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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때, 아셴이 입을 열었다.
“이번만 눈감아 주도록 하겠네.”
관대한 처사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 또한 그대를 다른 이로 착각할 뻔하였으니.”
처연한 눈동자에 가슴이 아려 왔다.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하여, 눈가가 젖어 들었다. 다행히도 그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에, 이런 날 보지 못했다. 내가 널 잊지 못했듯, 너도 날 잊지 못했구나. 죽은 이를 그리는 것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알면서도 나는 눈앞에 있는 게 나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가 보게.”
아셴은 곧장 등을 돌렸다. 쓸쓸해 보이는 등이 점차 멀어져 갔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잡히지 않을 만큼 멀어진 뒤였다. 답답했다. 모르는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토록 답답하고, 가슴이 저미는 일이었던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달려가 자신이 아일 카르스라고 말하고 싶었다. 농담이라고 웃으며 끝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결국, 뻗었던 손을 내렸다.
“기다려, 아셴. 모든 게 끝나면 널 다시 만나러 올게.”
주먹을 꽉 쥔 채, 등을 돌렸다. 흐려지려는 눈동자에 애써 힘을 주며 발을 움직였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내 자리를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검이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모든 일이 정리될 때까지는 모든 걸 가슴속에 묻어 두자. 아셴도, 베르한도. 당분간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살자. 꽉 쥔 주먹에 힘을 줄 때마다 손바닥이 저릿해졌다. 새하얗게 도드라진 뼈에 모든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은 검을 찾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제힐의 모습에 나는 더욱더 빨리 땅을 박찼다.
계단을 뛰어올라 왔을 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두 무릎을 짚은 채 숨을 훅 내쉬었다. 나는 가는 길을 망설이지 않았다. 아셴과 만난 후,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 탓이었다. 베르한이 언제나 집착하던 방. 아마 내 검은 거기 있을 것만 같았다.
나를 이상하게 보는 하녀들을 지나, 모퉁이를 돌고 수십 개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간혹, 경비병들이 보일 때면, 구석에 숨어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의외로 그곳에 도달하는 것은 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4층 복도에 서서 팔짱을 꼈다. 이곳은 황제만 사용하는 방들이 줄지어 늘어선 곳이었다. 하지만, 베르한의 성격이 성격인지라, 경비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출입이 쉽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베르한이 그리 허술할 리는 절대 없으니까. 베르한의 어린 시절, 그가 무슨 수를 써서도 들어가려 했던 방이 여기 있었다. 하지만, 그 방은 황제 폐하의 명으로 인해 그는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방일까, 하고 매일같이 고민해 보았지만. 그 방은 선왕 폐하께 있어선 금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곤 했었다.
나는 복도의 끝을 바라보았다. 음습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희미한 오렌지빛이 그곳에만큼은 닿지 않았다. 일부러 불을 켜 두지 않은 듯했다. 아니, 애초에 촛대가 그 주위에는 없었다. 베어 낸 자국이 여실한 촛대가 시야에 닿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연회가 한창인 아래층과는 꽤나 다른 분위기였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옛날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뱀파이어가 된 내가 이 향을 놓칠 리가 없었다. 금으로 된 촛대에 비친 내 눈동자는 희미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청동빛과 핏빛이 섞인 눈동자는 기이한 색이었다. 짙은 혈향이 코끝에 번졌다.
나는 이윽고 그 방 앞에 멈춰 섰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던 방. 베르한이 그토록 집착했던 방.
단단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황성에서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거지?”
문을 뚫어 버릴 기세로 노려보았다. 풍기는 것은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있었다. 베르한일까? 아니, 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한이라면 제힐이 필사적으로 붙들어 매고 있을 테니 말이다. 더군다나 눈치를 채고 올라오려고 했다면 애초에 베르한은 제힐을 뿌리쳤을 것이다. 속아주는 셈 치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에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뭐가 어찌 되었든, 확인하면 그만이겠지.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다른 방과는 달리, 이 방은 기름칠을 하지 않은 건지 경첩이 뻑뻑하게 돌아갔다. 끼이익- 하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발을 한 걸음 방 안으로 내딛었다. 발아래에는 부서진 유리 파편들이 즐비했다. 새하얗게 흐드러진 꽃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은 이, 피 냄새였다.
“손님이 왔는데, 냄새를 풍기면 안 되지. 예의도 없나?”
쾅!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히고, 나는 더 안으로 들어섰다. 주위는 깜깜했지만, 바닥에 흩뿌려진 피만큼은 선명했다. 적어도 나의 눈에는 그래 보였다.
방은 특이하다고 해야 할지, 기이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이상한 곳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베르한이 어째서 이곳에 그리도 집착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는 달빛만이 투과되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유리관은 처참하게 깨져 있었다. 냉동고마냥 서늘한 기온에 손끝을 매만졌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일까. 선왕이 죽은 지 1년이 지났으니, 이 방이 원래 어떤 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꺼림칙한 곳이라는 것만은 알겠다. 그다지 오래 발을 붙이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후드를 뒤집어써서일까.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장신의 사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나는 인사라면 인사라 할 수 있는 말을 툭 내던졌다.
“네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지. 애초에 관심도 없으니까.”
사내의 손에는 피가 흥건했다. 무슨 짓을 했을까.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그때, 사내가 무언가를 내게로 휙 던졌다.
꽤나 묵직한 것이 손안으로 들어왔다. 그 무게에 팔이 아래로 푹 꺼졌다. 나는 곧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것이 무엇인지 구태여 확인을 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손에 쥐어지는 이 감촉을 알고 있었다. 내가 찾고 있던 검이었다. 세밀하게 새겨진 세공도, 손에 익숙한 무게도 모두 그대로였다. 떨리는 손으로 검신을 더듬다가, 고개를 들었다.
“……너, 뭐야.”
관심도 없다는 말은 취소다. 어찌하여 그가 이 검을 가지고 있으며, 어째서 내게 건네주는 건가. 그리고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태도가 아주 거슬린다. 이 방에 들어와 있다는 건 베르한의 사람이란 말인데, 이 검을 내게 주는 저의가 뭐지? 생각하는 거라면 이제 진저리가 쳐지는데, 또 머리가 핑핑 돌아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황제는 술래잡기를 좋아하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라는 말이 튀어 나가려던 찰나,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저도 모르게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분주한 움직임. 묵직한 소리가 땅을 밟으며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틀림없다. 저건 베르한이 보낸 자들이었다. 병사들이 한꺼번에 4층으로 몰려든 것이었다. 그제야 사내가 한 말이 이해가 되었다.
“제기랄!”
주위를 둘러보았다. 숨을 만한 곳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숨는다고 하여 발각이 되지 않을 턱이 없다. 이 휑한 방 안에서 사람 하나 못 찾을까. 못 찾는다면 바보겠지. 그것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바보들! 결국, 나의 시선은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검은 커튼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다른 방에 비해서는 꽤나 좁은 테라스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그리 높지도, 그리 낮지도 않은 나무들이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발자국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나는 이리저리 재어 볼 것도 없이 곧장 테라스를 향해 달렸다. 동시에 문이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고, 차가운 쇠붙이의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검을 빼어 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기다려 줄 정도로 내 성미는 느긋하지 않다. 나는 미동 없이 서 있는 그를 스쳐 뛰었다. 그 찰나의 시간에, 그에게로 힐끔 시선을 돌린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빠른 잔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검고 검은…….
“너……!”
“잡아라!”
하지만, 그와 대화를 하기는커녕 말도 다 이을 수가 없었다. 나는 쉬이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애써 돌려 테라스의 난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찬바람이 몸을 때리고,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이 자식아! 너 목 씻고 기다리고 있어!”
그때 당했던 것의 배로 되돌려 줄 테니까, 하는 말은 목 안으로 삼켰다. 등을 돌린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내 몸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파사사사삭─하는 소리를 내며 몸이 나뭇잎을 헤치고 아래로 떨어졌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펴졌다. 바닥을 디딘 발에 저릿함이 퍼졌지만, 지체할 틈은 없었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절대, 놓치지 마라!”하는 경비들의 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수풀 안으로 들어서기 전,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예상대로 사내 또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선이 얽혔다. 동시에 눈이 새빨갛게 변하고, 송곳니가 날카롭게 맞물렸지만, 이성이 그것을 붙잡았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하지만, 다음에 만난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 반드시 그 목을 베어 버리고 말 것이다. 서늘한 다짐을 새기며,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달리는 것만 남았다.
수풀을 헤치며, 필사적으로 발을 굴렸다. 더 이상은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나의 허리에서는 이미 두 자루의 검이 흔들리고 있었고, 친우의 얼굴 또한 확인했다. 이것으로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제힐은 아마 빠져나왔을 것이다. 베르한과 마주해서 무사한 인간은 없지만, 나는 그를 믿는다. 반드시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다.
하지만, 내 발은 수풀을 막 빠져나가려던 직전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경비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 어째 좋게 좋게 풀린다고 생각했다.
“흥. 도망치는 놈들의 머리는 다 똑같지. 얌전히 무기를 버리고 승복하라.”
내가 이쪽으로 올 거라는 건 생각했으면서 왜 내가 승복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건지. 진부한 대사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 손은 자연스레 검을 빼어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되찾은 건데, 버리긴 왜 버려.
“얌전히 잡힐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좀도둑놈. 쳐라!”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요란한 움직임에 시선을 주며, 눈을 감았다 떴다. 검을 치켜든 자들의 몸을 시선으로 훑었다. 나는 그들을 피하지도, 그렇다고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지척까지 다가온 검날이 이마를 스쳤다. 허리를 뒤로 물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적은 대략 열 명 정도. 신발 끝을 땅에 비비며, 이윽고 자리를 박찼다.
일순, 바람이 불었다. 아니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났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며, 허공으로 핏줄기가 튀었다.
눈을 크게 뜬 채 굳은 자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나의 검은 이미 그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내 등 뒤를 향한 채였다. 바닥엔 널브러진 그의 부하들이 있었다. 풀 자락을 적신 핏방울들이 코를 간질였다. 주위에는 부러진 검날들이 즐비했다. 단장으로 보이는 자의 시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단장이라는 자가 너무 가볍군.”
그 누구보다도 앞에 섰어야 하는 자였다. 부하들의 사기를 끌어야 하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부하들이 쓰러지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허리에 찬 검을 단 한 번이라도 뽑아 본 적이 있나.
머릿속을 스치는 기나긴 전쟁들. 그곳에서 죽어 나갔던 부하들은 여전히 내 가슴을 죄어 온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임에도 죽어 버린 자식들을 보며 오열했던 가족들의 모습이, 내 눈을 아프게 만든다. 한 무리의 수장이란 자리는 그런 것이다. 수십 명의 목숨을 짊어지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멍청히 눈을 깜빡이는 그를 보며, 낮게 읊조렸다.
“전쟁에서는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수로 밀어붙일 수 있다 하여 일제히 달려든다면, 개죽음을 당할 뿐이지.”
칼을 한 번 휘둘러 혈흔을 털어냈다. 짧게 자란 풀에 새빨간 것들이 튀었다. 검을 집어넣자,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그가 주저앉았다. 애초부터 나는 이들을 벨 생각이 없었다. 황망해진 얼굴은 떨리는 숨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그를 스쳐 지나가며,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부하의 목숨을 가벼이 생각하지 마라.”
자신을 벨 생각이 없다는 걸 안 건지 그의 몸이 무너졌다. 바닥을 짚은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부하들은 죽지 않았다. 아마, 전쟁이었다면 손조차 써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딱히 그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내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했던 것뿐이었다.
떨리는 등을 보다, 나는 이윽고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그 이후로는 나를 막는 자들은 없었다. 뒤에서는 희미하게,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지만 쫓아오는 발걸음은 없었다.
나는 황성의 뒷문을 빠져나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경비대에게 발목만 붙잡히지 않았으면 되는데. 나는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성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건 좋은데, 제힐과 페트리알이 보이질 않았다. 설마, 당한 건가 싶었지만, 그리 쉽게 당할 위인들이 아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이다, 아일!”
숲 속의 나무 뒤에서 제힐이 고개를 내밀었다. 곧바로 그들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둘 다 상처 하나 없는 모습들이었다. 역시 무서운 것들이라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힐이 내 허리춤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무사히 가져온 것 같군.”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제힐이 빠져나온 황성을 돌아보며 질린 표정을 했다. 그러곤 돌연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다음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거다.”
“뭐?”
“─라고, 황제가 네게 전하라고 하더군.”
역시, 베르한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몸이 흠칫 떨렸다. 자연히 사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는 술래잡기를 좋아하지.”(회상)/
지금부터가 술래잡기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느긋하게 사냥감을 몰아넣는 걸 좋아한다. 지금은 그저 즐기고 있는 것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면 그대로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이다. 지금쯤 도망가는 우리를 생각하며 그는 웃고 있을 테다. 빌어먹을 놈. 궁지에 몰린 사냥감이 언젠간 네 목을 물어뜯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거다.
황성에 시선을 두고 있던 제힐이 몸을 돌렸다.
“그만 가지. 갈 길이 멀다.”
그 말에 답하듯, 나 또한 몸을 돌렸다. 우리가 빠져나온 황성은 잠잠했다. 병사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쯤 연회가 한창일 황성은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내며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서늘한 목덜미를 매만지며, 걸음을 옮겼다. 황혼이 밀려온 대지는 어둠에 삼켜져 있었다. 허리춤에 묶인 검을 매만지며,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왠지 기나긴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남쪽 섬으로 향하는 그 길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이제 막 시작된 여행은 불안함 반, 설렘 반이었다.
3. 움직이는 마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성에서 탈출한 지 일주일. 우리를 쫓아오는 이들은 없는 듯했다.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쫓을 모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마음에 안정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는 숲의 중앙에 서서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오른쪽?”
“…….”
말이 없는 제힐에,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이번엔 반대쪽을 가리켰다.
“그, 그럼 왼쪽?”
“…….”
아, 말을 해! 말을 해야 어디로 가든 갈 거 아냐! 나는 거칠게 뒷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서 고민 중이다. 숲이 정확히 양 갈래의 길로 나눠진 것이다. 이쪽으로는 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손쉽게 길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감이 좋은 페트리알에게 부탁을 해 보았지만, 이 짐승은 고기를 못 먹어서 힘이 없단다. 페트리알의 등에는 작은 짐 꾸러미가 메어져 있지만, 그 속에 고기는 없다. 간소한 식기도구들과 여비를 위한 보석들이 전부.
나는 결국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나도 모르겠어!”
“해가 지기 전에 결정하지 않으면, 노숙을 해야 한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숲의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다홍빛이었다. 해가 저물고 있다. 숲이 완전히 어두워지게 되면, 우리는 움직일 수가 없다. 밤의 숲은 여러 짐승들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뱀파이어.
나는 고개를 내려 갈림길을 뚱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이럴 땐 그 방법이 최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검을 빼 들었다. 그러곤 살포시 땅 위에 세웠다. 비틀거리던 검이 툭하고 쓰러진다. 오른쪽이었다.
“자, 가자! 오른쪽이라네?”
제힐이 그런 날 보며 혀를 찼지만. 뭐 어떠랴. 우선은 갈 방향이 정해졌는데. 내가 검을 주워 들자, 제힐과 페트리알은 나를 스쳐 걷기 시작했다. 내가 가리킨 오른쪽 방향이었다.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사람이 검을 줍고 있으면 좀 기다려 주든가 아니, 하다못해 걷는 속도라도 늦춰 주던가. 속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제힐이 나를 못마땅해하는 건 알겠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마음을 열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뭐.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발전이다만은. 그래도…….
“……이런.”
제힐이 혀를 찼다. 왜 그러나, 쳐다보자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그 눈을 따라 나또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물방울이 속눈썹 위로 툭 떨어졌다. 투둑투둑 한 방울씩 지면을 때리는 것은 비였다. 얼굴이 낭패감으로 젖었다.
“저 나무 아래로 들어가지.”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무 기둥의 밑동 부분이 움푹 패어 있다. 마치, 굴처럼. 비를 피하기에는 제격인 장소였다. 우리는 고민 없이 그곳을 향해 뛰었다. 공간은 딱 세 사람이 들어갈 정도였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과 옷을 털어내자, 때마침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꼭 정글에서 내리는 스콜 같았다.
나는 땅 위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결국, 오늘은 여기서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겠다. 착잡한 한숨을 삼켰다. 손을 내밀자, 손바닥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내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적어도 내일 아침은 되어야만 그칠 것 같다.
제힐은 재킷을 벗어 탈탈 털더니,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빗줄기가 거세지기 전에 들어온 탓에, 젖은 부분은 별로 없었다.
나는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덮는 것만 같았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빗소리는 맑았다. 땅이 젖는 냄새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펼쳐진 것은 단단한 벽이었다. 불편한 정적이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제힐을 힐끔 쳐다보았지만, 그 또한 밖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페트리알이 우리 사이에 길게 누워 하품을 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털을 비비적거렸다.
시선을 데굴데굴 굴리다 아무 말이나 꺼냈다.
“……비가, 많이 내리네.”
제힐도 눈으로 보고 소리로 듣고 있으니, 그쯤이야 알겠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빗줄기로 시선을 던진 채 답했다.
“그렇군.”
그리고 또다시 정적. 페트리알의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우리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대화가 별로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 안 한다기보다,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제힐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묻는 말에 대답해 주거나, 정말 필요한 말이 아닌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격 탓이라기보다, 일부러 그러는 듯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벽이 그와 나 사이에 있다. 내가 다가갈 틈을 제힐은 만들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 대고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그러는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내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그때, 탁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제힐이 돌을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마찰이 일어나는 돌에서는 작은 불씨가 연신 튄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른 풀들과 가지를 구석에서 모아 왔다. 그의 앞에 살며시 내려놓자, 때마침 일어난 불씨가 풀에 옮겨 붙었다. 작은 모닥불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귀족치고는 예사롭지 않은 솜씨였다.
“불 피우는 거 잘 하네? 쉽지 않은 건데.”
“뭐, 여러 번 해 봤으니.”
또다. 또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한다. 숨 막히는 벽이 느껴진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다, 페트리알의 옆에 다리를 펴고 누웠다. 끌어안은 짐승의 목은 따뜻했다. 북슬북슬한 까만 털이 뺨에 닿았다. 나는 지체 없이 눈을 감았다. 그냥 잘 테다. 이 불편한 공기 속에 있을 바에야,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낫다. 모닥불의 온기가 좁은 공간에서 일렁였다.
눈을 감은 머릿속에선 여러 생각들이 둥둥 떠다녔다. 나는 제힐과 왜 가까워지려 하는 것일까. 제힐처럼 나 또한 신경을 꺼 버리면 될 텐데. 왜 굳이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 관심을 받으려 하는 걸까. 난 대체, 그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지. 생각들은 한숨이 되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페트리알의 털에 얼굴을 묻자, 포근함이 밀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