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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 소나타 1권
1악장. adagio sostenuto(잔잔하게)
<목차>
1. 환생하다
2. 시작하다
3. 움직이는 마음
4. 라이벌
5. 첫사랑
6. 사막의 왕
7. 관계
/(1)/
1. 환생하다
“아셴, 피해!”
그의 등을 떠밀며 검을 휘둘렀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바닥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황성은 질척하게 변했다. 걸을 때마다 피 웅덩이가 찰박거리고, 코를 감싸 쥐게 만드는 썩은 냄새들이 진동했다.
평소에 동료라고 생각했던 놈들은 모두 적이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서로뿐이었다. 애초에 아무리 아름답다고 말한들, 황성은 황성이다. 야심으로 가득 찬 자들이 드글거리는 곳. 그곳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나는 검으로 땅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가쁜 숨을 뱉을 때마다 가슴이 들썩거렸다. 폐가 욱신거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셴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검을 휘둘러야 한다. 내가 쓰러지면, 우리 모두가 죽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서거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폐하께서 남기신 말을 떠올리며 눈을 꾹 감았다 떴다.
/“1황자를 부탁한다.”(회상)/
그러나 슬슬 한계가 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오기로 밀어붙이고, 도륙했지만 나 혼자서 그를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상대는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니었기에.
“아셴.”
그가 비척거리며 상체를 펴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태양빛과 같은 금발의 끝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살육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던 그이거늘. 그는 맞서기 위해 검을 뽑았으며, 괴로운 얼굴로 적들을 베었다.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당부했다. 아니, 거의 빌었다고 봐야 했다.
“도망가. 빨리, 여기서 달아나!”
그들이 노리는 것은 제1황자인 아셴이었으며, 이미 발걸음 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확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 그것은 느긋하고 여유로웠으며, 마치 맹수의 발걸음을 연상시켰다. 초조함이 일었다.
이미 상당수의 적들을 상대하고 베어낸 나는 당연하게도 지쳐 있었다. 지금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상태에서 아셴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니, 아셴을 신경 쓰기조차 버거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너를 두고 나 혼자 달아나라는 것이냐!”
“제발, 아셴!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싫다! 너를 두고 갈 바에야, 차라리 함께 검을 휘두를 것이야!”
고집스러운 눈동자에 한숨을 삼켰다. 1황자이면서도 나의 친우였기에, 나는 아셴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도망가라 한다 해서, 쉽게 등을 돌릴 것이라 생각지 않았지만. 이건 예상외로 단단한 철옹성이다. 나와 시선을 마주하던 아셴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눈동자는 슬픔에 젖어 있었다.
“내게 치욕을 심어 주지 마라. 너를 버리고 달아나서, 내가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네가 없다면, 그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거늘. 친우를 버리고 혼자 살아남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삶은 없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닦달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육중한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그들은 천천히 한 걸음씩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른한 시선이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낮은 웃음소리가 꼭, 포만감에 젖어 그르릉 소리를 내는 짐승 같았다. 아셴과는 다른 새카만 머리카락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몇 명을 도륙했을까.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베어 버렸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인간이니까.
“달아났을 줄 알았거늘. 무식한 건지, 용기가 가상한 건지.”
제2황자인 베르한이 언젠가는 일을 칠 거라 생각하긴 했었다. 그래서 경계를 한답시고 눈에 불을 켜고 그를 감시했거늘. 감시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셴의 하얀 피부와는 정반대인 구릿빛의 피부가 조명 아래에서 빛이 났다.
천성이 문인인 아셴. 그리고 천성이 무인인 베르한. 형제이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다.
마주 보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싸움이었다. 몇 번이고 부딪치는 칼날이 울었고. 나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자잘한 생채기가 여럿 생기고, 지혈을 해 두었던 뱃가죽에서는 다시금 피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심장을 꿰뚫렸다. 정확히 어떤 얼굴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전신이 검고 검은 자였다. 싸우는 와중에도 로브를 벗지 않았기에, 얼굴을 알아볼 순 없었다. 눈이 감기기 직전, 아셴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 처음으로 그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내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는 그 얼굴에 대고 나는 간신히 미소를 지어 줄 수가 있었다.
울지 마, 아셴.
제왕이 될 자는 쉽게 울어선 안 되는 것이라고, 네가 그랬잖아.
나는 죽기 직전에 그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그저 기억나는 것은 베르한의 웃음소리와 입술을 꾹 깨문 채 슬픔과 화를 억누르려던, 아셴의 모습뿐이었다.
***
희미하게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뭐가 자꾸 이리저리 들러붙는지 뺨이 가려웠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떨쳐내고선 다시 잠에 빠졌다. 아니, 빠지려 했다. 두 눈이 저절로 번쩍 뜨였다. 깜빡 깜빡. 속눈썹이 여닫힐 때마다 까만 밤하늘이 깜빡였다.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가 아니라.
나는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후우, 숨을 내쉬자 내쉬어진다. 눈앞에서 접혔다가 펴졌다가 하는 것은 아마, 내 손이겠지. 폐 속 깊이 들어오는 숲의 향기. 옷자락을 흔들어 놓는 살랑이는 바람. 나는 쉽사리 현실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분명히 죽었을 텐데. 아, 아니. 죽었는데.
심장이 꿰뚫리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억이 뚜렷하기에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감각이 꿈이라고? 아셴의 얼굴이 슬픔으로 점철되던 것이 환상이었다고? 웃기지 마라. 그딴 것이 꿈일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더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선은 확인을 해 봐야 할 것만 같았다.
망설임 없이 풀숲을 가로질렀다. 이 숲은 꽤나 익숙한 곳이었다. 제국, 엘티마스의 황성이 평화롭던 그 시절. 황실 기사단장으로 있었을 때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숲이었다. 꽤나 북쪽에 있는 곳이기에 식물의 모양새가 조금 특이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기후도 꽤 따뜻하고.
아마, 이대로 쭉 나아가다 보면 호수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리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로 호수가 나왔다.
“역시, 북쪽 숲이었군.”
호숫가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상체를 숙여 모습을 비춰 보았다. 언제나 차고 있던 검이 없으니, 허리께가 꽤 허전했다. 나는 그런 허리춤을 매만지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처음에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자, 호수에 비친 그도 눈을 깜빡인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똑같이 갸웃거리는 사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와인빛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자다. 조금은 탁한 청동빛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확실히 예쁘고 아름답지만,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남자는 확실했다. 하지만, 거기에 순전히 감탄을 할 수만은 없었다. 손을 들어 뺨을 쭉 늘려 보았다. 아픔에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게도 수면의 그도 똑같은 포즈로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미친.”
이건 나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저 모르는 얼굴은 나인 것이다.
세상에, 다시 살아난 것도 신기할 지경인데. 이젠 아주 다른 인간이 되어 버렸다. 나는 가슴과 배를 손으로 더듬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검이 있을 리가 없다. 이 인간은 아일 카르스가 아니니까.
그때였다.
크르릉-
숲 속에서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살기를 담은 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등을 돌려 그것과 마주했다. 시뻘건 안광이 숲의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이윽고 그것이 뛰어올랐다. 놀라 시선을 들어보니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달빛에 빛났다.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다. ‘저게 뭐지?’라고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을 굴려 피했다. 허공을 할퀴는 그것은 앞발이었다. 저 빌어먹을 생물. 감히 날 앞발로 후려치려 하다니. 하지만, 땅에 착지함과 동시에 바닥에 생겨난 자국으로 인해 투덜거림은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땅이 파였다. 그것도 앞발 하나에. 아마, 저 발톱에 긁힌다면 살가죽은 그냥 벗겨질 것이다.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에 나와야 할 행동을 나는 취하지 못했다.
“이런, 빌어먹을!”
검이 없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몸에 익은 움직임은 그 사실을 간과해 버린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것을 응시했다. 피로 물든 듯한 새빨간 털들이 짐승의 몸뚱이를 덮고 있었다.
붉은색이라기보다는, 검은색에 가까운 검붉은 눈동자가 번뜩인다. 정확히 사냥감을 보는 눈빛이었다. 라이온도 아니고, 심지어 타이거도 아니다. 하지만, 기이한 짐승이 내뿜는 기백은 맹수들을 뛰어넘고 있었다. 시선에 담긴 것은 오로지 광기뿐. 몸집은 거대하지만, 조금 전의 움직임을 봐선 꽤나 날렵하다는 것도 증명되었다. 한마디로, 낭패였다.
그것은 앞발로 땅을 긁어 댔다. 마치, 곧 달려들 것을 준비하는 것마냥.
초조함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검만, 검만 있었더라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그것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선을 떼고 등을 돌린다면, 저것은 곧장 달려들 것이다. 지능조차 높아 보이는 저 짐승은, 지금 내가 겁을 먹은 것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달아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되살아나자마자 짐승에게 물어 뜯기다니. 그런 기구한 팔자도 또 없겠지.
그르르릉-
목울대를 울리는 소리가 숲 속에 퍼져 나갔다. 도망가야 해.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잠시, 그것은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발돋움으로 인해 땅에 깊게 상처가 나며, 크게 벌린 입 사이로는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타액이 흘러내렸다. 피하지도 못한 채 발이 땅에 묶여 버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그것의 앞발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탕─!
무언가가 그것의 목덜미를 뚫고 지나갔다. 뛰어올랐던 짐승은 덤비지도 못한 채, 땅 위를 굴렀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온몸의 근육을 꿈틀거리며,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저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탕탕탕- 하며, 울리는 소리가 쇄도했다. 은색의 탄환이 그것의 몸을 몇 번이고 꿰뚫었다. 그것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블라임 주제에 꽤나 질기군.”
자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숲의 어둠에 묻힌 실루엣과 그 목소리는, 저자가 사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커먼 무언가가 그의 옆에서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날렵하게 뻗은 등허리가 허공에서 탄력 있게 튀어올랐다. 까만 몸체와 은색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짐승이다.
“숨통을 끊어 버려라, 페트리알.”
숨통을 끊으라고? 이미 저것의 숨통은 끊어진 게 아니었나?
하지만, 곧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몸은 죽은 것마냥 축 늘어져 있지만,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살기 어린 시선이 주위를 훑고 지나갔다. 끈적끈적하게 따라붙는 시선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페트리알이라 불린 짐승이, 그것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곧이어 사나운 안광을 쏟아내던 그것의 눈동자에서 검붉은 무언가가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피는 아니었다. 살아 있는 생물체 같았다. 기생충인가, 하며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타앙─!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히 탄환에 명중된 그것은 치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것마냥, 꿈틀거리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지렁이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액체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실 같은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끼아아아악─”
새된 울음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다. 철판을 긁어내는 것만 같은 소리였다. 두 귀를 꽉 틀어막으며 미간을 접었다. 젠장, 이게 무슨 소리야. 불쾌한 소리. 불쾌한 냄새.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나온 것도 이 정도는 아닐 듯하다. 이윽고 그것이 다 타들어 갔을 때, 소리는 멎었다. 이번에야말로 블라임이라 불린 짐승은 죽어 있었다. 빛을 잃은 눈이 그 증거였다.
휘유, 하며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아, 이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덕분에 살았습니다.”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악수라도 할 겸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척 보기에도 딱딱해 보이는 인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손바닥에 구멍이라도 안 나면 다행이지.
페트리알이라 불린, 검은 짐승은 주인의 곁에 가 서 있었다. 은색의 눈동자는 조금 살벌했다. 블라임이라는 생물체보다도 한 수 위인 듯한 느낌이었다. 강한 기백으로 감싼 몸체에선 기품이 흘렀다. 저건 또 무슨 생물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그가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달빛 아래에서 빛나는 은백색의 총 한 자루. 방금 기이한 짐승을 죽였던 무기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총의 몸체보다도 더 시리고 더 눈부신 은발이 흩날렸다. 시야를 사로잡는 몽환적인 움직임에 넋을 놓았다. 겨울 하늘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이스블루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가라앉은 그 시선은 꼭, 살기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철컥.
서늘할 만큼 차가운 총구가 내 이마에 닿았다.
“죽어라.”
당황스러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만큼 현실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무감정한 시선과 눈을 맞추었다. 방아쇠를 쥔 그의 손엔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서서히 힘을 가하는 그 움직임을 보고 있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장난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진심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황급히 이마에 닿은 총을 잡아챘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다지 아름다운 미소는 아니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래, 반항을 안 할 리가 없지.”
웬일로 곱게 죽어 주나 했더니, 하며 뒷말을 이었다.
그는 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동시에 묵직한 총의 몸체를 빠르게 휘둘렀다. 휘익, 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그 일격을 피하며, 몸을 굴렸다.
“무, 무슨.”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피하지 못했다면 저 총에 두개골이 갈라졌을 테다. 진짜다. 저 인간은 정말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었다. 아니, 왜?!
귓가에선 아직도 그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세게 휘둘렀으면 그런 소리가 날까.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이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어야지!
하지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가차 없이 총구를 다시 들이밀었다. 미동도 없는 시선에 진저리가 날 것만 같았다. 은인이 원수되는 순간이 바로 이런 것일까. 좀 전의 고마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식은땀이 흐르는 턱을 훔치며, 숨을 훅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말했다.
“곧 죽을 녀석이 궁금한 것도 많군.”
너 같으면 안 궁금하겠냐!
하지만, 그 외침은 소용없는 것이기에 그저 속으로 삼켰다. 이런 타입은 말로는 절대 통하지 않는 성격이다. 완고하고 딱딱하고, 융통성이라곤 없고. 하지만, 적어도 죽이는 이유는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냐?
“네 녀석이 죽는 건 당연한 거다.”
그러니 곱게 죽어라, 하며 그가 총을 고쳐 쥐었다. 한 걸음 다가오는 움직임에,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더 이상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막다른 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총이다. 원거리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위력을 발휘하는 것. 그것을 상대로 이렇게 물러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
전쟁터에서 굴러 본 만큼 그 정도 판단력은 있었다. 문제는 아일 카르스가 아닌 이 몸뚱이가 얼마나 버텨 줄지. 그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지금은 검도 없으니. 아,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네.
눈을 데구르륵 굴리다가, 그와 다시금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친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죽어 버려.’
아니, 대체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냐고! 살아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죽을 위기라니. 인생 참. 한숨을 푹 내쉬곤, 구명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우리 언제 만난 적이라도 있었어?!”
솔직히, 만난 적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리 물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서는 총구를 겨눌 뿐이었다. 눈빛에는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동요를 보인다면 파고들 틈이 있겠거늘.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빈틈이 없다. 총을 잡는 법도, 폼도 초짜가 아니었다. 이런 짓을 해 온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실력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바로 내 안위다!
저, 장승 같은 놈을 어찌 구워삶아야 할까. 상대방 얘기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너는 지껄여라, 나는 죽인다 식이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건 정말 하느님 맙소사다. 달리 생각나는 말도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원망을 속으로 삼키고 또 삼켰다. 내가 전생에 업이 꽤 많았나 보다.
내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도 손가락은 서서히 구부려지고 있었다. 총은 정확히 내 심장을 노리고 있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선명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 구부려지는 손가락. 내가 이토록 시력이 좋았던가? 아니, 물론 내가 이 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겠지만, 인간의 시력이 이토록 좋을 리가 없다. 지금은 밤인 데다가 떨어져 있는 거리도 꽤 되거늘.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다른 생각을 할 틈 따위는 없었다.
─탕!!
반짝이는 은색의 탄환이 빠르게 다가왔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무서운 속도였다.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숨을 흡 들이쉬곤, 굳어 버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의 근육이 겨우 꿈틀거리고, 은색의 탄환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어라?”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피한 후였다.
멍청하게 두 눈만 깜빡였다. 방금 무슨 일어났지? 아니, 나 방금 뭐한 거지? 슬쩍 발밑을 내려다보자, 조금 전에 서 있던 자리가 아니었다. 옆을 힐끔 내려다보자, 날아왔던 탄환이 떨어져 있다. 서늘한 느낌에, 몸이 흠칫 떨렸다. 그가 조준을 잘못한 걸까? 아니, 그건 저 인간의 표정을 보건대 절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피했다는 말인데. ……아니, 어떻게?
“쥐새끼마냥 이리저리 잘도 피하는군.”
아니, 내가 피하고 싶어서 피했냐?! 물론, 죽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나는 피한 것도 몰랐단 말이다. 이건 또 다른 의미로 억울해지기 시작한다. 젠장, 내 탓도 아닌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내가 왜 저런 욕까지 먹어 가며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는 건지. 정말, 이건 똥 팔자다. 그래, 똥 팔자라는 말 외에는 표현이 안 된다. 하지만, 그는 끈질겼다. 포기라는 걸 모르는 인간인지, 오기가 생긴 건지 그는 다시금 총구를 들어 올렸다.
나는 다급하게 팔을 들었다.
“자, 잠깐!”
“…….”
하지만, 여전히 무시당했다.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는 철옹성의 인간. 정말, 존경심이 생길 정도다. 이 인간아, 제발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해라!
“죽을 땐 죽더라도, 제발 이유나 알고 죽자!”
1악장. adagio sostenuto(잔잔하게)
<목차>
1. 환생하다
2. 시작하다
3. 움직이는 마음
4. 라이벌
5. 첫사랑
6. 사막의 왕
7. 관계
/(1)/
1. 환생하다
“아셴, 피해!”
그의 등을 떠밀며 검을 휘둘렀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바닥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황성은 질척하게 변했다. 걸을 때마다 피 웅덩이가 찰박거리고, 코를 감싸 쥐게 만드는 썩은 냄새들이 진동했다.
평소에 동료라고 생각했던 놈들은 모두 적이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서로뿐이었다. 애초에 아무리 아름답다고 말한들, 황성은 황성이다. 야심으로 가득 찬 자들이 드글거리는 곳. 그곳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나는 검으로 땅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가쁜 숨을 뱉을 때마다 가슴이 들썩거렸다. 폐가 욱신거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셴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검을 휘둘러야 한다. 내가 쓰러지면, 우리 모두가 죽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서거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폐하께서 남기신 말을 떠올리며 눈을 꾹 감았다 떴다.
/“1황자를 부탁한다.”(회상)/
그러나 슬슬 한계가 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오기로 밀어붙이고, 도륙했지만 나 혼자서 그를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상대는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니었기에.
“아셴.”
그가 비척거리며 상체를 펴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태양빛과 같은 금발의 끝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살육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던 그이거늘. 그는 맞서기 위해 검을 뽑았으며, 괴로운 얼굴로 적들을 베었다.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당부했다. 아니, 거의 빌었다고 봐야 했다.
“도망가. 빨리, 여기서 달아나!”
그들이 노리는 것은 제1황자인 아셴이었으며, 이미 발걸음 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확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 그것은 느긋하고 여유로웠으며, 마치 맹수의 발걸음을 연상시켰다. 초조함이 일었다.
이미 상당수의 적들을 상대하고 베어낸 나는 당연하게도 지쳐 있었다. 지금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상태에서 아셴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니, 아셴을 신경 쓰기조차 버거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너를 두고 나 혼자 달아나라는 것이냐!”
“제발, 아셴!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싫다! 너를 두고 갈 바에야, 차라리 함께 검을 휘두를 것이야!”
고집스러운 눈동자에 한숨을 삼켰다. 1황자이면서도 나의 친우였기에, 나는 아셴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도망가라 한다 해서, 쉽게 등을 돌릴 것이라 생각지 않았지만. 이건 예상외로 단단한 철옹성이다. 나와 시선을 마주하던 아셴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눈동자는 슬픔에 젖어 있었다.
“내게 치욕을 심어 주지 마라. 너를 버리고 달아나서, 내가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네가 없다면, 그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거늘. 친우를 버리고 혼자 살아남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삶은 없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닦달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육중한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그들은 천천히 한 걸음씩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른한 시선이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낮은 웃음소리가 꼭, 포만감에 젖어 그르릉 소리를 내는 짐승 같았다. 아셴과는 다른 새카만 머리카락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몇 명을 도륙했을까.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베어 버렸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인간이니까.
“달아났을 줄 알았거늘. 무식한 건지, 용기가 가상한 건지.”
제2황자인 베르한이 언젠가는 일을 칠 거라 생각하긴 했었다. 그래서 경계를 한답시고 눈에 불을 켜고 그를 감시했거늘. 감시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셴의 하얀 피부와는 정반대인 구릿빛의 피부가 조명 아래에서 빛이 났다.
천성이 문인인 아셴. 그리고 천성이 무인인 베르한. 형제이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다.
마주 보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싸움이었다. 몇 번이고 부딪치는 칼날이 울었고. 나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자잘한 생채기가 여럿 생기고, 지혈을 해 두었던 뱃가죽에서는 다시금 피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심장을 꿰뚫렸다. 정확히 어떤 얼굴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전신이 검고 검은 자였다. 싸우는 와중에도 로브를 벗지 않았기에, 얼굴을 알아볼 순 없었다. 눈이 감기기 직전, 아셴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 처음으로 그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내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는 그 얼굴에 대고 나는 간신히 미소를 지어 줄 수가 있었다.
울지 마, 아셴.
제왕이 될 자는 쉽게 울어선 안 되는 것이라고, 네가 그랬잖아.
나는 죽기 직전에 그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그저 기억나는 것은 베르한의 웃음소리와 입술을 꾹 깨문 채 슬픔과 화를 억누르려던, 아셴의 모습뿐이었다.
***
희미하게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뭐가 자꾸 이리저리 들러붙는지 뺨이 가려웠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떨쳐내고선 다시 잠에 빠졌다. 아니, 빠지려 했다. 두 눈이 저절로 번쩍 뜨였다. 깜빡 깜빡. 속눈썹이 여닫힐 때마다 까만 밤하늘이 깜빡였다.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가 아니라.
나는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후우, 숨을 내쉬자 내쉬어진다. 눈앞에서 접혔다가 펴졌다가 하는 것은 아마, 내 손이겠지. 폐 속 깊이 들어오는 숲의 향기. 옷자락을 흔들어 놓는 살랑이는 바람. 나는 쉽사리 현실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분명히 죽었을 텐데. 아, 아니. 죽었는데.
심장이 꿰뚫리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억이 뚜렷하기에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감각이 꿈이라고? 아셴의 얼굴이 슬픔으로 점철되던 것이 환상이었다고? 웃기지 마라. 그딴 것이 꿈일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더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선은 확인을 해 봐야 할 것만 같았다.
망설임 없이 풀숲을 가로질렀다. 이 숲은 꽤나 익숙한 곳이었다. 제국, 엘티마스의 황성이 평화롭던 그 시절. 황실 기사단장으로 있었을 때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숲이었다. 꽤나 북쪽에 있는 곳이기에 식물의 모양새가 조금 특이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기후도 꽤 따뜻하고.
아마, 이대로 쭉 나아가다 보면 호수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리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로 호수가 나왔다.
“역시, 북쪽 숲이었군.”
호숫가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상체를 숙여 모습을 비춰 보았다. 언제나 차고 있던 검이 없으니, 허리께가 꽤 허전했다. 나는 그런 허리춤을 매만지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처음에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자, 호수에 비친 그도 눈을 깜빡인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똑같이 갸웃거리는 사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와인빛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자다. 조금은 탁한 청동빛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확실히 예쁘고 아름답지만,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남자는 확실했다. 하지만, 거기에 순전히 감탄을 할 수만은 없었다. 손을 들어 뺨을 쭉 늘려 보았다. 아픔에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게도 수면의 그도 똑같은 포즈로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미친.”
이건 나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저 모르는 얼굴은 나인 것이다.
세상에, 다시 살아난 것도 신기할 지경인데. 이젠 아주 다른 인간이 되어 버렸다. 나는 가슴과 배를 손으로 더듬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검이 있을 리가 없다. 이 인간은 아일 카르스가 아니니까.
그때였다.
크르릉-
숲 속에서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살기를 담은 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등을 돌려 그것과 마주했다. 시뻘건 안광이 숲의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이윽고 그것이 뛰어올랐다. 놀라 시선을 들어보니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달빛에 빛났다.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다. ‘저게 뭐지?’라고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을 굴려 피했다. 허공을 할퀴는 그것은 앞발이었다. 저 빌어먹을 생물. 감히 날 앞발로 후려치려 하다니. 하지만, 땅에 착지함과 동시에 바닥에 생겨난 자국으로 인해 투덜거림은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땅이 파였다. 그것도 앞발 하나에. 아마, 저 발톱에 긁힌다면 살가죽은 그냥 벗겨질 것이다.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에 나와야 할 행동을 나는 취하지 못했다.
“이런, 빌어먹을!”
검이 없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몸에 익은 움직임은 그 사실을 간과해 버린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것을 응시했다. 피로 물든 듯한 새빨간 털들이 짐승의 몸뚱이를 덮고 있었다.
붉은색이라기보다는, 검은색에 가까운 검붉은 눈동자가 번뜩인다. 정확히 사냥감을 보는 눈빛이었다. 라이온도 아니고, 심지어 타이거도 아니다. 하지만, 기이한 짐승이 내뿜는 기백은 맹수들을 뛰어넘고 있었다. 시선에 담긴 것은 오로지 광기뿐. 몸집은 거대하지만, 조금 전의 움직임을 봐선 꽤나 날렵하다는 것도 증명되었다. 한마디로, 낭패였다.
그것은 앞발로 땅을 긁어 댔다. 마치, 곧 달려들 것을 준비하는 것마냥.
초조함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검만, 검만 있었더라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그것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선을 떼고 등을 돌린다면, 저것은 곧장 달려들 것이다. 지능조차 높아 보이는 저 짐승은, 지금 내가 겁을 먹은 것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달아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되살아나자마자 짐승에게 물어 뜯기다니. 그런 기구한 팔자도 또 없겠지.
그르르릉-
목울대를 울리는 소리가 숲 속에 퍼져 나갔다. 도망가야 해.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잠시, 그것은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발돋움으로 인해 땅에 깊게 상처가 나며, 크게 벌린 입 사이로는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타액이 흘러내렸다. 피하지도 못한 채 발이 땅에 묶여 버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그것의 앞발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탕─!
무언가가 그것의 목덜미를 뚫고 지나갔다. 뛰어올랐던 짐승은 덤비지도 못한 채, 땅 위를 굴렀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온몸의 근육을 꿈틀거리며,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저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탕탕탕- 하며, 울리는 소리가 쇄도했다. 은색의 탄환이 그것의 몸을 몇 번이고 꿰뚫었다. 그것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블라임 주제에 꽤나 질기군.”
자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숲의 어둠에 묻힌 실루엣과 그 목소리는, 저자가 사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커먼 무언가가 그의 옆에서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날렵하게 뻗은 등허리가 허공에서 탄력 있게 튀어올랐다. 까만 몸체와 은색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짐승이다.
“숨통을 끊어 버려라, 페트리알.”
숨통을 끊으라고? 이미 저것의 숨통은 끊어진 게 아니었나?
하지만, 곧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몸은 죽은 것마냥 축 늘어져 있지만,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살기 어린 시선이 주위를 훑고 지나갔다. 끈적끈적하게 따라붙는 시선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페트리알이라 불린 짐승이, 그것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곧이어 사나운 안광을 쏟아내던 그것의 눈동자에서 검붉은 무언가가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피는 아니었다. 살아 있는 생물체 같았다. 기생충인가, 하며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타앙─!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히 탄환에 명중된 그것은 치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것마냥, 꿈틀거리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지렁이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액체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실 같은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끼아아아악─”
새된 울음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다. 철판을 긁어내는 것만 같은 소리였다. 두 귀를 꽉 틀어막으며 미간을 접었다. 젠장, 이게 무슨 소리야. 불쾌한 소리. 불쾌한 냄새.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나온 것도 이 정도는 아닐 듯하다. 이윽고 그것이 다 타들어 갔을 때, 소리는 멎었다. 이번에야말로 블라임이라 불린 짐승은 죽어 있었다. 빛을 잃은 눈이 그 증거였다.
휘유, 하며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아, 이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덕분에 살았습니다.”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악수라도 할 겸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척 보기에도 딱딱해 보이는 인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손바닥에 구멍이라도 안 나면 다행이지.
페트리알이라 불린, 검은 짐승은 주인의 곁에 가 서 있었다. 은색의 눈동자는 조금 살벌했다. 블라임이라는 생물체보다도 한 수 위인 듯한 느낌이었다. 강한 기백으로 감싼 몸체에선 기품이 흘렀다. 저건 또 무슨 생물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그가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달빛 아래에서 빛나는 은백색의 총 한 자루. 방금 기이한 짐승을 죽였던 무기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총의 몸체보다도 더 시리고 더 눈부신 은발이 흩날렸다. 시야를 사로잡는 몽환적인 움직임에 넋을 놓았다. 겨울 하늘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이스블루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가라앉은 그 시선은 꼭, 살기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철컥.
서늘할 만큼 차가운 총구가 내 이마에 닿았다.
“죽어라.”
당황스러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만큼 현실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무감정한 시선과 눈을 맞추었다. 방아쇠를 쥔 그의 손엔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서서히 힘을 가하는 그 움직임을 보고 있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장난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진심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황급히 이마에 닿은 총을 잡아챘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다지 아름다운 미소는 아니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래, 반항을 안 할 리가 없지.”
웬일로 곱게 죽어 주나 했더니, 하며 뒷말을 이었다.
그는 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동시에 묵직한 총의 몸체를 빠르게 휘둘렀다. 휘익, 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그 일격을 피하며, 몸을 굴렸다.
“무, 무슨.”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피하지 못했다면 저 총에 두개골이 갈라졌을 테다. 진짜다. 저 인간은 정말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었다. 아니, 왜?!
귓가에선 아직도 그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세게 휘둘렀으면 그런 소리가 날까.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이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어야지!
하지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가차 없이 총구를 다시 들이밀었다. 미동도 없는 시선에 진저리가 날 것만 같았다. 은인이 원수되는 순간이 바로 이런 것일까. 좀 전의 고마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식은땀이 흐르는 턱을 훔치며, 숨을 훅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말했다.
“곧 죽을 녀석이 궁금한 것도 많군.”
너 같으면 안 궁금하겠냐!
하지만, 그 외침은 소용없는 것이기에 그저 속으로 삼켰다. 이런 타입은 말로는 절대 통하지 않는 성격이다. 완고하고 딱딱하고, 융통성이라곤 없고. 하지만, 적어도 죽이는 이유는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냐?
“네 녀석이 죽는 건 당연한 거다.”
그러니 곱게 죽어라, 하며 그가 총을 고쳐 쥐었다. 한 걸음 다가오는 움직임에,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더 이상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막다른 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총이다. 원거리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위력을 발휘하는 것. 그것을 상대로 이렇게 물러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
전쟁터에서 굴러 본 만큼 그 정도 판단력은 있었다. 문제는 아일 카르스가 아닌 이 몸뚱이가 얼마나 버텨 줄지. 그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지금은 검도 없으니. 아,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네.
눈을 데구르륵 굴리다가, 그와 다시금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친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죽어 버려.’
아니, 대체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냐고! 살아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죽을 위기라니. 인생 참. 한숨을 푹 내쉬곤, 구명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우리 언제 만난 적이라도 있었어?!”
솔직히, 만난 적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리 물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서는 총구를 겨눌 뿐이었다. 눈빛에는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동요를 보인다면 파고들 틈이 있겠거늘.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빈틈이 없다. 총을 잡는 법도, 폼도 초짜가 아니었다. 이런 짓을 해 온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실력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바로 내 안위다!
저, 장승 같은 놈을 어찌 구워삶아야 할까. 상대방 얘기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너는 지껄여라, 나는 죽인다 식이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건 정말 하느님 맙소사다. 달리 생각나는 말도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원망을 속으로 삼키고 또 삼켰다. 내가 전생에 업이 꽤 많았나 보다.
내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도 손가락은 서서히 구부려지고 있었다. 총은 정확히 내 심장을 노리고 있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선명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 구부려지는 손가락. 내가 이토록 시력이 좋았던가? 아니, 물론 내가 이 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겠지만, 인간의 시력이 이토록 좋을 리가 없다. 지금은 밤인 데다가 떨어져 있는 거리도 꽤 되거늘.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다른 생각을 할 틈 따위는 없었다.
─탕!!
반짝이는 은색의 탄환이 빠르게 다가왔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무서운 속도였다.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숨을 흡 들이쉬곤, 굳어 버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의 근육이 겨우 꿈틀거리고, 은색의 탄환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어라?”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피한 후였다.
멍청하게 두 눈만 깜빡였다. 방금 무슨 일어났지? 아니, 나 방금 뭐한 거지? 슬쩍 발밑을 내려다보자, 조금 전에 서 있던 자리가 아니었다. 옆을 힐끔 내려다보자, 날아왔던 탄환이 떨어져 있다. 서늘한 느낌에, 몸이 흠칫 떨렸다. 그가 조준을 잘못한 걸까? 아니, 그건 저 인간의 표정을 보건대 절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피했다는 말인데. ……아니, 어떻게?
“쥐새끼마냥 이리저리 잘도 피하는군.”
아니, 내가 피하고 싶어서 피했냐?! 물론, 죽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나는 피한 것도 몰랐단 말이다. 이건 또 다른 의미로 억울해지기 시작한다. 젠장, 내 탓도 아닌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내가 왜 저런 욕까지 먹어 가며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는 건지. 정말, 이건 똥 팔자다. 그래, 똥 팔자라는 말 외에는 표현이 안 된다. 하지만, 그는 끈질겼다. 포기라는 걸 모르는 인간인지, 오기가 생긴 건지 그는 다시금 총구를 들어 올렸다.
나는 다급하게 팔을 들었다.
“자, 잠깐!”
“…….”
하지만, 여전히 무시당했다.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는 철옹성의 인간. 정말, 존경심이 생길 정도다. 이 인간아, 제발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해라!
“죽을 땐 죽더라도, 제발 이유나 알고 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