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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엔드맨 2화
하이엔드맨 (2)


집 앞에는 도착해서 덩그러니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택배 상자를 발견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단독주택이었음에도 연락 하나 주지 않은 택배 기사의 무신경함을 속으로 씹었다.
택배를 시킨 적이 없기 때문에, 난 상자에 의문을 느끼며 무신경한 얼굴로 박스를 뜯었다.
찌익. 상자를 열자 그 안에 있는 건 허무할 정도로 작은 상자 하나였다. 상자 뚜껑을 열자 익숙한, 손 때 묻은 지포라이터가 보였다. 나는 그걸 발견한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웬일로 그 안에는 편지까지 들어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내용이 첫 줄에 쓰여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생일이었던가. 난 화장실 문에 달린 달력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다. 이틀 뒤는 내 생일이었다. 천천히 코이치가 보낸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다섯 번째 줄을 읽고 왈칵 편지지를 구겼다.
[폐암이 걸려서 더 이상 라이터가 필요 없어. 네가 가져. 아님 버리든지.]
편지의 볼품없는 줄 수에 일단 어이가 없었고, 그 어마어마한 내용에 두 번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이런 통보를 택배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라이터가 필요가 없어졌으니 나보고 가지라고? 순간 띵해지는 정신에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폐암이라니 말도 안 돼. 뭐하자는 거야. 내 안에서 분노와 배신감이 소용돌이쳤다.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채 마지막 줄을 읽었다.
[후계자 정하는 게 빨라질 거야.]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편지지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코이치가 뒷방 늙은이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코이치의 이기적인 통보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코이치에게 라이터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코이치가 라이터를 넘겨주는 것은, 작가가 절필하는 것과 비슷했다.
코이치는 폐암이 걸리고 나서야 담배를 끊었다. 그건 엄마에 대한 반추를 멈추겠다는 의미와 상통했다. 난 분명 코이치가 담배를 끊기 원했지만 이런 식으로 끊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코이치는 죽음이 코앞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순간이 와서야 지독한 행보를 멈췄다. 그리고 이제 그 짐을 내게 떠넘기려 했다.

***

시기 어린 눈빛과 냉대는 어려서부터 항상 받아 왔기 때문에 익숙해서 무덤덤하다. 폭풍 속의 고요와 같이 난 항상 그 대궐 같은 집안에서 보이지 않는 암투를 해 왔다. 태풍의 눈에서 언제 아수라장이 될지 모르는 고요를 느끼며 지내 왔다.
그것이 야쿠자 집안 족보의 피가 더럽혀졌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십 몇 년이 지나서 이제 성인이 되기 전이다. 드디어 좀 살 것 같다 싶었더니. 새삼스럽게도 후계자라는 단어가 다시 한 번 머릿속을 무겁게 했다.
어찌 되었건 사람의 권력욕과 명예욕은 지독하다는 건 이미 어렸을 적에 겪었다. 야쿠자 보스 자리, 그리고 조직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체를 손아귀에 넣는 것은 이 집안 사람들의 일생일대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많은 위협을 당한 거고.
그렇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내가 환이와 친해진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학교에서 환의 장막은 컸다. 그 장막에 아무도 대적할 수 없었다. 권위 있는 집안의 자제들 사이에서도 환이는 최고에 가까웠다. 학교 이사장마저도 굽실거릴 정도로 거물급이었고, 사람들은 환이 지나갈 때마다 매번 수군거렸다.
환이는 태생부터 로열패밀리로, 러시아 큰 기업체의 자제였다. 태어날 때부터 먹이사슬의 상층부에 자리하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알아서 환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환이는 오만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환이 싫지 않았다.
그에겐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 온 죽마고우가 두 명 있었다. 바로 선우와 우협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정을 비즈니스라고 칭했으며 그 관계는 균열 없이 완벽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그러한 자신들의 무리로 받아 주었다. 내가 녀석들의 ‘비즈니스 관계’에 들어갔다는 증거 중 하나는 같이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거였다.
나는 다 같이 담배를 피울 때 혼자 환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건 담배를 피우는 동안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환이는 담배 피우는 모습이 한 폭의 유화 같았다. 환이의 얼굴을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환이 우협이와 뭐라 뭐라 대화를 하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환이를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이런 변태 같은 취미를 가진 내게 선우는 치를 떨었다.
“괴짜 새끼. 환이가 오해하겠다.”
선우는 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삐죽거리는 선우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는 구시렁거리는 것과 달리 착했다. 다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과 다르게 정서적으로는 매말랐다.
그건 선우뿐만이 아니었다. 선우와 우협이, 환이는 부유한 대신에 메말랐다.
보트 만드는 것이 특기라고 말했던 우협의 아버지는 선박제조사 회장이었고, 숙박업을 하고 계신다던 선우의 아버지는 호텔리조트 회장이었다. 나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재벌들은 자기 아버지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겸손이라 생각하는 건가. 그런 주제에 선우와 우협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는 환이의 아버지가 무얼 하시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단지 우협이와 환이가 사촌지간이라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고, 환이의 아버지가 러시아의 큰손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있는 집 자제들이 득실거리는 이 학교에서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없을 테니까.
“환이 너한테만 잘해 주는 거 알아?”
선우는 불퉁한 목소리로 담배를 태우며 그렇게 말했다.
“뭐가?”
내 물음에 선우는 평소와는 달리 확실한 대답을 내놓았다.
“환이는 네가 편견 없이 대하는 걸 좋아해.”
내가 가늘게 눈을 뜨고 쳐다보자 선우는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내 개운치 않은 표정에 선우는 삐뚜름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 너는 환이의 외모에 정신머리를 저당 잡힌 거지만.”
“내가 언제?!”
내 반박에 선우가 키득키득 웃었다.
“자꾸 그러면 환이 더 오해할걸?”
“뭐가?”
선우는 잔뜩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넌 환이에 대해 하나도 몰라, 등신.”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선우는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선우는 달관한 늙은이처럼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너 나중에 쟤가 지랄 떨어도 난 몰라.”
그 말과 동시에 선우는 괴상한 노래를 불렀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자메이카 노래라고 했다.
선우는 항상 환이와의 비즈니스 관계를 강조했다. 선우는 환이 배신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내 지나치게 맹목적인 환에 대한 찬사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우협이 거들었다.
“그 말이 맞아. 난 걔가 내 사촌인데도 이해가 안 가거든.”
환이 알 수 없는 기행을 펼치는 괴짜에, 성격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내가 눈을 치켜뜨자 우협은 담배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환이 너한테만 관대하잖아.”
우협은 연구원처럼 관찰하고 분석했다. 그는 환이 이해 안 가지만 납득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그게 둘의 관계였다. 난 담배를 비벼 껐다.
우리는 어떠한 공통분모도 없는데 환이를 통해 친해졌고,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들 덕분에 가끔씩은 야쿠자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어째서 환이가 나를 친구로 받아 주었는지는 모른다. 우협의 말대로 환이는 내게만 관대했고 나는 그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

“시시해.”
환이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고어물을 보다가 껐다. 내가 지루해하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왜 잘 보고 있는데 꺼?”
선우가 투덜거렸다. 이번 영화는 우협도 열심히 보던 중이었는지 아쉬운 눈치다.
“나름 흥미로웠는데.”
그러나 환이는 지루한 얼굴로 하품을 했다. 그는 생긴 건 화사하게 생겨서 잔인한 걸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도 싫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환이는 코이치와 비슷한 부류였다. 사냥 본능을 타고난 부류. 자신이 사냥감으로 여기는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 부류였다. 다년간 코이치를 겪은 내 감이 그렇게 말했다.
“내일 환이 생일이야.”
TV를 끄자 적막만 도는 거실에서 선우가 말했다. 매년 환이의 생일 때마다 파티가 열렸고, 나는 항상 그 자리를 참석했다. 어느새 나는 녀석들의 생일마다 초대 받는 사이가 되었다.
생일파티 얘기를 하면서 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환이와 녀석들은 파티에 모이는 승냥이 떼를 혐오했다. 자신들에게 달라붙지 못해 안달인 족속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녀석들 주위에 있는 족속은 두 가지였다. 질투하거나, 혹은 아첨하거나. 그래서 외려 무덤덤한 나를 편하게 여겼다.
“너 어제 생일이었지?”
선우의 말대로 내 생일은 어제였다. 나는 환이와 생일이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
나는 사소한 것 하나를 운명이라 여기는 유치한 족속을 싫어했었다. 그런 주제에 나는 환과 생일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는 인간이 되었다.
선우는 이번에도 내게 필요 없는 선물을 건넸다. 어쩐지 아까부터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명품 쇼핑백들이 지나치게 많다 싶더라니 다 내 거였단 말이지? 이번에도 그는 국외에서 공수해 온 선물을 가득 내밀었다.
“이건 너무 많아.”
내 대답과 동시에 선우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사이에서 멀뚱히 쳐다본 우협이 말했다.
“그쯤 하면 그냥 받아. 불쌍하잖아.”
선우는 심술 난 얼굴로 말했다.
“줘도 못 받는 병신새끼.”
그가 나를 보며 씩씩거렸다. 선물이 많다는 내 한마디에 화가 난 것이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환이 키득키득 웃었다.
“괜찮아. 난 은하가 병신 같아서 좋아.”
나는 그 말에 환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거 칭찬이야?”
내 말에 환이는 그저 웃을 뿐이다.

***

환과 같이 지내면서 깨달은 것은, 그는 짜증 나면 손 하나 까딱해서 사람을 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였다.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람을 괴롭히는 게 가능했다. 환이는 이기적이고 포악했다.
나에게만 관대한 이유는 단지 단순한 흥미와 호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관심과 흥미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특혜를 당연하게 여기지도, 오만하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내가 일본으로 떠난다면 나란 존재는 잊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환이와 선우, 우협에게 나의 사생활을 공유하지 않았다.
난 녀석들과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이다. 나중에 이 관계가 끊긴다면 허전해질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 벽을 만들었다. 나중에 서로 멀어진다 해도 내가 조금 덜 허전할 수 있게, 이 우정 놀이에 흠뻑 취하지 않도록 맘을 단단히 먹었다. 난 녀석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비겁했다.
“어디 갔었어?”
환의 물음에 나는 묵묵히 대답했다.
“화장실.”
난 대답과 동시에 책상에 늘어졌다. 환의 시선이 내 볼에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환은 희미하게 웃었다. 난 환의 웃는 얼굴에 또 한 번 시선을 뺏겼다.
난 5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본능적인 두려움에 따라 연을 끊었어야 했을까? 안타깝게도 난 전혀 그러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외모에 약한 나를 탓해야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환이는 날 꼭 끌어안은 채 코를 비볐다.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못 받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애정 결핍증이 심했다. 그리고 애정 결핍증의 증상은 늘 스킨십으로 나타났다. 표독스러운 평소와 달리 환은 고양이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무거워.”
내가 그러든 말든 환은 내 말은 콧등으로도 안 들었다. 그는 원래 제멋대로였다. 매번 사람들에게 명령이나 하는 위치인데 타인의 말을 제대로 들을 리가 없다. 환은 내 말은 무시한 채 끌어안았다. 그러곤 내 냄새가 좋다며 간지럽게 킁킁거렸다.
“네 냄새가 좋아.”
환이는 잘생긴 것도 모자라서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원래 신체 접촉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환이에게는 면역이 생겨 버렸다.
난 원래 섹스를 제외한 신체 접촉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 칼에 찔릴 뻔한 경험 이후로 사람과의 접촉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근 5년간 끈질긴 환이의 시도 덕에 그의 손길에 완전히 적응되어 버렸다. 그가 나를 끌어안고 부비적거리는 걸 보던 선우 녀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어휴, 징그러운 새끼들. 좋냐?”
난 찬찬히 환이를 쳐다본 채 짧게 대꾸했다.
“예쁘잖아.”
내 말과 동시에 선우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과묵한 우협이조차 살짝 사레가 걸린 듯 기침을 했다.
“어휴, 시발. 이 꼴 안 보려면 얼른 뒈져야지.”
선우의 말에 환이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길에 선우가 이크,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계속 중얼거리는 선우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환이는 웃으며 내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예뻐?”
보통 공주병 걸린 여자애들이나 할 질문이 환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무서운 건 결코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환이는 예쁘다는 말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린다. 나는 그의 얼굴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불현듯, 전에 환이에게 예쁘다고 말했다가 장 파열 당한 놈이 생각났다. 사실 남자치고 예쁘단 말을 듣기 좋아하는 족속은 없다. 계집애에게나 하는 칭찬을 듣는 것이 유쾌할 리가 없다. 수컷들에겐 그저 강하다는 말이 칭찬일 뿐이니까.
환은 유독 다른 사람에게 예쁘다는 류의 칭찬을 들을 경우 가차 없이 이빨을 드러냈다. 어째서 나한테만 유독 관대한 건지는 모를 일이다.
환이는 항상 나에게만 조건 없이 관대했다. 나에게 화내는 일도 거의 없었다. 난 가만히 환의 얼굴을 쳐다봤다. 햇빛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블론드. 해바라기가 피어 있는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조합에서는 금발이 나오기 어려운데, 환은 어린 왕자처럼 찬란한 금발이다. 언뜻 듣기로는 환의 어머니도 토종 한국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 이런 조합이 쉬운 건 아니지. 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응, 예뻐.”
처음 만났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자각 없이, 본능에 따라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기 좋게 코가 꿰어 버린 거겠지. 난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 행동이 코이치랑 다를 게 뭐란 말인가.

***

나는 아까부터 러시아 뉴스만 보는 우협이를 쳐다봤다. 환이와 우협이 사이엔 친구라는 관계에 더한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사촌 지간이라 그런지 둘만이 공유하는 비밀이 있었다. 가끔은 심복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우협이는 환의 말을 잘 들었다.
신기한 조합이었다.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시끄러운 선우와 조용한 우협, 그리고 성질이 더러운 환이.
나는 일부러 녀석들의 관계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일적인 관계가 얽혀 있다는 것만 짐작 가능할 뿐이다. 우정 이전에 재벌 가문끼리의 결탁이 있던 것이 분명하다. 난 그에 대해 알고자 하지 않는 대신, 내 비밀 또한 말하지 않았다. 일본 기업 팬텀사 총수의 아들이자 야쿠자 후계자라는 걸 어떻게 말할까.
녀석들과 내가 다른 점은, 녀석들은 대우를 받았지만 난 감투에 비해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거다. 난 일본에서 사는 것이 지옥과 같았다. 그 높은 담벼락과 모래 정원, 그 지독한 벚꽃조차도 끔찍했다. 항상 자고 깨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니까. 날 낳고 죽은 모친에게 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무작정 한국으로 온 이유는 하나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나는 학교 졸업 전까지만 은신하겠다는 핑계로 일본에서 도망쳤다. 코이치의 도움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한국에 입국했다. 그리고 내 계획은 한국에서 쥐 죽은 듯 제삼자로 지내다가 돌아가는 거였다.
내 계획은 첫날에 환이를 만나면서 일정 부분 망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근 5년간을 일본에서 지내던 것과는 다르게 평온하게 살았다.
그리고 어느덧, 환이의 열아홉 살 생일이 다가왔다. 내가 떠날 날 또한 머지않았다.

***

일본에서 자랐던 유년기, 그 당시 나는 온천욕을 심심찮게 했다. 코이치가 온천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부상으로 인한 고통과 뻐근함을 완화하기 위해 온천을 즐겨 찾는다는 건 나중에 상처를 보고 알았다. 문신과 상처로 코이치의 피부는 성한 곳이 없었다.
나도 그때부터 온천욕을 좋아했다. 기립성 저혈압도 있는 주제에, 나는 탕 속에서의 현기증을 즐겼다. 온천욕을 한 뒤에 머리가 찡해지도록 얼음을 입에 담고 있으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추운 겨울이면 아직도 가끔 사케와 우동과 온천욕이 그립다.
환이 오늘 내게 말했다.
“생일이니까 온천욕 하는 거 어때?”
“온천욕?”
순간 화들짝 놀라서 묻는 나를 보며 환이 대답했다.
“응, 생일파티 겸으로 일본 갈까 하고.”
그건 전적으로 반대야! 나는 당황해서 말도 못 한 채 뻐끔뻐끔 입술만 달싹였다. 마치 호시탐탐 노리는 맹수처럼 환이의 눈동자가 빛났다. 대체 나에 대해 뭐가 그렇게 알고 싶은 건데. 정식으로 귀국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칼 든 야쿠자들이 나인지 모르는 척 달려들어도 이상할 것 없단 말이다.
“그냥 국내로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애써 당황을 숨긴 채 말하자 환이 가만히 쳐다봤다.
“뭐, 알겠어.”
집요하게 굴 줄 알았던 것과 달리 환이는 어쩐지 생각보다 쉽게 한발 물러났다. 물론, 고개를 내 쪽으로 숙이며 장난스런 말은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고집쟁이.”
지긋이 쳐다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오묘하다. 다채롭게 빛나다가도 가운데의 깊은 동공은 꼭 심해와도 같이 어두웠다.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떼어 낸 환이 웃었다. 온천욕은 국내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

“너 운전해 본 적은 있어?”
우협은 미성년자인 주제에 운전석에 앉아 대범하게 핸들을 꺾었다.
“보스턴에서 조금.”
우협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가 못 미더운 표정을 짓자 옆에서 선우가 거들었다.
“얘 생각보다 운전 많이 했어. 걱정 마.”
운전 경험이 많은 게 더 이상하거든?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으려다 관뒀다. 생각해 보니 방학 때마다 외국을 다니면서 차 운전을 했을 것이 뻔하다. 관광 목적인지, 본가 방문 목적인지는 몰라도 녀석들은 외국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
자동차 백미러에 달린 전갈 박제 장식이 흔들렸다.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네. 나는 장식이 시계추 운동을 하는 것을 쳐다보며 시트에 몸을 묻었다.
“아직 춥지도 않구만, 늙은이도 아니고 무슨 온천이야.”
선우가 연신 투덜거렸다. 묵묵히 운전석에 앉은 우협이 내비게이션을 누르고 있었다. 괌 같은 휴양지를 좋아하는 선우는 온천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양옆에 여자 끼고 바다를 갔어야 해!”
스포츠카에 여자나 태웠을 선우의 말은 깡그리 무시되었다.
“그러다 뼈 삭아.”
“꼰대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우협의 타박에 선우가 투덜거렸다. 선우는 차 안이 적막하다고 욕하더니 노래를 틀었다. 취향도 별스러운 선우는 어김없이 괴상한 자메이카 노래를 틀었다. 평범한 고등학생들이 몰기엔 부담스러운 메르세데스는 우협의 손에서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흘끗 옆을 보니 아까부터 말이 없는 환은 창밖만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나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 곧 창에 박힌 환이의 시선과 부딪혔다.
순간 몰려오던 졸음이 화들짝 깼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환이의 눈길이 내 눈에 콕 하니 박혔다. 환은 정확히, 밖이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창에 비친 내 얼빠진 표정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이내 놀란 나를 응시하던 집요한 시선이 떨어졌다. 환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다시 차 시트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두 시간여 끝에 차가 멈춘 곳은 선우 아버지 소유의 한적한 별장이었다. 복층으로 되어 있었고, 2층의 난간은 1층의 테라스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편에는 수영장과 온탕이 구비되어 있었다. 매번 관리인이 관리했는지 정원이 손질되어 있었고 선반에 놓인 체스 말엔 먼지 한 톨 없었다. 우협이는 운전한 것이 피곤한 모양인지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고, 선우는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와인병의 마개를 따고는 축배를 들자며 요란을 떨었다. 내가 도망치듯 방으로 가자 선우가 어디를 가냐며 타박했다.
“귀찮아.”
“놀러 온 거지 요양 온 거냐?”
나는 구시렁거리는 선우를 뒤로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천장의 무늬만 세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나 흡연 타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컥 방문이 열렸다. 깜짝이야.
“뭐야?”
순간 당황해서 입에 문 담배를 떨궜다. 멍한 내 표정을 보며 선우가 사악하게 대꾸했다.
“쥐새끼처럼 숨으면 봐줄 줄 알아?”
어쩐지 위풍당당한 선우의 표정에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그와 동시에 선우가 날 어깨에 들쳐 멨다. 몸이 붕 뜨면서 발밑이 휑해졌다.
“뭐하는 짓이야?”
반항하는 것도 잊고 몸이 뒤집힌 채 묻자 선우는 환하게 웃었다.
“물에 빠뜨리려고.”
채 반응할 새도 없이 나를 쌀 포대처럼 들쳐 멘 선우는 망설임 없이 2층 난간으로 향했다. 설마 했던 생각은 확실했다. 2층 발코니 아래로는 파란 풀장이 대기 중이다. 아, 씨발!
“잠깐만!”
가련한 내 목소리는 선우의 구호에 묻혀 버렸다 하나, 둘, 셋! 반항할 틈도 없이 선우에게 풀려난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어어. 아래로 떨어지면서 환이와 우협의 얼굴이 보였다. 허전한 허공이 제대로 느껴지려는 찰나 머리부터 물에 고꾸라졌다.
풍덩. 차가운 물의 수면이 얼굴에 닿자마자 몸이 바닥을 향해 가라앉았다. 팔과 다리를 휘두르자 물보라가 일었다. 금세 눈과 코로 물이 들어왔다. 2층에서 사람을 던지다니, 이거 살인 미수 아니야? 꾸륵꾸륵 물이 쉴 새 없이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푸핫, 하고는 물 밖으로 튀어나오며 콜록거리자, 선우가 사악한 얼굴로 낄낄거렸다. 축 늘어진 머리칼이 축축하게 얼굴에 달라붙었다. 내가 일어서서 확 째려보자, 난간에서 유쾌하게 웃는 선우의 얼굴이 보였다.
“너 죽을래?”
내가 욕설과 함께 내뱉자 선우는 변명하듯 발코니에 기대며 말했다.
“환이가 해도 된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