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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엔드맨




하이엔드맨 1화
하이엔드맨 (1)


벚나무가 만개한 아래, 나는 어지럽게 떨어지는 꽃잎들의 향연을 지켜보고 있다.
벚꽃나무 바깥을 두른 웅장한 담벼락은 높이가 2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다. 그 당시 어린 내 눈에 본가의 담벼락은 위압적으로 보였다. 정신 사나울 정도로 흘러내리는 꽃잎, 그리고 어지러운 향기에 속이 울렁거렸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처럼 벚꽃이 흩날렸고, 그 흐드러진 향연에 눈이 시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 대궐 같은 집 안에 들어오면 항상 감탄하곤 했지만,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눈처럼 쏟아지는 벚꽃들 사이의 담벼락 바깥, 그 어딘가를 동경하고 있었다. 날 숨 막히게 옥죄는 그 공간이 싫었기 때문이다.
내가 바깥으로 시선을 향할 때면, 코이치는 날 안아 올려 밖을 구경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면 높은 담벼락 너머로 길이 보였고, 난 한참이나 바깥을 쳐다보곤 했다.
그때 느끼는 그 자유가 좋았다. 진심으로 숨 막히는 본가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왜 코이치가 채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한국으로 떠났었던 건지 이해됐다. 그리고, 내 자유를 향한 갈망은 내가 열네 살이 되기도 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코이치는 담배를 피우며 물었다. 느슨한 감색 유카타를 입은 그의 등판은 넓고 컸으나 한편으로는 처량했다. 그는 한참이나 담배만 뻐금거렸고,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웅장한 일본식 모래 정원에 스산한 바람만이 불었다.
나는 이 강압적인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땀이 찬 손바닥을 바닥에 문질렀다. 다다미 바닥의 촉감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루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가볍게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정원 한가운데에 놓인 대나무 물레방아만 퉁, 하고 울릴 뿐이다. 난 내 앞에 다기를 내려놓고 코이치를 쳐다봤다. 식사 후면 항상 다도를 즐기는 코이치는, 지금은 차를 한 입도 대지 않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코이치가 말했다.
“갑자기 왜 한국에 가고 싶은 건데, 코스케?”
갑자기가 아닌데. 코이치의 아내이자 나의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었다. 사업을 핑계로 한국으로 도망쳤던 코이치는 젊은 날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은 바로 나였다.
보수적인 야쿠자 집안에서는 당연히 그 결혼을 말렸다. 보통 집안과 다르게 말리는 수준이 칼부림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코이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코이치는 반대를 무시하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의 어머니는 날 낳자마자 죽어 버렸다.
나에게 어머니는 없었고, 코이치는 항상 바빴다. 난 이 대궐 같은 집에서 홀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고, 알게 모르게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무시하는 발언과 핍박, 코이치의 아들이란 감투에 모난 증오가 쏟아졌다. 평범한 한국 여자의 아들이란 이유로 멸시 받았다. 나는 이 집안에서 영원히 섞일 수 없는 기름 같은 존재인 것이다. 난 손에 든 다기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엄마의 고향이라면서. 궁금해.”
그 말에, 코이치의 표정이 멍하게 풀어졌다. 아득한 추억과 상념에 사로잡힌 듯했다. 난 코이치의 표정을 보며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사랑은 지구상에서 가장 긴 유통기한을 자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윽, 시발.”
난 침대에 굴러떨어지자마자 이마를 짚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와중에도 오래전 일을 꿈으로 꾼 것이 놀라울 지경이라 생각했다.
아주 상세한 꿈. 기억도 안 나는 아득한 일인데, 꿈은 낡은 다기 그릇마저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역시 사람 무의식이 무섭구나. 난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다시 이불을 밟고 바닥에 미끄러졌다. 쿵.
“제기랄.”
난 핑핑 도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몇 시지? 짜증스레 알람 시계를 들어 확인해 보니 지각이다. 뭐, 이젠 놀랍지도 않다. 나는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욕실로 들어왔다. 레버를 비틀자마자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수가 쏟아졌다. 윽! 난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르며 레버를 다시 비틀었다. 미세한 각도 차이가 어마무시한 온도 차이를 낸다.
난 온수 조절이 제대로 안 되는 집을 탓하며 구시렁거렸다. 물에 폭삭 젖은 잿빛 머리칼의 남자가 음울하게 거울을 쳐다봤다. 어젯밤의 거친 정사 때문에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다시 눈을 비비고 거울을 쳐다보니 몸은 완전 가관이다. 여기저기 키스 마크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망할 년.”
이름도 모르는 어떤 여자를 떠올리며 욕을 내뱉는다. 이미 지각도 한 마당에 무서울 건 없었다. 나는 느긋하게 등교 준비를 했다. 어찌 됐건 난 아직 열아홉 살 고등학생이기 때문이다.
드라이기로 말린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교복을 꿰어 입고는 학교로 향했다. 학교는 집에서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런 주제에 나는 지각은 밥 먹듯 했다. 그리고 어제도 담임에게 욕을 먹었다.
정확히 1교시가 끝난 후 쉬는 시간. 난 그때가 돼서야 교실에 도착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 옆자리인 환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다채로운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언제나 느끼지만 환이의 이질적인 얼굴은 교실과 어울리지 않았다.
난 환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다시 피곤함이 빚쟁이처럼 몰려들었다. 가방의 차가운 지퍼가 볼에 닿았다. 그러나 등교하자마자 잠을 자려는 내 의지를 무너트리려는지, 옆얼굴로 집요하게 시선이 박혔다. 난 휙 고개를 들었다. 환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묘한 얼굴로 쳐다본 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밤새 뭐했어?”
“아, 게임했어.”
나는 환이 지각한 이유를 묻는 건가 싶어서 대충 둘러댔다. 그러고는 다시 푹신한 가방 위에 엎드린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자마자 환이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살짝 얼굴 위로 그늘진 음영에 눈을 떴다. 달큼한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환의 이질적이고도 서늘한 느낌이 뒷목에 느껴졌다. 차가운 환의 손가락이 내 뒷목을 쓰다듬는다. 환이 엎드린 내 옆으로 다가온 채 속삭였다.
“너, 목에 자국 났어.”
순간 몰려왔던 잠이 왈칵 날아가 버렸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틀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가만히 마주친 금색 눈동자가 서늘하고도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보기 좋은 새빨간 입술이 낮게 달싹였다.
“다 좋은데.”
나와 눈이 마주친 환이 싸늘하게 말했다.
“네 거짓말은 별로야.”
간담이 서늘했다. 난 그제야 여자가 목에 남긴 자국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망할, 환이가 화났잖아. 환이는 내가 거짓말하는 걸 싫어한다.

***

“나 꼭 한국 갈 거야.”
코이치는 아무 말이 없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다다미와 익숙한 유카타, 그리고 은은한 향초 냄새. 난 그 모든 것을 떠나고 싶었다. 코이치는 당연히 내 선택을 반대하지 않았다. 죽은 망령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괴짜이지만 나의 하나뿐인 아버지였으니까. 코이치는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희를 만난 것도 이때쯤이었어.”
벚꽃을 보며 회상에 잠긴 코이치가 말하는 건 결국 엄마 이야기였다. 나를 낳은 사람. 내가 쏙 빼닮았다는 여자.
“난 네 엄마를 보자마자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
코이치는 담담히 말하며 웃었다. 나는 코이치의 감성적인 말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코이치는 엄마를 처음 본 날 파란 장미 같다 생각했다고 했다. 색소로 물들인 장미는 많지만 진짜 파란 장미는 없다고 한다. 장미는 파란색 유전자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파란 장미의 꽃말은 불가능이다. 만약 파란 장미의 유전자 실험이 성공한다면 꽃말은 기적으로 바뀐다고 했다. 코이치는 엄마가 파란 장미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첫날을 잊지 못했고, 난 아직까지 엄마를 잊지 못한 코이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넌 네 엄마를 닮았어.”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코이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습관적으로 거울을 볼 때마다 드러나는 잿빛 머리카락과 눈매는 어머니와 닮아 있었다. 그래서 코이치는 넋두리처럼 내게 저런 말을 하곤 했다.
코이치는 일본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잘했다. 일본인임에도 너무나도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어머니를 위해서 한국어를 완전히 익히고, 그녀가 죽은 후에도 잊지 않고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코이치의 눈빛과 버릇에서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코이치처럼 맹목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코이치는 사별의 아픔 뒤 엉망으로 살았고, 나는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일본이 지긋지긋했다. 타카하시 가문의 후계자였던 코이치는 당연하게 보스가 되었고, 나는 코이치의 아들이란 이유로 수많은 위협을 당했다. 납치돼서 차 트렁크에 13시간 동안 갇혀 있던 적도 있고, 간식으로 받은 과자에 독이 묻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 대다수는 타인이 아닌 친족에게 의해서였다.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했다.
어린 나이부터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 운동은 점차 늘기 시작해서 유도, 당수, 태권도, 주짓수, 킥복싱까지 안 배운 운동이 없었다. 약하게 희석한 독을 티스푼으로 반 숟갈씩 먹으면서 내성을 키우고, 근육통을 앓으면서도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납치되어 트렁크에 갇혔던 트라우마를 이겨 내지 못했다. 그 덕에 난 지금도 밤만 되면 불을 켜고, 다른 여자들과 몸을 섞으며 버텼다. 홀로 새카만 방에 있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고작 열아홉 살의 나이에 나는 황당한 이유로 문란해졌다.

***

처음 한국에 오자마자 나는 따돌림을 당했다. 칙칙한 머리칼에 칙칙한 눈도 지나치게 눈에 띄었고, 더군다나 한창 독도 문제로 반일 의식이 팽배해져 있을 때였다. 이질적인 내가 대번에 왕따로 낙인찍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전학 온 나는 쪽바리 새끼라는 말을 들었다. 혼혈의 단점 중 하나다. 일본에서는 한국놈이라며 욕을 먹었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쪽바리라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그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따질 생각은 없었다. 일본에도 이지매가 있듯이 한국에도 왕따가 있고, 나는 그 표적이 되었을 뿐이다.
내가 한국으로 전학 온 것은 열네 살 때였다. 한창 사춘기였고, 서로 짓밟아야 잘난 줄 아는 남자놈들의 유치함은 최고를 찍고 있었다. 나는 그때 놈들의 희생양으로 낙인 찍혔다. 놈들은 거들먹거리며 날 공터에 몰고 위협을 했다.
내가 전학 온 중학교는 국제학교라 꽤 유복한 가정집 아이들만 오는 곳이었다. 이미 돈의 분배에 따라 어른들의 허례허식과 오만을 배운 아이들은 또 다른 약자를 짓밟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난 놈들이 그러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과녁이 내가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날 향해 시비를 걸던 아이는 주먹을 뻗었다. 난 몰려 있던 아이들 틈에서 이걸 응해 줘야 할지 고민했다. 아이의 주먹은 허술했다. 서툴고 느렸다. 나는 결국 포기한 상태로 눈을 감았다. 구석에서 가만히 있는 내게 놈의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감각에 눈을 떴다. 어느새 주먹을 뻗던 아이의 손은 멈춰 있었다. 내지른 주먹을 누군가 붙잡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지켜본 것인지 누군가가 끼어든 것이다. 한 대 맞아 줄 요량이었는데. 나는 멍한 얼굴로 눈앞을 쳐다봤다. 연한 상아색 블론드에 황금색 눈. 지금보다 어린 환이 희미하게 웃었다.
환은 망설임 없이 그 불량한 녀석의 손을 꺾었다. 그리고 단박에 녀석을 바닥에 메다꽂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실력이 대충 견주어 봐도 나만큼은 되는 듯했다. 난 당황한 얼굴로 환이를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환이 웃었다. 동시에 손목이 꺾인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날 봤을 때 미묘하게 웃은 것과 달리, 환은 벌레를 본 것처럼 찡그렸다.
“꺼져 버려.”
환은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사색이 된 아이들은 우르르 도망쳤다. 약자에게 악랄했던 그들은, 강자 한 명이 나타나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금세 공터는 휑해졌다.
나는 곧 공터에 혼자 남은 환이를 쳐다봤다. 그때 내 눈앞에 있는 환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환은 내 시선을 모조리 빼앗았다. 햇빛 아래에서 머리칼이 반짝거렸다. 상아색의 블론드와, 그것보다 옅은 호박색 눈동자. 서양인 특유의 이목구비와, 하얀 인형 같은 고고한 분위기는 날 완전히 사로잡았다. 나는 환이의 얼굴을 보면서 메두사의 머리가 생각났다. 얼굴을 보는 이를 바위로 만들어 버리는 메두사. 나는 메두사의 머리라도 본 것처럼 굳어 버린 것이다. 환의 눈빛에 포획된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독버섯도 예쁘고, 식충식물도 예쁘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내 시선은 결코 떨어지지 못했다. 환은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나는 그때 그 밝은 황금색 눈동자 안에 까만 동공을 보았다. 밝은 홍채와 까만 동공이 어우러진 눈동자는 꼭 해바라기 같았다. 나는 그때 환의 눈동자 속에서 해바라기를 보았다.
“히마와리(ひまわり).”
난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해바라기가 눈에 피어 있었다. 까만 동공은 마치 블랙홀 같았다. 환은 희미하게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너 일본 애야?”
환이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이국적인 환이의 입술에서 능숙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환이는 보통 사람과 달리 이질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전학 온 국제학교는 혼혈인이 많았지만 환이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는 한참을 입만 벙긋거리다가, 내가 생각해도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예뻐.”
키레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본능적으로 맛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난 본능적으로 감탄했다. 나는 환에게 단단히 홀려 버렸다.
서툰 한국어로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사람들이 신을 모시는 이유를 알겠다. 살다 보면 가끔 경배하고 찬양하고 싶은 인간 하나쯤은 나타난다. 엘도라도의 황금신이 있다면 환이와 생김새가 비슷할 거란 생각을 했다. 내 찬사에 환은 다정하게 대답했다.
“고마워.”
매끄러운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고, 환의 얼굴은 유화처럼 화려했다. 나는 한번 관심 가는 것에 뚫어지게 쳐다보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것이 동양권에서는 꽤 불쾌하게 받아들여졌고, 시비를 붙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데도 환이는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나는 환의 금발을 만지고 싶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어린왕자의 밀밭 같은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내 열망을 눈치챈 환은 천천히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나는 이 못된 버릇이 더 심해질 거라는 걸 예감했다.
“너처럼 빤히 쳐다보는 애는 처음 봐.”
다들 나한테 겁먹어서 제대로 못 보거든. 환이 그렇게 덧붙이고는 내 손을 잡아끌어 머리에 올렸다. 손바닥에 환의 머리칼이 닿았고,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소설 ‘사막 위의 열정’의 주인공은 처음 표범을 마주했을 때 그를 쓰다듬었다. 나는 마치 그 순간에 놓인 것만 같았다. 내 심장이 쿵쿵 뛰었다. 보는 것만큼 손끝에 닿는 감촉까지 매끄러웠다. 환은 고운 짐승처럼 눈을 가만히 내리깔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나는 한참 지나서야 손을 떼어 냈다. 그와 동시에 환은 차분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내가 널 도와줬잖아. 넌 뭘 해 줄래?”
난 그 물음에 멍하니 환을 쳐다봤다. 그때는 몰랐다. 환이는 주고받기가 확실한 타입이었다. 환이에게 있어서 적선이나 기부라는 개념은 없었다. 내가 어찌할 바도 모르고 쳐다보자, 환이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이 빚 꼭 갚아.”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환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환이의 눈동자의 잔상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황금색 해바라기.
코이치 듣고 있어?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파란 장미를 만났다면, 난 그 무엇도 아깝지 않을 해바라기를 만났다고.

***

환과 나는 첫 만남 이후로 쭉 같은 학교에 다녔다. 환이 어떤 농간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난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내내 환과 같은 반이 될 수 있었다. 그는 항상 관심의 중심에 있었고, 그런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나를 달고 다녔다.
첫 만남 때의 이미지가 굳어진 모양인지 환은 항상 날 보호하려 들었다. 내가 공터에서 괴롭힘 당한 이후로 약골이라고 생각하게 된 모양이었다. 사실 환이 조금만 늦게 나타났더라면, 그냥 그 녀석들은 내가 후들겨 팼을 것이다.
사실은 내가 야쿠자 아들에다가 싸움 병기인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매일 학교가 끝나면 훈련을 받는 것은 나의 일과이자 의무였다. 난 단 한 번도 학교 이후의 일과를 환이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환의 옆모습만 쳐다봤다. 만약 아름다운 여신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게 바로 환이일 거다. 내 시선에 환이 물었다.
“무슨 생각해?”
“그냥.”
“그냥?”
잘생겼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환이는 더 추궁할 생각은 없었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환이의 부드러운 속눈썹이 햇빛에 반짝였다.
“나 궁금한 거 있어.”
환의 목소리가 묘하게 낮았다.
“너 한국에 온 지 5년 됐지?”
내가 열네 살에 일본에서 건너왔고, 지금은 열아홉 살이니 맞다.
“생각해 보니 난 한 번도 너네 집에 간 적 없잖아.”
내가 당황해하자 환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가고 싶어.”
어디를?
“너네 집.”
단박에 나온 환의 대답에 내 머릿속은 멍해졌다. 난 항상 방과 후에는 훈련을 하고 잠들기 바빴다. 주말에 가끔 만난 적은 있어도 집에 초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사생활을 노출시킬 필요가 없었고, 환도 그걸 딱히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집에 데려가지 않아서 서운한 거야?”
내 물음에 보기 좋은 환의 입꼬리가 반달을 그렸다. 내 물음에 부정하지 않는다.
“어. 많이.”
많이, 많이란다. 식은땀이 관자놀이 옆으로 흘렀다. 말이 없는 나를 보며 환은 고집스레 말했다.
“데려가 줘, 너의 집에.”
환은 망설이는 내 입술이 채 열리기도 전에 말했다.
“일본에 있는 너네 집 말이야.”
그 순간, 말문이 완전히 막혀 버린 나는 멍하니 환이 얼굴을 쳐다봤다. 살짝 초점이 나간 내 얼굴을 보며 환이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싫어?”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렸다. 환이 이런 제안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방심한 나는 당황한 채 눈을 굴렸다. 하기야, 국외도 제집 드나들듯 하는 환이에게 일본을 가는 것은 바로 옆 동네 가는 것처럼 껌이었다.
아, 생각도 못했다. 재벌가 아들답게 배포가 크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 본가를 언급하다니. 어쩐지 골이 지끈거렸다. 곤란해, 아주아주 곤란하다. 야쿠자 아들이란 사실을 숨기기 급급한 나는 당혹스러움에 입이 말랐다.
“나중에 데려가 줄게.”
더듬거리며 떼어 낸 내 말에, 환이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왜?”
환이의 시선이 나를 옭아맸다. 나는 대답 없이 환을 쳐다봤다. 환의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마치 빨려 들어갈 듯 샛노란 눈동자엔 해바라기 꽃이 피었다. 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난 널 알 수가 없어.”
“…….”
“네가 날 초대한다든지, 가족사를 낱낱이 얘기한 적은 없었잖아.”
나는 당황했다. 환은 지금 살짝 화가 났다. 그가 미미하게 찌푸려진 눈으로 날 쳐다봤다. 숱 많은 금빛 속눈썹이 햇빛에 맞닿아 반짝 빛났다.
“어이없는 건, 조사까지 해 봤는데도 널 알기 어렵다는 거야.”
환이의 표정은 그동안 봐 왔던 얼굴과 달랐다.
“일본에서도 네 신상 정보가 하나도 없어. 이게 말이 돼?”
나는 너무나 솔직하게 묻는 환의 얼굴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환이는 지금 날 의심하고 있었다. 환의 맹수 같은 눈빛이 코앞에서 아른거렸다. 목덜미가 물리기 직전이 이런 기분일까. 환은 담담한 표정으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꽤 쓸 만한 정보원이었는데, 널 알 수가 없대. 마치 누군가 일부러 없앤 것처럼.”
가만히 쳐다보던 환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하잖아.”
그러더니 내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댄다. 하얗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내 볼을 가볍게 매만졌다. 이내 조금은 힘주어 끌어당긴 덕에, 코앞에서 환이의 두 눈과 마주했다.
“그래서 널 알아낼 거야.”
녀석의 눈빛이 흥미와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괴이하고 맹목적으로 변했다. 아마도 내 눈동자는 작게 흔들렸을 것이다. 보통 상대방을 ‘알아 간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독선적인 환이는 야무지고도 깔끔한 결론을 냈다. 널 ‘알아낼’ 거라고.
위협 같은 선전포고에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들킨다는 위기감보다는 스스로 느끼는 감정에 소름이 끼쳤다. 흉폭하고 거친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환의 고운 외모에, 심장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나는 아마 변태일지도 모른다.

***

철컥, 담배를 태울 때마다 지포라이터를 만지는 건 코이치의 버릇 중 하나다. 코이치가 지포라이터를 보여 주며 말했었다.
‘이게 네 엄마 세례명이야.’
지포라이터에는 필기체로 엄마의 세례명인 레이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난 솔직히 그 라이터가 싫었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태우는 코이치의, 라이터 같은 존재. 엄마는 그런 걸 원한 걸지도 모른다.
자신이 죽어서도 잊지 말라며, 엄마는 담배를 태우는 코이치의 라이터에 자신의 세례명을 새겨 달라고 했다.
코이치는 담배를 피울 때마다 기억하기 위해, 지포라이터에 엄마의 이름을 새겼다.
그 사랑은 내게 와 닿지 않았다. 이상해. 그냥 감성적인 변태일 뿐이야. 그때 나는 사랑은 지구상에서 가장 유통기한이 긴 감정 중 하나이며, 집착이라는 쓰레기를 양산해 내는 부질없는 것이라 느꼈다. 그리고 사랑이 정신병이 분명하다고 결론은 내린 것은 딱 열두 살 때다. 내가 열두 살이 먹도록 코이치는 엄마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다가 한 번쯤은 너를 흔들어 놓을 미친 인간이 생길 거야.’
코이치는 나도 그럴 거라고 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그것이 기분 나빴다. 예언하듯 말하는 게 꼭 저주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코이치의 그러한 습관이 싫었다.
나는 아직도 은하라는 내 한국 이름이 어색하다. 난 엄마의 성을 따서 ‘차은하’라는 이름을 가지고 한국에 왔다. 차연희. 내 엄마의 이름이다.
나는 엄마에게 코이치의 기억에서 떠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코이치의 애도는 그 끝을 몰랐다. 여전히 망령을 잊지 못하는 코이치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 라이터의 이기심이 싫었다.
코이치는 습관적으로 말했었다. 담배를 끊는 날이 온다면 그땐 아마 네 엄마를 조금은 잊었을 때일 거라고.
나는 코이치에 대한 회상을 거두고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