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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01
1화
1. 만남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신전 안에는 레미안 제국을 지키는 수호신의 석상이 모셔져 있었다. 달의 여신 레나의 자애로운 미소와는 반대로 한 손에는 활과 화살이, 또 다른 한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전쟁의 여신이기도 한 레나를 섬기는 레미안은 처음엔 작은 변방 국가였지만, 여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천년의 정복 전쟁 동안 광대한 제국을 완성한 것이다.
위로는 거대한 산맥 속에 실버 드래곤의 둥지가 있어 함부로 군대를 몰아 내려올 수 없었다. 북쪽에 살고 있는 용맹한 시베안인들이 드래곤의 소문을 믿지 않고 산맥에 군대를 보냈다가 모조리 몰살을 당한 일이 있었다.
동쪽으로는 엘프의 숲이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가 있어 해로를 개척하고 무역을 하였는데, 그 수입 덕택으로 나라는 더욱 부강해지고 윤택해졌다.
그 레미안 제국의 중심에 수도 브레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레나의 머리결과 같은 백금발을 가진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황제가 사치를 싫어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깊어 레미안의 백성들은 하루하루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또한 황제의 황위를 이을 황태자 또한 황제를 닮아 아름답고 자애로웠다.
힘 있고 젊은 황제는 30을 조금 넘긴 나이였지만 20대 초반의 단아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제에게는 아름다운 황후가 있었지만 황태자를 낳은 후 산후풍으로, 황태자가 아직 아기였을 때 죽고 말았다. 부부금실이 유난히 좋았던 황제가 죽은 황후를 잊지 못해 새로운 황후나 후궁을 들이지 않아서 후사가 조금 불안하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황태자가 하루하루 성장하면서 그런 염려도 잦아들었다.
황태자의 나이, 이제 16세가 되는 해였다.
그날은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황제를 비롯한 황태자와 신료들이 달의 여신 레나의 신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여 있었다. 황제가 레나의 석상 앞에 밀과 보리, 과일들을 정성껏 차려 놓고 기도를 드리던 중이었다. 황제는 기도 중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부드럽지만 짓궂은 시선에 황제는 기도 중이라는 것을 잊고 자신도 모르게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석상의 어깨에 앉아 밝게 웃고 있는 누군가를 본 것은 그때였다.
“레나 님.”
황제가 소스라치게 놀라 레나를 불렀지만, 황제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레나의 모습도 황제의 놀란 모습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단 한 명 황제의 옆에 있는 황태자만이 레나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대와 그대의 아이는 내 모습이 보이는 모양이구나.―
“신의 강림을 목격하다니, 더없는 영광이옵니다.”
황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어느새 황제 앞으로 다가온 레나가 온화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대가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을 보았다.―
“아니옵니다.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겸손하기까지 하구나. 그대의 그런 마음가짐이 마음에 든다. 하여 내가 그대의 소원 하나를 들어줄 생각이다. 무엇을 원하느냐?―
“백성들이 평안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황제의 대답에 레나가 미소를 지었다.
―욕심이 없는 아이구나. 그대가 초심만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걱정할 것도 없을 것이야. 하지만 그대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욕망이 나에게는 보인다. 어떠냐?―
레나의 은근한 물음에 황제의 마음이 흔들렸다.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일지라도 할 수 없는 일. 황제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소원을 레나는 꿰뚫어 본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신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말하거라.―
“죽은 황후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옵니다.”
―정녕 그것이냐?―
“그러하옵니다.”
황제의 소원에 레나가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황제도 너무 무리한 소원을 빈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묵묵히 황제를 바라보던 레나가 입을 열었다.
―황후는 인과율에 따라 이미 이곳과의 인연이 끊어졌다. 그 아이가 그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 아이가 보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황제의 당찬 대답에 레나가 흐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알았다.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그대가 끊어진 인과율을 다시 이으려 했기에 그대와 그대의 아들에게 영향이 미칠 것이다. 그래도?―
아들에게 영향이 간다는 소리에 황제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황후가 남겨 준 단 하나의 분신이었다. 자신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으나 황태자에게까지 나쁜 영향이 가게 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괴롭게 고개를 흔들자, 옆에 있는 황태자가 황제의 손을 잡았다.
“아바마마, 저는 괜찮습니다. 저로 인해 어마마마를 만날 수 있는 소원을 버리지 마십시오.”
“허나 너에게 나쁜 영향이 가게 할 수는 없다. 황후가 너를 어떻게 지켰는지 내 알고 있는데, 너마저 내 곁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다.”
“레나 님께서는 나쁜 영향이라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네 삶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조금이라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기를 원한단다.”
“압니다, 아바마마. 저도 두렵습니다. 하지만 어마마마를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어마마마께서는 저로 인해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제가 아바마마께 해 드릴 수 있는 효는 이것이라 생각됩니다.”
황제가 불안한 눈을 들어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맑은 눈 속에 담긴 진심에 황제는 황태자의 손을 꼭 잡았다.
―소원은 그것이냐? 그대들의 뜻이 그러하니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번 보름달이 떴을 때 황후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곳에 가 보거라.―
레나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순간, 두 사람의 시야에서 어느새 레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황제는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엄숙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것인가?
황제가 고개를 갸웃하며 황태자를 바라보자,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황태자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바마마 보름은 일주일 후입니다.”
***
황후가 잠들어 있는 묘실은 황궁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통 묘실이 성 밖에 있는 것과는 달리 황후 사후 그녀가 쓰던 궁을 그대로 묘실로 만든 것이다.
대신들이 이 의견에 모두 반대하며 기겁했지만 황후를 사랑했던 황제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늘 온화한 황제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며 정색을 했던 것이다.
황후가 죽은 지 15년이 흘렀지만 황후의 방은 그대로였다. 지금이라도 황후가 웃으며 황제를 맞아들일 듯했지만 방 안엔 냉기만 흐를 뿐 사람이 살고 있는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황후의 묘실을 올 때마다 황제는 늘 그것이 안타까웠지만 황제의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늘 조용한 묘실에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두 사람을 수호하는 기사가 둘이었다. 네 사람은 황후의 시신이 들어 있는 석관 앞에서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이제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아바마마. 달이 중천에 걸렸습니다.”
태자의 음성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태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 침착한 겉모습과는 반대로 태자도 긴장하고 있는지 손이 차가웠다. 그 뒤에서 황제의 수호 기사인 가온과 황태자의 수호 기사인 미루가 두 사람을 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중천에 이르자 묘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강렬한 빛에 네 사람의 눈이 동시에 감겼다. 10여 초 동안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묘에서 빛이 사그라지자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묘로 옮겨졌다. 화려하게 조각된 석관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돌아누워 있어 앞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은 남자들처럼 짧았다. 생전 황후는 체격이 작았는데 지금 이자는 길쭉했다. 일어서서 황제와 키를 맞대도 황제와 얼추 비슷하거나 조금 클 것 같았다. 격자무늬로 된 이상한 상의를 입고 검푸른 색의 바지를 입은 남자는 천으로 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남자?”
황제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뒤돌아 누워 있는 모습만 봐도 “전 남자랍니다.”를 연상시키는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설마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황제의 얼굴이 쇼크로 굳어지자 황태자 또한 몸을 주춤했다. 오히려 뒤에 서 있던 두 수호 기사만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남자?”
가온이 재차 성별을 확인하자 황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예상 밖이었다. 황후가 옛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며 짓궂게 웃던 레나의 모습이 떠올라 황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패닉에 빠진 네 사람의 정신을 한순간 되돌린 것은 쓰러져 있던 낯선 남자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신음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아! 머리야.”
두 눈을 깜박이며 정면으로 몸을 획 비튼 청년은 멍한 시선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천장을 향해 있던 시선이 어느 순간 천장을 벗어나 이리저리 옮겨졌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네 쌍의 눈동자에 흠칫 하는 표정을 짓더니 얼른 묘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곱상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었다.
“누구……세요?”
청년이 조심스럽게 말을 흐리자 황제는 또다시 입술을 으득 깨물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황후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레나가 경고한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순 없다. 지금 이 남자를 보니, 이자가 황후의 환생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두 명의 수호 기사가 눈짓을 교환했다. 눈앞의 남자도 그렇지만 황태자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어마마마십니까?”
“예?”
“정녕 어마마마십니까?”
“저, 무언가 오해가…….”
청년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두 눈 속에 황제의 혼란과는 또 다른 기쁨의 빛이 들어 있었다. 황태자는 레나의 경고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황후와의 시간이 지나치게 짧았기에 황후의 예전 모습을 기억할 수 없었다. 황제가 황후의 예전 기억에 청년을 향해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과는 반대로 황태자는 청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만.”
황제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환하게 웃던 황태자와 두 수호 기사들, 그리고 청년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청년에게 다가가려는 황태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자는 네 어머니가 아니다.”
“하지만 아바마마, 레나 님께서…….”
“그만하라고 했지 않느냐.”
황제의 격양된 목소리에 황태자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황제가 황태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미 없는 자식이기에 황태자를 볼 때마다 상냥하고 듬직한 아버지의 모습만 보인 것이다.
“미루, 조슈아를 데려가라.”
“알겠습니다.”
황제의 명령에 미루가 가볍게 예를 취하고 조슈아에게 다가갔다.
“잠깐 기다려, 미루 경. 나는 아바마마와 할 말이 있어.”
“내 말 듣지 못하였느냐?”
“아바마마는 어마마마를 왜 거부하십니까. 어마마마가 생전의 모습이 아닌 남성의 모습이라 그렇습니까? 레나 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정곡을 찔린 황제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미루, 내 말 못 들었느냐?”
황제가 재차 명령을 내리자, 잠시 물러서 있던 미루가 다시 조슈아에게 다가왔다. 미루가 다가오는 모습에 조슈아가 돌연 청년에게 달려가 가는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황태자의 돌발 행동에 미루와 가온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슈아를 못마땅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청년은 자신을 두고 어마마마니 뭐니 하는 통에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솔직히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눈앞의 사람들도 낯설었다. 사람들의 냉랭한 태도에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만 직감할 뿐이었다.
그래도 어마마마라니…… 그건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던가! 무슨 일인지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분위기에 눌려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 자신의 품으로 쏙 들어오는 조슈아를 엉겁결에 안았지만 소년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자의 험악한 시선에 청년은 슬그머니 조슈아를 밀어냈다.
청년이 거부의 손길을 보이자 조슈아는 더욱 꽉 끌어안았다. 조슈아의 행동에 황제의 얼굴이 더욱 굳어지자 청년은 아예 될 대로 되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긴 어디죠?”
청년의 물음에 황제가 고개를 획 들어 청년을 노려보았다.
“그 아이를 놓게.”
황제의 화난 음성에 청년이 두 팔을 슬쩍 펼쳤다. 무언의 항변이었다.
황제는 청년을 향해 이를 으득 갈았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이 사태를 빨리 해결해야 했다. 일단 반항하는 조슈아부터 떼어 놓고, 저자는 당분간 이곳에 감금해 둘 생각이었다. 해결책을 찾기 전까진 누구도 저자의 존재를 알아선 안 된다. 그것이 황제의 생각이었다.
황제가 눈짓으로 조슈아를 가리키자 미루가 빠른 속도로 다가가 황태자의 옆에 섰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미루 경, 그만두…….”
“잠깐 아이에게 무슨 짓이에요?”
세 사람의 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미루가 다가온다고 느낀 순간 조슈아가 있는 힘껏 반항하려 했지만 미루의 동작이 더 빨랐다. 목덜미를 수도로 가격하자 조슈아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지려는 조슈아를 재빨리 잡자, 미루가 청년에게서 조슈아를 빼앗듯 넘겨받았다. 두 사람이 묘실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좇던 황제는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황하고 불쾌했는지 청년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우선…… 그대에게 사과한다.”
“무엇을요?”
느닷없이 황제가 사과를 하자 청년은 불안해졌다.
“내 어리석음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난 내 이름을 걸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이란 게…… 저 때문인가요?”
“그렇다.”
청년의 날카로운 물음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 잠깐만요. 일단 여긴 어디죠? 그리고 누구세요?”
청년은 이들을 처음 본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청년의 질문에도 황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물어보면 안 되나요?”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다.”
황제의 시선이 가온에게 머물렀다.
“지금부터 묘실을 폐쇄하겠다.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가온 네가 책임을 져라.”
“명 받들겠습니다.”
가온이 예를 취하자 황제는 엄격한 눈빛으로 청년에게 경고를 하였다.
“이곳에서 나가지 말기를 바란다. 그대가 다른 사람 눈에 띄게 되면 그대를 보호해 줄 수 없다.”
“이곳에서 전 위험인물인 건가요?”
“그렇다. 해결책을 찾기 전까진 누구도 그대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안 된다.”
황제의 말에 청년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 해결책 빨리 찾길 바랍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1화
1. 만남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신전 안에는 레미안 제국을 지키는 수호신의 석상이 모셔져 있었다. 달의 여신 레나의 자애로운 미소와는 반대로 한 손에는 활과 화살이, 또 다른 한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전쟁의 여신이기도 한 레나를 섬기는 레미안은 처음엔 작은 변방 국가였지만, 여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천년의 정복 전쟁 동안 광대한 제국을 완성한 것이다.
위로는 거대한 산맥 속에 실버 드래곤의 둥지가 있어 함부로 군대를 몰아 내려올 수 없었다. 북쪽에 살고 있는 용맹한 시베안인들이 드래곤의 소문을 믿지 않고 산맥에 군대를 보냈다가 모조리 몰살을 당한 일이 있었다.
동쪽으로는 엘프의 숲이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가 있어 해로를 개척하고 무역을 하였는데, 그 수입 덕택으로 나라는 더욱 부강해지고 윤택해졌다.
그 레미안 제국의 중심에 수도 브레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레나의 머리결과 같은 백금발을 가진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황제가 사치를 싫어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깊어 레미안의 백성들은 하루하루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또한 황제의 황위를 이을 황태자 또한 황제를 닮아 아름답고 자애로웠다.
힘 있고 젊은 황제는 30을 조금 넘긴 나이였지만 20대 초반의 단아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제에게는 아름다운 황후가 있었지만 황태자를 낳은 후 산후풍으로, 황태자가 아직 아기였을 때 죽고 말았다. 부부금실이 유난히 좋았던 황제가 죽은 황후를 잊지 못해 새로운 황후나 후궁을 들이지 않아서 후사가 조금 불안하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황태자가 하루하루 성장하면서 그런 염려도 잦아들었다.
황태자의 나이, 이제 16세가 되는 해였다.
그날은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황제를 비롯한 황태자와 신료들이 달의 여신 레나의 신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여 있었다. 황제가 레나의 석상 앞에 밀과 보리, 과일들을 정성껏 차려 놓고 기도를 드리던 중이었다. 황제는 기도 중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부드럽지만 짓궂은 시선에 황제는 기도 중이라는 것을 잊고 자신도 모르게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석상의 어깨에 앉아 밝게 웃고 있는 누군가를 본 것은 그때였다.
“레나 님.”
황제가 소스라치게 놀라 레나를 불렀지만, 황제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레나의 모습도 황제의 놀란 모습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단 한 명 황제의 옆에 있는 황태자만이 레나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대와 그대의 아이는 내 모습이 보이는 모양이구나.―
“신의 강림을 목격하다니, 더없는 영광이옵니다.”
황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어느새 황제 앞으로 다가온 레나가 온화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대가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을 보았다.―
“아니옵니다.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겸손하기까지 하구나. 그대의 그런 마음가짐이 마음에 든다. 하여 내가 그대의 소원 하나를 들어줄 생각이다. 무엇을 원하느냐?―
“백성들이 평안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황제의 대답에 레나가 미소를 지었다.
―욕심이 없는 아이구나. 그대가 초심만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걱정할 것도 없을 것이야. 하지만 그대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욕망이 나에게는 보인다. 어떠냐?―
레나의 은근한 물음에 황제의 마음이 흔들렸다.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일지라도 할 수 없는 일. 황제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소원을 레나는 꿰뚫어 본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신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말하거라.―
“죽은 황후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옵니다.”
―정녕 그것이냐?―
“그러하옵니다.”
황제의 소원에 레나가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황제도 너무 무리한 소원을 빈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묵묵히 황제를 바라보던 레나가 입을 열었다.
―황후는 인과율에 따라 이미 이곳과의 인연이 끊어졌다. 그 아이가 그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 아이가 보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황제의 당찬 대답에 레나가 흐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알았다.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그대가 끊어진 인과율을 다시 이으려 했기에 그대와 그대의 아들에게 영향이 미칠 것이다. 그래도?―
아들에게 영향이 간다는 소리에 황제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황후가 남겨 준 단 하나의 분신이었다. 자신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으나 황태자에게까지 나쁜 영향이 가게 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괴롭게 고개를 흔들자, 옆에 있는 황태자가 황제의 손을 잡았다.
“아바마마, 저는 괜찮습니다. 저로 인해 어마마마를 만날 수 있는 소원을 버리지 마십시오.”
“허나 너에게 나쁜 영향이 가게 할 수는 없다. 황후가 너를 어떻게 지켰는지 내 알고 있는데, 너마저 내 곁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다.”
“레나 님께서는 나쁜 영향이라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네 삶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조금이라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기를 원한단다.”
“압니다, 아바마마. 저도 두렵습니다. 하지만 어마마마를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어마마마께서는 저로 인해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제가 아바마마께 해 드릴 수 있는 효는 이것이라 생각됩니다.”
황제가 불안한 눈을 들어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맑은 눈 속에 담긴 진심에 황제는 황태자의 손을 꼭 잡았다.
―소원은 그것이냐? 그대들의 뜻이 그러하니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번 보름달이 떴을 때 황후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곳에 가 보거라.―
레나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순간, 두 사람의 시야에서 어느새 레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황제는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엄숙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것인가?
황제가 고개를 갸웃하며 황태자를 바라보자,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황태자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바마마 보름은 일주일 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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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가 잠들어 있는 묘실은 황궁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통 묘실이 성 밖에 있는 것과는 달리 황후 사후 그녀가 쓰던 궁을 그대로 묘실로 만든 것이다.
대신들이 이 의견에 모두 반대하며 기겁했지만 황후를 사랑했던 황제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늘 온화한 황제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며 정색을 했던 것이다.
황후가 죽은 지 15년이 흘렀지만 황후의 방은 그대로였다. 지금이라도 황후가 웃으며 황제를 맞아들일 듯했지만 방 안엔 냉기만 흐를 뿐 사람이 살고 있는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황후의 묘실을 올 때마다 황제는 늘 그것이 안타까웠지만 황제의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늘 조용한 묘실에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두 사람을 수호하는 기사가 둘이었다. 네 사람은 황후의 시신이 들어 있는 석관 앞에서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이제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아바마마. 달이 중천에 걸렸습니다.”
태자의 음성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태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 침착한 겉모습과는 반대로 태자도 긴장하고 있는지 손이 차가웠다. 그 뒤에서 황제의 수호 기사인 가온과 황태자의 수호 기사인 미루가 두 사람을 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중천에 이르자 묘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강렬한 빛에 네 사람의 눈이 동시에 감겼다. 10여 초 동안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묘에서 빛이 사그라지자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묘로 옮겨졌다. 화려하게 조각된 석관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돌아누워 있어 앞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은 남자들처럼 짧았다. 생전 황후는 체격이 작았는데 지금 이자는 길쭉했다. 일어서서 황제와 키를 맞대도 황제와 얼추 비슷하거나 조금 클 것 같았다. 격자무늬로 된 이상한 상의를 입고 검푸른 색의 바지를 입은 남자는 천으로 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남자?”
황제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뒤돌아 누워 있는 모습만 봐도 “전 남자랍니다.”를 연상시키는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설마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황제의 얼굴이 쇼크로 굳어지자 황태자 또한 몸을 주춤했다. 오히려 뒤에 서 있던 두 수호 기사만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남자?”
가온이 재차 성별을 확인하자 황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예상 밖이었다. 황후가 옛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며 짓궂게 웃던 레나의 모습이 떠올라 황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패닉에 빠진 네 사람의 정신을 한순간 되돌린 것은 쓰러져 있던 낯선 남자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신음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아! 머리야.”
두 눈을 깜박이며 정면으로 몸을 획 비튼 청년은 멍한 시선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천장을 향해 있던 시선이 어느 순간 천장을 벗어나 이리저리 옮겨졌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네 쌍의 눈동자에 흠칫 하는 표정을 짓더니 얼른 묘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곱상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었다.
“누구……세요?”
청년이 조심스럽게 말을 흐리자 황제는 또다시 입술을 으득 깨물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황후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레나가 경고한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순 없다. 지금 이 남자를 보니, 이자가 황후의 환생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두 명의 수호 기사가 눈짓을 교환했다. 눈앞의 남자도 그렇지만 황태자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어마마마십니까?”
“예?”
“정녕 어마마마십니까?”
“저, 무언가 오해가…….”
청년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두 눈 속에 황제의 혼란과는 또 다른 기쁨의 빛이 들어 있었다. 황태자는 레나의 경고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황후와의 시간이 지나치게 짧았기에 황후의 예전 모습을 기억할 수 없었다. 황제가 황후의 예전 기억에 청년을 향해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과는 반대로 황태자는 청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만.”
황제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환하게 웃던 황태자와 두 수호 기사들, 그리고 청년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청년에게 다가가려는 황태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자는 네 어머니가 아니다.”
“하지만 아바마마, 레나 님께서…….”
“그만하라고 했지 않느냐.”
황제의 격양된 목소리에 황태자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황제가 황태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미 없는 자식이기에 황태자를 볼 때마다 상냥하고 듬직한 아버지의 모습만 보인 것이다.
“미루, 조슈아를 데려가라.”
“알겠습니다.”
황제의 명령에 미루가 가볍게 예를 취하고 조슈아에게 다가갔다.
“잠깐 기다려, 미루 경. 나는 아바마마와 할 말이 있어.”
“내 말 듣지 못하였느냐?”
“아바마마는 어마마마를 왜 거부하십니까. 어마마마가 생전의 모습이 아닌 남성의 모습이라 그렇습니까? 레나 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정곡을 찔린 황제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미루, 내 말 못 들었느냐?”
황제가 재차 명령을 내리자, 잠시 물러서 있던 미루가 다시 조슈아에게 다가왔다. 미루가 다가오는 모습에 조슈아가 돌연 청년에게 달려가 가는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황태자의 돌발 행동에 미루와 가온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슈아를 못마땅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청년은 자신을 두고 어마마마니 뭐니 하는 통에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솔직히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눈앞의 사람들도 낯설었다. 사람들의 냉랭한 태도에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만 직감할 뿐이었다.
그래도 어마마마라니…… 그건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던가! 무슨 일인지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분위기에 눌려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 자신의 품으로 쏙 들어오는 조슈아를 엉겁결에 안았지만 소년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자의 험악한 시선에 청년은 슬그머니 조슈아를 밀어냈다.
청년이 거부의 손길을 보이자 조슈아는 더욱 꽉 끌어안았다. 조슈아의 행동에 황제의 얼굴이 더욱 굳어지자 청년은 아예 될 대로 되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긴 어디죠?”
청년의 물음에 황제가 고개를 획 들어 청년을 노려보았다.
“그 아이를 놓게.”
황제의 화난 음성에 청년이 두 팔을 슬쩍 펼쳤다. 무언의 항변이었다.
황제는 청년을 향해 이를 으득 갈았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이 사태를 빨리 해결해야 했다. 일단 반항하는 조슈아부터 떼어 놓고, 저자는 당분간 이곳에 감금해 둘 생각이었다. 해결책을 찾기 전까진 누구도 저자의 존재를 알아선 안 된다. 그것이 황제의 생각이었다.
황제가 눈짓으로 조슈아를 가리키자 미루가 빠른 속도로 다가가 황태자의 옆에 섰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미루 경, 그만두…….”
“잠깐 아이에게 무슨 짓이에요?”
세 사람의 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미루가 다가온다고 느낀 순간 조슈아가 있는 힘껏 반항하려 했지만 미루의 동작이 더 빨랐다. 목덜미를 수도로 가격하자 조슈아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지려는 조슈아를 재빨리 잡자, 미루가 청년에게서 조슈아를 빼앗듯 넘겨받았다. 두 사람이 묘실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좇던 황제는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황하고 불쾌했는지 청년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우선…… 그대에게 사과한다.”
“무엇을요?”
느닷없이 황제가 사과를 하자 청년은 불안해졌다.
“내 어리석음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난 내 이름을 걸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이란 게…… 저 때문인가요?”
“그렇다.”
청년의 날카로운 물음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 잠깐만요. 일단 여긴 어디죠? 그리고 누구세요?”
청년은 이들을 처음 본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청년의 질문에도 황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물어보면 안 되나요?”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다.”
황제의 시선이 가온에게 머물렀다.
“지금부터 묘실을 폐쇄하겠다.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가온 네가 책임을 져라.”
“명 받들겠습니다.”
가온이 예를 취하자 황제는 엄격한 눈빛으로 청년에게 경고를 하였다.
“이곳에서 나가지 말기를 바란다. 그대가 다른 사람 눈에 띄게 되면 그대를 보호해 줄 수 없다.”
“이곳에서 전 위험인물인 건가요?”
“그렇다. 해결책을 찾기 전까진 누구도 그대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안 된다.”
황제의 말에 청년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 해결책 빨리 찾길 바랍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