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낮의 떠들썩함이 거짓말인 것처럼 묘실 안은 조용했다. 황제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시녀가 얼굴을 내밀었다가 황제의 모습을 보고 얼른 자리를 비켜 주었다.
책을 읽던 기린이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어제도 방문하였기에 오늘도 방문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위문차 오신 건가요?”
“그것은 아니지만…….”
기린이 비꼬자 황제는 그다음 말을 얼버무렸다. 보통은 황제가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데, 기린이 뚱한 얼굴로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 내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아니, 그대의 말이 옳다.”
황제의 뜻밖의 대답에 이번엔 기린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품속에서 가벼운 먹을거리들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뭡니까?”
기린이 음식물들을 보며 의아해하자 황제는 마지막으로 기다란 포도주 병을 꺼내 들었다.
“말 그대로 위문품이다.”
황제의 담담한 말투에 포도주 병을 바라보던 기린이 처음으로 피식 미소를 지었다.
“포도주를 좋아하나?”
기린의 미소에 황제가 흐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포도주보단…… 21도의 소주가 더 좋습니다.”
“소주?”
“제가 있던 곳의 술입니다. 두 달 만에 술을 보니 포도주도 반갑군요.”
황제가 기린의 술잔에 술을 채워 주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가온에게도 권했으나 가온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건배도 하지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한 모금 마셨다. 포도주잔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린이 생긋 웃자 황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술에 얽힌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저…… 예전 일들이 생각나서요.”
기린의 말에 황제는 조용히 자신의 포도주 잔을 바라보았다. 기린의 사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린이 지금 이런 처지가 된 건 모두 황제의 탓이 컸으므로 지금은 그냥 조용히 있는 게 기린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황제는 무료해졌다. 지금까지는 의도적으로 기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앞에 있는 기린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궁금증이 차올랐다.
보통 황제라면 귀족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에겐 경외의 대상이었다. 황제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안절부절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자주 얼굴을 접하는 중앙 귀족이 황제에게 조금 익숙하다면 익숙하달까…….
보통의 사람들은 황제 앞에서 이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헌데 기린은 처음 만나는 날부터 이상하게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치 대등한 존재를 보는 듯한 그런 눈길……. 같은 황제라도 나라의 국력이나 기타 여러 가지에 의해서 위아래가 조금씩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기린은 대단한 국가의 황족이나 왕족에 준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일까?
황제는 포도주 잔을 비우고 병 쪽으로 손을 뻗는 기린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이 세계에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들이 있지. 나 역시 그중 한 명이고, 그대가 살던 세상은 어떤 곳인가?”
포도주 병을 잡으려던 기린의 손이 주춤했다. 황제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의도를 파악하려 함인지 기린의 길쭉한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다. 다른 세계는 어떤 곳인지 궁금했을 뿐이다. 우리와 같은 체제를 가지고 나라를 운영하는지, 아니면 다른 체제를 가지고 운영하는지, 서로 비교해 보면 각기 장단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린이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기린이 미간을 살짝살짝 찌푸리는 것이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같지는 않습니다.”
“허면?”
“제가 살던 곳의 체제를 말할 수는 있지만…… 받아들이시지 못할 겁니다.”
“무슨 말인가?”
이번엔 황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온 님에게 듣기론 폐하가 다스리는 이곳은…… 영주와 그들이 다스리는 영지민들, 그리고 농도 등으로 구분된다고 하였습니다. 맞습니까?”
“그대의 말이 맞다.”
“영주들은 영지 안에서 마치 왕과 같은 행동을 하며 거기서 나온 세금을 폐하께 바칠 겁니다.”
“그렇다.”
왕이라는 말에 황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은 그런 악독한 놈들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다른 제국에서는 여전히 뻔뻔하기 그지없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초야권으로, 영주가 다스리는 땅의 처녀가 시집을 가게 되면 신부의 첫날밤을 신랑이 아닌 영주가 먼저 차지하는 악법이다. 그로 인해 신부와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서 없는 살림에 영주에게 뇌물을 바치는 자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그 초야권의 허락을 해 준 건 그 제국의 황제였지만 말이다. 그런 특별한 권한을 내림으로써 영주의 불만도 잠재우고 충성심도 드높인다는 것인데, 황제는 이런 법을 아직도 악용하고 자랑하는 다른 제국을 경멸스럽게 바라보았다.
어쨌든 영주가 자신의 영지에서 왕처럼 행동한다는 기린의 말은 사실이어서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제국이나 폐하께 무슨 일이 있을 때 영주들은 폐하를 돕기 위해 기사들을 끌고 올 것이고요. 이 모든 게 맞다면…… 전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전 다른 세계에서 왔습니다. 이곳에서 당연한 일도 다른 세상에서 보면 그게 아닌 거죠.”
기린의 말이 끝나자 황제는 침묵을 지켰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즉, 그대의 세상에서 황제는 없는 거로군.”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황제가 없는 세상이라니…….
그런 세상이 가능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황제의 말에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기린의 모습이었다.
“황제가 없는 나라라니, 상상하기가 쉽지 않군. 황제가 없다면 적어도 그에 준하는 자는 있겠지?”
“계속 제 얘기를 들으실 겁니까?”
“물론이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놀라웠다. 하지만 이곳과는 다른 세계니까.”
“더 놀라운 일이 많습니다. 어쩌면 제 말을 들은 걸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황제가 없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뭐지?”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기자 기린은 그런 황제를 유심히 보았다. 처음 황제가 없는 나라의 얘기가 나왔을 때, 그가 분명 불같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었다. 헌데 전혀 그런 반응이 없자 기린은 솔직히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세계가 부정당하는 것만큼 충격적인 일은 없다. 더군다나 그는 만인지상의 황제가 아닌가.
“모르겠군.”
정말로 모르겠다며 황제가 어깨를 으쓱하자 기린은 또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답이 뭐지?”
“……들으실 겁니까?”
“몇 번을 말해야 하나. 들을 거다.”
“정말 후회하지 않으실 거죠?”
“그래.”
황제의 자신 있는 대답에 기린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신분의…… 구분이 없습니다.”
“뭐?”
황제의 입에서 놀람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분의 구분이 없다면 나라는 누가 운영하지?”
“국민들이 직접 지도자를 뽑습니다.”
“그 뽑는 방식은?”
“어린이들을 제외한 성인 남녀 모두가 직접 투표로 뽑습니다. 뽑힌 자는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일하게 됩니다.”
“대리인이라…… 왕과 같은 존재군.”
“조금은 그런 의미가 있죠.”
“그럼 그 대리인은 죽을 때까지 대리를 맡나?”
“아니요. 5년에 한 번 국민들이 다른 대리인을 뽑습니다.”
“어째서?”
“대리인이라고 해도 정권을 잡으면 욕심이 생깁니다. 그것을 경계하고, 또한 대리인이 무능하다면 그것을 바로잡을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5년의 정치로 그 대리인이 무능한지 유능한지 판단할 수는 없지 않나?”
“그 정도면 충분해요. 오히려 5년의 세월이 재앙일 정도의 대리인도 있었으니까요. 만약 그가 죽을 때까지 통치하는 왕이었다면 국민들이 커다란 상처를 받았을 겁니다.”
“재미있군. 황제는 죽을 때까지 통치하는데 말이야.”
“성군이 통치하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몇 십 년 동안 평화롭고 아늑한, 그야말로 국민들의 방패가 되겠지요. 하지만 폭군이 다스린다면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에 걸쳐 쌓아 놓은 모든 것들이 무너질 겁니다. 폐하는 성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린의 말에 황제는 고민에 빠졌다.
“잘 모르겠군.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모든 국민들에게 내 의지가 전해졌는지는 의문이야.”
“그럼 다시 한 번 살펴보세요.”
“그럴 생각이야.”
황제는 기린을 보며 씨익 웃었다. 오늘의 방문은 기린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생각외의 모습을 기린이 보여 주고 있어 꽤나 만족스러웠다. 황제가 흡족한 얼굴로 잔의 포도주를 한 번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밤도 늦었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황제가 일어서서 문 쪽으로 향하다 몸을 빙글 돌려 기린을 보았다.
기린과의 대화는 생각 외로 재미있었고, 유익했다. 그러니 한 가지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그대를 방문한 목적은 위로차였다. 그래서 그대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는데 그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기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소원이라는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더니 이윽고 기린의 입이 열렸다.
“밖에…… 나가 보고 싶습니다.”
“밖에?”
“이곳에 온 지 두 달이 지났지만 방 밖을 나가 보지 못했어요. 남들의 시선이 걱정되시면 한밤중에 정원만 잠깐 산책할게요.”
밖이라는 말에 황제의 눈이 가늘어지자 기린은 급하게 뒷말을 이었다. 혹시나 황제가 성 밖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눈초리가 다시 온화해지자 기린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기린이 이곳에 갇혀 한 번도 땅을 밟아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도 마음대로 받지 못해 창백해진 기린의 안색이 신경이 쓰였다.
“알겠다.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정말이죠?”
“물론이다. 내일 다시 방문하도록 하겠다.”
황제가 확답을 해 주자 기린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맺혔다가 사라졌다.

묘실을 나온 두 사람은 본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조용히 따르던 가온이 발을 멈추자 황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기린 님 말입니다. 위험합니다.”
“무엇이 말이지?”
황제의 의문에 가온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듣는 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가온은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그분의 생각이 위험합니다. 그냥 이론만 아는 자들이 떠들어 대는 것과는 다릅니다. 폐하도 느끼셨을 테지만 그분의 행동은 물에 녹아드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습니다. 만약 그분이 하신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퍼지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그분을 멀리하십시오. 폐하가 태자 전하와 그분의 만남을 금하신 것은 옳은 일이었습니다.”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가온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황제와 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가온의 마음도 잘 알고 있었다. 황제 또한 기린의 존재가 드러나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온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가온,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야 물론 폐하십니다.”
“그게 다야?”
“미사여구도 같이 붙여 드릴까요? 고귀하고 위대하신 달의 여신 레나의 가호를 받는 레미안 제국의 우아하고 온화하고, 아름답지만 현명하신 황제 폐하시며, 백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다른 제국의 황제로부터는 부러움과 질투를 받는 최고의 황제 폐하십니다.”
가온이 입에서 낯 뜨거울 정도의 미사여구가 술술 흘러나왔지만 황제의 표정은 당당하기만 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기억해 두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가온이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자신감이 넘쳐 오만해 보이는 황제의 모습을 보며 가온은 안심했다. 이런 황제가 옆에 있는데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기린의 문제는 황제가 잘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흡족한 얼굴로 가온의 예를 바라보던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내일 관찰자들을 불러. 슬슬 보낼 때가 됐어.”
“알겠습니다.”
가온은 관찰자들을 떠올리고 히죽 웃었다. 황제의 수족과 같은 자들로, 이들은 모든 영지들을 관찰하고 감시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 누구의 소속도 아닌 오로지 황제의 사람들이었다.
나라에서 파견하는 관찰자라는 관리도 존재하였다. 형식적인 것이었지만 영주들이 다스리는 영지들을 돌아보고 황제에게 장계를 올리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공식적으로 영주들의 비호를 받으며 활동하는 것과는 달리 황제의 직속 관찰자는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때문에 두 관찰자의 장계의 내용이 많이 어긋나게 되면 황제는 그것의 책임을 물어 영주들과 관리인 관찰자들을 감사하고, 증거를 찾아내 영주들의 힘을 약하게 하거나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 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의 사람들로, 눈치 없는 자들은 운이 없어서 걸렸다고 생각하지만 일부 눈치 있는 자들은 확신은 못 하고 내심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황제가 또 관찰자들을 풀었으니 몇 달 후, 혹은 1년 후엔 영주의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좌천될 불쌍한 영주들이 생겨날 것이다. 가온은 이번에 희생양이 될 영주가 누가 될지 몹시 궁금해졌다.

***

대전 안에서 황제는 대신들과 굵직굵직한 사건이나 소소한 분쟁에 대한 정무를 시작했다. 황제는 대신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였고, 전에 제기된 답을 내려 주거나 분쟁에 대한 토의를 하느라 대전은 소란스러웠다.
그때 대전의 문이 열리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하멜 백작이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갑작스런 하멜 백작의 등장에 대전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백작에게 집중되었다. 황제가 손짓하여 부르자 백작은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하멜 백작, 이 시간에 그대가 이곳에 온 것은 별로 반갑지 않군.”
황제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농담을 하자 하멜 백작의 굳어진 입가에 웃음기가 감돌았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온화한 말투와는 다르게 황제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사석에서라면 백작의 출현에 반가워했을 테지만 대전 안에서의 만남은 사고가 터졌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파른 제국의 사신, 마아치 백작이 습격을 받아 부상을 당했다 하옵니다.”
“습격?”
“그러하옵니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아치 백작은 파른 제국 내에서도 소문이 좋지 않은 자로, 첫 대면부터 황제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뱀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사한 느낌이 드는 자였다. 그래도 타국의 사신인지라 온화하게 맞아들였지만 여자를 꽤나 밝힌다는 뒷말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를 바꾸곤 하였다.
습격이라는 말에 대신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대체 어떤 자들이 백작을 습격했답니까?”
“파른 제국에서 이의를 제기해 오는 것 아닙니까?”
“타국의 사신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니. 이런……!”
“백작이 습격당한 이유가 있을지 모르잖습니까?”
“글쎄요…… 소문엔 여인을 밝힌다고 하던데. 혹시 여인의 남편한테 그리 당한 건 아닐는지요?”
“가능한 이야기군요.”
“아무리 여인을 밝힌다지만 이곳은 타국인데 설마 그런 행동을 했을 리가요?”
“지 버릇 개 줍니까?”
“어허, 경은 말씀이 지나치세요.”
“혹시 좀도둑이 몰라보고 저지른 일 아닐까요.”
웅성거리는 대신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던 황제는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분명 이들 중 정답을 맞힌 자가 있을 것이다. 대신들의 의견도 들었겠다 이제 본 이야기로 들어갈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황제는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조용!”
황제의 한마디에 웅성거리던 대신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자 황제는 하멜 백작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범인은 잡았나?”
“예.”
“백작의 부상 정도는?”
“어깨에 검상을 입었습니다. 다행히 중상은 아니라 며칠 요양만 잘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흉터는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습격한 자는 누군가?”
“륜이라는 자로, 용병 일을 하던 자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보게.”
“예. 마아치 백작은 필요한 시녀를 뽑기 위해 가던 중 마침 적합해 보이는 여인을 발견하여 그녀에게 시녀로 들어올 것인지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승낙을 하고 그날 밤 저택으로 들어왔는데, 시녀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작에게 위해를 가하였다고 합니다. 백작은 정당방위로 그녀를 처형하였고, 다음 날 그녀의 오빠라는 륜이 찾아와 백작에게 행패를 부리며 검을 휘둘러 백작을 상처 입혔다고 합니다. 륜은 그 자리에 있었던 백작의 호위 기사들에게 잡혀 , 현재 감옥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