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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 마차가 부서지고, 마부가 죽으면 말은 놀라서 날뛰지 않나? 그걸 잡아 왔다고? 이미 도망을 갔었어도 한참을 갔을 놈을 무슨 수로?!
“어떻게 잡은 거야?”
눈을 깜빡이는 나에게 제힐은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다. 동시에 내 입에선 신음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페트리알.”
과연. 그런 수가 있었다. 동물들은 위계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 강한 것에는 함부로 공격을 가하지 못한다. 오히려, 도망가기 바쁘다. 더군다나 그 동물이라는 것이 평범한 맹수의 배는 강한 놈이라면. 그저 평범한 동물에 불과한 말이 페트리알의 속도와 그 살벌함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제힐이 말했다.
“나는 말을 타고, 넌 페트리알을 타고 간다. 빠르게 달리면 늦지 않을 거다.”
“페, 페트리알을 타라고?!”
몰랐다면 상관없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페트리알이 작고 작은 소년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제힐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저놈은 너 하나쯤은 가뿐히 태울 수 있다. 겪어 봤을 텐데?”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겪어 봤다. 겪어봤고말고. 저택을 빠져나올 때 우리를 등에 태우고 달린 게 누군가. 성인 남성 두 명을 태우고서도 그런 속도를 낸 게 누군가. 페트리알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제힐의 말대로 가뿐할 것이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트리알을 힐끔 쳐다보자, 그것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한 곳을 보는 꼴이 범상치 않았다. 쟤는 뭘 보는 거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말이 있는 방향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자는 사이에 말이 녀석의 배 속으로 사라지진 않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대화가 끊기자, 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타닥타닥 불씨가 타오르는 소리만이 연신 들렸다. 불편하지도, 그렇다고 편하지도 않은 애매한 정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그때를 떠올리게 되었다. 속이 술렁이고, 피가 끓던 그 순간. 이성의 끝자락이 보이려 했던 순간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다. 여태까지는 와 닿지 않았던 현실이 한순간에 나를 덮쳐 내리눌렀다. 언제 놓아 버릴지 모를 이성에 이젠 잠들기조차 무서워졌다.
나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뱀파이어란 무엇일까. 정말, 운명이라는 건 거스를 수 없는 걸까. 피만을 갈망하고 살육을 하며, 광월(狂月)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런 건 싫었다. 나는 인간이고 싶다. 아무리 뱀파이어라 할지라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것들만 버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인간인 척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심장이 맥박 치는 그 격렬한 감각은 너무도 강했다. 손쉽게 억누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다음에 또 그런 감각이 찾아온다면, 나는 이번에야말로 먹힐지도 모른다. 억누를 자신이 없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 며칠 새 급격히 약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난, 뱀파이어가 아니야.”
피 따위 마시고 싶지 않아.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순식간에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어깨를 짓눌러 왔다.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밤. 모닥불에만 의지한 채 앉은 몸은 추웠다.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 제힐이 입을 열었다.
“모든 생물들은 그 본성이 있기 마련이지. 인간이 무리를 짓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동물이 서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존재이듯이 모든 것엔 본성이 있다. 그리고 그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그게 규칙이다.”
차가울 정도로 이성적인 발언이었다.
그 말을 잠자코 듣다가, 웅얼거렸다. 마치 투정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 아냐.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어도 그것을 견디는 방법 정도는 있을 거 아니냐고.”
제힐은 말이 없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그는 입을 다물고 하늘을 보았다. 바람이 숲을 울리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슬픈 울음소리였다.
이내 제힐이 입을 열었다.
“남쪽 섬.”
“……?”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들자, 제힐과 두 눈이 마주쳤다.
“남쪽 섬에 있는 나리시옌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나리시옌?”
“밤의 왕이라 불리는 뱀파이어다. 가장 오랜 시간을 산 남성체 뱀파이어이기도 하지. 휴에라와는 달리 퓨어뱀프라 그 힘이 남다르고, 지식 또한 방대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세상 거의 모든 지식이 그의 머릿속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
“……그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주먹을 꽉 쥐었다. 새하얀 손에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세게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떨려 왔다. 설령, 가정이라 할지라도, 허탕을 치게 될 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조금의 희망이 보인다면, 그 빛을 향해 걸어간다. 그것이 여태까지 지켜 온 내 인생의 신조였다.
결정은 빨랐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가겠어. 남쪽 섬으로.”
제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마주친 제힐의 눈은 고개를 끄덕이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다음 날 오후.
쉬지도 않고 달렸던 우리는 황성에 무사히 도착할 수가 있었다. 오랜만에 온 황성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뭐, 1년 만에 변할 만한 것이 뭐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새삼 이렇게 다시 발을 들여놓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순백색으로 빛나는 외벽도 그대로였고, 자줏빛의 복도도 그대로고, 뭐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베르한이 왕이 되었다는 것. 그것뿐이다.
“아일.”
상념에서 빠져나오자, 눈앞엔 검은 옷자락이 보였다. 제힐이 내미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었다. 고급스런 재질의 옷은 촉감이 부드러웠다. 두께도 제법 괜찮아서 추울 것 같지도 않고. 다만, 조금 화려한 것 같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 그가 말했다.
“갈아입어라. 흙투성이인 채로 들어갈 수는 없을 테니.”
입어 본 적이 있어야, 입지. 거추장스런 장식들을 다 떼 버리고 싶었다. 새하얀 줄이 그어진 겉옷은 깔끔해서 좋은데 블라우스가 살짝 불편했다. 제힐은 이미 갈아입은 것인지 하얀색의 정복을 입고 서 있었다. 저렇게 보니, 확실히 귀족가의 자제라는 것이 인식이 된다. 평소의 그는 그저 사냥꾼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내가 하는 양을 빤히 바라보더니, 제힐이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그리곤 소매 한쪽을 들어올리며, 내 팔을 끼워 넣고 단추를 착착 채워 주기 시작한다. 옷매무새를 매만져 주는 손길이 꼼꼼했다. 괜스레 목덜미가 가려워진다. 나는 미묘하게 간지러운 이 분위기를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연회장에 검은 옷은 좀 칙칙하지 않아?”
시선을 힐끔 들어 올리더니, 아무렇지 않게 답해 왔다. 여전히 손은 바쁘게 옷 주위를 움직여 대고 있었다.
“어차피, 금방 나올 테니 상관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이라고 답하려다, 문득 떠올랐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 그야 물론 아셴을 보러 온 이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살짝, 시간을 끌어야 될 텐데?”
정돈을 다 한 것인지, 그가 상체를 폈다. 마주 본 얼굴엔 “어째서?”라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씨익 미소를 그렸다. 그에 제힐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린 것 같지만, 뭐 어떠랴.
“내 파트너가 여기 있거든.”
“……파트너?”
그래, 둘도 없는 파트너가 여기 있다.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검 두 자루가 말이다. 단장이 되었을 때 아셴이 직접 선물해 주었던 검. 나는 전장에서 언제나 그것과 함께였고 그것으로 적을 베어 왔다. 이제는 그 검이 아니면 불편할 정도였다.
내가 죽은 곳이 이곳이니, 그 검을 버렸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셴이 가지고 있거나 베르한이 가지고 있을 텐데. 내 생각엔 베르한이다. 그가 내 검을 아셴에게 넘겨줬을 리가 없겠지. 아셴에겐 그 어떠한 것도 넘기지 않으려 했던 놈이니까.
나는 두 주먹을 꽉 쥐며 작게 읊조렸다.
“되찾아야 해.”
그 말과 동시에 정갈한 노크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그만 나오셔야 합니다.”
교육을 잘 받은 것이 티가 나는 하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손님용 방이었다. 노숙을 하고 여기저기 구른 몰골로는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다행히도 연회는 오후 늦게 열리게 되어 있었고, 제힐이 시녀에게 옷 두어 벌을 부탁한 덕분에 이렇게 잘 차려입게 된 것이다. 아마, 저 시녀 평소 제힐에게 마음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왜, 과거 있는 왕자님에게 끌리는 그런 종류.
“알았다. 금방, 나가지.”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난다. 마주친 시선으로 여러 가지 대화가 오고 갔다. 결의를 다지는 것이라 볼 수도 있었다. 우리 둘에게는 서로의 역할이 주어졌으니 얼마나 베르한을 잘 속이느냐가 관건이리라.
제힐이 다시 한 번 매무새를 만져 주며, 당부했다.
“이름. 잊지 마라.”
그 한마디를 끝으로, 우리는 드디어 방을 나갔다.
연회가 열리고 있는 회랑은 황성의 위엄에 걸맞게 상당히 넓었다. 화려한 보석들로 만들어진 샹들리에가 환하게 회랑을 비추고, 실력 있는 악사들이 은은하게 음악으로 내부에 생기를 북돋고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이내, 제힐의 뒤를 쫓았다. 회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각자, 부채로 입을 가리고는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사내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몇몇은 단순한 흥미를, 또 다른 몇몇은 낯간지러운 호의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많은 것은 노골적인 적대였다.
시리에스가(家)가 몰락한 뒤로, 제힐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뻔했다. 몰락에 가까운 귀족의 사정을 봐주는 이들은 드물다. 아마, 호의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의 외모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제힐과 나는 그러한 시선들을 무시하고는 베르한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우선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 먼저였다.
베르한 또한 우리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모양이었는지, 대화를 나누던 무리에서 빠져나와 우리와 마주했다.
시선을 아래로 깔며, 허리를 천천히 숙였다. 가장 먼저 인사를 내뱉은 것은 제힐이었다.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는 일이 없을 것 같던, 그 올곧은 허리가 굽어지는 모습은 꽤 신기하였다.
“시리에스가(家)의 미천한 소인이 감히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아아, 그런 의례적인 인사는 되었네. 하도 들었더니 이제는 외워 버렸을 정도야.”
허리를 펴고 황제와 마주했다. 손을 절레절레 젓는 그 모습에선 여유로움이 묻어 나왔다. 깔끔한 정복을 차려입고 있지만, 무사의 분위기는 어딜 가든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베르한에게는 이런 화려한 조명 아래보다는, 피가 튀는 전장이 더욱 잘 어울렸다.
나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깔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 번도 그의 앞에서는 시선을 내리깐 적이 없었거늘. 하지만, 지금의 그는 황자가 아니라 황제다. 황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짓은 감히, 무례하다 하여 불경죄로 잡혀갈 만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없어. 지루한 것은 딱 질색이니까.”
속으로 한숨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럼 그렇지. 1년 만에 보는 베르한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루한 것은 결코 못 참는 성격하며, 대놓고 타인을 깎아내리는 취미까지도. 제힐이 오지 않아 지루하다는 말은 즉, 베르한은 즐기고 있는 것이다. 노골적인 적대와 경멸의 시선과 그것에 무감하게 대응하는 제힐의 태도를. 그저 하나의 극을 보듯이 구경하는 것이었다. 자신 외의 이들은 장난감으로 보듯이 사는 그다운 행동이었다. 너무 똑같아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황궁에 그런 내분을 일으켰으면, 좀 바뀌는 점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그때, 베르한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나는 절레절레 내젓던 고개를 황급히 숙였다.
“음? 처음 보는 얼굴이군.”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침착하게 대처했다.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이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몇 번이고 혀에 굴려도 익숙지 않은 그 이름을.
“블레디 크림슨이라 하옵니다.”
몸에 밴 동작으로 인사를 올리고 허리를 펴자, 베르한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뭐야, 왜 저런 눈으로 보지. 번뜩이는 시선이 내 속을 샅샅이 훑어 내리는 것만 같았다. 뒷걸음질 칠 것만 같은 발을 애써 바닥에 붙들었다. 여기서 피하면, 안 된다. 그럼 의심할 구석을 내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제힐에게 이런 이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네가 언제부터 타인의 사생활에 관심이 있었다고. 나는 긴장 어린 시선을 힐끔 제힐에게 건넸다. 그가 물 흐르듯 자연스레 대답했다.
“얼마 전, 저택을 나갔다 알게 된 친구입니다. 사나운 짐승에게 공격을 받고 있기에, 구해 주었지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완벽히 맞는 말이기도 했다. 비록, 짐승을 공격했던 총구를 내 이마에 들이밀었었지만 말이다.
베르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로운 턱을 매만졌다. 먹물을 쏟아부은 듯, 새카만 머리카락이 빛에 비치어 기이한 색을 띠었다. 그 순간, 나와 베르한의 두 눈이 마주쳤다. 피할 틈도 없었다. 그 시선에 그대로 옭아매이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베르한의 중얼거림이 잔잔한 음악을 뚫고, 우리에게로 들려왔다.
“이상하군. 어째서일까, 그대가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지는 듯해.”
마치, 오래된 사이처럼, 이라며 그가 덧붙였다.
그 순간,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헉 들이켜려던 숨을 애써 삼키고 또 삼켰다.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온몸의 신경이란 신경은 다 떨리는 느낌이다. 이거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든다.
때마침 제힐이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갑작스레 차단된 시선에 눈을 깜빡였지만,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등 너머로 제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경이 많이 예민해지신 모양입니다, 폐하. 이 친구를 폐하께서 보셨을 리가 없습니다.”
누가 본다면, ‘참 뻔뻔하기도 하다.’, ‘얼굴에 철판을 몇 겹이나 깔았나 보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안다. 조금은 차가워진 저 목소리가 바로 그 증거였다. 아주 미미한 변화라 자칫 놓치기 쉽지만, 조금만 그의 옆에 있다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긴장을 하면 도리어 냉정해지는 인간이다.
베르한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자신의 시야가 가로막힌 것에 대해 짜증이 일어난 것이리라.
“그대가 그것을 어찌 아는가. 마주쳤을 수도 있지 않나?”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폐하. 블레디는 기억상실증입니다. 겨우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낸 것이 전부이지요. 게다가 저택 주변에서 만났을 땐, 허름했던 차림새였으니 어느 모로 보아 황궁이나 수도와는 거리가 먼 이일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개인적으로 마주치셨을 리가 없습니다.”
뜬금없는 제힐의 말에 그만 입을 떡 벌렸다. 크게 뜬 눈만 연신 깜빡거렸다. 제힐의 등이 버티고 서 있어서 다행이지, 자칫 표정을 그대로 드러낼 뻔하였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저런 말을 내뱉다니. 더군다나 나랑 상의하지도 않았잖아!
나는 초조함을 삼키며 베르한의 답을 기다렸다. 과연 베르한이 이런 허술한 거짓에 속아 넘어갈 정도의 위인일까. 그의 야생적인 감과 본능은 타고난 것이다. 겨우 저런 거짓말로 속여 넘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흠. 그렇다면 그대의 말이 맞겠군. 사람을 착각했던 모양이야. 미안하네.”
……속아 넘어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쉽게 수긍하는 답에 얼이 빠져 버렸다. 미친. 너 지금 그 말을 믿어? 나는 진심으로 그의 머리 상태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좌에 앉아 있다 보니 감이 무뎌진 걸까. 들키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건 이거대로 더 불안했다. 저 인간이 대체 무슨 생각이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그가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고개는 숙이지 않았고 말투 또한 그다지 사과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더 이상 그것에 관한 것을 묻지 않았다. 정말로 속아 넘어간 듯했다. 나는 찜찜함에 찌푸려진 미간을 펼 수가 없었다. 저 인간이 저럴 리가 없는데.
“기억상실증이라니, 젊은 사람이 안됐군. 집에서는 그대를 찾는 자가 없는가?”
곧장 내게로 화살이 돌아왔다. 제힐이 자연스레 옆으로 비켜서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숨을 한껏 삼켰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장단에 맞춰 주어야만 했다. 연기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지만, 젠장 이젠 될 대로 되라다.
나는 짐짓 슬픈 표정을 지었다.
“기억이 없으니 저를 찾는 자들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저를 찾는 자들과 마주친 적이 없고, 저의 집 또한 기억이 나지 않으니, 어찌 집에서 저를 찾는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푹 숙인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베르한은 그것을 착각한 모양인 듯.
“내, 무리한 것을 물어 미안하네. 괴로우면 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또다시 사과를 해 왔다. 이번엔 정말로 기겁을 할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눈앞에 있는 건 맹수다. 맹수에게 허점을 드러내면 안 돼! 보이지 않게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물 흐르듯 넘어간 위기는 기뻐할 만한 일이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 분위기는 설명조차 어려울 정도로 미묘했다. 불편한 정적이 맴돌았다. 숨조차도 함부로 내쉴 수가 없었다.
나는 혼신의 연기를 쥐어짜 벽을 짚으며 비틀거렸다. 당연한 듯이 제힐이 부축해 왔다. 이럴 때는 참 손발이 잘 맞는 것 같단 말이지.
“으윽, 머리가…….”
“송구하옵니다만, 폐하. 먼저 자리를 피해도 되겠는지요. 이 친구가 기억에 관한 것만 떠올리려 하면 이리 두통을 호소해서…….”
기억 때문이 아니라도, 이 분위기 때문에 두통이 몰려올 지경이다. 나는 머리 쥐어짜는 일과는 체질이 안 맞단 말이다.
“아픈 자를 붙잡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내빈을 위한 객실이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에서 쉬도록 하게.”
제힐과 나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고는 그 자리를 황급히 피했다. 물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간혹 멈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기심이 가득 들은 여러 쌍의 눈동자들이 쫓아왔지만, 그것을 신경 쓸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불온한 공기가 회랑 안에 가득 차올라 있었다. 등 뒤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식은땀이 흘렀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나기 직전, 빠르게 눈으로 훑어본 회랑 안에서는 아셴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셴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좀 전의 그 객실에 다시 들어온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숨을 내뱉었다. 격한 운동이라도 한 것 마냥 숨이 찼다. 불안하게 눈동자가 떨려왔다. 나는 곧장 불만을 쏟아냈다.
“젠장. 무슨 눈치가 그렇게 빨라? 그게 인간이야?”
베르한. 정말이지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는 놈이다.
“어쨌든 대충 넘어가서 다행이군.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지만, 방심할 수는 없지. 넌, 이곳에 있어라. 나는 다시 회랑에 내려가야겠다.”
내가 아무리 병자가 되어 객실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제힐은 아무 상관이 없는 자였다. 안 그래도 시리에스가의 가주로서 멸시를 받는 그다. 괜히 나와 함께 이곳에 있다가는 무슨 엄한 소리가 나올 지 알 수 없었다. 딱히 붙잡을 수도 없고, 붙잡았다간 오해 사기 십상이니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길이 생겼으니, 다행이야.”
회랑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는 빨리 검을 찾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제힐이 창밖을 내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내가 신호하면, 움직여. 지금 이곳에선 환자인 척 행동해라. 황제가 의원을 들일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아.”하는 짜증스러운 탄식이 나왔다. 어찌 되었든 나 또한 연회에 참석한 객이었다. 객의 몸이 좋지 않다면, 주인이 돌보아 주는 것은 당연한 법이다. 과연 베르한이 그런 귀찮은 짓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움직이는 건 위험할 터다.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나는 침대로 가 누웠다. 창밖의 하늘은 짙어질 노을을 준비하는 듯이 서서히 그 색을 달리하고 있었다. 제힐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눈을 살짝 감았다. 이대로라면 검을 되찾는 일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끝이 나고 말 것이다. 남쪽 섬까지 여행하려면 그만한 위험이 뒤따를 텐데.
그리고 지금은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아셴”
회랑에서 잠시만 보려고 했거늘, 그는 없었다. 연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에도, 베르한에게 다가갔을 때도 아셴은 없었다. 항상 연회만큼은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오늘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거지. 단순히 나오기가 싫어서? 하지만, 아셴은 그런 위인이 아닌데. 제힐에게 의견을 구하고 싶어도, 그는 이미 나간 후다. 결국 나 혼자 머리를 싸매도 어찌할 도리는 없다는 건데.
나는 눈을 떠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 모습을 샅샅이 훑던 베르한. 등 뒤에서 떨어지지 않던 그 시선. 그리고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아셴. 저도 모르게 속에 담아 두었던 심정이 뱉어지고 말았다.
“……불안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