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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고개 (2화)
01. 출가하다 (2)


눈이 오기 시작하면서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버렸다. 간혹, 헤드라이트를 켠 채로 쌩─ 하고 지나가는 차들만 있을 뿐이었다. 누구는 차 타고, 누구는 얼어 죽고. 인생 한 번 참…….
“하아.”
“뭐하고 있는 거지?”
문득, 낮은 음성이 귓가를 때렸다. 큰형보다는 아니었지만, 꽤나 여자들 많이 울렸을 법한 목소리였다. 나는 슬금슬금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큰 우산 덕에 얼굴은 가려져 있었지만, 까만색의 양복 안에 드러나는 잘빠진 몸과 큰 키에 어렴풋이 그가 굉장히 잘생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덤으로 부자라는 것도. 이 주변에 사는 걸까.
“아저씨는 뭐하는데?”
“…….”
아, 아저씨가 아닌 건가? 그런데, 아니면 아닌 거지 치사하게 말을 무시하고 그러냐.
나는 몸을 일으켜 내 옆에 있는 건물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신세 한탄하느라 쳐다보지도 않았던 건물은 상당히 컸다. 오피스텔이었다. 그것도 최고급.
이거, 어쩌면 엄청난 행운인 걸지도. 그때, 다시금 그가 입을 열었다.
“질문은 내가 먼저 한 것 같은데.”
나는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집을 나왔다고? 아니, 그건 좀 싫다. 꼭, 가출한 것처럼 보이니. 하지만, 나는 곧 결론을 내렸다. 내가 그에게 대답할 의무 따위는 없었다.
“대답하기 싫다면?”
“가출한 건가?”
왜, 요즘 어른들은 젊은것들이 돌아다니면, 가출한 걸로 단정을 짓나 몰라. 출가라고! 하지만, 나는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가출한 청년으로 보이는 것은 싫었지만, 어쩌면 이것은 절호의 찬스였다.
“가출했다고 하면, 나 주워 갈래?”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은 남자를 보며 싱글싱글 눈웃음을 지었다. 이것은 나의 비장의 무기였다. 이 표정을 지을 때면, 큰형도 그다지 크게는 화를 내질 못하니까 말이다.
“흐음.”
남자가 우산을 들지 않은 한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매끈하고 날카로운 턱이었다. 아직까지도 젖살이 조금 남아 있는 나의 얼굴과는 달리 잘 다듬어진 얼굴이었다. 나는 무심코 내 얼굴을 매만졌다. 왠지 조금 질투가 나려고 한다.
“데려가면.”
“응?”
“데려가면, 넌 뭘 줄 거지? 설마, 공짜를 바란 건 아니겠지.”
우와. 진짜 쪼잔하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서 두 눈을 깜빡였다. 물론, 이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말이다. 내가 가출한 것 같은 청년으로 보였다면,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 말이다. 가출한 인간이 돈 있는 거 봤냐고.
“뭘 갖고 싶은데?”
우선은 밑져야 본전이었다. 괜히 주눅 들었다가는 그걸로 꼬투리를 잡힐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방심을 하는 순간 죽음! 선우가의 뼈저린 가르침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글쎄. 그다지 가지고 싶은 건 없다만.”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진짜 없어? 아저씨 입으로 말한 거야!”
“…….”
“왜, 왜에.”
이, 이 아저씨가 왜 빤히 쳐다보고 난리야. 나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혹시, 표정이 이상했나? 아니면 건방져 보이는 얼굴이라서 싫었나? 그, 그것도 아니면 감정 중인 건가? 팔아먹으려고?!
“우선은 들어가지.”
아, 팔아먹으려는 건 아니었구나. 나는 어색하게 아하하하, 하고 웃으며 그를 뒤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그가 향하는 곳은 내 옆에 있는 으리으리한 오피스텔이었다.

[삐릭─, 달칵.]
몇 번은 눌러야 하는 우리 집과는 달리, 간단한 지문 인식 하나로 문이 열렸다. 상당히 단순해 보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철벽 같아 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가 내게로 시선을 힐끔 돌렸다.
“들어가지.”
“아, 으, 응.”
문을 연 채로 옆으로 비켜선 남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후다닥 안으로 들어섰다. 마주친 눈이 굉장히 차가웠다. 밖에 있을 때는 우산 때문에 몰랐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큰형과 맞먹는 위압감이었다. 검은 동공 속에 비치던 날카로움이 잔상처럼 떨쳐지질 않았다.



02. Let’s GAME


“거기 앉아 있어.”
남자가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끝을 따라가자 4인용의 새하얀 소파가 있었다. 소파 앞에는 투명한 테이블이 소파의 길이만큼이나 뻗어 있다. 나는 머뭇머뭇 소파로 가서 앉았다.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운 것이 이 소파는 꽤 고가일 듯했다. 집은 굉장히 깔끔했다. 필요한 가구 외에는 일체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남자가 방으로 들어간 틈을 타서 중얼거렸다.
“꽤 좋은데 사네.”
거실의 벽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었다. 층수도 꽤 높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는 전망은 그야말로 절경이 따로 없었다. 강남 거리의 색색 불빛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상당히 분위기 있어 보였다. 하지만, 감탄하는 머리와는 달리 현실적인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내가 저기에서 얼어 죽을 뻔했단 말이지.”
“죽기 직전에 어딘가로 팔려 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언제 나온 것인지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내 귀로 흘러 들어왔다. 몇 번이고 느끼는 거지만, 상당히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부드럽게 귓가를 타는 목소리가 몸을 나른하게 하는 듯했다. 여자들이 상당히 좋아하겠다.
나는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방으로 들어가더니 옷을 갈아입고 나왔나 보다. 너무 딱 들러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몸의 라인이 드러나는 검은색의 라운드 티셔츠에 흰색의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 모델이 따로 없었다. 다른 이들이 입었을 때는 평범한 일상복이었겠지만, 그가 입으니 확실히 달랐다.
“글쎄, 팔기는 어려웠을걸.”
어지간히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런 짓 함부로 못 하지. 내가 누구냐.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며, 위용을 떨치고 있는 선우가의 막내 아니겠어? 일반인에게 당할 정도로 무르지 않다, 이거야. 하지만, 내가 누군지 알 수조차 없는 남자는 피식, 웃어넘길 뿐이었다. 아무래도 무시하는 것 같다. 어쩌겠는가. 가출 청년에게 돌아오는 취급이 이런 거지 뭐. 가출은 아니지만.
남자가 손에 든 와인글라스를 빙글 돌리며 말했다.
“우선은 얘기를 나눠 볼까.”
그의 집에는 미니바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뒤에 진열되어 있는 양주와 와인들은 대강 살펴봐도 대단했다. 커다란 진열장 안에 놓여 있는 것들의 수만 해도 엄청났고, 그 종류들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역시, 부자인가 보다.
“혼자 마셔?”
“돈 없는 놈에게는 술 안 파는 거 모르나?”
“아저씨, 술장사 해?”
“오늘부터 할까 하고.”
강적이었다. 마치, 큰형과 얘기를 하는 기분을 맛보게 하는 희대의 강적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에게 박수를 보내었다. 언제 한 번 큰형과 만나게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두 사람이 하는 말싸움을 구경하면 얼마나 재밌을까.
“말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소개부터 하지. 내 이름은 유예한이다.”
“아, 그래?”
간단명료한 내 답에 남자-유예한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인상 긋는 것까지 예술이다.
“상대방이 이름을 말했으면, 같이 이름을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아, 난…….”
나는 그만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아니, 입을 다물다 못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나는 나의 경이로운 기억력에 예찬을 보냈다. 조금만 머리가 둔했어도 생사를 오갈 뻔했다.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을 하나하나 들추었다. 유예한, 유예한. 어딘가 낯이 익은 이름이었다.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 하나의 예외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선우가의 사형제는 각기 다른 교육을 받았다. 큰형인 환은 집안을 잇기 위해 조직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고, 둘째 형인 도운은 몸놀림이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에 격투와 검술 등의 전투법을 배웠다. 그리고 셋째 형인 현은 조용하고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협상을 하는 법을 배웠다. 표면적으로 비치는 기업의 뒤도 현이 형이 이을 예정이었다. 물론, 가업인 조직은 환이 형이 잇는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배웠느냐. 솔직히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외운 것뿐이니까. 사형제 중에서 가장 기억력이 좋았던 나는 각 조직의 이름과 그 조직을 다스리는 자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 등, 약점으로 잡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넣었다.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큼 상대를 흔들라는 가르침이었다. 나는 상당히 약은 데다가 뻔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나에게는 이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했다. 더군다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타 조직에서는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집안에서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상대를 알고 상대는 나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는 정보를 가진 자의 승리로 항상 끝이 났었다.
“넌?”
“나, 난…….”
이런, 빌어먹을!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유예한이라는 자의 정보가 금세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예한. 강남을 가지고서 현재 우리 집안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그 유명한 백아무의 보스였던 것이다. 백아무와 우리 흑혈은 서로 만나기만 해도 으르렁거렸고 금세 피바람이 불었다. 시시때때로 누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말은 예사였고, 길을 가다가 시비를 걸어오는 것도 이제는 애교였다.
물론, 이것은 조직원들끼리의 다툼이었다. 정작 우리 사형제와 유예한은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각 조직의 간부들이 만나게 되는 이상. 단순한 싸움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모두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가만히 신문만 보던 큰형도 유예한이라는 이름에는 눈빛이 차갑게 변하곤 했으니, 말 다했지.
그런데, 나는 과연 그 유예한이라는 남자 앞에서 이름을 밝힐 배짱이 있을까? 유예한과 내가 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젠장, 답은 정해져 있는 거다.
“말하고 싶지 않은데?”
“……뭐?”
머리를 굴려라. 머리를 굴려라, 선우연! 넌, 할 수 있어. 집안에서도 인정한 영재잖아. 네 머리로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거다!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차피 며칠 머물다가 갈 텐데 이름 가르쳐 주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좋아, 꽤 좋은 대답이었어.
“그럼 난.”
“응?”
“내가 말한 내 이름은? 기억에서 지울 건가?”
“에, 으음. 그건.”
내 기억에서 네 이름이 지워질 리가 없지. 지금도 너에 대한 정보들이 머릿속을 둥둥 헤엄치고 있는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질 않았다. ‘빨리 말하지?’하며 흉흉하게 빛나고 있는 시퍼런 두 안광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젠장, 말해야 하는 건가.
나는 두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려 댔다. 이쪽 세계에서는 자신의 적을 절대 살려 두지 않는다. 어쩌면 인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더더욱 사양이다. 나 때문에 우리 조직이 발목을 붙잡히다니! 그런 건 죽어도 싫다고!
째깍, 째깍.
정적 속을 흘러가는 시계 소리에, 마음이 초조하게 변했다. 시계는 벌써 8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8시였는데. 벌써 20분이나 흘렀구나. 20분. ……20분?
“……아!”
“뭐지?”
드디어 찾았다. 빠져나갈 방법을!
“이대로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저씨가 억울한 거지? 그런데 나는 가르쳐 주고 싶지가 않단 말이지.”
“그래서?”
“그래서, 게임을 하자는 거야.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아저씨가 알아내. 그럼 되잖아?”
그 말에, 그가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팍 그었다. 정말이지 살벌한 표정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 정도로.
“알아내라고? 이름도 모르는 자에 대해서? 하!”
“왜 못해? 당사자가 앞에 있는데.”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내라는 거지?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갈수록 인상이 험악해지는 것이 이대로라면 쫓겨날지도 모를 듯싶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스무고개 알아?”
“……스무고개?”
예한이 반문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말이 나온 것뿐이지 표정은 ‘이게, 무슨 헛소리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남자도 어지간히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격인가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살기 어린 경계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선에 굴하지 않았다. 살기 따위야 집이 조폭 집안이다 보면, 익숙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먹이가 떡밥을 물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선은 1차는 순조롭게 통과인 듯했다.
“응. 스무고개. 혹시,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스무 개의 질문을 던져 답을 추론해 내는 게임. 아닌가?”
아니, 뭐. 그렇게 사전적인 설명을 하면 할 말이 없죠. 누가 정의가 궁금하다고 했냐, 이 양반아. 아냐고!
“뭐, 아는 것 같네. 어쨌든! 할 거야, 말 거야?”
“음.”
예한이 고민을 하는 모양인지 미간을 모았다. 심하게 찡그린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손가락으로 문질러 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고민을 할 때 생기는 버릇인 듯했다.
이윽고,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좋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앗싸. 물었구나!
“그럼, 질문을 하지.”
“아, 아아아니! 잠깐만 기다려 봐! 뜬금없이 시작하지 말라고. 여기에는 규칙이 있단 말이야!”
“규칙?”
또다시 눈썹이 슬며시 위로 치켜 올라갔다. 어지간히도 귀찮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어떠랴. 이미 승낙한 것을!
나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그의 말을 막았다. 한꺼번에 스무 개의 질문을 던진다면, 살아 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오래 있기 위한 방책이 필요한 법이었다. 역시, 우리 집안의 영재 선우연. 이, 나의 머리는 칭찬해 줘야 마땅한 것이다.
“질문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요일에만 받겠어.”
“어째서 일주일인 거지?”
“그 전의 6일 동안은 내 행동을 지켜보란 얘기지. 나를 보다 보면 궁금한 것이 생길 거 아냐? 그럼, 질문을 생각해 뒀다가 쓸모 있는 것을 물어보면 된다는 소리.”
이번에는 꽤나 마음에 드는 말인 것인지 표정을 일그러트리지 않았다. 성격이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심해야했다. 그가 아직, 내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선우연이라는 걸 알았다면 게임은 무슨. 곧바로 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건 만에 하나의 이야기일 뿐. 당분간은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평화가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일단락된 일에 기뻐해도 되겠지?
“알아들었으면, 방 좀 안내해 줘. 나 피곤하다고.”
언제 표정을 풀었냐는 양, 또다시 예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내가 뻔뻔한 것은 알지만, 이것 외에는 딱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명령하는 것과 밀고 나가는 것만 배워 온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그렇다고, 평생 말 안 하고 살 것도 아니고 말이지.
나는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예한을 따라갔다. 그러고는 그의 뒤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 서로 잘 지내 보자고. 백아무의 유예한.



03-1. 첫 번째 질문 (1)


달그락, 달그락. 상쾌하고 따뜻한 아침의 햇살이 창가를 향해 스며들고 그대와 나의 아침은 아주 아름답게 막을 올렸다.
─는 무슨. 살벌해서 돌아가시겠다. 어떻게 아침 식사에서 나는 소리가 달그락, 달그락밖에 없는 거냐. 밥을 삼키는 소리조차 송구스러워서 내지 못하는 아침이라니. 차라리 먹지 않는 것만 못했다. 이대로 먹다가는 체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앞에 떡하니 앉아서 식사를 하고 계시는 그 ‘원인’님을 보고 있자, 싫어도 먹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목 안으로 물을 연거푸 들이부었다. 겨우 다 먹었다. 무슨 아침을 이리도 많이 준단 말인가. 내가 싫으면 말로 하든가! 아주 위경련으로 실려 가게 만들려고 작정을 하셨구만! 매일 아침 식사를 이런 식으로 한다면,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위 용량 과다로 실려 갈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위협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탁! 거칠게 컵을 내려놓자 스윽, 그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그 시선은 깜짝 놀랐다기보다는, ‘뭐하는 짓이냐.’에 가까웠다. 임금님이 밥을 먹는 자리도 이렇게 무섭진 않을 것이다
“벌써 다 먹었군. 부족했나?”
이 인간은 정말로 나를 죽이려는 모양이다. 이게 어딜 봐서 모자라냐!
“아, 아뇨. 저, 적당했어요.”
하지만, 내 입을 비집고 나오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내 입에서 존대가 나오게 만들다니. 그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오리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감히 왕의 면전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쏘냐. 밥을 주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더 먹지, 왜?”
필요 이상의 참견이십니다. 전하는 수라나 계속 드시지요.
“아니, 뭐 그냥. 배가 불러서요. 하하하하.”
네놈의 수법에 넘어가지는 않으리. 절대 이곳에서 죽임을 당할 수는 없다!
나는 애써 웃어넘기며 두 손을 얌전히 허벅지 위로 내렸다. 그러고는 두 눈을 깜빡깜빡.
1분, 3분, 10분.
“하아.”
타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동시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가 맘에 안 들지? 부탁할 거라도 있는 건가?”
“아니요. 그런 거 없는데.”
이번에는 존대와 반말이 섞여서 나왔다. 그만큼 나는 당황한 상태였다.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왜 저리 화를 낸단 말이냐. 우리 형님들이 그랬단 말이다! 아무리 자신이 밥을 다 먹었어도 웃어른이 밥을 드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예의라고!
“……됐다.”
뭐가? 뭐가 됐는데?
궁금하기는 했지만, 다시 식사를 시작하는 그를 보자 물을 수가 없었다. 밥 먹는 거 방해하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니 말이다.
나는 그가 밥을 먹는 것을 기다리며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아침 밥상치고는 꽤나 반찬의 가짓수가 많았다. 노란 계란말이에다가 푸른나물에 참기름과 깨로 고소하게 간을 내고, 짭짜름하게 적당한 맛이 나는 깻잎지에, 아침밥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된장찌개.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밑반찬이 있지만, 나머지는 생략.
놀랄 수밖에 없는 양이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음식을 그가 직접 했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뭔가 뚝딱뚝딱하는 소리와 보글보글 지글지글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가 날 불렀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거, 1등 신랑감이네. 이 모습을 보면 결혼하려고 줄 서는 여자들 많겠구만.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릴없이 다리를 아래위로 흔들며 그의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의 아침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몇 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몇 번이나 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는지는 설명하지 않겠다. 귀찮으니까.
이윽고 식사가 끝났을 무렵, 그가 거실로 나를 불렀다.
“어제 못 다한 얘기가 있었지.”
내 앞, 테이블에 머그컵을 놓아 주며 맞은편에 그가 앉았다. 소파에 앉자마자 자기 몫으로 타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가 던진 한마디가 저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못 한 얘기라니? 정체에 관한 것이라면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 사정을 봐줬으니, 이제는 그쪽에서 줘야 하지 않나?”
그러니까 뭘. 대체 무슨 말이냐고. 아니, 서두 잘라먹고 말하는 게 버릇이랍니까?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으니 함부로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앞에 놓인 카페라떼를 홀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 내가 물었었지. 머무를 수 있는 대가로 내게 뭘 줄 거냐고.”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그, 유예한이라는 것을 안 이후로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지만, 그런 말이 오고 갔던 기억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기억이 있다고는 해도 선뜻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땡전 한 푼 없는 것은 마찬가지니 말이다. 게다가 아무리 내게 돈이 있다고 해도 저, 유예한이 돈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집에 사는 그가 뭐가 아쉬워서?
“생각해 둔 것은 있나?”
“아니, 그런 거 없는데?”
간간히 차를 마시며 대답하자, 성의가 없다고 느낀 것인지 그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것을 보니 뭐라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내게 뭐라 한 적이 없는 사내지만 말이다.
“생각해 둔 것이 없다니, 잘됐군. 얘기가 빠르겠어.”
어느새, 다 마신 것인지 컵을 탁 소리가 나도록 두고서 그가 상체를 기울였다. 빛조차 반사되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머리카락이 그의 뺨 언저리에서 흩어졌다. 굉장히 야릇한 자태가 아닐 수 없었다.
다 큰 남자에게서 저런 분위기가 난다니. 새삼스레 다시 부러워진다.
“뭐, 뭔데?”
왠지 모를 압도적인 분위기에 더듬더듬 입을 열었지만, 그는 쉽사리 말을 꺼내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말하기 어려운 조건이라서가 아니라, 마치 나를 관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집요한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혹시, 의심하고 있는 건가. 의문이 꼬리를 들었지만, 나는 곧 털어 냈다. 고작, 하루를 함께한 자다.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뒷조사를 한다고 해도 며칠은 걸릴 터.
이내, 그가 상체를 펴고서 소파에 편하게 기대었다. 다리를 꼬고 한 쪽 팔은 소파 등에 걸쳐 놓은 자세가 꽤나 거만해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상대를 탐색하는 눈빛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아 보였다.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타깃을 잘못 선택한 걸지도.
“내 조건은 간단하다. 한 가지 소원. 그거면 돼.”
“한 가지 소원?”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내가 알라딘에 나오는 지니도 아니고. 소원이라니?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유예한의 표정이 잠시 변한 것 같았지만, 워낙 머리를 굴리고 있던 터라 그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덕분에 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간단하지?”
“음, 으으음. 그래, 뭐. 그렇게 할게.”
후에, 나는 후회하게 된다. 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이 순간을.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고작, 스물한 살의 나이. 선우가의 막내라 할지라도, 나는 세상에 던져진 작은 생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한 가지 소원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뭐야?”
그 소원이 뭔지 알아야 대비를 할 게 아닌가. 갑자기 무턱대고 이상한 것을 요구한다면, 내게 거부권이 있을까? 물론, 있겠지. 그리고 그 다음은 저 낮은 목소리로 “나가.”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결론은 그 어떤 소원이든 들어줘야 한다는 거. 뭐, 이런 염병할…….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고, 진짜 난감하다. 싫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지만, 치사하고 쩨쩨해 보일까 싫었다. 그리고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으니, 소원이라는 것도 짐작이 가질 않는다.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의 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아직은 모르지.”
태연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게 말이 돼?!”
소원을 들어달라며! 그럼, 떠오르는 게 있을 거 아냐! 다른 사람들은 소원을 말하라고 하면, 백 가지도 말하겠구만. 아직은 모른다고?! 지금, 사람 가지고 장난쳐? 네가 그렇게 잘났냐?!
─라고, 외칠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어쨌든 눈앞에 있는 사람은 현재 나의 물주나 다름없는 인간이었다. 형님들의 교육 중, 이런 것이 있었지.
너에게 이득이 될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지 마라. 설령, 그자의 약점을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섣부른 언행은 금물이다.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하고, 그때 버려도 늦지 않다. 그쪽에서 먼저 너를 내치게 하지 마라. 그것이 어떤 식으로 네게 타격을 줄 지 알 수 없는 일이니.
큰형의 말이니, 틀린 말은 아니겠지. 더군다나 조금은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흠흠, 그러니까, 하나라도 있을 거 아냐.”
“없다만.”
이, 인간아. 1초라도 생각하고 답해 주면 어디가 덧난다니? 세상이 무너져?
“그, 그래도. 지금, 막 생각나는 거라도오…….”
“없어.”
내,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딱, 따악! 10분만 저 자식 팰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무슨 인간이 저래! 대화의 예의 같은 것도 안 배웠어?!
“그럼, 언제 말할 생각인데?”
“굳이, 지금 말할 필요가 있나?”
“갚을 건 빨리 갚을수록 좋지 않을까?”
난, 빚지는 건 딱, 질색이란 말이다.
“어차피, 스무 개의 질문을 던질 때까지는 시간도 많이 남았고. 소원은 천천히 생각해도 될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아니면, 굳이 지금이어야 하는 이유라도?”
그렇게 따지시면, 할 말이 없죠.
역시, 이 인간은 큰형과 만나게 해 줘야 해. 이건 인연이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두 사람의 장래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냥 기각시켜 버렸다. 집안 풍비박산을 넘어 세계의 종말로도 이어질 수 있다. 나는 착한 아이니까, 세계를 위해 헌신해야겠지? 평생 형님과는 만나지 않길 바라오.
“신기한 얼굴이군.”
“엑? 뭐, 뭐가?”
내가 21년 인생을 살았지만, 얼굴이 신기하게 생겼다는 말은 솔직히, 처음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여자도 꽤나 꼬이는 얼굴이고 몇 번 자 본 적도 있었다. 남자 녀석들도 나른한 고양이 같다면서 치근덕거리고. 어떤 사람은 색기가 있는 얼굴이라고 한 적도 있었다.
고로, 어디 가서 빠지는 얼굴은 아니라 이거다.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내가 인형이냐. 로봇이냐. 이 세상에 표정이 없는 인간도 있더냐. 아니군. 있구나. 내 앞에.
나는 턱을 손으로 짚은 채, 잠시 유예한의 표정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하루 동안 그가 지었던 표정이 뭐가 있을까.
처음 만났을 때는 무표정이었지. 그리고 그 다음도 무표정이었지. 아, 가끔 눈썹이 위로 올라가긴 했었다. 물론, 그것도 무표정이었지만. 그리고 그 다음도, 그 다음도. 그리고 지금도…….
내, 그대를 진정한 철벽의 얼굴. 철옹성의 표정으로 인정하는 바이니라. 이건, 뭐. 인간이 아니네. 어떻게 인간이 저렇담. 감정이 없다고 소문 난 셋째 형도 저 정도는 아닌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알고 싶지는 않군.”
어느새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표정을 구경하고 있던 모양인지, 여전히 시선은 내게 머물러 있었다. 왠지 그 시선에 부담이 느껴졌다.
나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밑바닥에서부터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목덜미와 얼굴이 뜨거웠다.
왜,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니! 나, 나한테 할 말 있나?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간다. 고개를 돌리는 것도 어려웠다. 아니, 정확히는 무서웠다!
힐끔, 눈알만 굴려 슬쩍, 바라보았다.
‘히익!’
차라리, 안 보는 것만 못했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그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바로 눈앞에 셔츠 사이로 드러난 그의 쇄골이 보였으니, 말 다 한 거다.
이, 이건 너무 가깝잖아! 절루가! 저리가아아아!! 소리 없는 외침으로 나는 발악했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내 입가로 슬쩍 다가왔다.
“?”
그의 손가락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의 일은 제대로 인식이 되질 않았다. 손가락이 왜 내 입가에 머무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째서 그 손가락이 내 입술을 훑고 가는 건지도 모르겠고! 나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끼기긱, 돌려 그를 보았다. 어느새 한 발자국 물러선 그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할짝.
붉은 혀가 그의 엄지손가락을 핥고 사라졌다.
“차가 묻어 있어서 말이지.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끈적거리거든.”
그러고는 빙긋 미소 지었다.
“…….”
그리 말한 그는 이내 두 개의 머그잔을 들고서 부엌으로 사라졌다. 여전히 말도 안 될 정도의 장난스런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뭐지, 이건 뭐지? 대체 뭐가 지나간 거야?!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서 사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지금! 지그음!!
끈적거릴 것을 염려하여, 친히 그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닦아 주었다는 거야?! 그리고서 자신의 손에 묻은 것을 혀로 핥았다고?!
사태가 정리되자, 머릿속을 강타하는 것은 새하얀 분노. 그래, 새빨간도 아닌, 새하얀 분노였다!
“아, 아아. 아아악!! 뭐하는 짓이야아!!”
어디서 감히, 성추행을 하는 거야! 아악!
“어따 대고 성추행이야!”
“성추행이라니. 왜 갑자기 사람을 범죄자 취급이지?”
머그잔을 들고 가던 그가 시선만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그 폼이 여간 거만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잘생긴 놈은 뭘 해도 화보라고. 저 상태에서 플래시만 터트린다면, 아마 대박감일 거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나는 엄연히 성추행을 당한 가련한 짐승이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