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0)/
***
제힐은 잠이 든 아일과 페트리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두 녀석이 잠들고 나니, 주위가 굉장히 고요해졌다. 평소에는 이런 분위기가 일상이었다. 말을 거는 이 하나 없고, 곁에 있는 이 하나 없다. 하지만, 아일이 온 뒤로는 오히려 정적이 불편해질 정도다. 그리 많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는 자신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재킷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곤 아일을 한 번 바라봤다. 조금 망설임을 담은 손이, 재킷을 아일의 몸 위에 덮는다. 목까지 꼼꼼하게 덮어 준 뒤, 그는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쑤셨다.
아일이 자신과 가까워지려 하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함께 장단을 맞춰 줘야 하는 건가. 안타깝게도 제힐은 그런 것을 해 줄 수가 없다. 애초에 아일은 뱀파이어, 그는 뱀파이어 헌터. 섞일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는 품에 있는 총자루를 꽉 쥐었다. 마른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쏜다면, 아일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왜 자신은 그를 남쪽 섬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한 걸까. ……아일을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으로 있어 주길 바라서?
제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그에게 덮어 주었던 재킷을 다시금 주워 들었다. 뭐 하러 이걸 덮어 준 건지 모르겠다. 뱀파이어는 감기 따위 걸리지도 않거늘.
“……넌 왜, 나와 가까워지려 하는 거냐.”
‘너를 죽이려고 했는데.’
처음 만나자마자 총구를 들이밀었다. 죽으라고 말했다. 역겹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일은 멀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가오려고 한다.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피하고, 벽을 쳤다. 그에게 이끌려 갈 것만 같아서.
어쩌면, 그에게 은탄이 아닌 마취탄을 박아 넣었을 때부터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죽였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번이고 그 상황이 다시 오더라도. 자신은 아일을 죽이지 못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제힐의 입을 타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결국, 아일의 위에 다시 재킷을 덮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비가 많이 오니까.’라며 자신을 애써 납득시켰다.
눈을 끔뻑이던 페트리알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빤히 바라보는 짐승을 쓰다듬어 주며, 제힐은 벽에 등을 기대었다.
“으음. 아셴…….”
문득 들리는 소리에 제힐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일이 페트리알을 끌어안고 뺨을 비비고 있었다. 잠꼬대를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괜히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하지만, 곧 자각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제힐은 애써 아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제1황자, 테이 아셴 론 엘티미리온. 아일 카르스의 친우이자, 누구보다도 황제에 가까웠던 인물이다. 그를 지키다 죽은 아일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 건 지금도 아셴일 것이다.
제힐은 눈을 내리깔았다.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인간 같은 생각을 하고, 인간다운 행동을 한다. 그 모습에 마음이 흐트러진 것이리라.
제힐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난, 널. 죽일 거다.”
조금이라도 인간의 모습을 잊는다면,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다. 그는 다짐하며 총자루를 꽉 쥐었다.
그때였다.
“제힐. 친하게 지내ㅈ…….”
순간, 총을 떨어트릴 뻔했다.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아일은 여전히 꿈 삼매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총을 잡은 손에선 어느새 힘이 빠져나간 후였다. 친하게 지내자니. 도대체 뭘 어떻게, 지내면 된단 말인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언젠가는 죽여야 할 자를 가까이 두다니……!
거기까지 생각하다, 제힐은 그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언젠가는 죽여야 할 자.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그토록 아일을 멀리 하려던 이유를. 뱀파이어이기 때문이 아니다. 제 손으로 아일을 죽인 뒤, 죄책감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슬퍼하지 않기 위해서 가까이 둘 수가 없는 거다.
제힐은 저도 모르게 총을 떨어트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대체 언제부터. 그는 단잠에 빠진 아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기사단장이라 할 수도 없었고, 뱀파이어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순하고 맑았다.
문득, 스승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제힐. 이 세상에는 완벽한 악은 없단다.”(회상)/
그녀는 어린 제힐에게 베레타를 건네주며, 미소 지었다. 어린아이가 쓰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총이었다.
/“그러니, 이 베레타가 향하는 곳은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해.”(회상)/
그녀는 말했다. 분노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고. 몰락한 시리에스 가문에서 제힐을 구해 주었으면서도, 그녀는 그리 말했다. 총구를 잘못 겨누게 된다면, 그 탄환이 향하는 곳은 제 자신이 될 것이라고. 그릇된 선택으로 후회에 젖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그녀는 죽음의 순간까지 제힐에게 당부했다.
그는 떨어진 총을 주워 들었다. 은색의 베레타는 마른 땅 위에서도 빛을 발했다. 제힐의 시선은 자연스레 다시 아일을 향했다. 딱히, 그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 관계가 아닌 것도 아니다. 모르는 척하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으니까. 이제는 죽어도 그를 외면할 수 없으리라.
제힐은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가늘어진 빗줄기가 지면을 두드리고 있었다. 비가 곧 개일 것이다. 그는 한숨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이겼다, 아일.”
***
기지개를 쭉 켜며,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맑았다. 나뭇잎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굴러떨어진다. 그렇게 세차게 내리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나는 눈을 감으며,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상쾌함이 온몸에 퍼지는 기분이다.
그때, 등 뒤에서 제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일, 다 됐다.”
“아, 응!”
기분 탓일까. 제힐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러워진 것 같다. 말투는 예전과 바뀐 것이 없지만, 분명히 뭔가가…….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제힐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손에 들린 그릇에는 묽은 스프가 담겨 있었다. 그는 빨리 안 오고 뭐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황급히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었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힐의 스프는 페트리알과 나에 비해서 굉장히 적은 양이었다.
“그거 먹고, 괜찮겠어?”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먹어라.”
그릇을 들고 목 안으로 꿀꺽꿀꺽 삼켰다. 묽은 스프에 별맛이 있을 리가 없겠지만, 왠지 평소보다 식사 분위기가 편안하다.
그는 그릇을 비워내며, 말했다.
“이 숲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마을이 나온다.”
“마을?”
“매그리아다.”
매그리아라면, 예전에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축제로 유명한 마을이라는 것만은 기억난다. 물론, 그 축제를 즐겨 본 적은 없지만. 나는 그릇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는 꽤 편안한 곳에서 잠을 잘 수가 있겠다.
“아일.”
갑작스런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제힐의 손이 내 입가를 스쳤다. 화들짝 놀라자, 제힐이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프가 묻어 있었다.”
“아, 응. 고마워.”
역시, 제힐이 변했다. 절대 이런 걸 닦아 줄 위인이 아니다. 아니, 사소한 신체 접촉조차 안할 인간이다. 당황스러움에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 제힐과 페트리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벙쪄 있는 날 내려다보더니, 손을 뻗었다. 빤히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연다.
“가자.”
가슴 속에 환한 불빛이 번지는 기분이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응!”
비가 개였다. 그와 나의 사이를 가로막던 벽이 사라졌다.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서는 상쾌한 바람만이 불었다.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떠랴. 제힐이 드디어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것만큼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에게로 뛰어갔다. 내가 곁에 가자, 그제야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딱 맞는 보폭. 딱 맞는 속도. 매그리아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4. 라이벌
“흐아암.”
하품을 찍 내뱉으며, 고개를 떨쳤다. 옆에 앉은 복슬복슬한 페트리알의 목덜미를 꼭 껴안으며 뺨을 비볐다. 졸음이 밀려오는 눈에는 바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이 뭔, 축제라고 하더니 꽤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매그리아라는 마을은 일전에도 한 번 와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일 때문에 왔었던 터라 즐기질 못했다. 물론, 지금도 즐길 여유 따위는 없지만 말이다. 아니, 실은 축제 따위는 다 제쳐 두고서라도 어디 제대로 묵을 곳만 찾을 수 있으면 좋을 듯했다. 노숙을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끼익, 열리는 여관 문을 힐끔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땠어?’하는 내 물음에, 제힐이 고개를 내저었다. 젠장. 매그리아로 발걸음을 돌린 것이 실수였다. 하필이면 오늘이 축제 기간일 줄이야. 여관이란 여관은 죄다 꽉꽉 찬 바람에, 어디 쉴 곳이 없었다. 페트리알이 황궁에서 물어온 보석들로 여비를 마련한 건 좋지만 이래서야 어디 쓸 곳이나 있겠는가.
갸르릉거리는 페트리알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 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웬만한 곳은 다 찼을 것 같은데. 어쩌지?”
“정 안 되면, 오늘도 노숙을 해야겠지.”
‘별수 있겠어.’하는 말투에 나도 그러려니 하고 수긍했다. 제힐의 손이 뻗어 와 내 앞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져 주었다. 정돈되어 가는 머리를 보다, 문득 한 곳에 시선을 주었다. 저기도 여관이 하나 있네. 그도 내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는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최근에 느끼기 시작한 건데 제힐이 나를 보는 시선이 요즘 들어 많이 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죽이려 했던 인간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변화였다.
“들어갔다 올 테니, 페트리알과 여기서 기다려.”
“아니, 이번엔 나도 같이 갈래.”
페트리알이랑 둘이서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지루한데. 제힐은 두 번은 권하지 않았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우리 셋은 모두 여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역시 인산인해였다. 여기저기서 북적북적거리는데. 내 예상으론 여기도 방이 없을 듯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방이 남았냐는 제힐의 질문에, 여관 주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밥이라도 먹고 싶거늘 식당에도 자리가 남는 곳이 없었다. 망할 축제. 왜 하필이면 오늘 열리고 난리야. 꼬르륵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페트리알의 배 속에서 들려왔다. 그래, 너도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쯧 혀를 차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바닥에 비비적거리는 것이 꽤 귀여웠다.
“아오, 진짜. 왜 여기도 없는 거냐고!”
갑작스런 큰 소리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옆을 바라보자, 보라색의 무언가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 더는 못 걸어. 여기서 재워 줘!”
다 큰 놈이 저런 땡깡을 부리다니.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의 큰 목소리였다. 쉽게 볼 수 없는 보라색의 머리카락이 인상 깊었다.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웨이브 진 채, 목덜미에 흩어져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앞머리였다. 두 눈을 다 가릴 정도로 긴 앞머리는 그의 뺨까지 내려와 있었다. 저래서야, 앞이 보이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바닥을 이리저리 구르는 그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주인장의 일행이냐는 시선에, 우리 셋은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게 일행일 리가 없잖아.
땡깡 보라돌이를 밀어내는 모습을 보며, 우리 또한 밖으로 나왔다. 여관이란 여관은 다 찾아본 것 같은데. 이젠 정말 노숙을 해야 하나. 페트리알의 두 앞발을 붙잡아 이리저리 흔들었다. 힘없이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이 웃겼지만, 배고파서 웃음도 안 나왔다. 결국 앞발을 놓아주곤 힘없이 주저앉았다. 처량한 신세. 어디 가서 한탄할 곳도 없으니 더 서럽다. 팔짱을 끼고 선 제힐의 모습을 힐끔 보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쪽을 바라보는 여인들은 한 명씩은 모두 볼을 붉혀 댔다. 볼 붉힐 틈 있으면, 적선 좀 해 주지. 한탄 같은 투덜거림을 삼켰다. 낡은 여관 문으론 연신 손님이 들락거렸다.
그때, 페트리알이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내 바짓단을 잡아당기며 걸음을 재촉해 댄다.
“……페트리알?”
아니, 저기에 뭐가 있다고 그래. 페트리알이 날 끌고 가려는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좁은 골목길이었다. 음습하고 축축해 보이는 길이건만. 뭐, 저쪽에서 맛있는 사냥감이라도 발견했나?
져 주듯 일어나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난 페트리알이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힐의 옷자락을 잡아끌자, 그가 순순히 끌려 왔다.
“제힐, 저기. 우리 저기 안 가 봤지?”
“……확실히. 가 본 곳은 아니군.”
골목 틈으로는 여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쉽사리 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낡다 못해 부서질 것 같은 여관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신세가 어디 찬밥 더운밥 가릴 때던가. 결국 우리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좁은 골목길에는 먹다 던진 음식이라든가, 더러운 오물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코를 감싸 쥐게 만드는 악취에 속이 울렁였다.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오자, 여관은 더욱 가관이었다. 바람에 삐걱거리는 간판은 곧 떨어질 듯 보였다. 그리고 곧 떨어졌다.
쾅! 하고 떨어진 간판 소리에 페트리알의 등이 흠칫 굳었다. 썩은 나무 기둥과 녹슬다 못해 떨어지기 직전인 경첩이 눈에 보였다. 창문은 먼지가 끼어 있었고, 깨진 것들도 있었다. 세상에, 귀신 나오겠다.
“일단은 들어가 보지.”
제힐의 말에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아니라, 이거지. 하지만, 역시 들어가기 꺼려지는 건 마찬가지다. 페트리알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으며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서자, 습하고 눅눅한 공기가 확 끼쳐 왔다. 내부는 불 하나 밝히지 않은 건지 깜깜했다. 아니, 밝힐 불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식당처럼 보이는 1층에는 식탁이 고작 네 개뿐이었다. 그중 두 개는 또 부러져 있었다.
나는 인기척이 없는 허공을 보며 소리쳤다.
“실례합니다!”
카운터에서 곧장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스스한 머리를 한 노파가 꾸무럭꾸무럭 등을 펴더니 눈을 깜빡였다. 자다 일어난 것인지 모양새가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윽고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 손님이구먼.”
예, 그렇습니다만, 하고 답해야 하는 건가.
“방이 남았습니까?”
당연히 남았겠지만, 제힐은 그리 물었다. 그리고 역시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는 우리를 쭉 훑어보더니 중얼거렸다.
“어른 둘 하고, 짐승 하나.”
짐승도 세는 겁니까, 하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는 옆에 선 페트리알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방은 어떤 걸로 드릴까, 하고 묻는 말에 제힐은 “2인용 방으로 주시오.”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불쌍한 페트리알. 여관 주인장도 세어 주었던 존재를, 제 주인이 세어주지 않다니.
우리는 노인의 안내에 따라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낡은 계단이 삐걱삐걱 비명을 내질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계단에, 페트리알의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이거, 한 세 번만 걸으면 무너지겠다.
이윽고 도착한 방은 비교적 깨끗했다. 침대도 꽤 넓었고, 테이블과 테라스도 있었다. 낡아 버린 양탄자쯤이야 별 문제도 되지 않는다. 노인은 그럼 잘 쉬다 가라는 인사를 남기며, 방을 나갔다.
“그래도 다행이네. 어찌 됐든 구해서.”
내 말에 제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래 머물 곳도 아니니, 그리 좋은 방은 필요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이 편이 더 좋은 듯했다.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고, 조용하고 숨어 지내기엔 딱이지 않은가.
제힐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아, 드디어 제대로 쉴 수 있단 생각이 드니,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침대에 털썩 앉자 쿠션감이 꽤 좋았다. 물론, 다른 여관들에 비하면 턱없이 떨어지는 질이겠지만 흙바닥에서 잤던 우리에겐 충분히 괜찮은 곳이었다.
졸음이 밀려오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다시금 하품이 새어 나왔다.
“피곤하면, 자라.”
아니, 괜찮아, 라고 말하려고 했건만 제힐의 손바닥이 내 머리를 꾹 눌러 왔다. 요즘 생각하는 건데, 거리가 상당히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 허물없이 내게 손대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나름 바라던 일이기는 했지만, 상당히 빠른 듯해서 조금 어안이 벙해질 때가 많았다.
눈가를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피곤하다지만, 여관에 오자마자 자서야 쓰겠어. 제힐이랑 페트리알이 이리 버티고 서 있는데. 나는 테라스로 나가 숨을 내쉬었다. 탁 트인 아래로는 건물과 사람들이 보였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단언컨대, 지금 이 말은 내가 한 게 아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목소리가 상당히 익숙한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시선이 마주쳤다. 아니, 정확히는 시선이 마주친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인간은 눈이 없으니까. 보랏빛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동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보라돌이 땡깡. 내 머리를 스치고 단어는 그것뿐이었다.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난간에 발을 올리는 모양새가 심상치가 않다.
서, 설마.
놀랄 새도 없이 놈이 폴짝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이쪽 테라스로 넘어왔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진짜로 넘어왔다.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녀석을 향해, 나 또한 손을 흔들어야 하는 건가 하는 쓸모없는 고민을 했다. 힐끔 녀석의 어깨 너머로 바라본, 난간과 난간 사이의 거리는 꽤 넓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넘을 엄두도 내지 못할 거리였다. 제정신이 아니다. 아니, 그전에 왜 넘어온 거야?
“안녕. 여기서 또 보네?”
친근하게 건네는 인사에 착각을 할 뻔했다. 나, 쟤랑 아는 사이였던가. 하지만, 그건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멍청한 생각이었다. 나는 저런 놈을 모른다. 얼굴의 반을 가린 앞머리라든가, 소매가 넓은 특이한 옷이라든가. 저런 인간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놈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이야. 여관 찾기 드럽게 힘들다, 그치?”
힘들긴 힘들었지만, 답해 주고 싶진 않다. 빙글빙글 웃는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어딘가가 이상했다. 고정된 웃음 같다고 해야 할까. 위화감이 들었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놈의 옷자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 천 쪼가리는 대체 뭐지. 놈이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또다시 빙긋 웃었다. 그리곤 마치 친구에게 물건을 자랑하듯 말했다.
“이 옷 신기하지? 저 먼 동방에서 구해 온 거야.”
아, 그러세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나는 지금 갈등 중이었다. 놈을 이대로 쫓아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려야 하는 건지. 솔직히 말하자면 후자 쪽으로 더욱 생각이 기운다. 이유는 근본도 알 수없는, 수상한 놈이라는 데에 있었다. 혹여나, 베르한이 보낸 놈일 수도 있다.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나는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익숙한 감촉의 검 자루가 손에 잡혔다. 여차하면 뽑아 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보다는 제힐의 손이 더 빨랐다.
철컥.
“예의가 없는 놈이군. 남의 방에 함부로 흙발을 들여놓다니.”
하지만, 역시나 이 보라돌이는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뒷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녀석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 미안. 그럼 인사하고 들어오면 되는 거지?”
뭐? 하고 되물을 새도 없었다. 녀석이 곧장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실례하겠습니다아.”
늘어지는 말꼬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90도로 꺾인 허리는 부담스러웠다. 정말로 인사했다. 이제 어쩔 거냐는 식으로 제힐을 바라보자, 그도 할 말을 잊은 모양이었다. 보라돌이가 다시 웃으며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리고 우리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대체 이 위화감은 무엇일까. 싱긋싱긋 잘도 웃는 낯짝이지만, 저 얼굴을 백 퍼센트 믿을 수는 없었다. 대놓고 얼굴을 드러내는 놈들의 웃음도 가식이 대부분이거늘. 앞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려 놓은 놈은 하물며 어떻겠는가.
저 웃음의 진위도, 놈이 하는 생각도 전부 읽을 수가 없었다. 이것을 노리고 앞머리를 기른 것이라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화감은 컸다.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 만큼이나.
하지만, 내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제힐이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뱀파이어가 한가롭게 마실이라니. 느긋해서 좋겠군.”
─뱀파이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보라돌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줄곧 느끼던 위화감은 바로 그것이었나. 녀석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더욱 짙게 입꼬리를 말아 올릴 뿐이었다.
“거 참 딱딱한 인간일세. 융통성이라곤 요만큼도 없구만.”
손가락을 둥글게 말며, 요만큼에 강조를 해 온다. 저 말은 곧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듯싶다. 제힐은 총구를 그대로 다시 들이밀었다.
“당장 나가.”
보기 드물게 유예시간을 준다. 보통 같았으면 곧장 총을 갈겨 댔어도 이상할 게 없거늘.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인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뱀파이어에게 호의를 보이는 건 아니었다. 최근 들어 나에게 약간이나마 유하게 대하고 있을 뿐이지 그의 뱀파이어에 대한 증오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럴 텐데 어째서 바로 공격을 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그럼에도 보라돌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또 한 걸음 다가오는 움직임에 나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