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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힐은 황급히 아일에게서 손을 뗐다. 평소에는 표정이라곤 없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순혈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퓨어뱀프였다니. 신음성을 내뱉는 아일의 입속에선 유독 송곳니가 눈에 띄었다. 그래, 바로 저거다. 저 은백색의 송곳니가 퓨어뱀프라는 증거였다.
콜트를 쥐고 있던 제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했다. 뱀파이어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몸이 아일의 송곳니에 반응했다. 저절로 몸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제힐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곧 아일의 괴로운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아으윽─크읏!”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거리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정신은 놓아 버린 듯하지만, 입은 연신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것은 그저 괴로워한다기보다, 무언가와 싸우는 듯 보이기도 했다. 본래의 혼이 변화하려는 몸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일의 의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뱀파이어임을 부정하는,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려는 의지. 내뱉는 숨은 넘어갈 듯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제힐은 그만 난감해지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다시금 손을 뻗었지만, 그 후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지금 이 사내를 어찌하려는 걸까. 아니, 어쩌고 싶은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죽여야 하는가, 살려야 하는가. 솔직히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도 우스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간 보아 왔던 아일의 모습이,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껍데기는 뱀파이어지만, 그의 알맹이는 인간이다. 제힐은 뱀파이어들을 죽이기로 결심한 거지, 인간을 없앨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의 껍데기는 뱀파이어…….’
알맹이는 어떻든 껍데기만은 완벽한 뱀파이어였다. 그것도 뱀파이어들 중 가장 위험한 퓨어뱀프! 제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순혈 뱀파이어. 즉, 이노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진한 혈통을 이어받은 존재. 그렇기에 뱀파이어들 중에선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퓨어뱀프였다. 가장 성가신 존재이며, 그렇기에 죽여야 하는 존재들. 제힐의 가문을 말살시킨 뱀파이어 또한 퓨어뱀프였다.
하지만, 그는 퓨어뱀프인 아일을 두고서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선 죽여 마땅한 이 육체를 눈앞에 두고서……!
“제기랄!”
결국, 제힐의 손은 아일의 몸을 부축하였다. 그의 어깨에 닿는 순간 팔뚝이 경련하듯 떨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는 도저히 아일을 죽일 수가 없었다. 인간이길 바라는 그 처연한 눈동자가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고 떠오르는 탓이었다.
“윽! 하아, 하아.”
서서히 진정이 되어 가는지, 아일이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번뜩이던 송곳니도 서서히 제 크기를 다시 찾아가고 있다. 물론, 색 또한 본래의 흰색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제힐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여간, 참으로 끈질긴 생명이다. 그의 저항이 본능을 억누르는 것에 성공했다. 당분간은 아마 조용할 것이다.
제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자신은 인간을 살린 것이다.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을 살린 것이다. 그는 그렇게 제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러니, 뒤늦게 자책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아일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기절하듯 잠든 그 모습을 보며, 제힐은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뭐긴 뭐겠어. 리미트가 시작되는 거지.”
웃음기를 가득 담은 여성 특유의 가는 목소리였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희뿌연 형체가 어른거렸다. 이윽고 그것이 뚜렷해졌다. 발끝까지 늘어뜨린 긴 백발. 좀 전에 놓쳤던 그 뱀파이어였다. 핏빛과도 같은 새빨간 눈을 보건대, 저건 하프뱀프였다.
그는 놓았던 총을 다시금 집어 들었다.
아일과 달리 눈앞에 있는 여자는 뱀파이어다. 그러니, 그가 망설일 필요 따위는 없었다. 제힐은 총신을 빙그르르 돌려 잡았다. 곧이어 집 안에는 요란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탕! 탕─!!
빠른 잔상을 그리며 총알들이 쇄도했다. 은빛의 궤적이 그녀의 몸을 뚫었지만, 그 몸은 좀 전과 같이 형체가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제힐은 쉴 새 없이 여기저기를 향해 총을 쏘아 댔다. 날카롭고 묵직한 총성이 저택에 울려 퍼졌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는 취미 따위는 없었다. 빠르게 장전을 하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구석구석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었다. 몇 개의 탄환이 날아갔는지, 어디에 쏘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윽고, 탄환이 허공에 박혔다.
“크……으.”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그녀의 실체가 다시금 나타났다. 괴롭게 찌푸려진 미간은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사납게 노려보는 눈동자가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그녀의 어깨에는 제힐이 쏘았던 은색의 탄환이 박혀 있었다. 살갗이 타는 냄새가 났다.
제힐은 그녀를 보며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리 이노뱀프라 해도, 그건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군.”
그의 빈정거림에 그녀가 이를 아득 물었다. 어깨를 틀어쥔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우드득 하며 뼈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듣는 이의 미간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괴이한 소리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이 제 살점을 파고들고, 강한 악력이 제 어깨를 비틀어댔다. 인간에게 당한 것이 분하고 원통해서 참을 수가 없다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때 허공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에라.”
작은 손이 불쑥 튀어나와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붙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어깨가 다시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뼈가 원래 자리를 찾아 되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다시금 제대로 맞춰진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휴에라라 불린 여인이 웃었다.
그녀의 옆에는 여태까진 없었던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허공에서 튀어나와 사뿐히 땅에 발을 내린다. 밤하늘 같은 까만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늘어져 있었다. 공허하고 탁한 검붉은 눈동자.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입술 또한 죽어 버린 검은 빛이었다. 눈 아래로 흐르는 검은 물질을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스켈뱀프로군.”
이노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가장 결핍된 것들이었다. 자아 발달이 되지 않은 그들은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한마디로 기형이라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점이 조금 껄끄러운 점이지만.
“순혈이란, 순혈은 다 모이는군.”
휴에라가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싱긋 웃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제힐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특별한 날이라니. 그의 시선이 절로 아일을 향했다. 널브러진 아일의 주위로는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다. 그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날이라는 게, 아일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거. 그리고 휴에라가 말한 리미트라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갑자기 허공에서 노랫말과도 같은 말이 들려왔다. 저택은 뱀파이어들에게 점령당한 것인지, 여기도 저기도 모조리 뱀파이어들뿐이었다. 제힐은 낮게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아일을 향해 있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게 하는 놈이군, 하며 한숨을 푹 내쉰다.
노랫말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만월의 아래에서 축배를 들어라. 우리들의 어머니, 리데이알의 축복 아래. 또 하나의 영혼이 꿈틀거린다!”
주위에서는 연신 까르륵 까르륵하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 건지,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위험하다. 저 노래가 의미하는 바를 제힐은 대강 알 수가 있었다. 또 하나의 영혼이란, 아일 카르스를 뜻하는 것일 것이다. 뱀파이어의 혼이 서서히 눈을 뜨고 있다는 의미인 듯했다. 그렇게 되면, 아일 카르스란 존재는 완전히 먹혀 버리게 된다. 지금은 그 강한 의지로 억누른 듯하지만, 과연 그게 언제까지 버텨 줄지.
제힐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은백색의 콜트를 자신의 등 너머로 겨누었다. 느긋한 움직임이었다. 몸을 천천히 돌리자, 그의 등 뒤에는 어린 뱀파이어 하나가 있었다. 아니, 어리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었다. 모습이 어릴 뿐, 실제론 이것의 나이가 어느 정도일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인간. 방해, 돼.”
뚝뚝 끊어 말하는 발음은 어눌했다. 썩어 문드러진 피부 표면. 초점이 맞지 않는 검붉은 눈동자. 말라 버린 몸은 마치 껍질을 보는 듯했다. 창백한 피부 사이로는 몸의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스켈뱀프였다. 그것도 아주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이윽고 그것이 긴 손톱을 치켜들며 달려들었다. 크게 벌린 입에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턱까지 삐져나온 긴 송곳니 두 개가 전부였다.
괴이한 울음소리가 소년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제힐은 흔들림조차 없는 시선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귀찮은 얼굴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총구를 겨눈다. 맨 처음 아일을 봤을 때와 같았다. 자비라고는 일체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어린아이이든, 노인이든,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뱀파이어라는 사실, 그거 하나뿐이었다.
타앙!
허공에 빛이 하나 그어졌다. 은색의 탄환이 만들어낸 잔상이었다. 그것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소년의 심장을 꿰뚫었다.
“끄아아아악─!”
탄환이 박힌 심장을 중심으로, 소년의 몸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부위에 맞았다면 좀 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장에 박힌 은탄은 뱀파이어의 모든 신경을 태워 버린다. 소년이 바닥에 엎드려 몸부림을 쳤다. 꿈틀거리는 모습이 괴이쩍었다. 타는 냄새. 아니,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소년의 몸부림은 멈췄다. 그곳에는 회색의 재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방 안을 가득 둘러싼 뱀파이어의 종류는 다양했다. 이노 뱀파이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일을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블라임도 있다. 제힐은 하나하나를 눈으로 훑었다. 그리곤 재킷 안에서 또 다른 총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은색의 베레타였다. 은백색이 아닌 순수한 은빛이 발하는 그것은 마치, 달을 닮아 있었다. 제힐은 베레타에 은탄을 장전하곤, 두 개의 총을 모두 손에 들었다. 오랜만에 잡아 보는 베레타는 역시 무게가 남달랐다.
뱀파이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저건……!”
“이렌의 총, 이렌의 총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런, 애송이가 그녀의 총을 들고 있는 거지?!”
제힐은 총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의 스승님께서 넘겨주신 베레타다. 뱀파이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스승님의 이름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뱀파이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뱀파이어들의 목소리는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불쾌했다.
‘……더러운 것들이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제힐은 두 개의 총구를 뱀파이어들에게로 겨누었다.
“쫑알쫑알.”
술렁거리던 목소리들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시간, 정적이 맴돌았다.
“시끄러워.”
이윽고 두 총구에서 은색의 잔상이 그려졌다.
타앙─!
그 소리는 곧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같았다.
두 개의 총에서는 쉴 새 없이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뱀파이어들의 살을 꿰뚫고, 심장을 태웠다. 끊이지 않는 타는 냄새에도 그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수십 개의 탄환이 수십의 뱀파이어를 집어삼켰다. 이내 당황한 뱀파이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켜보기만 하려던 것들이 나타나니, 역시 수가 상당했다. 이건 포위되었다고 봐도 무관했다. 휴에라의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제힐은 앞발을 치켜든 블라임의 배를 걷어차곤, 곧장 총구를 겨누었다. 당연하게도 그가 노리는 곳은 블라임의 안구였다.
타는 냄새와 함께, 끼아아악하는 여전히 귀가 아픈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손톱을 치켜든 스켈뱀프를 걷어차고 은탄으로 그자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리고 그에 이어 달려드는 자의 머리를 베레타의 몸체로 후려쳐, 쓰러뜨렸다. 두개골이 갈라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뇌수가 터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여느 무기들과는 다른 베레타의 위력이었다.
제힐은 한 걸음 물러서며, 뒤쪽을 곁눈질했다. 정신을 잃었던 아일이 눈을 뜨려는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딱 봐도 이들이 노리는 것은 아일이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지켜야만 했다. 그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페트리알─!”
그 말과 동시에 창 밖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창틀을 밟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예의 검은 짐승이었다. 맞물리는 이빨 사이로 진득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페트리알은 아일과 제힐을 지키듯, 느릿한 걸음으로 그들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크르르르릉─
은색의 동공이 날카롭게 사냥감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이내 페트리알이 무서운 속도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사납게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송곳니가 목덜미를 물어뜯고, 몸을 짓밟았다. 위협적으로 빛나는 발톱이 머리를 후려치고, 살점을 할퀴어 댔다. 페트리알의 발톱이 스쳐 지나간 자리는 모두 살점이 너덜거리며, 뼈를 드러냈다. 사방으로 질척하고 검은 액체가 이리저리 튀었다.
그리고 그때.
“으윽.”
아일이 드디어 눈을 떴다.

***

젠장,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주위가 너무도 시끄러웠다. 의식은 붕 뜬 것마냥 멍했다. 새하얀 천장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잠시 동안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도. 눈꺼풀을 여닫으며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생각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돌연 내 뺨으로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튀었으니까. 차가운 느낌에 손등으로 뺨을 비비자, 검은색의 액체가 묻어 나왔다. 피도 아니고 먹물도 아닌 것. 보는 순간 일어나는 불쾌감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다시 기절하지 않은 나 자신을 저주했다.
방 안을 가득 메운 무리들이 시야에 박혔다. 뭐야, 무슨 구경났어? 라고 물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인간처럼 보이는 놈들이 하나도 없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뭐……지?”
내 눈으로 봤음에도, 내 눈을 의심하고 싶어졌다. 썩은 내가 방 안에 진동하고,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일전에 봤던 블라임이라는 짐승이었다. 나는 내 앞을 막고 서 있는 등에 시선을 주었다. 저 올곧은 등은 누군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흔들리는 은빛의 환영. 귓가를 때리는 총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시선은 곧 긴 백발의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제야 쓰러지기 직전의 일이 모두 떠올랐다. 저 끈적끈적하고 기묘한 시선. 제힐이 쳐들어옴과 동시에 내 몸에선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었다. 끊임없이 저항하던 도중에, 나는 어찌 되었지? 그 후부터의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기절한 듯싶다.
나는 눈앞에서 블라임을 물어뜯는 페트리알을 힐끔 쳐다보았다. 소년의 이미지를 모두 없애 버릴 만큼이나, 난잡하고 살벌한 광경이었다. 앞발에 후려쳐진 블라임이 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그리곤 곧장 제힐의 탄환이 쇄도했다.
바닥을 질척하게 적신 검은 물질들과, 드글거리는 뱀파이어. 그걸 보고서 나오는 감상은 단 하나뿐이었다.
“징그럽네.”
인간이라면 몰라도 모조리 뱀파이어라니. 수십 번 쓰러졌다 깨어난다고 해도, 이런 광경은 두 번 다신 사양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순 땅이 흔들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붙잡으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젠장, 골이 울린다, 울려. 쓰러진 후유증이 꽤 길게 남는 듯했다.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제힐이 고개를 돌렸다. 이 지저분한 소음들 속에서도 용케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싶었다. 무심한 눈으로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더니, 한마디를 던진다.
“드디어 깨어났군.”
이제 깨어나서 거참 미안하군.
“미안. 좀 오래 잤나?”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의미 불명의 미소였다. 하지만, 그 뒤에 들려오는 말로 인해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었다.
“그대로 죽어 버리길 바랐지만.”
빌어먹을 놈. 걱정이라는 단어는 네 사전에 없는 것이냐. 노려보려 했지만, 관두었다. 내가 쓰러진 사이에 나를 지켜 주고 있던 건 믿고 싶진 않지만, 이놈이니까.
“그거 참 미안하네.”
이젠 어느 정도 어지러움이 가신 듯했다. 번뜩이는 여러 쌍들의 눈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저 새빨갛고 검은 눈동자들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인간들 중에서도 빨간 눈을 가진 사람은 있지만, 저렇게 동공마저 붉은색에 가까운 사람은 없었다. 눈동자마저 피에 굶주린 성미를 나타내는 듯해 조금 불쾌해졌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종족인 나의 몸에 역겨움이 치밀었다. 나는 죽어도 저들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주먹을 꽉 쥐며 주위를 훑어보다, 예의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다정스레 말을 건넸다.
“어머, 깨어났니. 꼬마야? 더 누워 있지.”
잠결에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휴에라였던가.
나는 아쉬움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전쟁과도 마찬가지인 이 판국에 오고 가는 대화치고는 참으로 나긋나긋했다.
“아줌마는 살아 있었네?”
휴에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도 꽤나 강적이었다.
“응, 안타깝게도.”
“아줌마라고 불러도 상관없나 봐?”
내 말에 그녀가 깔깔깔 웃었다. 배를 잡으며 웃는 꼴이 어지간히도 웃긴 모양이었다. 아줌마라 불리고서 저리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 봤다. 뱀파이어는 인간과 사고방식도 다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를 안다면, 아줌마 소리가 안 나올걸?”
눈초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기까지 하는 모습에, 나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몇 살이기에.”
“글쎄. 내가 며칠 전까지 잠들어 있었으니까. 한, 구천팔백오십 세 정도 되려나?”
태연한 그녀의 말에 그만 질린 표정을 짓고 말았다. 저건 아줌마가 아니라 거의 할머니, 아니 조상님 수준이다. 내 표정을 보더니, 휴에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또 웃는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이래 봬도 여자라서 상처받는단다. 게다가 나보다 많이 먹은 것들은 수두룩해. 이 정도면, 아직 청춘이라고.”
청춘은 무슨 얼어 죽을. 그쪽이 청춘이면, 나는 아직 태아 정도 되겠군. 태어나지도 않았겠어.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팩 돌려 버리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젠 여성체 뱀파이어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고 싶지가 않다. 이왕이면 평생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저건 엄연히 사기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 물렁물렁해진 공기를 되돌리는 날카로운 총성이 들렸다.
탕! 탕! 탕! 연속으로 울려 퍼지는 그 소리에, 다시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여자와 대화하다가 잊었는데 지금은 이리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새된 비명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키에에에에엑!”
“끄아악!”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냄새는 이윽고 무언가가 썩는 듯한 냄새로 변질되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위를 쥐어짜듯, 헛구역질이 나왔다. 나는 코를 틀어쥐었다. 젠장, 죽으려면 곱게 죽던가. 이게 무슨 냄새야. 무표정한 얼굴의 제힐이 뱀파이어들을 향해 두 자루의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은탄이 쏘아져 나왔던 총구에서는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채였다. 그 연기마저도 얼어붙을 듯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가 총을 빙그르르 돌려 잡더니, 탄환을 다시금 장착했다.
제힐은 총구를 다시 겨누며 말했다.
“잡담은 거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