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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힐이 고개를 짧게 한 번 끄덕였다.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서자, 의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렸다. 그 소리를 들은 페트리알 또한 허리를 일으킨다. 이미 식사를 끝낸 짐승의 입가는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힐끔 쳐다보자, 이번엔 그저 흘끗 바라보기만 할 뿐, 곧 시선을 돌려 버린다. 도대체 저 짐승은 무엇일까. 성인 남성의 허리까지 오는 큰 몸집과 오한이 들 정도의 살벌함. 아무리 봐도 애완용은 아니다.
제힐이 입가를 닦은 냅킨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 먹으면, 내 방으로 와라. 할 얘기가 있어.”
둘은 조용히 식당을 나갔다. 제힐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는 페트리알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먹긴 먹어야 하는데. 이게 제대로 목 안으로 넘어갈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본인의 입으로 들으니 꽤 충격적이다.
“하아아.”
한숨을 길게 늘어뜨리며, 포크를 집었다. 잘 발린 고기 살을 야금야금 뜯어 먹고, 식어 버린 스프를 휘익 한 번 휘저었다. 하지만, 이내 찔끔찔끔 먹어 대던 걸 멈추고 식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어차피 인간이 아니니, 밥 좀 안 먹는다고 죽는 건 아닐 테다. 단지, 음식을 보고 있자니 더 큰 걸 갈망하게 되는 것이 문제였다.
본능적으로 혀를 굴리며, 송곳니를 톡톡 두드렸다. 타는 듯한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집 안에 아무도 없으면 이건 누가 정리하는 거지. 버리는 건가? 힐끔힐끔 시선을 던지며, 뺨을 긁적였다. 그놈도 그냥 가 버렸는데, 내가 치울 필요는 없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등을 돌렸다. 뭐, 알아서 하겠지.
식당에서 나왔을 때에는 어둠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음습한 복도의 계단을 밟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달을 둘러싼 구름은 조금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채 걷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계단을 다 올라온 후였다.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고 복도를 걸었다. 놈은 내게 자신의 방 위치를 알려 주지 않았지만, 솔직히 찾는 건 쉬웠다. 그런 종류의 인간이 어떤 방을 쓸지는 뻔했기 때문에.
나는 2층 복도의 가장 끝에 있는 문 앞에 섰다. 탁한 금빛의 문고리는 차가웠다. 문고리를 돌리자 끼익 하며 경첩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았는지 그 소리는 상당히 괴로운 신음성이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문을 조금 빨리 닫았다. 쾅 하고 약간은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어깨를 움찔거린 건 나뿐이었다. 제힐은 고개를 들어 시선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군말 없이 앉자, 그 또한 맞은편에 앉는다. 방 안은 깔끔하다기보다 삭막하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필요한 가구 외에는 일절 찾아볼 수도 없었다. 책꽂이에는 무수한 책들이 꽂혀 있었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눈이 가는 것이 없었다. 넓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손님을 맞기 위함인 듯한 테이블과 소파가 전부였다.
“잘 찾아왔군.”
의외라는 듯한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쯤이야 쉽지.
“너 같은 타입이 좋아하는 위치는 잘 알고 있거든. 복도의 맨 끝. 은밀하면서도 타인과의 접촉이 차단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하지. 하지만, 풍경만큼은 그 어느 방보다 아름다워. 맨 끝이다 보니, 옆에는 그 어떠한 방도 없으니까 정경이 탁 트이거든.”
내 말이 맞지?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피식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왠지 무시당하는 기분에 울컥했지만,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저 인간이랑 무슨 대화를 하겠어. 제힐 같은 타입은 전생에서 겪어 보았다.
나의 친우인 ‘테이 아셴 론 엘티미리온’도 그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며, 타인과의 벽을 쉽사리 허물지 않는 타입. 물론, 나와는 친구 관계였기 때문에 그런 면을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둘을 보게 된다면,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테이’라는 세례명에 맞는 성격이라며, 코웃음을 쳤던 게 몇 번이던가. ‘테이’라는 말의 뜻은 고요하다, 적막하다는 의미가 있다. 내가 그걸 거론할 때마다 그는 머쓱하게 웃었지만 솔직히 그 세례명 때문에 애 성격이 저 지경이 된 게 아닌가, 하고 난 생각하곤 했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제힐이 대뜸 물었다.
“정체가 뭐지?”
뜬금없이 웬 정체.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별 감흥 없이 답했다.
거참 새삼스럽게.
“정체라니? 네가 알다시피 난 뱀파이어야. 할 얘기라는 게 이건가?”
나의 말에 제힐이 고개를 저었다.
눈빛이 너무 진지했기에, 나 또한 자세를 바로하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집요한 시선이 내게 달라붙었다.
“내가 묻는 건 그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말하는 거다. 할 얘기는 우선 네 정체를 안 다음이다.”
알맹이.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는 솔직히, 나도 알 수가 없다. 그저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날카로운 시선은 어느새 확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대체 뭘 확신하는 걸까. 곧, 그는 더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일 카르스. 이 이름을 모르는 이는 드물지.”
어깨가 흠칫 굳었다. 하지만, 지레 놀라 버린 내 모습에 더 뜨끔하고 말았다. 젠장, 이건 맞는다고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혹시나 해서 물었던 것인데, 정말인 모양이군. 정말, 그 아일 카르스인가? 동명이인이 아닌?”
더 속일 것도 없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탓하겠는가. 생각이 없었던 날 탓해야지. 좀 더 깊게 생각해 보지 않고, ‘아일 카르스’라고 이름을 대었던 내 잘못이다. 문득 아셴이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친다.
/“아일. 넌 네 위치에 대한 자각이 너무 없어.”(회상)/
지금, 그 말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했다. 나는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황실 기사단장이었고, 내 이름은 널리널리 퍼져서, 무용극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난 영웅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자각이 너무도 없었다. 그래, 아셴의 말처럼 내가 유명인이라는 느낌이 그다지 들지 않았다. 제힐이라고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거늘. 더군다나 귀족인 이상에야, 그 이름을 모를까. 내 불찰이었다.
제힐의 놀란 눈을 보며, 시선을 애매하게 굴렸다. 정확히는 신기한 것을 보는 눈이었지만 이거나 저거나 불편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대체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건지. 내가 아일 카르스라는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놀랍군.”
그의 입에서 나온 단 한마디였다. 하긴. 아일 카르스는 현재 망자가 되어 있을 테니 신기하긴 하겠지. 하지만, 제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죽은 지 1년 만에 환생하는 것이 가능한 건가.”
뭐, 몇 년?
빠르게 시선을 돌렸지만,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타인의 몸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정말 그 육체를 가지고 새로 태어난 것일 텐데.”
정말이지, 놀랍군, 하며 그가 말을 맺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건 나였다. 내가 죽은 지 고작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이곳이 엘티마스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몇 십 년은 흐른 줄 알았다. 아니, 몇 십 년 흐른 거면 다행이지. 아주 세대가 바뀌었을 줄 알았거늘. 내가 짐작을 정확히 하지 못했던 것은 이 육체 덕분이기도 했다.
뱀파이어는 누군가의 배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 또한 어린아이에서 시작되진 않는다. 육체는 그야말로 랜덤이라 볼 수 있었다. 그 탓에 뱀파이어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육체를 가진 자들이 많다. 나 또한 몸은 성인이지만, 뱀파이어로서의 능력은 아마 태아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니, 몸 안에서 느껴지는 갈증조차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은 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제1황자의 오른팔이자 황실 기사단장, 아일 카르스. 뱀파이어로 환생하다. 이거 정말 걸작이군.”
어느새 제힐의 눈은 흥미를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쓰기에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도대체 신은 무슨 생각으로 날 1년 만에 이 세계로 불러들인 것일까. 그것도 뱀파이어의 육체를 가지고. 괴롭게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돌렸다. 우뚝 선 성곽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 먼 곳에서도 보일 만큼이나 거대한 성. 1년. 황성에 내란이 일어난 지 1년이란 말이지.
나는 성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제힐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 목소리는 짙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지금, 제국을 이끌고 있는 황제는 누구지?”
이미 예상되는 바가 있었지만, 그래도 물어야만 했다. 친우의 생사를 확인해야 한다. 죽기 직전에 보았던 그 눈빛이 아직도 떨쳐지지 않는다. 나를 잃은 슬픔에, 그는 지금 어떤 상태가 되어 있을까.
“안타깝게도, 제2황자였던 ‘알 베르한 론 엘티미리온’이다.”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그가 황좌에 앉았단 말인가. 선왕께서 잘 닦아 놓은 그 자리에, 그놈이 올랐다. 그 잔인한 녀석이! 냉혹하기 짝이 없는 그가! 악마의 환생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던 녀석이 드디어. 귓가에 따라붙는 녀석의 웃음소리. 미쳤다고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는 그 웃음소리가 아직까지고 이명처럼 남아 있다.
물론, 그는 냉정함과 날카로운 판단력, 빠른 행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 점만 봤을 때는 황제로서는 완벽한 재목이었다. 그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들의 고통을 즐기는 그는, 짓밟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그는 백성의 어버이가 되지 못한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정신이 암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제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한 가지, 가장 반가워할 소식을 말해 주지.”
의문을 담은 시선으로 제힐을 보자, 그가 시선을 똑바로 맞춰 왔다. 나와는 다른 냉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테이 아셴 론 엘티미리온’. 제국의 제1황자. 너의 주군인 그는 아직 살아 있다.”
놀라움에 눈이 크게 뜨였다. 말도 안 돼. 베르한이 그를 살려 두었을 리가 없다.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조리 베어 버리는 자인데. 그런 나를 보며, 제힐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는 죽지 않았다. 아일 카르스.”
숨을 쉰 건지 내뱉은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살아 있다. 아셴이, 아셴이 살아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황궁으로 달려가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 태어났을 때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그 뒤의 일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떨리는 숨을 연신 뱉어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가슴 한편이 뜨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제힐의 말에 나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지만, 그리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다.”
아니, 아까는 좋은 소식이라며. 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하긴, 베르한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냥 살려 둘 리가 없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가 “살아 있는 건 다행이라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하며 덧붙였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베르한의 잔인한 성품은 이미 유명하다. 설마, 막 고문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지만, 황제가 뭔가 생각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지.”
이런 외딴곳이 처박혀 있으니, 모르는 거잖아, 라는 생각이 비집고 올라왔지만 내뱉진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혹시, 감옥에 가둬 뒀다거나…….”
다행히도 제힐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니, 그건 아냐. 연회 때에도 1황자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고, 딱히 의심할 만한 구석은 없는 모양이더군. 오히려 사이좋은 형제라는 소문이 돌고 있을 정도야.”
허,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사이좋은 형제라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하는 인간이 대체 누구인가. 그런 단어는 베르한이 황제가 되기 전에도 나돌지 않던 말이다. 오히려 앙숙이라는 말이 정확하지. 사사건건 서로의 일에 트집을 잡고, 서로를 경계해 온 두 사람이다. 아셴도 황좌에 관심이 없는 샌님은 아니었기에, 그 강도는 더했다.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베르한이 대체 왜 아셴을 살려 두었는가, 그게 문제였다.
“황궁에 가 봐야겠어.”
짓씹어내듯 내뱉자, 제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내가 부른 이유도 그거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깊었다. 베르한도 베르한이지만, 이놈도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저 읽을 수 있는 건 깊은 증오. 그 외의 감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제힐이 느긋하게 턱을 괴며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황궁에서 연회가 열린다. 그곳에 나는 참석하기로 되어 있어. 명목상으로는 일단, 공작가의 사람이니까.”
뱀파이어들로 인해 몰락해 버린 시리에스 공작가. 그러고 보니 시리에스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힐이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기에, 그에게 모든 직위가 넘어갔지만 그뿐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얻게 된 것은, 질척한 동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힐은 딱히 그들에겐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인다. 아니, 모든 분노를 뱀파이어에게 돌렸기 때문에, 더는 분노할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그곳에 너도 데려갈 생각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말에 어깨가 들썩였다. 내게 있어서는 희소식이다. 황성에 당당히 들어갈 명분도 생기는 것이니,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하지만, 제힐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너와 나는 반드시 눈에 띄게 될 거야.”
눈에 띄고말고. 한 놈은 은발이고 한 놈은 와인 빛이다. 띄기 싫어도 띌 수밖에 없는 외모를 우리는 가지고 있었다. 아마, 연회장에 발을 들여놓는 즉시 시선이 몰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베르한의 시선도 저절로 끌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 덕에 나는 잠입을 하기가 어려워지겠지. 아셴의 무사를 확인해야 하는데, 베르한에게 발목을 잡혀서야.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될 거란 시나리오가 벌써부터 그려진다. 하, 하지만 염색약이 있으니 이럴 때야말로 그걸 이용해서, 평범한 갈색으로 염색하면…….
“뱀파이어의 색은 인위적으로 숨길 수 없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지. 나야, 연회에 몇 번 가 보았으니 상관없겠지만, 너는 문제가 돼. 그곳에 가게 되면 네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넌 뭐라고 대답할 거지?”
“……그건.”
“아일 카르스라고 말할 참인가? 내가 1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의 기사단 단장이었다. 그리 말할 생각인가? 살아 돌아왔다고? 그런데 모습이 바뀌어 버렸다고? 연회장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지 마라. 네가 아일 카르스라는 것이 밝혀지면 황자만 반가워하는 게 아니다. 황제도 아주 기뻐하겠지.”
“다른 의미로.”라며 그가 말끝을 맺었다. 쉼 없이 쏘아 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었고, 대꾸할 말도 없었다. 그렇다. 나는 그곳에서 아일 카르스라는 이름을 댈 수가 없다. 기분이 싸하게 식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발끝만 보고 있는데, 그가 한숨을 짧게 내쉰다.
“그때만 이름을 바꿔라. 어쩔 수 없지만,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쩔 수 없지. 아셴에게만이라도 내가 되살아났다는 걸 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하지만, 제힐은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날카롭게 내뱉는다.
“행여나, 황자에게만 몰래 말하겠다는 생각은 집어치워. 그와 단둘이 만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야. 의심받을 짓은 하지 마.”
결국 모든 희망이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그럼, 내가 황성에 가는 의미가 없잖아! 라고 외치려고 했지만, 문득 잊어버렸던 한 가지가 떠올랐다. 있다. 내가 가야 하는 이유가. 그리고 나의 존재를 어필할 순 없겠지만, 우선 본래의 목적대로 아셴의 무사만이라도 확인하자. 혹시 다친 곳은 없는지, 쇠약해지진 않았는지. 먼발치에서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아니,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해야겠지.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기구한 뱀파이어 생 같으니라고. 차라리 갓난아기가 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나의 이런 속마음과는 달리, 제힐은 턱 끝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더니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블레디 크림슨. 블러드라는 이름은 이상하니, 블레디가 낫겠군. 그걸로 해라. 어차피 임시방편이니, 좋은 이름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블러드 크림슨(blood crimson). 진홍의 피. 한시라도 내가 뱀파이어라는 걸 잊지 않는 그의 머리에 진저리가 난다. 그리고 조금은 씁쓸해졌다. 아직 스스로에게도 뱀파이어라는 자각이 없는데, 그에게 있어서 나는 오로지 뱀파이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바뀔 여지는 정말 단 한 치도 없단 말인가.
그가 준 임시 이름이 독처럼 가슴속에 퍼진다. 아무리 인간의 피는 마시지 않겠다고 외쳐도,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뱀파이어를 증오하는 그에게 신뢰를 바라는 것이 무리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믿어 주기를 바랐건만.
“그럼, 나가 봐도 좋아. 내가 한 말들 잊지 말고.”
고개를 힘없이 끄덕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 또한 자리에 일어서며 다시 책상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의 등허리는 숨 막힐 정도로 올곧았다. 책상 위의 서류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착잡한 마음이 가슴속을 지배했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부여잡고 당기자 끼이익- 하는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진다. 내 심장을 긁어내듯 아주 괴로운 소리였다. 눈을 내리깐 채 방을 나가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는 인간일 수는 없는 걸까.”
육체는 뱀파이어지만, 정신은 인간이다. 그러니 나는 인간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제힐에게 난 뱀파이어일 것이라 생각하니 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적어도 다른 누군가가 나를 인간으로 봐 준다면, 나는 인간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뱀파이어이고 아일 카르스라는 걸 아는 건, 제힐 뿐이니까. 적어도 그의 마음이 조금쯤은 변해 주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다.
***
낡은 경첩이 돌아가며 문이 닫혔다. 그제야 제힐은 서류를 뒤적이던 손을 멈추었다. 솔직히 서류는 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이 무거운 공기를 외면하고 싶었기에, 손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둔 것뿐이었다. 서류 따위가 눈에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등을 돌리자 닫힌 문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쓸쓸히 방 안을 빠져나가던 뒷모습이 눈에 밟힌다. 하지만, 제힐은 서류를 쥔 손에 힘을 꽉 주는 것으로 그 감정을 묵살시켰다.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서류가 마치, 자신의 심정과 비슷해 보였다. 구겨지고 구겨지는 이 감정. 아마, 저런 뱀파이어를 처음 봐서 그러는 거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작게 읊조렸다. 차마, 아일의 앞에서는 답해 줄 수 없었던 말을.
“뱀파이어는 인간이 될 수 없어.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너를 망칠 거다. 아일 카르스.”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는 일은 있어도, 뱀파이어가 다시금 인간으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하다. 어차피 너도 곧 그 사실에 순응하게 되겠지. 다른 뱀파이어와 같이 힘을 갈망하고, 피에 굶주린 야수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런 웃기지도 않는 소리는 다신 내뱉지 마. 다시는.
제힐은 품속에 갈무리해 둔 총자루를 쓸어 만졌다. 차갑게 얼어 있는 은백색의 콜트가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 건 포기해. 내가 너를 죽일 수 있게.”
정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게 생기기 전에.
콜트의 손잡이를 아프게 꽉 잡으며, 그는 자신을 다스렸다. 분노라는 감정 외에는 그 무엇도 허용하지 않았던 심장에, 자꾸만 이상한 것이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
뻑뻑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섰다. 침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다시 들었었는데, 다시 일어나니 또 밤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희끄무레한 달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미쳤군,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밤에 잠들었는데 다시 밤이라니. 대체 몇 시간이나 잔 걸까. 밤이 아침처럼 느껴지는 기분이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미친 게 분명해.”
또다시 까무룩 잠이 들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자도 자도 졸렸고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졌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은 채워지질 않았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가 된 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쳤다고 여기는 쪽이 나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침대 밖에 멍하니 서 있자, 밤의 차가운 공기가 전신에 닿았다. 서늘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머리가 길어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다시 따스한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나는 협탁 위에 있는 끈을 들어 머리를 질끈 묶었다. 솔직히 검사인 내게, 이런 긴 머리는 조금 거추장스러웠다.
나는 그렇게 야행성 올빼미마냥, 드디어 방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낡은 경첩이 울고,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무도 없는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으며 한 걸음씩 내려갔다. 여전히 창 밖에는 어슴푸레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까맣게 둘러싸인 안개 속에서 숲이 바람에 흔들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힐은 지금 호랑이들 소굴에 몸을 던진 채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북쪽 숲은 이 대륙에서도 뱀파이어들의 출몰이 빈번한 곳이었다. 이 음습한 분위기만 봐도 딱 뭐가 튀어나올 것 같지 않은가. 그런 곳에 이리 저택이 있고, 제힐은 여기서 살고 있으니.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뭐, 그만큼 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이겠지만.
“아니면, 이 숲을 아예 엎어 버릴 생각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