들어와요.”
유리문을 두드리자 부드러운 강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희영은 커피와 쿠키가 담긴 접시를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들고 들어온 일정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