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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외쳤는지 이제는 세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이토록 알고 싶어 하는 이유. 이렇게 그와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 그가 내게 총구를 들이미는 이유. 이유, 이유, 이유. 정말 궁금해서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 뜻이 통한 모양인지, 그가 스르륵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무시나 욕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니까.”
툭 내던지듯 들려온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답을 주긴 준 것 같은데, 확실히 듣기도 들었는데 이해는 가지 않았다. 뱀파이어라는 단어를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왜 뱀파이어가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뱀파이어란, 이 대륙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종족이었다. 남녀노소를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들, 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뻔했다. 인간이 하찮기 때문에. 굳이 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단지, 알고 있는 사실은 그들은 숲 어딘가의 깊숙한 곳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 간혹 온몸의 피를 빨려 죽은 시체가 발견되는 살인사건은 대부분 뱀파이어들의 소행이었다. 인간들의 공포의 대상. 한때, 황실의 명을 받아 기를 쓰고 찾아다녔던 종족. 그것이 뱀파이어였다.
나는 올곧은 그 시선을 바라보며, 얼빵하게 되물었다.
“뱀파이어? 누가?”
“네가.”
“…….”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본 그 또한 미간을 찌푸렸다. 한동안 우리 사이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 서늘한 바람이 웅웅거리며 숲을 맴돌았다.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그는 이미 저도 모르게 총구를 내린 후였다. 우리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그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했고. 그는 나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뱀파이어라고? 내가?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우리는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장난해?”
“피해 갈 생각인가 보군.”
놀랍게도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같았다. 서로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또다시 정적이었다. 그의 옆에 누워 있던 페트리알이 길게 하품을 했다.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일 먼저 정적을 깬 쪽은 나였다.
겨우 입을 연 내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거짓말이지?”
믿을 수가 없다, 라기보다는,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뱀파이어라니. 그는 그런 나를 보며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골치 아픈 것을 보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더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뱀파이어.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며, 본능에만 충실한 잔인한 종족. 그것들에게 살해당한 인간들만 해도 몇이던가. 황실의 명을 받아 그들을 찾아다니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로 인해 언제나 뱀파이어라는 이름에 치를 떨었던 나인데. 그런 내가 뭐라고? 뱀파이어?
눈앞에 손을 펼쳐 보았다. 핏기 없이 새하얀 손바닥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눈이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세뇌를 하듯 그렇게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나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가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진실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뭐, 뭔가 착오가 있는 거다. 그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인간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 한들, 머릿속을 치고 들어오는 증거물들을 부정할 여력은 없었다. 새카만 밤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뚜렷하게 알아보는 눈동자.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빠른 몸놀림과 반사 신경. 내가 아무리 뛰어난 기사였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은색의 탄환이었다.
애써 잊으려 했지만, 나는 그 탄환을 보고 몸을 떨었다. 단순히 죽을 고비를 눈앞에 두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몇 날 며칠을 썩었던 나다. 그보다도 더한 위협을 언제나 맛보아 왔다. 그런 내가 고작, 탄환 하나에 겁을 먹는다고? 말도 안 된다. 그 탄환에 대한 공포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좀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무언가가.
그래, 그것은 뱀파이어를 두렵게 하는 은이라는 존재였다.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너는 뱀파이어다. 그것도 순혈의.”
철컥.
찬바람이 부는 숲 속에서, 또다시 총구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힘겹게 팔을 내리고 고개를 들자,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은 여전히 망설임이 없었다. 은색의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정확히 내게 겨눠진 은백색의 총구에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이내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탄환은 정확히 내 몸을 꿰뚫었고, 나는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
옆구리 언저리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감은 눈 안으로 새카만 어둠이 보였다. 의식은 있는 것 같은데 몸은 손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다. 마치,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모든 감각이 옆구리로 몰리는 것만 같다. 살짝 뒤척이려고만 해도 살을 후벼 파는 통증이 뒤따랐다.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꽉 주고서, 간신히 들어 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것들은 실체가 희미했다. 뻑뻑한 눈가를 몇 번이고 감았다 떴다. 그제야 서서히 사물들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관자놀이를 타고 땀방울이 또르륵 굴러 떨어진다.
잠시 동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새하얀 천장이 보인다.
“젠장, 여긴 또 어디야. 아니, 그전에 내가 왜…….”
으윽, 하는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허리께를 관통하는 통증에 식은땀이 삐질 새어 나온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은탄을 맞은 것 같은데. 그때의 일을 이리저리 회상했지만, 도달하는 결론은 같았다. 그때의 일은 꿈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생각하다 보니 이거 참 억울하다. 자비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놈. 어떻게 불쌍한 내게 동정은 못 베풀망정, 총을 쏠 수 있느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한 건 어째서 내가 죽지 않았냐는 것이다. 혹시, 뱀파이어로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 그래서, 은탄 같은 건 맞아도 별 효력이 없다거나.
거기까지 생각하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생각해도 신빙성 없는 가설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강했더라면, 떨어진 은탄을 보고 놀라지나 말았어야 했다. 나는 숨을 후욱 들이쉬었다. 하지만, 내뱉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제대로 삼키기도 버거웠다.
“아악!”
늑골을 관통하는 뜨거운 통증에, 온몸이 울었다. 나는 숨만 헐떡이며 망연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트며 등이며 땀으로 흥건했다. 늑골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젠장, 숨쉬기도 힘드네.
어느 정도 숨이 진정되었을 무렵, 이불을 살짝 들춰 보았다. 새하얀 뭔가가 눈에 들어온다. 꼼꼼하게 허리를 감싼 그것은, 이리저리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붕대였다. 희미한 소독약의 냄새까지 난다. 이젠 더욱더 현실을 직시하기가 어려워졌다. 대체 이 붕대는 왜 내 몸에 감겨 있는 건지. 누가 주워 와서 치료를 해 준 것인지. 아니면, 혹시 또 환생을 해 버린 건지. 하지만,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낡은 경첩이 삐걱거린다.
“깨어났군.”
말과는 달리 표정은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였다. 기억 속의 차가운 얼굴 그대로다.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얼굴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입을 뻥긋거리며, 그가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그가 들고 있는 쟁반에 담긴 물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그는 가만히 서서 지그시 내려다보기만 했다. 답답함에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은데, 죽어도 입을 열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째서 날 죽이려 한 놈이 여기 있는 걸까. 꼼꼼하게 치료된 것을 보건대 어느 마음씨 좋은 분의 집 같은데. 왜 저 재수 없는 장승까지 있는 거냐고!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내 집이니까.”
“……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뭐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기분이다. 놈은 쟁반을 협탁 위에 내려놓더니,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곤 곧 무자비하게, 그래, 정말 무자비하게! 나를 침대에서 잡아 올렸다. 우악스럽게 붙잡힌 팔도 아프지만, 무리하게 움직인 허리는 더 아팠다. 막을 새도 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야, 아파. 아파!”
내가 비명을 꽥꽥 지르자 그가 힐끔 시선을 맞추어 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자신이 할 일만 묵묵히 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수건을 물에 적셔서 꾸욱 비틀어 짜더니 몸 구석구석을 닦아낸다. 내 몸을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느낌에, 몸을 살짝 굳혔다. 어리둥절했다. 내 몸을 닦아 주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보자마자 총질할 줄 알았거늘.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걸 보니, 뱀파이어는 뱀파이어인 모양이군.”
식은땀이 흘렀던 몸에 시원한 수건이 닿자, 몸이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내게 왜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인지. 어째서 그의 집에 있는 것인지. 나는…… 죽었던 게 아니었는지.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원래 뱀파이어는 은탄을 맞아도 살 수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겠지만, 달리 물을 말도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살아 있을 리도 없고, 그와 이렇게 마주 보고 있을 이유도 없다. 나의 중얼거림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무슨 소리냐, 하고 묻는 표정이었다.
“살 수는 있겠지. 본 적은 없지만.”
본 적은 없다니. 그럼, 대부분 죽는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대체 산다는 거야, 죽는다는 거야. 미간을 팍 찌푸리며 톡 쏘듯 대꾸했다.
“하지만, 난 살아 있는데?”
“뱀파이어에게 은은 치명적이다. 은가루만 몸에 닿아도 그 부위는 타들어 가.”
아니, 그러니까 이봐요. 난 살아 있다니까! 타지도 않았잖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허리를 보았다. 붕대가 감겨 있는 부근은 이미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어 있는 듯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탄 게 아니다. 이 화끈거리는 통증은 내게도 익숙했다. 전쟁터에서 몸을 다치는 것이 예사였던 내가 그걸 모를까. 그런 내 의문에 답을 던져 주듯, 그가 말했다.
“네가 맞은 건 은탄이 아니야.”
이내 다 닦은 수건을 그가 던졌다.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수건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하지만, 역시 총을 다루는 자는 달랐다. 조준력이 굉장히 좋았다. 분명히 뒤도 안 돌아보고 휙 던졌는데 저게 바구니 안에 정확하게 들어가다니.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다시 기분이 싱숭생숭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놈이 정말로 내 심장을 노렸더라면, 백 퍼센트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허리에 상처를 입었다. 어째서일까.
“은탄이 아니라고?”
“그래. 게다가 실탄도 아니지.”
그럼, 대체 뭘 맞았다는 걸까. 나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맞은 건 마취탄이었다. 시끄러운 생물을 잠들게 하기에는 최고거든.”
“마취탄?”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겨우 이해가 갔다. 어찌하여 죽지 않은 것인지. 하지만, 의문은 또 하나 남아 있었다. 어째서 마취탄을 쏜 걸까. 그렇게 냉정한 태도로 가차 없이 죽이려 했으면서.
“널 죽이는 건 보류하기로 했다. 보아하니,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것도 막 알게 된 모양이니까.”
“그, 그럼!”
나, 살려 주는 거야?! 환희와도 같은 희망이 머리를 스쳤다. 고맙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어깨를 두드려 줄까 하며 별 상상을 다 했다. 하지만, 내가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었다. 그가 쟁반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그 시선은 나를 비웃고 있었다. 착각하지 말라는 듯.
“넌 앞으로 내가 감시하겠다.”
“감시한다고?”
지금의 내 몸에 피가 있을 린 없겠지만. 만약 있다면, 차갑게 식는 기분일 것이다. 안 그래도 차가운 손끝이 더욱 차게 어는 듯했다. 날 감시하겠다니. 그의 눈에 가득 들어찬 불신의 눈초리가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사냥감이라 말하는 것만 같았다. 무어라 반박하려던 찰나, 그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살아라. 혹시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시선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혹시라도, 뱀파이어처럼 행동하게 된다면, 그는 날 가차 없이 죽여 버릴 것이다. 그때의 그 은백색의 총구가 다시 내 심장을 향하게 될 것이다.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이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마냥, 머물 곳이 생겼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감시라니!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던, 내게 그런 숨 막히는 처사라니! 내가 그런 생활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견디고 뭐고 하기 전에, 억울했다. 태어나서 지금만큼 억울한 적이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뱀파이어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정신만은 인간이다. 전생의 삶이 머릿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거늘. 아일 카르스의 삶이 각인처럼 몸에 새겨져 있거늘. 나는 인간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이란 말이다. 그 사실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빽 외쳤다.
“난, 죽어도 인간의 피는 마시지 않아!”
그것은 호소라고 봐도 좋았다. 나는 인간이라고. 자신에게 거는 세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릴 뿐. 내게서 등을 돌렸다.
문을 닫기 전, 그가 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심장을 갈가리 찢기엔 충분했다. 입가에 걸린 조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글쎄.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낡은 경첩이 울며, 문이 닫혔다. 황망한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남긴 비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홧김에 옆에 있던 베개를 냅다 던졌다. 하지만, 맞아야 할 인간이 없었기에 베개는 그저 문을 한 번 때리는 것으로 말았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허리에 다시 통증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툭 떨어지는 하얀 베개를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자식. 뭐, 두고 볼 일이라고? 그 말은 꼭, 내가 반드시 피를 먹게 될 거라는 확신처럼 들려왔다. 그 두 눈에 들어찬 비웃음에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두고 봐. 난 절대 마시지 않아! 인간의 피 같은 거 안 마신다고!”
죽기 전까지만 해도,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인간이었다. 인간으로서 살아왔고, 인간으로서 행동해 왔다. 그런 내가 인간의 피를 마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죽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죽어도!
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아래에 깔린 침대 시트에 굵은 주름이 생겼다. 피 같은 거 마실까 보냐. 이렇게 되면 이젠 오기가 생길 지경이다. 저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도. 저 인간이 나를 다시 보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나는 피를 마시지 않을 거다. 언제까지고 인간, 아일 카르스로 살아갈 거란 말이다.
깨문 입술이 바르르 떨려 왔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찍힌 입술이 살짝 찢어졌다. 하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것은 지극히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혀가 바짝 굳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물을 마신다고 해결될 갈증이 아니었다.
침대에 얼굴을 박은 채, 주먹을 몇 번이고 내려쳤다. 빌어먹을. 젠장. 나는 인간이야. 나는 인간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한들,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침대시트를 꽉 그러쥐었다. 왜 하필 이런 몸으로 환생한 것일까. 왜 하필 뱀파이어가 된 거냐고!
“젠장─!”
그날 저녁.
상처가 완전히 아물어 버린 나는 방을 나왔다. 방문을 닫고서 주위를 둘러보자, 사방이 어두웠다. 새카만 어둠에 잠긴 복도에는 등불 하나 없었다.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으며 복도를 밟기 시작했다. 복도는 꽤나 길었다. 내가 누워 있던 방이 상당히 넓었기 때문에, 설마설마했지만 이렇게 넓은 저택일 줄이야.
문득, 그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우선 평민은 아닐 테고, 귀족이라는 것은 정답인데. 그는 어째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데리고 다니는 짐승도 조금 독특한 것 같고. 블라임이라는 생물을 죽일 때의 모습은, 확실히 노련해 보였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귀족치고는, 위험한 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하다.
발을 움직여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갔다. 1층 식당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뱀파이어도 피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니었는지. 음식 냄새를 맡으니 배에서 금방 신호가 왔다. 뭐, 저걸 먹는다고 해도 갈증이 사라질 것 같진 않지만. 우선은 기력 회복 셈치고 한 번 내려가 봐야겠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긴 식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방은 벽 대신 큰 창문들이 자리한 채였다. 여전히 불을 켜지 않았기에 이곳 또한 어두웠다. 달빛이 비추는 틈으로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옆의 의자를 빼고 앉았다.
“너, 혼자 먹냐?”
“벌써 다 나았나 보군. 역시, 순혈은 달라.”
그의 빈정거림에 마음이 팍 상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애초에 뱀파이어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게 겪어 놓고서 모른다면, 신경에 이상이 있는 거겠지. 저런 인간에게 흥분해 봤자 나만 손해인 거다.
그는 스프가 담긴 접시를 나의 앞에 놓아 주었다. 식탁에는 고소한 빵과 버터가 중앙에 놓여 있었고, 갓 구워낸 것인지 노릇노릇하게 익은 칠면조가 부드러운 육질에 기름을 흘리며 자리하고 있었다. 배에서 절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우선 입가심으로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상큼한 소스가 입안 가득 퍼졌다. 먹을 게 입안에 들어오자, 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샐러드는 싱싱했다. 나는 문득 그에게 물었다.
“이거, 네가 다 한 거냐?”
“혼자 살다 보면, 절로 하게 되는 법이지.”
무심한 대꾸였지만, 솔직히 놀랐다.
황성에 비해서는 작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저택이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 살다니. 저택이 어둡고 고요한 것에는 이유가 있는 걸까.
“하인이나 지배인 같은 사람도 없는 거야?”
나는 힐끔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는 페트리알이 길게 누워, 고기를 뜯고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살점을 파고들어 무자비하게 뜯어냈다. 핏물을 뚝뚝 흘리는 고기는 아무런 손질도 되어 있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페트리알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눈을 번뜩이며 고기를 뜯는데, 마치 나를 물어뜯는 것만 같았다. 뒷골이 섬뜩해진다.
“페트리알.”
그의 목소리에 그제야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진득하게 들러붙었던 시선은 마치, 다음 사냥감은 너다, 라고 말하는 듯해서 찜찜하던 차였다. 저런 짐승을 용케도 길들였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는 페트리알과 나 외에는 아무도 없어.”
“어, 어째서?”
그가 잠시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나의 시선과 똑바로 마주했다.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시선 끝에는 많은 것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확히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시선이 점차 불편해질 즈음 그의 입이 열렸다.
“다 죽었거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끝을 이었다.
“─뱀파이어에게.”
놀란 나의 눈을 보며, 그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릎 위에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제야 그가 왜 뱀파이어들에게 그렇게나 짙은 적의를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보자마자 죽으라 말했던 것도, 내게 총구를 들이밀었던 것도 모조리 이해가 간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뱀파이어다. 내가 아무리 부정한다 한들, 내 육체가 뱀파이어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놀란 눈 할 필요 없어.”
그는 칠면조 다리를 뜯다가 내려놓았다. 그러곤 곧장 페트리알에게 그것을 던져 주었다. 페트리알이 정확하게 그것을 받아 문다. 냅킨에 손을 닦으며, 그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어차피 너랑은 관련이 없는 일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나는 말없이 입만 달싹거렸다. 죽었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그 눈빛이 너무 무심해서, 오히려 더욱 슬펐다. 그는 그 슬픔에 익숙해지기까지 얼마나 자신을 혹사시켜 온 걸까.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또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뱀파이어가 내 앞에서 그런 얼굴을 하면, 적응이 안 되거든.”
와인 글라스를 빙그르르 돌리며, 턱을 괸다.
“역겨워서.”
몸이 흠칫 떨렸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의 모든 감정이 뼛속 깊이 전해져 왔다. 뱀파이어를 향한 깊고 깊은 분노. 그리고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는 저주와도 같은 심정.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떨리는 숨을 목 안으로 애써 집어삼켰다. 하지만, 의외로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였다.
붉은 와인 한 모금을 목 안으로 삼키며, 입을 연다. 그 느긋한 움직임에 지금까지 들은 말들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다시금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얼음 같은 눈동자는 여전히 차가웠다. 티끌만 한 감정조차 담기지 않는다.
“내 이름은 제힐 폰 시리에스. 그쪽은?”
아주 잠깐이지만 망설였다. 나의 이름. 소중한 사람들에게 수없이 불렸던, 그 이름 하나에 깃든 길고 긴 시간들. 나는 이 이름을 사용해도 되는 거겠지.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아일 카르스니까.
이 육체의 주인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의 몸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 육체를 가지고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세계에서의 삶이 또다시 한 번 주어진 것이었다. 천천히 입을 열어 그 이름을 내뱉었다.
“……아일 카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