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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 있는 생각이라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힐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암, 그렇고말고. 뭐 그가 딱히 뭘 하든지 나와는 상관없는 거지만. 나는 그저 제힐에게 내가 인간임을 어필하면 그만이다. 뭐, 조금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애써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저택을 둘러볼 심산으로 방 밖으로 나왔는데, 쓸데없는 상념이 머리를 비집고 들어온다. 지금은 그저, 아셴의 생각만 하자. 창밖으로 보이는 성곽에 다시 한 번 시선을 던지며, 나는 눈을 낮게 깔았다. 저절로 두 주먹이 꽉 쥐어진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저택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빛을 받은 나의 머리카락이 짙은 색으로 변해갔다. 와인빛이 검붉은 색에 가까워졌다. 뱀파이어의 머리카락은 햇빛에 약했다. 그 탓에 빛이 있는 곳에 나가면 어두워지고, 어두운 곳에 있으면 선명해졌다. 지금도 그늘이 있는 쪽은 여전히 선명한 와인빛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말 뱀파이어다워서 이젠 아주 질릴 지경이다. 이래서야 인간이라고 세뇌를 걸어도 소용이 없으니.
계단을 다 내려온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경을 안 쓰려고 했지만, 아까부터 굉장히 거슬리는 소리가 하나 있다. 평소 같았으면 죽어도 못 들었을 소리지만, 지금의 나는 뱀파이어다. 인간보다 배는 뛰어난 청각에 무슨 소리가 자꾸만 걸려들었다.
넓은 홀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홀의 정면에는 아름다운 사내와 여인의 그림 한 점만이 걸려 있었다. 아마, 제힐의 부모님일 법한 그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다 죽었거든.”하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 목소리를 힘겹게 떨쳐내며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도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연신 부스럭대는 그 소리는 꼭 무언가를 뒤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설마, 좀도둑인가?
그러다 문득, 나는 단 한 곳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른 건물로 이어지는 복도 안으로 까만 어둠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내딛자 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다. 역시, 저쪽이구나.
나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좀도둑이면 때려잡고, 바람이면 그냥 돌아오자. 만일 뱀파이어면, 글쎄 어떻게 할까. 나 혼자서는 이기기 역부족일지도 모르는데. 쩝쩝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밟았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뭐. 좁은 복도는 갈수록 넓어지며, 저 끝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기자 그것은 달빛이었다. 탁 트인 길의 양옆에는 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또 다른 건물이 있다.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걸었다.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나는 그것에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이토록 먼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가 자신에게 닿았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뱀파이어의 감각이 이토록 뛰어난 것이었단 말인가. 전생에서 “기사로서의 나의 감은 뛰어나다.”라고 말하고 다녔던 것이 괜히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의 나에게 비교한다면, 그때의 난 새 발의 피도 안 된다. 역시, 이 육체는 뱀파이어구나. 자각하기 싫은 현실이 또다시 물밀듯 밀고 들어온다.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나는 드디어 그곳에 발을 들여 놓았다. 건물 안은 찬 기운이 가득했다. 벽은 마치 얼음과도 같았다. 입 밖을 비집고 나오는 입김은 나를 당황케 만들었다. 꼭 이곳만 겨울이 된 듯했다. 여긴 대체 뭘 하는 곳일까. 하지만, 내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나는 흠칫 몸을 떨며 벽에 등을 붙였다. 정말로 좀 도둑인가. 그러나 나는 곧 갸웃거렸다. 내 코가 이상해지지 않았다면, 이건 분명히 음식 냄새다. 그것도 조리된 음식이 아닌, 조금은 비린 냄새. 살짝 피 냄새도 나는 것 같고. 하지만, 싱싱한 건 또 아닌 것 같다. 후각까지 발달해 버린 내 몸은 모든 것을 민감하게 잡아냈다. 내 감이 말하건대, 이곳은 음식을 저장해 두는 곳인 것 같다.
나는 빼꼼히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곤 곧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부스럭, 부스럭.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대체 뭘까. 잠이 덜 깨서 헛것을 보고 있나? 아니면, 아직도 꿈속인가. 볼을 쭉 잡아당겨 보니, 당연하게도 아팠다. 하핫.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르기도 말랐지만, 참으로 어색한 웃음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밖에는 반응할 수가 없었다.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참으로도 기가 막혔기에. 작은 등을 구부리고 쭈그려 앉은 모양새도 웃기고, 그 작고 새하얀 손으로 고기를 주워 먹는 꼴이 괴기스러웠다.
그때, 허겁지겁 음식을 주워 먹던 자와 나의 눈이 딱 마주쳤다. 내 목소리를 들은 건지, 사납게 치켜뜬 눈동자가 꽤나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눈앞에서 미친 듯이 음식을 먹어 대고 있는 것은……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넌, 누구…….”
누구냐, 라고 물으려던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눈을 지그시 뜨며, 소년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뭐지. 이상하게 낯이 익은데.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진 않았다. 낯은 익지만, 나는 저런 애를 본 적이 없다.
쭈그리고 앉은 탓에 땅에 늘어지기까지 한, 긴 흑발. 그리고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초리지만, 전체적으로 동그란 눈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은색의 눈동자. 이렇게 인상적인 소년을 내가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나는 문득 다시금 소년을 바라보았다.
방금 뭔가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그게 뭐지? 나는 눈을 좀 더 가늘게 뜨며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 시선과 마주하듯 소년 또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은색의 눈동자라. 검은색과 은색. 미묘한 조합이지만, 그 기이함이 또 신비롭다. 그리고 저 작은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기백. 나는 분명히 저런 분위기를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저 눈빛도 익숙하다.
검은색, 은색. 검은색, 은색.
……검은색, 은색.
아. 아아.
“……!”
아아아!
나는 입을 가린 채 손가락을 들었다. 소년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아이는.
“페트리알?!”
그 무시무시한 짐승이라는 소리다. 까만 털로 덮인 커다란 체구. 그리고 사나운 은색의 눈동자. 분위기는 조금 다르지만, 기백은 확실히 같다. 누군가가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그 짐승이 인간이었다니. 아니, 인간이 짐승인 건가. 아니 아니, 그런 건 다 제쳐 두고서라도. 이 작은 아이가 그 짐승이라고?
블라임의 목덜미를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입에는 온통 피칠갑을 한 채 고기를 물어뜯던 그 짐승?
소년을 가리키던 손가락에선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결국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다시 한 번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이건 말도 안 돼.
소년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정신이 멍해지기 시작한다. 평범한 짐승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사람으로 변하기까지 하다니.
그렇게 페트리알과 나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뻐근해질 즈음, 팔에는 슬슬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저 페트리알일 것이 분명한 소년의 모습은, 식당에서 본 페트리알의 모습과 흡사했다. 온 얼굴에 피칠갑을 하다못해 턱 밑으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주위에는 마구잡이로 뜯어 놓은 고기 포장지들이 널려 있었다.
이 호러틱한 광경에 대고 나는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하는 걸까.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자, 소년도 눈을 깜빡거린다. 당혹감 같은 감정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돌연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걷고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작은 발걸음 소리였다. 나는 소년이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은 그다지 무섭지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겁을 먹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소년의 키가 나보다 훨씬 더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작 가슴께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는 키였다. 눈도 크고, 뺨에도 젖살이 빠지지 않은 채였다. 정말로 어린 소년이었다.
이윽고 소년의 입이 열렸다.
“아일 카르스.”
발음이 조금 어눌하고,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무감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고요했다. 나는 무심코 소년의 부름에 답했다.
“아, 응?”
하지만, 딱히 부른 것이 아니었는지 소년은 말이 없었다. 괜히 머쓱해지는 것만 같아 뒷목을 긁적였다. 정적인 시선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다만, 공허해 보이기도 하는 눈동자가 조금 신경 쓰였다. 이 아인 사람일까, 짐승일까.
돌연, 소년이 손을 스윽 뻗어 왔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내 관두었다. 소년의 시선엔 살기가 없었다. 또한 손을 뻗어 오는 것도 무슨 의도가 있는 것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 소년의 작은 손이 나의 뺨에 닿았다. 살짝살짝 쓰다듬는 행동에도 딱히 의미는 없었다. 그저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 손길에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여태 보아 온 페트리알은 성인 남자 몇 명은 거뜬히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위압적인 짐승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은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남자아이로밖에는 보이지가 않았다. 물론, 입 주위에 묻어 있는 피만 닦는다면 말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여전히 소년은 내 뺨을 조물거리고 있었다.
“페트리……알?”
말끝을 조금 올려 말하자, 물어보는 것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인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졌다. 이 아이는 페트리알이다. 어느새 페트리알은 손을 내리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웨인 울프. 웨이닝 문(waning moon)의 조각에서 태어난 존재.”
뜬금없는 말에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태어난 존재’라는 말로 미루어 봤을 때, 자기소개를 한 것 같은데, 말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여전히 발음은 어눌했다.
웨이닝 문. 하현달. 페트리알의 말을 해석해 보자면, 하현달의 조각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된다. 달의 조각이 뭘까. 나는 답을 찾으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보았지만,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페트리알은 내게서 반응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는지, 계속해서 자신의 말만을 이었다
“너는 순혈종의 뱀파이어. 퓨어뱀프. 우리의 어머니는 같은 존재. 새하얗게 빛나는 달에 경배를 드리라. 순결의 빛이 핏빛으로 물들어 갈 때, 깨어난다. 우리들의 어머니, 리데이알.”
리……데이알? 알 수 없는 말들에 결국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물어본다고 해서 제대로 된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뭐 하나 헛소리인 것은 없는 듯했다. 이상하게 소년의 모든 말들이 신경 쓰였다. 끈질기게 날 따라오는 시선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소년에게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 리데이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지만, 곧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페트리알.”
낮고 서늘한 목소리. 이 냉동고와 어울리는 목소리를 찾으라 한다면, 나는 반드시 저 목소리를 꼽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언제 온 것인지 제힐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찰나의 시간, 나와 제힐의 두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시선을 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돌려 버린 시선이 향한 곳은 웃기게도 같은 곳이었다.
페트리알은 우리 둘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제힐은 굳이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페트리알의 뒤로 가 있었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식량 창고에는 동물의 피와 고기의 기름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무자비하게 뜯긴 고기용 포장이 널브러져 있었다. 페트리알이 뜯다만 포장지를 발 뒤로 스윽 밀어내는 것이 보였다. 눈을 데구르륵 굴려 보지만 어쩌겠는가. 현행범으로 딱 걸린 것을.
제힐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급속도로 가라앉는 분위기에 헛기침을 했고, 페트리알은 영악하게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에 제힐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이거 곧 있으면 폭발할 것 같다. 나는 저도 모르게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 나는 같이 안 먹었다?”
난 그냥 대화만 했고, 고기는 안 먹었어. 정적을 깨고 나온 내 말에, 제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선이 힐끔 내게로 옮겨 오더니 다시 돌아간다.
그러고는 또다시 한숨.
“하아─”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과 이마를 짚은 손, 그리고 찌푸려진 미간은 마치, 골치 아픈 것들을 본 것만 같은 반응이었다. 괜히 찔끔 어깨를 떨어 버렸다. 나는 진짜 안 먹었는데, 하고 웅얼거리자 됐다는 듯 그가 손을 휘휘 젓는다.
제힐은 심호흡을 하는 것마냥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더니 등을 돌렸다. 물론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 올 때까지 다 치워 놔.”
그 말에 페트리알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꼭 항의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양심이 있다면 넌 아무 말 못 하지. 현행범이니까.
제힐은 자비 따윈 없다는 듯 일갈했다. 아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시작해.”
이윽고 페트리알의 몸에서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소년의 몸이 스르륵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곧 까만 털이 뒤덮인 유연한 등이 형체를 그리고, 네 개의 발이 나타나, 검은 짐승으로 탈바꿈했다. 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자, 페트리알이 발톱으로 바닥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은 억울하고 원통하다는 듯이. 역시 그리고 당연하게도 제힐의 이마에 핏대가 하나 더 늘었다. 곧이어 올 호통을 대비하여 난 귀를 살짝 틀어막았다.
“빨리!”
걷어찬 것도 아니었건만, 페트리알은 깨갱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입으로 포장용 봉지와 팩을 하나하나 물어 쓰레기통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마치, 잘 훈련된 애완견을 보는 듯했다. 불쌍한 것. 그러게 작작 좀 먹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멀어지는 제힐의 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왠지 내겐 아무 말도 없으니 괜히 신경 쓰인다고나 할까. 나는 그 등을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나도 같이 할까?”
일순, 그의 몸이 작게 휘청인 것처럼 보였다.
제힐은 애써 벽을 짚더니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해.”
그러더니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나는 미간을 긁적이며, 청소 중인 페트리알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곤 너저분한 포장지를 하나둘 줍기 시작했다. 그런 날 보며 페트리알이 꼬리를 흔들어 댔다. 마치, 고맙다는 듯이. 그리고 그런 우리 귀에는 복도를 빠져나가는 제힐의 한숨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고, 어슴푸레한 달빛이 스며드는 밤. 내 것이 아닌 것마냥 스르륵 눈꺼풀이 말려 올라가고,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나는 멍하니 상체를 일으켰다.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공허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시린 달빛과 벽에 비친 나무 그림자뿐이었다. 그림자가 흔들리는 모습이 괴이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했다. 힘겹게 내뱉어지는 숨은 뜨거웠다. 몸이 축 늘어진 것마냥 무거웠다. 깨질 것 같은 머리에 시야가 어지럽다. 젠장, 몸 상태가 왜 이지경이야.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옷섶을 적셨다.
창밖에선 우웅하며 바람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하게 흔들리는 창문은 혹독한 겨울의 바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공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머리가 불덩이마냥 뜨겁다. 겨울이라고 감기라도 걸린 걸까. 끙끙거리며 몸을 완전히 일으키곤 창가로 조금씩 걸어갔다. 이 재수 없는 몸뚱이. 뱀파이어 주제에 왜 아프고 난리야.
“뱀파이어는 인간보다 몸이 좋은 거 아니었나?”
인간이었을 때에도 걸려 본 적이 없는 감기였다. 헌데, 이제 와 새삼스럽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관두고 말았다. 두개골이 쪼개지는 듯이 아팠다. 지잉, 하며 골이 울리는 통에 잠시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협탁을 짚은 채 창가에 서자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 상태에 더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내다본 창밖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마치 어둠에 삼켜진 듯한 숲. 섬뜩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달빛 하나 투영되지 않는 어둠. 마치 모든 빛이 저곳을 비켜 가는 것만 같았다. 까만 숲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몸이 떨려 왔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공포인지 전율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차갑게 언 창문을 손으로 짚으며 더욱 바짝 다가가 섰다.
고개를 들어 본 하늘은 만월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방 안을 환하게 비춰 줄 정도의 만월이거늘, 이상하게도 숲만은 비추지 못했다. 그 광경이 기이하여 나도 모르게 창문을 열어 버리고 말았다. 겨울의 찬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 옷자락과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순간, 숲의 검은 안개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
숨을 헉 들이쉰 목이 새된 소리를 냈다. 오로라마냥 하늘에 펼쳐진 안개는 기묘한 색이었다. 하늘거리는 커튼마냥 환상적인 빛깔. 평범한 검은색처럼 보이는가 하면, 새벽 같은 짙푸른 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몽환적인 보랏빛을 띠기도 하는, 그런 색이었다. 그야말로 달을 유혹하는 밤의 오로라. 나는 넋을 놓은 채 오로라와도 같은 그 안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귓가에 환청이 들려온다.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어서 내게 닿으라고. 그리 속삭이는 환청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것은 곧 얼마 가지 않았다.
“키히히힉.”
귀를 찢어 버릴 것만 같은 웃음소리였다. 게다가 한둘도 아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시야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곤 멍청한 생각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나, 언제 창문을 열었었지. 아니, 언제 일어난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창가에서 벗어나듯 또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것은 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목덜미 부근이 서늘하다고 느꼈다. 허리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이 뺨 언저리에 달라붙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돋아나고, 어깨가 굳었다. 그리고 곧 등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핏기 하나 없는 새하얀 손이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내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왔다. 길게 자란 손톱이 스칠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완전히 방심했다. 누군가가 뒤에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했다니.
돌연 그 손이 턱을 잡아 돌렸다. 저절로 고개가 뒤쪽을 향했다.
“어디를 보는 거니, 아가. 이쪽이야.”
새하얀 머리카락. 시야를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그것이었다. 발끝까지 늘어뜨린 새하얗고 긴 머리카락. 그리고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장신구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깊게 파인 이브닝드레스가 우아했다.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린 미소는 매혹적이었지만, 마냥 아름답다고 감상할 틈은 없었다. 위화감이 들었다.
유혹이라도 하는 듯 뺨을 쓰다듬는 손끝. 살갗을 스치는 날카로운 손톱. 불안정한 숨을 내뱉으며 그녀가 하는 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이 여자는 누구지. 그때, 뺨께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톱이 살갗을 벤 것이었다. 하지만 흘러내릴 피는 없었다. 대신 검은색의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갑고 끈적끈적한 액체였다. 여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꼬마야, 너 향이 좋구나.”
그녀는 손끝에 묻은 액체를 혀끝에 가져다 대었다. 내게로 한 발자국 다가오자, 빈틈도 없이 몸이 밀착되었다. 몸이 굳어 버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몸에 마비가 온다더니. 하지만, 난 인간이 아닌데, 하는 하등 쓸모없는 생각만 들었다. 힐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 여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이 여자는 인간이 아니다.
하늘에 펼쳐진 안개와도 같은 분위기가, 이 여자에게서 흘러나왔다. 밤을 닮은 음습하고도 유혹적인 기운. 이런 걸 인간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동자엔 점차 열기가 짙어지고 있었다. 달콤한 과실을 바라는 듯 스르륵 벌어지는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속에는 과실을 베어 먹기 위한 날카로운 송곳니가 자리하고 있었다. 비명과도 같은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뱀파이어.”
발이 저절로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동시에.
콰앙!
무서운 기세로 문이 열렸다. 아니, 열린 게 아니라 부서졌다. 너덜거리며 쿵 떨어지는 문짝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 위에 선 것은 시리도록 눈부신 은빛이었다. 제힐이다.
그때, 돌연 그가 외쳤다.
“아일, 엎드려!”
갑작스레 불린 이름에 어깨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감동할 새도 없이 총성이 날카롭게 울었다. 타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아마, 내 심장이 뛸 수 있다면, 지금 엄청난 속도로 두방망이질을 했을 것이다. 내 반사 신경이 뛰어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저 여자 대신에 내 심장이 뚫릴 뻔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은백색의 총구가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날카로운 기세의 요물이 아가리를 벌리는 것만 같았다.
탄환이 여자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탄환에 맞은 여자는 마치 종이 쪼가리마냥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했다. 흩어지듯 희미하게 찢어지는 모양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형체도 없이 사라진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 후 나는 아무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제힐의 잇새로 내뱉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놓쳤군.”
그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다급히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을 헉 들이쉬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몸을 비집고 나오려는 듯 강한 고동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내 심장은 뛰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가슴께를 움켜쥔 손에서도 심장이 뛰는 건 느껴지지가 않는데. 이 고동소리는 대체 무엇일까. 누군가가 귀에 대고 북을 치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뜨겁다. 집어삼키는 숨도 내뱉는 숨도 모두 뜨거워서, 목이 타들어 갈 것 같다.
“이봐, 아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총에 탄환을 장전시킨 제힐이 그리 물어 왔지만, 나는 답해 줄 수가 없었다. 바닥에 엎어진 채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윽, 하는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꽉 틀어 막힌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새어 나왔다. 아프다. 아파 죽을 것만 같다. 기사였던 시절에도 이런 고통은 맛본 적이 없었다. 심장이 비틀어지는 듯한 이 감각. 온몸의 모든 세포들이 타오르는 것 같은 이 느낌. 나는 숨을 헐떡이며,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렀다.
“하…… 윽!”
내게 다가오던 제힐이 우뚝 멈춰 섰다. 그제야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가 재빨리 달려왔다. 내 상체를 부축해 주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아프게 감은 채, 가슴만을 부여 쥐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슴을 모두 파 버리고 심장을 떼어내고 싶었다.
“이봐, 왜 그래?! 어디가 아픈……!”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뭐야, 뭔데 그래. 무슨 일인데. 나 또한 다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말을 하진 못했다. 입만 열면 죄다 신음성이 되어 터져 나왔다. 얼굴은 통증으로 찌푸려지고, 나는 고통을 소리로 내뱉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의 팔에 의지한 채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나 좀 살려 달라는 듯 그렇게 헐떡였다. 그러다 문득 이가 가렵다는 것을 느꼈다. 맞물린 이를 부득부득 갈아 보았지만, 그 기묘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타는 듯한 느낌도 여전했다. 젠장, 이게 대체 뭐냐고.
까무룩 흘러갈 듯한 정신 틈으로, 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색이…….”
나는 애써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뜬 눈은 뿌옇게 흐려졌다. 가득 고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이것에 지면 안 되는 거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언제까지 갈까. 충격을 받은 듯 놀란 얼굴에 나는 다시 눈을 꽉 감았다.
꺽꺽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가 점차 뒤로 젖혀졌다. 망연히 천장을 바라보며 가슴을 들썩였다. 두근두근 울리는 고동소리. 그리고 심장을 쥐어짜고, 신경을 긁어내는 이 느낌.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눈물이 귓가에 고였다.
가슴을 쥔 손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간다.
“……퓨어뱀프.”
억눌린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결국 정신을 놓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