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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가온이 황제가 지시한 뒷수습을 모두 한 후 집무실로 찾아온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일찍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청년을 위로해 주었던 것이다.
묘실에 갇힌 청년을 위해서 특별히 입이 무거운 시녀를 하나 붙여 둔 후 절대 묘실에서 나가지 말라는 말을 하자 청년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그 모습이 괄괄한 황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순해 보였다. 정말 황후님이 환생하신 게 맞을까? 혹시 레나 님이 한 번 더 장난을 치신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가온이 집무실에 들어서자 황제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눈 밑이 검은 걸 보니 밤새 한숨도 못 잔 것 같았다.
“어떻게 됐어?”
“믿을 만한 시녀를 붙였습니다. 묘실은 그녀 이외엔 아무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은…….”
가온이 일부러 뜸을 들이자 황제가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더군다나 갇혀 있어야 하는 이유도 모르니까요.”
“쓸데없는 얘기를 한 건 아니겠지?”
“설마요. 전 그냥 폐하의 명에만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뭐…… 가볍게 묘실을 나가지 않는 게 몸에 이로울 거라는 경고는 해 뒀습니다.”
가온의 처리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분을 왜 거부하신 겁니까?”
황제는 긴 한숨을 쉬었다.
“처음엔 그저 황후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녀가 예전의 모습이 아닐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어. 난…… 머리로만 알았지 정작 마음속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그를 보는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
“남자라서 싫으셨던 겁니까?”
“그를 봐도 황후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황후를 사랑했지만 환생한 모습까지는 아니었다.”
“태자님은 어쩌실 겁니까?”
“만남을 금지시키겠다. 돌아갈 사람에게 정을 줄 필요는 없지.”
황제의 얼굴이 우울하게 변했다.
“그분에겐 언제 가실 겁니까?”
“당분간 가지 않을 생각이다. 또한 황태자와의 만남도 거부하겠다. 가온, 출궁 준비를 해라. 지금 레나 님의 신전으로 가야겠어.”
“정말로 가실 겁니까? 기껏 소원을 들어줬더니 다시 물리려 한다며 레나 님의 불벼락이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가온이 허리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가자 혼자 남은 황제가 또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신전에 간다고 해도 레나 님의 신탁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또한 가온의 말대로 신의 분노를 사서 불벼락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야 한다. 황태자와 그를 위해서.

***

청년은 심란한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넓고 화려했지만 청년에게는 감옥과 같았다. 누구도 청년에게 전후사정을 말해 주지 않았다. 시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다행히 묘실 안에서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가끔 가온이 찾아와 청년을 위로하는 것이 전부였다.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아다니던 청년이 지쳤는지 창틀에 몸을 기댔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 발각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지라 청년은 창밖을 바라볼 때도 조심스러웠다. 장미가 핀 넓은 미로 정원을 바라보던 청년의 눈동자가 한순간 커다랗게 변했다. 정원을 산책하는 황제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황제의 모습은 이곳에 왔을 때 딱 한번 보았지만 백금발 때문에 눈에 띄었다.
청년은 가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언제쯤 그분이 오실까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너무한 거 아닙니까? 내가 죄수도 아니고…… 이유라도 말해 주세요.”
“그것에 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미안해하는 가온의 모습에 청년은 어이가 없었다. 정작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폐하께서도 최선을 다해 답을 찾고 계십니다.”
“폐……하요?”
청년의 눈이 커졌다. 그날 묘실에서 마주쳤을 때는 정신이 없어 그자의 정체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것이다.
한편 가온은 점점 생기를 잃어 가는 청년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무런 죄도 없는 청년이 이곳까지 끌려와 영문도 모른 채 감금을 당했으니 많이 답답할 것이다.
“곧 해답을 찾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하아…… 알겠습니다.”
청년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온에게 대답을 요구해 봤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회피할 것이다. 이 문제의 원인 제공자인 황제가 대화를 거부하니 아랫사람인 가온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가온이 돌아간 후 청년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말 한마디에 목숨이 달아나는 그런 세계로 온 것이다. 좋든 싫든 지금은 그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미칠 듯이 답답하고 불쾌했지만 그자만이 청년의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었다.
황제를 바라보는 청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기다려 주지.
돌아갈 수만 있다면 죽는 시늉까지 해 주겠어.
그러니…… 빨리 답이나 찾아.
청년은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

신전을 나오는 황제의 표정이 어두웠다. 늘 그렇듯 오늘도 레나 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이 훌쩍 지났지만 레나 님은 황제의 부름에 응답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신전의 계단을 내려오는 황제에게 가온이 말을 끌고 다가섰다.
“그만 포기하십시오.”
“겨우 한 달하고?”
“대답을 안 하시는 거 보면 역시…….”
가온이 말끝을 흐리자 황제가 그런 가온을 노려보았다.
“그분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서로 얘기는 해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분은 지금 기다림에 지치셨을 겁니다. 태자 전하도 그렇고요.”
“…….”
“혹시, 새삼 반하면 어쩌나 걱정하신 겁니까? 아, 그거라면…….”
“그 입 다물라!”
“네.”
황제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가온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는 어떻게 지내?”
“잘 지낸다고는 할 수 없지요.”
“건강은 괜찮아 보이던가?”
“겉보기엔 그렇습니다만, 지금 그분은 육체가 아닌 정신적으로 힘들 겁니다.”
가온의 말에 황제는 복잡해졌다. 그를 의도적으로 피했었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참 엉뚱해서 그를 만나게 되면 또 다른 인연을 쌓을까 걱정되었다. 돌려보내기로 결심한 이상 신탁을 들을 때까진 최대한 인연을 쌓는 걸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이다.
“오늘 그를 만나겠다.”
가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교양 있어 보였습니다. 말투도 우아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더군요. 속마음이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속마음?”
“생각해 보십시오. 영문도 모른 채 한 달이 넘게 감금되어 있는데 좋은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속으로는 이런 씹어 먹을 놈, 하고 욕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네 말이 맞다. 욕을 먹어도 싸지.”
묵묵히 말을 몰면서 황제는 묘실에서 본 청년을 떠올려 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봤었기에 그자의 얼굴이나 옷차림 등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밤을 닮은 칠흑 같은 머리카락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나 때문에 이런 곳에 끌려왔다고 증오하고 있겠지?
황제는 애마의 갈기를 가만히 쓸어 주었다. 애마의 까만 갈기가 마치 그자의 머리카락 같았다.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까?
황제는 마치 청년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애마에게 속삭였다.

***

모든 정무를 마치고 궁을 나서는 황제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15년째 어둠에 잠겨 있던 묘실에서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묘실 관리 차원에서 작은 불 하나둘쯤은 늘 켜 두고 있었기에 이상할 것은 없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묘실에서 살고 있는 청년 때문이었다.
황제는 묘실의 육중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황제와 뒤를 따르는 가온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만이 들렸다. 긴 복도를 지나 황후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홀로 황제가 몸을 틀었다. 익숙하게 움직이던 황제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는 시녀와 창밖을 바라보는 청년이 보였다.
황제의 출현에 시녀가 가볍게 몸을 숙이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동안 청년이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청년의 표정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기대감과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제는 곧장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앉지.”
청년은 조용한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보통 황제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주춤거리며 시선을 피하는 것이 정석인데 청년은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오히려 황제가 시선을 회피했다.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까 머릿속으로 조율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죠?”
청년이 먼저 말을 걸자 황제가 그제야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의 이름이 뭐지?”
“이기린입니다.”
“안드레아 미르 레미안이다.”
황제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기린이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궁금하였을 것이다. 그대가 왜 이곳에 있는지.”
“그렇습니다.”
황제의 고뇌에 찬 표정에 기린도 진지해졌다.
“그대는 날 욕할 자격이 있다.”
“예?”
“그대의 의사는 무시한 채 이곳에 강제로 왔으니 그동안 마음이 심란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유를 알려 주시려 이곳에 오신 거죠?”
“그렇다.”
황제는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황후의 이야기와 조슈아의 탄생, 그리고 황후의 죽음과 15년의 세월 동안 황후를 그리워하던 이야기, 그리고 여신 레나에게 소원을 빌어 한 달 반 전에 황후의 후생을 맞이한 것까지 조용한 톤으로 말하였다. 기린 또한 신중하게 황제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그 황후님의 후생이라는 건가요?”
“그렇다.”
기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번엔 황제가 기린의 반응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분명 욕은 아닐지라도 책망의 말은 흘러나올 것이다. 시간이 흐른 후 기린은 고개를 들고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처음 황제의 말을 들으면서 당황하던 시선은 어느새 사라지고 지금은 경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욕한다고 해서 절 어떻게 하는 건 아니죠?”
“물론이다.”
강경하게 나오는 기린의 태도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개자식입니다.”
기린의 입에서 흘러나온 천인공노할 말에 가온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가온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에 찬 검을 조금 빼어 들고 있었다. 황제는 묵묵히 기린의 욕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주먹을 쥔 손이 하얗게 변한 걸 보니 만약 기린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당장 주먹이 날아갔을 것이다.
“전 당신이 사랑했던 황후가 아닙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구요.”
“알고 있다.”
“아무리 영혼이 같아도 당신을 사랑한 기억은 없어요. 내겐 25년 동안의 소중한 기억과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그 알량한 사랑 타령에 억지로 끌려왔다고요.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
“죽은 사람은 추억이 있어서 아름다운 겁니다. 절 보고 황후로 생각하셨습니까? 아니오, 당신은 거부했어요. 판단 착오로 당신 스스로 추억을 망친 겁니다.”
뼈 있는 기린의 말에 황제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했다.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은 눈앞의 기린을 볼 때마다 새롭게 뼈에 새겨졌다.
“참으로 할 말이 없다. 그대의 말이 백번 옳아.”
황제의 참회에 기린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당당한 표정만 지었을 지배자가 이렇게나 약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사죄를 하자 기린의 분노도 점점 사그라졌다.
“대책은 있습니까?”
조금은 누그러진 기린의 음성에 황제 또한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레나 님의 신전에 가서 신탁을 받으려 애쓰고 있다.”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다니…… 기약이 없다는 소리예요?”
“신탁이 내일 내려올 지 1년 후에 내려올 지 10년 후에 내려올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정말 무책임합니다.”
기린의 눈빛이 또다시 날카롭게 변하자 황제는 우울한 얼굴로 의자에게 일어섰다.
“그대에게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약속한다.”
“무엇을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황제가 청명한 눈길로 기린을 바라보았다. 황제와 눈이 마주친 기린은 움찔했다. 조금 전까지 우울해하던 그가 맞나 싶을 정도의 눈빛이었다.
“그대를 반드시 돌려보내 주겠다.”
“정말입니까?”
“그래, 내 이름을 걸고.”
“……기다리겠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그 뒤에서 가온이 그림자처럼 뒤따라 나가자 밖에 있던 시녀가 슬그머니 들어와 뒷정리를 시작했다. 기린은 황제가 사라진 그 문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묘실을 나오며 가온이 황제의 옆으로 다가섰다.
“대단한데요? 설마 진짜로 욕할 줄은 몰랐습니다.”
“큭큭큭.”
황제의 웃음소리에 가온이 의아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무엇입니까? 그 웃음은? 저 불안해집니다.”
“개자식이래. 나보고.”
“아하, 꽤나 충격적이었죠?”
“그 소리를 또 들을 줄은 몰랐는데.”
“또……라면? 그 첫 번째가 황후님입니까?”
“그럼 누구겠어? 나한테 개자식이라고 욕하고 설마 살아남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역시 그분은 황후님의 환생이군요.”
가온이 내심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욕은 먹었지만 하나도 반박할 수 없었지. 눈빛이 살아 있어 다행이군. 어딘가 불편했다면 내 마음도 안 좋았을 것이야.”
황제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묘실을 올려다보았다.

***

“가온 님.”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아름다운 시녀의 부름에 가온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시녀는 목소리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가온의 표정이 한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황태자의 직속 시녀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가온이 시녀의 뒤를 따라 황태자가 기거하는 장미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미궁은 황궁 안에서도 황제의 집무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미래의 황제를 위해 미리 실무를 익혀 두라는 배려이기도 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황태자가 가온을 알아보고 자리를 권했다. 방 안에는 황태자와 그 옆에 서 있던 미루만이 있을 뿐이었다. 시녀를 시켜 차를 내오게 한 황태자는 향긋한 차향이 서서히 퍼지자 비로소 가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늘 일에 바쁘십니다.”
“그렇군요. 요즘 폐하를 통 뵙지 못해서 혹여 옥체가 상하시진 않았는지 걱정이 됩니다.”
요즘 아주 피폐해지셨죠. 특히 정신적으로.
“폐하는 강건하십니다. 전하.”
가온의 속마음과는 다르게 입에서는 전혀 문제없음이라는 말이 술술 흘러 나왔다.
“폐하와 요즘 소원해진 것 같습니다. 가온 경께서도 아시지요?”
“…….”
“해서 폐하와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만, 가온 경께서 전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믿겠습니다. 헌데 가온 경, 그분은 잘 계십니까? 그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아무런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가온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자 황태자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알겠습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었군요. 이만 돌아가 봐도 좋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가온은 인사를 하며 황태자의 집무실을 나섰다.
기린이 무척 보고 싶을 텐데도 황제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황태자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성큼성큼 크게 걸어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간 가온은 창밖을 바라보는 황제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가온의 시선을 느낀 황제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막 한 소리 하려던 가온의 기세가 줄어들었다.
“황태자 전하가 저를 부르셨습니다.”
황태자라는 말에 피곤하고 귀찮아하던 황제의 얼굴이 일순 돌변했다.
“그분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요. 태자 전하를 저대로 놔두실 겁니까?”
“……한 번 만나게 되면 물러서지 않을 거야.”
“황태자 전하가 가엽지 않습니까? 그분과의 만남을 금하실 거면 폐하께서 뜨거운 부정으로 감싸 안으십시오. 부부는 등 돌리면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부모 자식 간은 아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태자 전하는 자신 때문에 황후마마가 붕어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더 클 겁니다.”
가온의 말은 꽤나 건방졌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만나 보시면 어떻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요즘 폐하와의 관계가 소원하다고 저더러 자리 좀 만들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만나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