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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아무도 없는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노을이 지듯 오렌지빛 조명이 내려앉은 복도는 고요했다. 발자국 소리 또한 느긋하였기에, 자칫하면 산책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까만 속눈썹이 생각을 하듯 느릿하게 여닫혔다. 베르한은 조금 전에 보았던 블레디 크림슨이라는 자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와인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청동빛의 눈동자. 확실히 그가 아는 인물 중에는 그런 외모의 소유자는 없었다. 짐승에게 위협을 당하는 것을 구해 줬다는 말도, 거짓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이 께름칙한 느낌은 무엇일까. 아니, 실은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그저 믿기지가 않을 뿐. 잔잔하게 걸치고 있던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무서우리만치 표정이 없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유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르한의 뒤엔 한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붉은 옷을 입은 사내가 허리를 숙여 왔다.
“예, 폐하.”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블레디라는 자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허리를 숙이던 그 모습과 인사를 올리는 어투, 짐짓 슬픈 표정을 짓던 얼굴까지. 하나하나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당도한 곳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냉동고마냥 얼어붙은 공기가 발치에 닿았다. 방 안은 음습하고 칙칙했으며, 바닥에는 하얀 꽃이 한가득 널려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투명한 유리관 하나만이 자리한 채였다.
베르한은 그 안에 발을 들여놓으며 명했다.
“그 둘을 감시하도록. 그리고 블레디 크림슨이라는 자에 대해서 알아보아라. 아니, 그 이름도 진짜가 아닐 테니 인상착의를 가지고 찾아보도록. 모습은 기억하고 있겠지?”
바닥을 밟을 때마다, 꽃잎들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유리관 안을 내려다보았다. 음영이 진 속눈썹 아래가 파르르 떨려왔다. 마치 웃음을 참는 것마냥.
“반드시 물증을 찾아오도록.”
“존명.”
유앤이라 불린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다시금 사라졌다. 베르한은 다정한 손길로 유리관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 손길은 마냥 다정하다고만은 볼 수가 없었다. 진득하면서도 서늘했다. 마치 피가 얼어붙은 검처럼.
유리관 속에 시선을 두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이 속에 있어야만 하는 것을 아니, 있었던 것을 눈으로 그려 보았다. 하얀색의 머리카락, 금갈색의 눈동자. 기사복을 입은 청년의 싸늘한 주검을.
“많이 둔해졌군. 감히, 그런 식으로 나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차게 얼어붙은 유리관은 시렸고. 얼어붙은 꽃들도 차가웠다. 하지만, 그는 즐거웠다. 즐거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그가 말끝을 맺었다.
“아일 카르스.”
허공에 흩어지는 목소리는 낮은 웃음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베르한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검을 뽑아 들어 올렸다. 그리곤 가차 없이 유리관 위에 내리꽂았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단단했던 유리관이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부서졌다. 그 누구도 쉽게 믿기 어려운 힘이었다. 파편이 스친 볼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렀다. 하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검을 두 손으로 짚은 채 허리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텅 빈 방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는 그 공기만큼이나 서늘했다.
만나서 반갑다고 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오랜만이라고 말해 주랴? 큭큭거리며 연신 웃음을 내뱉던 그가 문득, 웃음을 뚝 멈추었다. 고개를 기울이자, 그 시선은 다시금 유리관을 향했다. 나른함이 묻어나는 움직임이었다.
“재밌어지겠구나.”
그는 이윽고 검을 거두었다. 발아래에 흩어진 파편들이 반짝였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는 방을 천천히 나갔다. 끼익 닫히는 문 안에는 부서진 유리관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리관 속에는 그 무엇도 들어 있지 않았다.

***

제힐의 예상대로 의원은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나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맥도 짚어 보고, 이마도 한 번 짚어 보고, 또 고개를 갸웃거린다.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어디 한 군데 아픈 곳은 잡아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멀쩡하니 뭔가 이상하다 싶을 거다. 당연하지. 난 아픈 데가 없는 걸.
“기억이 없으시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머리가 아프십니까?”하는 질문에, ‘이젠 괜찮아요.’하며 그를 내보냈다. 1년 만에 의원도 바뀐 건지 옛날에 나랑 입씨름을 해 댔던, 그 할아범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아마 황성은 꽤 많이 변해 있으리라.
나는 상체를 일으켜 어깨를 빙글빙글 돌렸다. 젠장, 가만히 누워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제힐이 준다던 신호는 대체 언제 오는 걸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힐일까, 싶었지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상외로 베르한이었다. 마치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딱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에 입만 벙긋거렸다. 저놈이 여긴 무슨 일로 찾아왔지. 미심쩍은 눈초리를 애써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쩐 일이십니까?”
“내빈의 몸이 좋지 않은데, 어찌 집 주인의 마음이 편하겠나.”
퍽이나. 차마 겉으로는 내던질 수 없는 비웃음이었다. 문가를 힐끔 쳐다보다 그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한시라도 빨리 아셴과 검을 찾아야 하는데. 하필이면 이놈이 들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무릎 위에 얌전히 올린 손끝이 저려 왔다.
저 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모든 것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시선. 사소한 감정 하나 읽을 수 없는 눈동자. 그리고 나른하게 내려앉은 속눈썹까지. 그와 이리 마주할 때면 항상 심장이 바르르 떨려 오곤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짐짓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베르한이지만, 그 속은 과연 어떠할까. 저 미소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나는 무르지 않다.
“저는 괜찮으니, 그리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밖에서 다들 기다리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내고 한숨을 돌렸다. 생전 쓰지도 않던 신경을 왜 쓰는지 모르겠다. 그건 베르한이 변해서가 아닐 것이다. 필시 무언가가 있다. 날카로운 창이 내 심장을 꿰뚫기 전에 피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황제를 두고 나가 버릴 순 없는 노릇이니, 그가 나가게 만들어야겠지.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내가 원한 답도 원하지 않던 답도 아니었다.
“여전히 당돌하군.”
일순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얼빵한 소리가 나가고 말았다.
“……예?”
“아무것도 아니네.”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손끝의 저릿함이 발끝까지 퍼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한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헛소리를 지껄일 위인이 아니기에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다시 묻는다 하여도 그는 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다시 물으면 그건 또 그거대로 이상하다. 홀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꼴이 들통이 나버릴 테니까.
베르한은 그런 사소한 것을 놓칠 정도로 촉이 나쁜 놈이 아니다. 맹수 앞에서 갸르릉거리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나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는 벌써 노을이 밀려들고 있었다. 붉게 삼켜진 하늘 틈으로는 희미한 달그림자가 보였다. 머릿속이 멍해질 정도의 기이함. 그리고 기묘한 전율. 등골을 스치는 감각은 소름이라 할 수도 있었고 환희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감정인지는 알 수가 없다.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창문에서 고개를 돌렸다. 방 안에는 달그락거리는 찻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따스한 향기가 마음을 안정시켰다. 찻잔을 매만지며 시선을 힐끔 들어올렸다. 베르한은 애써 나를 찾아온 주제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차나 마시자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초조함만 쌓여 간다. 쌓이고 쌓이는 초조함, 저리다 못해 차게 식는 손끝, 떨리는 숨결. 모든 것이 나를 미치게 할 것만 같았다. 계속 이렇게 견디다 보면 곧 폭발할 것처럼.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곧 베르한의 입이 열렸다.
“그대를 보니, 신기한 기분이 드는군.”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단순한 감상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건가.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곧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한때, 소중했던 친우가 있었다. 그자는 이렇게 날이 저물 때면, 항상 하늘을 보곤 했지. 그래서 나도 가끔은 떠올리곤 했다. 그자의 머리카락이 노을과도 같은 붉은 빛이었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지. 아니, 노을이 아닌 핏빛을 닮은 붉은 머리카락이었어도 괜찮을 것 같더군.”
미간을 찌푸렸다. 베르한의 친우? 그런 게 있었던가. 내가 그의 사생활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친우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늘은 핏빛이었다. 베르한이 입에 담았던 그 핏빛 노을 말이다.
그것을 보고 있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약물에 몸을 담그고 나온 것마냥 정신이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피가 싸하게 식는 기분이다. 소름이 끼치는 건가. 아니다. 그것과는 무언가 다른 기분이었다. 나를 보는 까만 눈동자에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가볍게 걸친 미소가 신경 쓰인다.
나의 신경은 그가 말한 친우라는 존재에게로 옮겨졌다. 베르한의 친우. 그것에 힌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떠올린다 하여 답이 나오는 것이었으면 이런 기분은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심복을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하다. 그는 심복을 친우로 둘 정도의 성정이 되지 못한다.
그때, 그의 손등이 내 뺨에 닿았다. 어깨가 움찔거렸다.
뺨을 쓸어 만지듯 스친 손이 부드럽게 머리카락 끝을 매만져 왔다. 황홀경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나긋하게 퍼진 미소가 그랬고, 손끝에 묻어 나는 조심스러움이 그랬다. 그의 체온이 닿는 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날 것만 같았다. 나와는 달리 와인을 마신 그의 체온은 조금 높았다. 제힐의 차가운 손과는 달랐다.
차게 메마른 입술이 바르르 떨려 왔다. 그는 그런 내 상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대가 마음에 들어. 마치 내가 상상했던 것이 실체화 된 것 같아, 말이지.”
“소, 소인과 친구분이 꽤나 닮았던 모양입니다?”
“꽤 닮은 게 아니라, 아주 빼다 박았지. 특히 그 성격이.”
아주 기나긴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차게 가라앉는 공기 속에선 숨조차 마음대로 뱉을 수가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건만, 내게는 마치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나를 살피는 두 눈동자는 진득했다. 나의 표정 하나하나 모두 쫓아올 것만 같았다. 그 탓에 미간을 찌푸리지도 눈썹을 꿈틀거리지도, 심지어 마른침조차 삼킬 수가 없었다. 묶인 듯 그 시선과 마주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실은 그가 말하는 친우라는 게 누굴 뜻하는 건지. 나는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저 회피하려고 했던 것일 테다. 하지만, 쐐기를 박는 저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말았다. 그렇다고 수긍할 수는 없었다.
베르한과 나는 친우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게 따뜻하고 산뜻한 관계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나와 베르한은 어떤 사이였던가. 그것은 확실히 짚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간혹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었고, 지나가다 또 마주치면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적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했고, 아군은 더더욱 아니었다. 물론 마지막은 적으로서 장식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완전히 적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엔 너무도 애매모호한 관계.
그러니, 결코 아닐 것이다. 친우라니. 그게 어딜 봐서 친우란 말인가. 친우라는 건 아셴과 나를 뜻하는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안심시켰지만, 마주 본 베르한은 즐거워 보였다. 턱을 괸 채 속이 보이지 않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 손으로 와인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리며 속눈썹 아래에 그늘을 드리웠다. 도수 높은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심장이 죄여 드는 것만 같았다. 막힌 숨을 뱉어내고 싶다. 더는 이 자리에 있기 싫다.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제힐이 신경 쓰여,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의자가 요란하게 뒤로 밀렸다. 묵직하고 날카로운 소리에 어깨가 또다시 흠칫 굳었다. 하지만, 나는 더는 신경 쓸 재간이 없었다. 이 짜증나고 더운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를 바라보는 저 질기고 질긴 시선을 끊어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다.
나는 그에게서 황급히 등을 돌렸다. 다행히도 베르한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여유를 만끽하는 천상의 선인처럼. 붉은 와인을 목 안으로 넘기고 있었다. 입가에 걸린 작은 미소가 여전히 신경 쓰인다. 와인이 아니라 피를 넘기는 것만 같았다. 전쟁의 잔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저 손끝에 묻어 나오는 피가 과연 얼마일까. 저 웃음에 삼켜진 비명소리가 얼마일까.
노을을 등진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지만. 나는 도저히 아름답다고 말해 줄 수가 없었다.
베르한은 가 봐도 좋다고 답하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 붙잡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나는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곧장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줄곧 앉아 있기만 하던 그에게서 다시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긴 뭐 하러 왔나, 아일 카르스.”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이름이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방금 뭐라고 그런 거지. 머릿속엔 현실이 쉽사리 인지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있는 공간 자체가 환상처럼 느껴졌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말도 안 돼.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럴 리가 없는걸. 알아차렸을 리가 없다고. 이 모습을 보고서 어떻게 아일 카르스를 떠올려!
아니, 애초에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걸 믿느냔 말이야. 베르한은 몽상가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저놈은 현실주의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믿지 않고, 메르헨적인 건 더더욱 믿지 않는다. 그런 놈이 저 이름을 내뱉다니. 내 귀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열 수는 없었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해 버렸다. 문고리를 잡은 손을 또 다른 손이 부드럽게 감싸 왔다. 뜨거운 온기가 손등에 전해졌다. 손끝이 저릿하다 못해 핏기가 싹 가셔 버렸다. 귓불을 핥아 올리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행동도 내뱉는 숨도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연인을 대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잘 다듬어진 칼날처럼 날카롭고 살얼음판마냥 차갑기 그지없었다.
“대답해라, 여긴 뭐 하러 왔지?”
덜덜 떨리려는 손을 애써 진정시켰다. 문고리를 꽉 부여잡으며 속으로 숨을 삼키기를 수십 번. 안 그래도 무거웠던 공기가 더욱더 무거워지는 듯했다. 이대로 공기에 짓눌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기사였다.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해서야, 어찌 파트너와 다시 조우할 수 있겠는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애처롭게 떨리던 눈동자는 서서히 고요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아일 카르스가 누구냐는 듯, 그리 행동했다. 아니, 반드시 그리 보여야만 했다. 여기에서 동요한다면, 자신이 아일 카르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못 들은 척, 그게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름칠이 된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베르한은 내 뒤에서 비켜섰고, 나를 잡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는 태연한 척 걸음을 옮기며 문을 닫았다. 마른 침이 식은땀이 흐르는 것마냥 목 안으로 넘어갔다. 가시를 삼킨 것도 아닌데, 목 안이 따끔거렸다. 방을 나오자마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술을 꽉 깨물며 문을 힐끔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들킨 것 같긴 한데, 대체 왜일까. 어떻게 안 걸까. 아니, 그 이전에 왜 놓아준 거지?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 지껄일 인간이 아닌데.
뭔가를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이 모습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인사밖에 하지 않았다. 알아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베르한의 감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였나?
그때, 발끝에 까만 그림자가 닿았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제힐이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그가 빠르게 다가왔다.
“뭐야, 왜 나와 있지?”
“잠깐. 잠깐만, 이리로. 아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겠어. 할 말이, 의논해야 할 게 있…….”
말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만큼 동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한의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인간인 이상 초조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제힐을 잡았던 손목을 다시금 놓을 수밖에 없었다.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때마침, 아니 어쩌면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베르한이 나온 것이었다.
낭패감에 얼굴이 굳어 버렸다.
제힐은 대체 무슨 일인지 나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베르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기 바빴다. 베르한은 뭐가 그리 좋은지 보기 드문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였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워 보인다기보다는, 잔혹함을 띠고 있었다.
제힐의 눈빛에 설마, 하는 시선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아직도 가지 않았던 건가? 아, 제힐을 보러 간다고 했었으니, 딱히 갈 필요도 없었나 보군. 앞에서 만난 듯하니.”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 빠져나갈 방도가 생각나질 않았다. 베르한은 나의 반응을 즐기듯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에 이가 아득 맞물렸지만, 티내지는 않았다. 들켰든 어쨌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 어떻게 빠져나갈까, 어떻게. 머리가 지끈거린다. 조금만 머리를 굴린다면 떠오르겠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려 아무런 생각이 들질 않았다.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만이 계속해서 머리를 빙빙 돌기만 했다.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던 쪽은 제힐이었다.
“예. 저도 블레디를 다시 보러 왔었는데, 때마침 만났습니다. 마음이 통한 모양입니다.”
“그런가. 역시, 마음이 통하는 친우라는 건 좋은 거군.”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둘 다 저런 거짓말은 대체 어디서 배워 오는 건지. 태연자약한 얼굴로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간다. 마치 가면을 쓴 배우들의 무대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 눈빛들은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제힐은 어떻든 간에, 베르한은 결코 저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에서 만들어내는 대사를 기계적으로 뱉어낼 뿐이겠지. 베르한의 가식은 자연스러웠지만, 더불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리 생각하고 있을 즈음, 제힐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폐하와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친우의 상태도 볼 겸.”
“나와 말인가?”
“예.”
제힐이 부디, 부탁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힐끔, 내게 눈짓을 주었다. 그것은 신호였다. 어서 이곳을 뜨라는 신호.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한순간에 맑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대화에 방해가 될 것 같으니.”
“아아, 그래. 고맙다.”
자연스레 제힐이 내게 인사를 하고,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등 뒤에서 떨어지지 않는 베르한의 시선. 식은땀으로 등이 젖어 가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자연스레 걸었다. 하지만, 걸음이 자연히 빨라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나는 뛸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지나가던 인간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안 걸까. 아니, 정말로 들켜 버린 게 맞는 걸까? 혹시, 지레짐작으로 혼자 이러는 건 아닌 걸까. 새하얗게 변했던 머릿속에 그제야, 먹물이 이리저리 튀기 시작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답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만든 모든 가설은 정답이 아니다. 이건 들킨 것이 확실하다. 받아들일 순 없지만, 확실하다. 정체가 들통 났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것은 더는 위험했다. 하루라도 빨리, 검을 되찾아 나가야만 했다. 더불어 아셴의 안위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리스크가 너무도 컸다. 차라리 우연이라도 일어나길 바라야만 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내, 나는 뛰던 발을 멈췄다. 벽에 등을 기대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제힐이 지금, 시간을 벌어 주고 있을 때가 기회다. 지금 찾아내지 못한다면, 정말로 끝나는 것이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제힐마저도. 상관도 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다니. 최악이다.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최악이다…….
“빌어먹을!”
답답한 마음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달려 나온 것은 좋았지만, 검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베르한이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대체 어디다 두었을까. 쉽사리 손이 닿지 않는 곳이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젠 정말 머리에서 쥐가 날 것만 같았다. 벽에 머리라도 박고서 쾅쾅 두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이리도 바보 같을까. 어쩜, 이리도 경계심이 얕았을까. 한심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정말로 돌아서서 벽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쾅! 쾅! 하는 소리가 세게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못 볼 거라도 본 것마냥 슬슬 피해 갔다. 두통이 지끈- 하고 울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런 대책도 떠오르지 않는 머리에 답답함이 치밀었다. 대체, 이 머리로 어떻게 기사단장을 떠맡았던 건지.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 이봐. 왜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어깨를 붙잡아 벽에서 떼어냈다. 하지만, 내 행동이 멈춘 것은 어깨를 붙잡혀서가 아니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결코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목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황금빛이 물결치듯 반짝였다.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의 화려한 금발, 그리고 풀숲을 보고 있는 것마냥 깊고 시원한 녹안.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모습을. 이 목소리를.
“아, 아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반가운 이름에, 나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큰일 났다. 무심코 뱉어 버린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슬쩍, 눈치를 보자 역시 아셴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날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눈앞에 있는 것이 진짜인지 구별이 가질 않았다. 발을 떼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아셴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피하지 않았다. 몸 이곳저곳을 살펴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꽉 부둥켜안고 보고 싶었다고 말해 주고도 싶었다. 정말이지 걱정했다고, 그리 말하며 속 시원하게 웃고 싶었다. 머릿속이 멍해지기 시작한다.
“어째서 날 그리 부르는 것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싸늘한 시선에 나는 곧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금 뒤로 주춤 물러섰다. 제힐과의 약속이 있었다. 절대, 아셴을 따로 만나지 말 것. 자신의 행동으로 그에게 해가 가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결국,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허리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제가 다른 인물과 착각을 한 듯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기에는 아셴은 만만치가 않은 상대였다.
“착각이라. 내 모습과 퍽이나 많이 닮았던 모양이군. 더군다나 이름까지 똑같다니. 아주 기막힌 우연이군 그래.”
누가 둘이 형제 아니랄까 봐 돌려 말하며 비꼬는 걸 어쩜 저리도 잘할까. 할 말이 없었다. 아무 말이나 내뱉었지만,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아셴과 닮은 모습에 똑같은 이름이라니. 그런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 치더라도, 우연치고는 너무 어이가 없지 않은가.
입을 달싹이며, 변명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절실히도 제힐이 필요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