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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가온의 말에 대답도 없이 묵묵히 앉아 있던 황제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식어 빠져 씁쓸한 맛이 올라오는 차였지만 황제는 무심한 동작으로 찻잔을 들어 마셨다.
“그러고 보니…… 황후의 기일이 얼마 안 남았지?”
“5일 남았습니다.”
“참 웃긴 일이지? 황후의 후생이라는 남자가 눈앞에 있는데 황후의 기일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잖아.”
“어쩔 수 없잖습니까? 그분의 존재는 일급비밀이니까요.”
“알아. 황후의 기일은 지금까지처럼 준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그분은 어쩌시겠습니까? 기일에는 싫어도 묘실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으라는 말을 해 둬야겠지.”
황제가 안락한 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늘어지자 가온이 혀를 끌끌 찼다.
그때 집무실의 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에 황제가 문 쪽으로 돌아보았다.
“누구냐?”
지금까지 가온과 대화하던 우울, 근심, 음산함의 목소리를 싹 바꿔 버리고 황제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어보자 집무실 넘어 늙은 대신이 조심스럽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남부 지방의 서류가 도착하였사옵니다.”
“아, 그래. 들어오시게.”
황제가 재빨리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문이 열리며 늙은 대신이 서류를 들고 들어와 황제에게 공손하게 내밀었다. 미소를 띠며 서류를 받은 황제는 대신이 물러가자 웃고 있던 얼굴을 순식간에 지워 버리고 손안에 든 서류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 장 한 장 차분히 넘기던 황제가 어느 순간 피식 웃어 버렸다.
“레이븐의 영주가 의외로 일을 잘하는군.”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일도 못하면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까 생각했는데, 뭐. 좀 놔둬 보지.”
문서를 읽어 보던 황제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가온도 피식 웃었다. 저 말투는 마음에 든단 말이었다. 처음 레이븐 가문의 장자가 작위를 이으려 2년 전 수도로 올라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황제는 변장을 하고 잠행 중이었는데, 레이븐의 장자와 시비가 붙어 서로 멱살잡이까지 갔던 것이다. 황제가 그 일을 다 기억하고 있으니 레이븐 백작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다만 레이븐 백작은 그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는 레이븐 백작을 못마땅해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좋은 능력을 보여 주고 있어 황제를 흡족하게 했다.
“원래의 세금을 낸 영지가 몇몇 되는군. 흉년인데 어떻게 다 냈을까? 설마 자기 배에서 친히 세금을 각출해 낸 그런 영주는 없을 테고.”
“그런 영주가 있다면 정말 복 받은 영지지요.”
“세금 많이 내면 칭찬해 줘야 하는데 말이야. 난 어째서 그들이 더 미울까? 그놈들 밑에서 착취당할 내 아이들이 불쌍하다.”
“영지는 각 영주의 것입니다. 아무리 폐하라도 참견하시면 그들이 폐하께 등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가온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영지의 주인은 영주들이지만, 영주들의 주인은 나야. 다 내 아이들이지. 제일 하층민인 노예나 농노들까지 모두. 그들이 무너지면 차례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가온, 넌 3천의 백성이 살이 찌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한 사람의 영주가 살이 찌는 것이 좋으냐?”
“이왕이면 3천의 백성이 좋겠는데요.”
“그것이다. 일 못하는 놈 한 놈만 치면 끝나는 일이야.”
“하지만 그들은 귀족이지 않습니까? 고귀한 귀족과 일반 백성들을 비교하는 것은.”
가온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황제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가온을 바라보았다.
“고귀는 무슨. 다 똑같아. 그냥 운이 좋아서 귀족으로 태어난 것뿐이다.”
“그럼 폐하도요?”
“나라고 별수 있겠어? 내가 다른 황제와 다른 게 뭔 줄 알아? 주제 파악을 확실히 하고 있다는 것뿐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잘나서 황제로 태어나고, 그런 권리를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황제의 자리란 건 아주 피곤한 거야. 하나하나 내 아이들을 다 책임져야 하고 보살펴야 하는 거지. 내 아이들이 배곯지는 않는지 춥지는 않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 다 봐야 하는 거다. 내가 혼자서 그걸 못 하니까 중간 놈들을 붙여 둔 건데 그놈들이 그걸 못 하니까 무척 힘들어.”
황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혀를 끌끌 찼다. 가온은 황제의 투정에 빙그레 웃었다.
참 특이한 황제였다. 봉건제도가 굳건한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사람이 한낱 농노를 가리켜 내 아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어디의 황제가 이런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황제의 생각을 누군가가 알았다면 당장 황제의 자리마저 위태로워질 것이다. 귀족들이 합세하여 황제를 폐하고 다른 누군가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이런 특이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백성이 평안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가온은 이내 무언가가 생각난 듯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아 참. 태자님과의 자리는 언제로 잡을까요?”
태자라는 말에 황제의 자신감 넘치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기일 전에는 바쁘겠어. 그 이후로 하자.”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황제의 한숨 소리가 들리자 가온은 조심스럽게 집무실의 문을 닫고 태자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황제는 어두운 밤을 틈타 묘실을 방문했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기린은 황제의 방문에 놀란 눈치였다.
“자려는 걸 방해했나 보군.”
“괜찮습니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
황제는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내일은 황후의 기일이다.”
기일이라는 말에 기린은 실망했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는데 전혀 상관없는 내용인 것이다.
“기일에는 부득이하게 묘실의 문이 열린다. 사람들로 북적이겠지.”
“다른 곳으로 갑니까?”
“아니. 그대가 움직일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대의 존재는 비밀이다.”
“조용히 있으란 얘기군요. 그렇죠?”
“그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기린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황제가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유를 들었을 때는 흥분하여 욕도 했지만 곧 감정을 추슬렀다. 지금도 최대한 냉정하게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황후의 기일이 나에게는 무척 특별한 날이지만 그대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해서 그대가 필요한 것을 한 가지 들어줄 생각이다. 말해 봐라. 어떤 것이 필요하지?”
“……책이 좋겠습니다.”
“책이라. 왜?”
“주위의 소음을 막고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알았다. 가온을 시켜 보내도록 하지. 내일은 힘든 하루가 될 것이니 그만 쉬도록 해라.”
황제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기린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으나 뒤돌아보진 않았다.
기린에게 말한 것처럼 힘든 하루는 황제에게도 해당되는 날이었다. 황제는 피곤한 얼굴로 묘실을 나섰다.
***
묘실은 오랜만에 활기가 넘쳐흘렀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간혹 커다란 웃음소리도 들렸다.
오늘은 황후의 기일이었다. 숙연해야 할 날이었지만 이날만큼은 잔칫날처럼 떠들썩하게 치러졌다. 황후가 자신이 죽은 날 사람들이 울며 엄숙한 분위기를 한다면 죽어서 유령이 된 후 다시 궁을 방문했을 때 몹시 슬퍼할 것이라며, 그날만큼은 잔칫날처럼 지내 달라던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유지를 받들어 황제는 황후의 기일에는 경범죄자들은 간소한 태형을 치른 후 놓아주었다. 중범죄자들과 사형수들조차 이날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이날은 어머니의 날이라고 하여 모든 아이를 낳은 어머니들, 위로는 왕족부터 아래로는 농노까지 축복을 받았다.
황후의 기일은 황제와 황태자가 자리를 같이하여 두 사람의 애틋한 부정과 나라의 안녕을 확인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두 달 만에 만난 황제와 황태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식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주위에 시립해 있던 중앙 귀족들은 긴장한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늘 다정하고 온화한 두 사람이 두 달 동안 한 번의 만남도 없었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지 알아야 했다. 그냥 단순한 변덕으로, 또는 일이 바빠서 함께하지 못했다면 다행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두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며 무언가 알아내기 위해서 눈을 번뜩였다.
귀족들의 시선과는 다르게 황제는 눈앞의 태자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두 달 만이었지만, 그사이 키가 더 크고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황후를 닮아 사파이어를 박은 것 같은 눈동자를 보자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태자의 어깨를 다정하게 짚었다.
황제가 돌연 자신의 어깨를 짚자 태자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늘 보아 왔던 다정한 황제의 모습에 태자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못 본 사이에 더 자랐구나.”
“그렇습니까? 전 잘 모르겠습니다.”
태자가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 자라면 키가 나보다 크겠는데?”
“소자, 아직은 아바마마처럼 되려면 멀었습니다.”
“아니다. 나도 16살 때 키가 많이 커졌지. 태자도 16살이니 빠르면 일 년 길면 2년 후면 아비보다 훨씬 커질 게야. 그 모습을 생각하니 무척 흡족하구나.”
“아직은 키만 큰 어린애일 뿐입니다. 아바마마를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
조슈아의 대답에 황제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황제의 옆에 있는 가온과 미루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헌데 이런 광경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모든 식순이 끝나고 황제가 집무실로 돌아가려 했을 때 황태자가 황제를 잡은 것이다. 조금 전까지 웃음을 머금고 있던 태자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황제는 태자의 얼굴을 보고 용건을 알아챌 수 있었다. 기린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겠지…….
“소자,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이 무엇이냐?”
“어마마마와의 만남을 허락해 주십시오.”
조슈아의 입에서 어마마마란 말이 나오자 황제는 눈썹을 찌푸렸다.
“불허한다.”
“어째서입니까?”
“그는…… 네 어미가 아니다.”
“허면 그분과의 만남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불허한다.”
“아바마마!”
태자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한 채 황제는 뒤돌아섰다.
“어째서 그분을 거부하시는 겁니까?”
“그를 본 순간,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아바마마가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아니…… 내가 틀렸다.”
“한 나라의 황제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 그렇게 배웠습니다. 아바마마는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황제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자 조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제발 간청드립니다. 아바마마.”
“그 청은 들어줄 수 없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실 순 없으십니까?”
“미안하구나, 조슈아. 그는 그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엔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단다. 내 잘못으로 그를 불러들였지만 그도 돌아가길 원하고 있단다.”
황제의 대답에 조슈아는 침묵했다. 그러나 곧 긴장한 얼굴로 황제를 보았다.
“좋습니다. 그분의 세계로 돌아가신다면…… 전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계실 동안만이라도 만남을 허락해 주십시오.”
“불허한다. 조슈아……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하는 네 마음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와 네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야. 넌 그것을 깨닫지 못할 게다. 너는 맹목적인 사랑을 그 사람에게 퍼붓겠지. 정이 들면 들수록 그 사람이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너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부족함이 없는 황태자의 자리를 지켜 왔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기에 지금까지 아무런 집착이 없었지. 하지만 어머니는 다르다. 넌…… 틀림없이 그에게 집착하게 될 것이다.”
황제의 대답에 황태자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사파이어를 박아 넣은 듯한 조슈아의 눈동자에서 일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단지 어마마마가 보고 싶은 것뿐입니다. 집착이라고요? 아바마마는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바마마는 그분을 다시 사랑하게 될까 봐 무서운 겁니다. 전생인 모친보다 더 사랑하게 될까 봐,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닫으신 겁니다.”
“그렇지 않다.”
“아바마마가 레나 님의 신전에 매일 들르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바마마가 그분을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매일 올리겠습니다.”
“…….”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태자는 가볍게 목례를 올리고 뒤돌아섰다. 황태자의 뒤에 물러서 있던 미루가 곧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짧았지만 같은 공간에 있었기에 본의 아니게 기사들에게까지 내용이 다 전달되었다. 꼿꼿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가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그것 보세요. 제가 뭐랬습니까. 진작 황태자 전하를 달래 드렸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좀 심했나?”
황제의 얼굴이 우울하게 변했다. 냉소 짓던 입꼬리가 추욱 처지고 보랏빛 눈동자가 흐려지자 가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황제의 모습은 또 오랜만이었다. 늘 자신감이 넘쳐 오만하던 황제도 자식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자식이 한마디 했다고 상처받은 약해 빠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아들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보기엔 두 분이 서로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한 것 같은데요.”
“…….”
“황태자 전하의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폐하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래도 태자 전하를 생각하셔서, 어느 정도 절충안을 찾으시지요.”
“……피곤하구나.”
“침실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집무실로 간다. 할 일이 태산이다.”
“오늘은 그만 쉬십시오. 포도주 한 잔 가볍게 드시면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심신이 지치고 힘들 땐 잠이 보약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밥이 아니고?”
“저녁 드시고 바로 주무시면 되겠네요. 그럼 밥도 보약, 잠도 보약, 일석이조 아닙니까?”
가온이 싱긋 웃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가온의 충고대로 내 그리해 보지.”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묘실을 나서던 황제가 허리를 쭈욱 폈다. 우울한 분위기를 한껏 내뿜던 몸에서 우아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젊은 시녀들과 부딪힌 것이다. 시녀들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황제는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속은 엉망진창일 텐데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황제가 내심 안타까워서 가온이 혀를 끌끌 찼다. 황제가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정원에 나온 가온은 이내 피식 웃었다.
부전자전이라고 묘실에서 그렇게 황제와 난리를 치던 황태자가 황제와 똑같은 웃음을 띠며 시녀들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
장인의 솜씨가 느껴지는 화려한 침대 위에 깃털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비단 이불이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휘장을 친 안쪽에서 황제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보드랍고 좋은 향기가 나는 이불을 바짝 끌어 올려 코끝까지 덮은 황제는 해가 지려고 하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로 작은 새 몇 마리가 짹짹거리는 것을 보던 황제의 눈동자가 점점 풀려지더니 이내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숙면으로 몸과 정신이 푹 쉬어 피로가 해소된 것은 좋았으나 한 번 잠에서 깬 이후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베개를 끌어안고 억지로 잠을 청해 보려 했지만 쓸데없는 잡생각만 나서 오히려 잠을 이루는 데 방해만 받았다. 이대로 잠을 청해 볼까, 아니면 일어나서 운동이라도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황제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지 몇몇 불빛만 제외하고 성안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온 황제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장미 미로가 있는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던 황제가 차례로 궁을 바라보았다. 대신들이 일하는 궁의 몇몇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자 황제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일하는 기특한 놈들이 누군지 직접 가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난 김에 한번 가 볼까? 황제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린 곳엔 황태자의 장미궁이 있었다. 태자도 잠들었는지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장미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낮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상심이 컸겠지…….”
황제가 태자궁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제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멀리 흐릿한 불빛이 하나 보였다.
“저곳은…….”
방향을 보아하니 묘실이었다. 그도 아직 자지 않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낮에 묘실에서 그렇게 떠들썩하게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흘렀으니 아무리 무심한 자라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엄연히 존재하는 그에게 기척도 내지 말라고 했으니 더 답답할 것이다.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든 황제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침실 문 앞을 지키던 가온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디 가십니까?”
“묘실에.”
“밤이 깊었습니다. 그분도 주무실 겁니다.”
“아니, 불이 켜져 있었다. 포도주 한 병 준비해 주겠나?”
“같이 드실 겁니까?”
“한 잔 마시고 싶구나. 그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더군. 포도주가 숙면에 도움이 되니 그것을 마시고 푹 쉬었으면 한다.”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가온의 두 손엔 황제가 애용하는 포도주 한 병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안주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