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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의 론도 1권
편애의 론도 1권 1화
1. 크레파스 (1)
「기억해?
플라타너스에 새겨진 시간을.」
가끔, 인간이란 참으로 알기 쉬운 생물이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비켜, 비켜!”
“저기 봐! 또 일등이야. 몇 번째지?”
“입학 이래로 내려간 적이 없지?”
“입학할 때도 수석으로 들어왔다며!”
특히나 지금처럼 목소리를 높일 때는 더 그렇다.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감정은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고, 또 시끄럽기까지 했다. 호기심과 부러움. 그리고 희미하게 섞여 있는 질투. 모든 것이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저들의 감정이 너무도 알기 쉬운 걸까. 미묘하게 그 시선들이 내 신경을 자극해 온다.
게시판에는 전교생의 등수가 1등부터 마지막까지 나열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내 이름은 찾기가 쉬웠다. 가장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저 이름. ‘리오엘 L’이 내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돌연 누군가가 어깨를 짚어 왔다.
“저기 봐라. 또 네 이름이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몰렸다. 그렇게나 시끌벅적하던 게시판 앞이 고요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조용하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이내 자기 주장을 하는 그 시선들이 조금씩 불편해질 즈음,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것마냥 모두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상자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풍기는 냄새로 가늠하건대 쿠키였다.
“리오엘 축하해! 또 1등이구나!”
“응, 고마워.”
그에 질세라 이번엔 남자애가 소리친다.
“비결 좀 알려 줘! 난 실기가 젤 어렵던데!”
“궁금하면, 연무장에 4시 35분에 와.”
아, 또 시작됐다.
성적 발표 날만 되었다 하면 이렇게 몰려들어서는 자기들 좋을 대로 떠들어 대곤 했다. 내 옆에 붙어 있는다고 해서 성적이 오를 리가 없건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팁을 알려 줄 것도 아니다. 팁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한 것이라곤 한결같이 수련한 것뿐이었다. 그러니 알려 줄 게 없을 수밖에.
이럴 시간에 나라면 가서 수련에 힘썼을 것이다. 나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질색이니까.
한숨을 내쉬곤 허공에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그러자 모세의 기적처럼 인파가 갈라졌다. 아니, 모세의 기적이라기보다도 흡사 왕의 행차 길 같았다.
이 시즌이 되면 언제나 이곳은 시끄럽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소년소녀들도 아니건만, 20대가 되었어도 그들의 호기심은 사그라지질 않는다. 조금 특이하다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 되곤 한다. 특히 학교라는 곳에서는 더욱 그런 법이다. 또한 특별한 집단 속에서 더 특별한 인간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곳은 특별 군사 학교, 어거스트. 20대부터만 다닐 수 있는 이곳에는, 세계에서도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인재냐 하면, 전쟁 속에 몸을 던지기 위한 인재다.
그리고 이 학교는…….
“오오. 저기 봐, 리오엘!”
“푸른색의 소행성이야!”하고 그가 소리쳤다.
이 학교는 우주에 있다.
“푸른색이라니 희귀하네.”
“그러게.”
나의 짧은 대답에 놈이 고개를 홱 돌렸다. 오렌지빛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리듯 흐트러진다. 삐죽하게 올라간 눈초리에 어울리지 않게, 놈은 제법 말이 많았다. 나와는 달리 떠드는 걸 좋아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곤 했다.
“감상이 그게 다야?”
“그런데?”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소행성 하나 지나가는 거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게 더 이상하다.
나는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 옌은 투덜거리면서 잘도 쫓아왔다. 참 말 많고 오지랖도 넓은 놈이다. 어찌하면 저토록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어찌하면 저토록 쉴 새 없이 입을 놀릴 수가 있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뭐……, 싫지는 않으니까.
무심코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모든 벽이 유리로 이루어진 복도에는 우주가 그대로 보였다. 새카만 세상에 펼쳐진 작은 행성들. 확실히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이것도 계속 보다 보면 그저 그렇다. 생각해 봐라. 길가에 나무가 있다고 매번 똑같이 감탄할 것인가.
돌연, 희미한 빛이 저 끝에서부터 반짝였다. 그러더니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 빛은 재빠르게 우리 앞에 커다란 몸체를 드러내더니, 곧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마치 목적은 이 학교라는 것처럼.
새카맣고 날렵한 몸은 학교의 절반 정도가 될 정도로 컸다. 그 몸체에 새겨진 마크를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날이었던가.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옌이 말했다.
“맞다. 오늘 군의 높으신 분들이 온다고 했었는데.”
반듯하게 뻗은 날개와 얇고 넓은 면적. 흡사 새를 닮았다.
저게 바로 체르시엘군이 자랑하는 함대, 자이로크. 평소에는 감정적으로 무딘 나도 이 순간만큼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너, 저걸 봐도 아무렇지가 않아?”
겉으로 티가 안 나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자이로크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어쩐지 가슴이 조금 술렁거리는 것만 같다. 저곳에는 그가 타고 있을 것이다. 체르시엘의 야수라 불리는 사내, 테렌스 아델 참모총장이.
자이로크는 곧 학교의 아래로 사라졌다. 사라진 방향은 정거장 쪽이었다. 학교에 들어올 준비를 하는 것일 테다. 그렇게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내 눈에 켜진 불은 쉽게 꺼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더 강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테렌스 아델. 여태까지 전장에서 죽인 적의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라는 남자. 짐승과도 같은 카리스마로 모두를 압도한다는 사내. 그리고 희대의 천재라는 또 다른 별명을 가진 그.
무엇을 숨길까. 테렌스 아델은 나의 동경이다.
옌이 내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둘러 왔다.
“구경하러 갈 거야?”
말아 쥔 책을 곧장 휘둘렀다. 검이 바람을 베듯 세찬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분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정보에 의하면 테렌스 아델은 타인을 만나지 않는다고 들었다. 군의 간부가 아닌 이상 그를 보기는 어렵다. 대인기피증? 아니, 천재니까. 인간이라는 생물이 그에게는 시시하게 보이는 것이 틀림없다. 만나고 싶지만 실례를 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도 나는 군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그를 만날 것이다. 그의 부하로서.
옌은 자신의 책으로 내 책을 툭 밀어냈다. 그러더니 뺨을 퉁퉁하게 부풀렸다.
“네가 그런 눈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겠지.”
“당연하지.”
내 눈이 어떤지 거울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겠지만, 감은 잡힌다. 분명히 평소에는 볼 수 없을 생기가 감돌았을 것이다.
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꿉친구에게조차도 보여 주지 않는 얼굴이니, 서운함을 느낄 것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게 내 성격이다. 그리고 고칠 생각도 없다. 그걸 알면서도 옌은 내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재차 말할 필요도 없었다. 네가 바라는 성격이 되지는 않을 테니 포기하라고 말이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옮겼을까.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옌이 “아.”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네 표정이 변하는 경우가 딱 하나 더 있네.”
“뭔데?”
그는 강의실에 학생카드를 찍으며 입을 열었다. 나 또한 옆에서 카드를 찍었다. 그러자 문이 스르륵 옆으로 열렸다. [출석이 완료되었습니다.]하는 기계음은 차갑고 낮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 놈의 목소리가 섞여 든다.
“전투 실기 할 때.”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잠시 우리에게 머물렀다. 옌과 나는 창가 맨 끝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푸른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까만 우주가 눈에 들어온다. 그 새카만 풍경 아닌 풍경에 잠시 눈길을 빼앗겼다. 굳이 무슨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아름답다거나 신기하다거나 그런 감상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주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건, 저 드넓고 검은 세상 어딘가에 지구가 있기 때문이었다.
턱을 괸 손이 괜히 움찔움찔 떨렸다. 가고 싶다는 듯, 두 눈으로 그 행성을 눈에 담아 보고 싶다는 듯이 미약하게나마 자신의 감정을 몸이 표현하고 있었다. 만일 불쑥 들려온 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그렇게 우주 속에 계속해서 시선을 빼앗긴 채였을 것이다.
탁! 하는 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눈앞에 보이는 건 가느다란 손목과 그것을 붙잡고 있는 또 하나의 손이었다. 뼈대가 제법 굵었다. 그런데도 손등에 유독 살이 없어서 툭 뼈가 불거져 하얗게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은 거칠어져 있는 이 손을 나는 몹시 잘 알고 있다. 옌의 손이었다.
굳이 상황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옌의 목소리 하나면 충분했다.
“미안한데, 이 녀석은 누가 자기 몸에 손대는 거 싫어해.”
눈앞의 여학생은 당황한 듯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틀림없이 또 내게 흥미를 느낀 불청객이 틀림없었다. 그 증거로 저 가는 손가락이 날 향해 뻗어 있지 않은가.
“미, 미안. 머리카락이 너무 예뻐서.”
짧은 한숨이 터졌다. 거 봐라. 역시 이거다.
됐다는 듯 옌을 바라보자 그는 미련도 없이 그 손을 놓았다. 내버려 두어도 내가 저지했을 텐데. 옌의 오지랖은 언제나 범위가 넓어서 탈이다. 특히나 그게 나와 관련이 되면, 이것저것 가릴 거 없이 챙겨 주려 하니 더 문제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내가 그런 옌을 별로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안 그러면 이 녀석이 네 손목 잘라 버릴걸?”
댕강, 하며 옌은 말끝을 장난스레 맺었다. 농담이었고 그럴 일도 없지만 의외로 그 말의 효과는 컸다. 여학생이 곧 미안하다며 자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한숨이 푹 새어 나온다.
옌을 향해 눈을 흘기자,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키득거리기 바빴다. 쓸데없는 말 뱉어 놓고 혼자만 좋아라 하지. 혼자만.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 고맙다.”
네 덕분에 또 다른 헛소문이 돌겠구나. 리오엘은 마음에 안 들면 검부터 뽑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뭐 어때. 이걸로 귀찮은 거 더는 셈이잖아?”
쯧, 혀를 차자 놈은 금세 어깨동무를 해 왔다. 훈련으로 다져진 단단한 팔이 어깨에 무게를 더한다. 묵직한 느낌에 몸이 한차례 흔들렸다.
“에이. 화났어? 화났으면 다시 가서 리오엘 착한 놈이라고 말해 주고 올까?”
“됐어. 무거우니까 팔이나 치워.”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목이 간질간질했다. 밝은 오렌지빛이 눈가에 비쳤다. 머리카락이 아니라 햇빛이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 보통은 다들 이런 식의 머리카락이다. 그것이 당연하고, 익숙할 터였다. 하지만 내 머리카락은 그렇지 않았다. 우주를 닮은 듯 새카맣기만 하다. 그것뿐이라면 모를까.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벽안에 모두가 흥미를 갖곤 했다. 나만큼 맑은 푸른색은 보지 못했다면서. 귀찮지 않다면 거짓말. 하지만 귀찮다고 말하는 것마저도 귀찮을 뿐이다.
옌이 팔을 내리자 때마침 자동 음성 기계가 [교수님께서 들어오십니다.]라고 짧은 말을 내뱉었다. 약속처럼 내부가 조용해졌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걸어오더니 교탁을 탁 내려쳤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다들 알고 있을 거고. 그로 인해 들뜬 것도 이해하지만, 소란스럽게 굴지 말도록. 우리는 평소처럼 한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수업 하나요?”
그가 크렌스보드(크렌스펜과 연동되어,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보드)로 돌아섰다. 수평선을 긋듯 크렌스펜(사람의 생각을 읽어 내는 펜. 크렌스보드에만 사용할 수 있다)을 허공에 한 번 그었다.
크렌스보드에 글자가 나타났다. 큼지막한 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복습]이라고.
모두의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 굳어 버렸다. 진도를 나가는 것도, 그렇다고 자습도 아닌 복습이라니. 그런 우리를 내버려 둔 채 교수님께서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인 만큼, 제군들의 머릿속에 사상과 개념을 다시 상기시키는 복습을 하도록 하겠다. 우선은 모듈에 관해서다. 다들 [모듈의 시초] 첫 페이지를 로딩시키도록.”
각자 자리 앞에 있는 모니터 화면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미 100페이지도 넘게 진행이 되었거늘 다시 1페이지로 돌아가라니. 더군다나 가장 지루한 부분이다.
1페이지의 로딩이 끝나자, 화면에는 구체가 하나 나타났다. 행성을 닮았지만 행성은 아니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말할 필요도 없다만 모듈이다. 지구와 똑 닮은 생김새를 하고 있지만…….”
삑― 하는 소리가 났다. 교수님이 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그러자 우리가 보고 있는 화면이 모습을 달리했다. 모듈의 옆에 지구의 사진이 뜨고 구조가 자세히 나타났다.
“오존층으로 둘러 싸여 있는 지구와는 달리 모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단순히 모든 기술과 자잘한 부품들의 집합인, 기계 껍데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것을 스크린 카마그래프 이매진(Screen·kamagraph imagine) 줄여서 스카이(SKY)라고 부른다. 스카이에는 지구에 관련된 정보……, 사소한 소리부터 대기 중에 떠도는 성분, 기온에 따른 변화, 모든 것이 입력되어 있다. 스카이는 그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모듈을 최대한 지구와 가까운 환경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산소 공급과.”
삑.
화면에 새파란 하늘이 떴다.
“하늘을 만들어 냄으로써 기후를 조정하는 것이다. 모듈이 자체적으로 조정하는 대표적인 기후로는 레이닝타임과 스노윙타임 등이 있지. 지구의 기후가 예측해도 맞추기가 힘든 반면 모듈의 날씨는 정확하게 시일이 정해져 있다는 차이가 있다.”
“기계니까.”라며 교수님이 말을 덧붙였다.
또 한 번 화면이 넘어간다. 이번에는 스카이의 모습이 좀 더 자세하게 나왔다. 구체의 표면은 정사각형으로 빼곡히 둘러싸여 있었다. 흡사 미러볼을 닮았다.
“스카이는 퍼즐과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정사각형은 가로세로 10센티미터로 단 한 조각도 0.1센티의 오차조차 없게 제작이 되어 있다. 지구가 자전을 하듯이, 모듈은 이 정사각형들이 매번 같은 주기로 도는데 이것들이 돌고 돌면서 서로의 위치를 세세하게 바꾼다. 그렇게 되면…….”
삑.
“이렇게 흐린 하늘이 되었다가, 눈이 내렸다가 하는 것이지. 쉽게 말해 저 정사각형들은 스카이의 조직세포 같은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처럼 촉감도 생김새도 유리에 가깝다.”
“만일 이게 깨지면 어떻게 되겠나?”
돌연 교수님께서 그리 물었다.
아주 쉬운 질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누군가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듈에 혼란이 찾아오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중요한 기체 조절이 되지 않아, 산소 공급이 어려우며 중력의 조절 또한 어려워져 몸이 우주로 튕겨 나갈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전멸, 합니다.”
좋은 대답이었다며 교수님께서 고개를 끄덕인다.
분위기가 조금 숙연하게 가라앉았다. 모듈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 운석이 날아올지 알 수 없고, 기계인지라 언제 고장이 나 버릴지 또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유는 지구가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구라는 곳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모듈은 지구에 존재하는 많은 나라들 중, 다섯 개의 국가가 최초로 만들어 낸 인공 행성이다. 그리고 최초로 만들어진 우주 국가가 여기, 체르시엘이다. 3401년, 대 이주가 시작되면서 지구의 인구는 절반 넘게 줄어들었으며 그에 비례하게 위태롭던 자연 또한 본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 이주 이전의 지구는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자연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멸망의 위기가 닥쳤던 행성이다. 하지만 과학도, 기술도, 개발도 모두 모듈로 넘어오면서 안정을 되찾았지. 즉, 모듈은 과학 기술의 산물임과 동시에 지구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는 소리다.”
그는 고요한 시선으로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수업이 시작되면서 조용해진 강의실 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모듈에 관한 것을 들을 때면 이렇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특히 지금처럼 지구와 비교하며 듣게 될 땐 더 그렇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모듈이 생겨나며 만들어진 조약이 무엇인지 대답해 봐라.”
돌연 교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리오엘.”
나는 입을 한차례 달싹이다 곧 입술을 뗐다. 간단한 질문이었으며, 결코 잊어선 안 될 답이었다.
“본국 불침략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지구에서 일어나던 전쟁을 막기 위한 조약이며, 또한 우주에서 일어날 전쟁에 대비한 조약이기도 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우주에선 얼마든지 전쟁을 해도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존재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잘 기억하고 있군. 부가 설명도 아주 좋았다. 역시 리오엘이야.”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교수님을 보며 다시 착석하였다. 동시에 화면이 넘어간다.
“모듈은 우리들이 있는 제로(0)부터 나인(9)까지 존재한다. 모듈은 단 하나의 구체에 단 하나의 넘버가 붙으며, 이것들은 모두 우주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리로 이음으로써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체르시엘의 모듈은 제로, 쓰리, 포. 이 세 곳이다. 나머지 모듈은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체르시엘이 아니다. 특히나 나인은 말이지. 가끔 헷갈리는 놈들이 많은데, 나인이 한때 체르시엘에 속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니 착각하지 말도록.”
분위기가 더욱더 무겁게 가라앉는다. 모듈의 지도를 바라보는 모두의 눈빛이 차가운 빛을 띠었다. 군사 세뇌 교육의 영향이었다.
“나인은 바르세크, 체르시엘의 분단국이자 적국에 속해 있는 모듈이다. 유일하게 다리로 이어져 있지 않은 모듈이며 체르시엘이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단독으로 만들어진 나라지. 그렇기에 지구 연합국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독립국가로 분류할 수 있다.”
마지막에 화면에 나타난 것은 신(新)우주 계획 14조항의 항목이었다.
─특별한 허가 없이는 모듈의 인간이 지구에 접촉하는 것을 금한다.
─허가는 모듈 대표장의 인장과 지구 입국장의 허가증, 그리고 지구 연합국인 다섯 개 나라의 동의서를 필요로 한다.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듈의 시민증과 보건증을 소지해야 하며 지구에 해가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로 제한한다.
(중략)
─단, 비상시에 한하여 군인만은 위의 항목들을 무시하고 연합국의 동의만으로 입국이 가능한 권한을 얻는다.
설명은 길지만 요약하자면 하나뿐이었다.
모듈의 인간은 지구에 갈 수 없다는 것.
보건증이란 단순한 병력에 대한 기록을 넘어서, 세균 수치 또한 지구에서 정한 기준을 넘어서는 안 되며 자잘한 상처도 있어선 안 된다. 검사 시간은 길고 비용도 만만치 않으므로 웬만한 사람은 보건증을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더군다나 지구에 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이 조항은 쉽게 말해 지구에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럼 다들 14조항을 읽어 보고 있도록.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교수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간은 아직 30분 이상이나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손목의 워치(군의 통신단말을 일컫는 단어. 시간도 알 수 있다)를 한 번 바라보더니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리오엘은 나와라. 갈 곳이 있다.”
“어디를 말입니까?”
“군의 분들이 널 만나 보고 싶어 한다.”
모두가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군의 사람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니. 혹시 테렌스 아델을 볼 수 있는 걸까. 초조함에 새끼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옌은 그런 날 보더니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정도로 표정이 없는 것도 참 재주다.”
“시끄러워.”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만나게 되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의 함대에 들어가고 싶다고? 아니, 그건 너무 직설적이잖아.
강의실을 나와 복도를 걸으면서 짧은 숨을 들이켰다.
먼저 안으로 들어선 교수님의 “학생을 데려왔습니다.”라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이 문 안에 그가 있다. 그 생각을 하자 무심코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
나는 교수님의 손짓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곧바로 다리에 힘을 주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거스트, 학생번호 3674. 리오엘 리오라고 합니다.”
“오, 검은 머리네?”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심장은 급속도로 식어 가기 시작했다.
없다. 테렌스 아델이.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지만, 그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영상과 자료로 몇 번이고 봐서 알고 있다. 잿빛의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흔하지 않은 외모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이라도 비슷한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수님이 내 어깨를 앞으로 살짝 밀었다.
“이 학생이 우리학교 수석입니다. 입학 시험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놓친 적이 없죠.”
그 외에는 식상한 말들이 오고 갔다. 대단하다는 둥,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는 둥. 이 사람들도 만나기 힘든 사람들이라는 것쯤은 안다. 이들은 체르시엘 제3, 4함대장들이다. 하지만, 가장 만나고 싶은 그가 없다니. 김샌다. 아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럴 때만큼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대화가 끝났을 때에는 이미 수업이 끝난 시간이었다. 나는 강의실로 향하지 않고 곧장 기숙사로 향했다. 희미하게 푸른 등만 켜진 복도는 어두웠다. 잠시 멈춰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새카만 우주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보이진 않지만 저 수많은 행성 사이에서 지구가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어거스트의 수석이 되면, 지구에 갈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 어려운 입학 시험을 뭣 하러 치렀는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들어오려 했던가. 그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니, 나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지구에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창밖에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걸으려던 찰나 발을 흠칫 멈추고 말았다.
“흠흠, 흠.”
발랄한 허밍이다. 하지만, 잘 부른다고는 차마 말해 주지 못하겠다. 아니,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나오는 대로 부르는 듯한 노래. 음정도 박자도 엉망이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인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망설일 것도 없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여기가 감히 어떤 곳인데.
“저기요. 여기에 낙서하시면 안 됩니다만.”
오색의 크레파스가 찍찍 그어진다. 그것이 그리고 있는 것은 무지개였다. 그것도 아주 엉성한 무지개. 초등학생이 그려도 저것보단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상대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엉터리 허밍을 하며 엉터리 그림을 계속 그릴 뿐이다.
참다못한 나는 결국 그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이봐요, 여기는 낙서하는 곳이 아닙니다.”
“으응? 안 돼?”
“하면 안 되는 거야?”하면서 그가 훌쩍거렸다. 맑은 눈망울에 눈물이 빠르게 고이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몸이 흠칫 굳었다. 그것은 다 큰 사내가 훌쩍거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모양새에 기가 차서도 아니었다. 사람을 울렸다는 당혹감 때문도 아니었다.
푸른 조명이 비추는 잿빛 머리카락, 그리고 붉은 눈동자. 낯이 익다.
“저, 저기.”
여태까지 죽인 적군의 수가 셀 수조차 없다고 하는 그. 자비라고는 없는 잔인한 성품으로, 피바람을 몰고 다닌다는 그. 희대의 천재라 불리며 체르시엘의 야수라고도 불리는 그. 체르시엘군 참모총장 테렌스 아델.
“시러어! 테렌스 그림 그릴 거야!!”
이게?!
천천히 손목을 놓았다. 그러자 “무지개! 무지개!”하면서, 다시 낙서를 시작한다. 꼬불꼬불, 흐물흐물한 무지개다. 그런 주제에 크기는 아주 크다. 긴 팔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뻗어 가며 잘도 그린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훑어보았다. 어린애가 아니다. 완벽한 성인의 모습이다. 그것도, 매스컴으로 자주 보았던 테렌스 아델이다.
나는 슬쩍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저어, 테렌스 아델 님?”
“응? 내 이름 알아?”
방긋방긋 잘도 웃는다. 저 날카로운 눈을 귀엽게 접어 가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참 잘 웃는다. 일순, 몸이 휘청였다. 그리고 그 순진한 긍정에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아, 이게 정녕 테렌스 아델이란 말인가. 정녕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란 말인가. 결코 건드려선 안 될 무언가를 건드린 것처럼, 시야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테렌스 아델을 만나고 싶어 하던 내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편애의 론도 1권 1화
1. 크레파스 (1)
「기억해?
플라타너스에 새겨진 시간을.」
가끔, 인간이란 참으로 알기 쉬운 생물이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비켜, 비켜!”
“저기 봐! 또 일등이야. 몇 번째지?”
“입학 이래로 내려간 적이 없지?”
“입학할 때도 수석으로 들어왔다며!”
특히나 지금처럼 목소리를 높일 때는 더 그렇다.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감정은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고, 또 시끄럽기까지 했다. 호기심과 부러움. 그리고 희미하게 섞여 있는 질투. 모든 것이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저들의 감정이 너무도 알기 쉬운 걸까. 미묘하게 그 시선들이 내 신경을 자극해 온다.
게시판에는 전교생의 등수가 1등부터 마지막까지 나열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내 이름은 찾기가 쉬웠다. 가장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저 이름. ‘리오엘 L’이 내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돌연 누군가가 어깨를 짚어 왔다.
“저기 봐라. 또 네 이름이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몰렸다. 그렇게나 시끌벅적하던 게시판 앞이 고요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조용하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이내 자기 주장을 하는 그 시선들이 조금씩 불편해질 즈음,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것마냥 모두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상자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풍기는 냄새로 가늠하건대 쿠키였다.
“리오엘 축하해! 또 1등이구나!”
“응, 고마워.”
그에 질세라 이번엔 남자애가 소리친다.
“비결 좀 알려 줘! 난 실기가 젤 어렵던데!”
“궁금하면, 연무장에 4시 35분에 와.”
아, 또 시작됐다.
성적 발표 날만 되었다 하면 이렇게 몰려들어서는 자기들 좋을 대로 떠들어 대곤 했다. 내 옆에 붙어 있는다고 해서 성적이 오를 리가 없건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팁을 알려 줄 것도 아니다. 팁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한 것이라곤 한결같이 수련한 것뿐이었다. 그러니 알려 줄 게 없을 수밖에.
이럴 시간에 나라면 가서 수련에 힘썼을 것이다. 나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질색이니까.
한숨을 내쉬곤 허공에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그러자 모세의 기적처럼 인파가 갈라졌다. 아니, 모세의 기적이라기보다도 흡사 왕의 행차 길 같았다.
이 시즌이 되면 언제나 이곳은 시끄럽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소년소녀들도 아니건만, 20대가 되었어도 그들의 호기심은 사그라지질 않는다. 조금 특이하다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 되곤 한다. 특히 학교라는 곳에서는 더욱 그런 법이다. 또한 특별한 집단 속에서 더 특별한 인간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곳은 특별 군사 학교, 어거스트. 20대부터만 다닐 수 있는 이곳에는, 세계에서도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인재냐 하면, 전쟁 속에 몸을 던지기 위한 인재다.
그리고 이 학교는…….
“오오. 저기 봐, 리오엘!”
“푸른색의 소행성이야!”하고 그가 소리쳤다.
이 학교는 우주에 있다.
“푸른색이라니 희귀하네.”
“그러게.”
나의 짧은 대답에 놈이 고개를 홱 돌렸다. 오렌지빛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리듯 흐트러진다. 삐죽하게 올라간 눈초리에 어울리지 않게, 놈은 제법 말이 많았다. 나와는 달리 떠드는 걸 좋아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곤 했다.
“감상이 그게 다야?”
“그런데?”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소행성 하나 지나가는 거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게 더 이상하다.
나는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 옌은 투덜거리면서 잘도 쫓아왔다. 참 말 많고 오지랖도 넓은 놈이다. 어찌하면 저토록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어찌하면 저토록 쉴 새 없이 입을 놀릴 수가 있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뭐……, 싫지는 않으니까.
무심코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모든 벽이 유리로 이루어진 복도에는 우주가 그대로 보였다. 새카만 세상에 펼쳐진 작은 행성들. 확실히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이것도 계속 보다 보면 그저 그렇다. 생각해 봐라. 길가에 나무가 있다고 매번 똑같이 감탄할 것인가.
돌연, 희미한 빛이 저 끝에서부터 반짝였다. 그러더니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 빛은 재빠르게 우리 앞에 커다란 몸체를 드러내더니, 곧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마치 목적은 이 학교라는 것처럼.
새카맣고 날렵한 몸은 학교의 절반 정도가 될 정도로 컸다. 그 몸체에 새겨진 마크를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날이었던가.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옌이 말했다.
“맞다. 오늘 군의 높으신 분들이 온다고 했었는데.”
반듯하게 뻗은 날개와 얇고 넓은 면적. 흡사 새를 닮았다.
저게 바로 체르시엘군이 자랑하는 함대, 자이로크. 평소에는 감정적으로 무딘 나도 이 순간만큼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너, 저걸 봐도 아무렇지가 않아?”
겉으로 티가 안 나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자이로크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어쩐지 가슴이 조금 술렁거리는 것만 같다. 저곳에는 그가 타고 있을 것이다. 체르시엘의 야수라 불리는 사내, 테렌스 아델 참모총장이.
자이로크는 곧 학교의 아래로 사라졌다. 사라진 방향은 정거장 쪽이었다. 학교에 들어올 준비를 하는 것일 테다. 그렇게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내 눈에 켜진 불은 쉽게 꺼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더 강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테렌스 아델. 여태까지 전장에서 죽인 적의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라는 남자. 짐승과도 같은 카리스마로 모두를 압도한다는 사내. 그리고 희대의 천재라는 또 다른 별명을 가진 그.
무엇을 숨길까. 테렌스 아델은 나의 동경이다.
옌이 내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둘러 왔다.
“구경하러 갈 거야?”
말아 쥔 책을 곧장 휘둘렀다. 검이 바람을 베듯 세찬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분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정보에 의하면 테렌스 아델은 타인을 만나지 않는다고 들었다. 군의 간부가 아닌 이상 그를 보기는 어렵다. 대인기피증? 아니, 천재니까. 인간이라는 생물이 그에게는 시시하게 보이는 것이 틀림없다. 만나고 싶지만 실례를 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도 나는 군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그를 만날 것이다. 그의 부하로서.
옌은 자신의 책으로 내 책을 툭 밀어냈다. 그러더니 뺨을 퉁퉁하게 부풀렸다.
“네가 그런 눈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겠지.”
“당연하지.”
내 눈이 어떤지 거울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겠지만, 감은 잡힌다. 분명히 평소에는 볼 수 없을 생기가 감돌았을 것이다.
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꿉친구에게조차도 보여 주지 않는 얼굴이니, 서운함을 느낄 것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게 내 성격이다. 그리고 고칠 생각도 없다. 그걸 알면서도 옌은 내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재차 말할 필요도 없었다. 네가 바라는 성격이 되지는 않을 테니 포기하라고 말이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옮겼을까.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옌이 “아.”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네 표정이 변하는 경우가 딱 하나 더 있네.”
“뭔데?”
그는 강의실에 학생카드를 찍으며 입을 열었다. 나 또한 옆에서 카드를 찍었다. 그러자 문이 스르륵 옆으로 열렸다. [출석이 완료되었습니다.]하는 기계음은 차갑고 낮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 놈의 목소리가 섞여 든다.
“전투 실기 할 때.”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잠시 우리에게 머물렀다. 옌과 나는 창가 맨 끝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푸른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까만 우주가 눈에 들어온다. 그 새카만 풍경 아닌 풍경에 잠시 눈길을 빼앗겼다. 굳이 무슨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아름답다거나 신기하다거나 그런 감상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주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건, 저 드넓고 검은 세상 어딘가에 지구가 있기 때문이었다.
턱을 괸 손이 괜히 움찔움찔 떨렸다. 가고 싶다는 듯, 두 눈으로 그 행성을 눈에 담아 보고 싶다는 듯이 미약하게나마 자신의 감정을 몸이 표현하고 있었다. 만일 불쑥 들려온 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그렇게 우주 속에 계속해서 시선을 빼앗긴 채였을 것이다.
탁! 하는 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눈앞에 보이는 건 가느다란 손목과 그것을 붙잡고 있는 또 하나의 손이었다. 뼈대가 제법 굵었다. 그런데도 손등에 유독 살이 없어서 툭 뼈가 불거져 하얗게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은 거칠어져 있는 이 손을 나는 몹시 잘 알고 있다. 옌의 손이었다.
굳이 상황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옌의 목소리 하나면 충분했다.
“미안한데, 이 녀석은 누가 자기 몸에 손대는 거 싫어해.”
눈앞의 여학생은 당황한 듯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틀림없이 또 내게 흥미를 느낀 불청객이 틀림없었다. 그 증거로 저 가는 손가락이 날 향해 뻗어 있지 않은가.
“미, 미안. 머리카락이 너무 예뻐서.”
짧은 한숨이 터졌다. 거 봐라. 역시 이거다.
됐다는 듯 옌을 바라보자 그는 미련도 없이 그 손을 놓았다. 내버려 두어도 내가 저지했을 텐데. 옌의 오지랖은 언제나 범위가 넓어서 탈이다. 특히나 그게 나와 관련이 되면, 이것저것 가릴 거 없이 챙겨 주려 하니 더 문제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내가 그런 옌을 별로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안 그러면 이 녀석이 네 손목 잘라 버릴걸?”
댕강, 하며 옌은 말끝을 장난스레 맺었다. 농담이었고 그럴 일도 없지만 의외로 그 말의 효과는 컸다. 여학생이 곧 미안하다며 자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한숨이 푹 새어 나온다.
옌을 향해 눈을 흘기자,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키득거리기 바빴다. 쓸데없는 말 뱉어 놓고 혼자만 좋아라 하지. 혼자만.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 고맙다.”
네 덕분에 또 다른 헛소문이 돌겠구나. 리오엘은 마음에 안 들면 검부터 뽑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뭐 어때. 이걸로 귀찮은 거 더는 셈이잖아?”
쯧, 혀를 차자 놈은 금세 어깨동무를 해 왔다. 훈련으로 다져진 단단한 팔이 어깨에 무게를 더한다. 묵직한 느낌에 몸이 한차례 흔들렸다.
“에이. 화났어? 화났으면 다시 가서 리오엘 착한 놈이라고 말해 주고 올까?”
“됐어. 무거우니까 팔이나 치워.”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목이 간질간질했다. 밝은 오렌지빛이 눈가에 비쳤다. 머리카락이 아니라 햇빛이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 보통은 다들 이런 식의 머리카락이다. 그것이 당연하고, 익숙할 터였다. 하지만 내 머리카락은 그렇지 않았다. 우주를 닮은 듯 새카맣기만 하다. 그것뿐이라면 모를까.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벽안에 모두가 흥미를 갖곤 했다. 나만큼 맑은 푸른색은 보지 못했다면서. 귀찮지 않다면 거짓말. 하지만 귀찮다고 말하는 것마저도 귀찮을 뿐이다.
옌이 팔을 내리자 때마침 자동 음성 기계가 [교수님께서 들어오십니다.]라고 짧은 말을 내뱉었다. 약속처럼 내부가 조용해졌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걸어오더니 교탁을 탁 내려쳤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다들 알고 있을 거고. 그로 인해 들뜬 것도 이해하지만, 소란스럽게 굴지 말도록. 우리는 평소처럼 한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수업 하나요?”
그가 크렌스보드(크렌스펜과 연동되어,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보드)로 돌아섰다. 수평선을 긋듯 크렌스펜(사람의 생각을 읽어 내는 펜. 크렌스보드에만 사용할 수 있다)을 허공에 한 번 그었다.
크렌스보드에 글자가 나타났다. 큼지막한 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복습]이라고.
모두의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 굳어 버렸다. 진도를 나가는 것도, 그렇다고 자습도 아닌 복습이라니. 그런 우리를 내버려 둔 채 교수님께서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인 만큼, 제군들의 머릿속에 사상과 개념을 다시 상기시키는 복습을 하도록 하겠다. 우선은 모듈에 관해서다. 다들 [모듈의 시초] 첫 페이지를 로딩시키도록.”
각자 자리 앞에 있는 모니터 화면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미 100페이지도 넘게 진행이 되었거늘 다시 1페이지로 돌아가라니. 더군다나 가장 지루한 부분이다.
1페이지의 로딩이 끝나자, 화면에는 구체가 하나 나타났다. 행성을 닮았지만 행성은 아니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말할 필요도 없다만 모듈이다. 지구와 똑 닮은 생김새를 하고 있지만…….”
삑― 하는 소리가 났다. 교수님이 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그러자 우리가 보고 있는 화면이 모습을 달리했다. 모듈의 옆에 지구의 사진이 뜨고 구조가 자세히 나타났다.
“오존층으로 둘러 싸여 있는 지구와는 달리 모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단순히 모든 기술과 자잘한 부품들의 집합인, 기계 껍데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것을 스크린 카마그래프 이매진(Screen·kamagraph imagine) 줄여서 스카이(SKY)라고 부른다. 스카이에는 지구에 관련된 정보……, 사소한 소리부터 대기 중에 떠도는 성분, 기온에 따른 변화, 모든 것이 입력되어 있다. 스카이는 그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모듈을 최대한 지구와 가까운 환경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산소 공급과.”
삑.
화면에 새파란 하늘이 떴다.
“하늘을 만들어 냄으로써 기후를 조정하는 것이다. 모듈이 자체적으로 조정하는 대표적인 기후로는 레이닝타임과 스노윙타임 등이 있지. 지구의 기후가 예측해도 맞추기가 힘든 반면 모듈의 날씨는 정확하게 시일이 정해져 있다는 차이가 있다.”
“기계니까.”라며 교수님이 말을 덧붙였다.
또 한 번 화면이 넘어간다. 이번에는 스카이의 모습이 좀 더 자세하게 나왔다. 구체의 표면은 정사각형으로 빼곡히 둘러싸여 있었다. 흡사 미러볼을 닮았다.
“스카이는 퍼즐과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정사각형은 가로세로 10센티미터로 단 한 조각도 0.1센티의 오차조차 없게 제작이 되어 있다. 지구가 자전을 하듯이, 모듈은 이 정사각형들이 매번 같은 주기로 도는데 이것들이 돌고 돌면서 서로의 위치를 세세하게 바꾼다. 그렇게 되면…….”
삑.
“이렇게 흐린 하늘이 되었다가, 눈이 내렸다가 하는 것이지. 쉽게 말해 저 정사각형들은 스카이의 조직세포 같은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처럼 촉감도 생김새도 유리에 가깝다.”
“만일 이게 깨지면 어떻게 되겠나?”
돌연 교수님께서 그리 물었다.
아주 쉬운 질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누군가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듈에 혼란이 찾아오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중요한 기체 조절이 되지 않아, 산소 공급이 어려우며 중력의 조절 또한 어려워져 몸이 우주로 튕겨 나갈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전멸, 합니다.”
좋은 대답이었다며 교수님께서 고개를 끄덕인다.
분위기가 조금 숙연하게 가라앉았다. 모듈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 운석이 날아올지 알 수 없고, 기계인지라 언제 고장이 나 버릴지 또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유는 지구가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구라는 곳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모듈은 지구에 존재하는 많은 나라들 중, 다섯 개의 국가가 최초로 만들어 낸 인공 행성이다. 그리고 최초로 만들어진 우주 국가가 여기, 체르시엘이다. 3401년, 대 이주가 시작되면서 지구의 인구는 절반 넘게 줄어들었으며 그에 비례하게 위태롭던 자연 또한 본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 이주 이전의 지구는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자연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멸망의 위기가 닥쳤던 행성이다. 하지만 과학도, 기술도, 개발도 모두 모듈로 넘어오면서 안정을 되찾았지. 즉, 모듈은 과학 기술의 산물임과 동시에 지구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는 소리다.”
그는 고요한 시선으로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수업이 시작되면서 조용해진 강의실 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모듈에 관한 것을 들을 때면 이렇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특히 지금처럼 지구와 비교하며 듣게 될 땐 더 그렇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모듈이 생겨나며 만들어진 조약이 무엇인지 대답해 봐라.”
돌연 교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리오엘.”
나는 입을 한차례 달싹이다 곧 입술을 뗐다. 간단한 질문이었으며, 결코 잊어선 안 될 답이었다.
“본국 불침략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지구에서 일어나던 전쟁을 막기 위한 조약이며, 또한 우주에서 일어날 전쟁에 대비한 조약이기도 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우주에선 얼마든지 전쟁을 해도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존재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잘 기억하고 있군. 부가 설명도 아주 좋았다. 역시 리오엘이야.”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교수님을 보며 다시 착석하였다. 동시에 화면이 넘어간다.
“모듈은 우리들이 있는 제로(0)부터 나인(9)까지 존재한다. 모듈은 단 하나의 구체에 단 하나의 넘버가 붙으며, 이것들은 모두 우주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리로 이음으로써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체르시엘의 모듈은 제로, 쓰리, 포. 이 세 곳이다. 나머지 모듈은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체르시엘이 아니다. 특히나 나인은 말이지. 가끔 헷갈리는 놈들이 많은데, 나인이 한때 체르시엘에 속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니 착각하지 말도록.”
분위기가 더욱더 무겁게 가라앉는다. 모듈의 지도를 바라보는 모두의 눈빛이 차가운 빛을 띠었다. 군사 세뇌 교육의 영향이었다.
“나인은 바르세크, 체르시엘의 분단국이자 적국에 속해 있는 모듈이다. 유일하게 다리로 이어져 있지 않은 모듈이며 체르시엘이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단독으로 만들어진 나라지. 그렇기에 지구 연합국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독립국가로 분류할 수 있다.”
마지막에 화면에 나타난 것은 신(新)우주 계획 14조항의 항목이었다.
─특별한 허가 없이는 모듈의 인간이 지구에 접촉하는 것을 금한다.
─허가는 모듈 대표장의 인장과 지구 입국장의 허가증, 그리고 지구 연합국인 다섯 개 나라의 동의서를 필요로 한다.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듈의 시민증과 보건증을 소지해야 하며 지구에 해가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로 제한한다.
(중략)
─단, 비상시에 한하여 군인만은 위의 항목들을 무시하고 연합국의 동의만으로 입국이 가능한 권한을 얻는다.
설명은 길지만 요약하자면 하나뿐이었다.
모듈의 인간은 지구에 갈 수 없다는 것.
보건증이란 단순한 병력에 대한 기록을 넘어서, 세균 수치 또한 지구에서 정한 기준을 넘어서는 안 되며 자잘한 상처도 있어선 안 된다. 검사 시간은 길고 비용도 만만치 않으므로 웬만한 사람은 보건증을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더군다나 지구에 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이 조항은 쉽게 말해 지구에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럼 다들 14조항을 읽어 보고 있도록.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교수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간은 아직 30분 이상이나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손목의 워치(군의 통신단말을 일컫는 단어. 시간도 알 수 있다)를 한 번 바라보더니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리오엘은 나와라. 갈 곳이 있다.”
“어디를 말입니까?”
“군의 분들이 널 만나 보고 싶어 한다.”
모두가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군의 사람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니. 혹시 테렌스 아델을 볼 수 있는 걸까. 초조함에 새끼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옌은 그런 날 보더니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정도로 표정이 없는 것도 참 재주다.”
“시끄러워.”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만나게 되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의 함대에 들어가고 싶다고? 아니, 그건 너무 직설적이잖아.
강의실을 나와 복도를 걸으면서 짧은 숨을 들이켰다.
먼저 안으로 들어선 교수님의 “학생을 데려왔습니다.”라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이 문 안에 그가 있다. 그 생각을 하자 무심코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
나는 교수님의 손짓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곧바로 다리에 힘을 주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거스트, 학생번호 3674. 리오엘 리오라고 합니다.”
“오, 검은 머리네?”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심장은 급속도로 식어 가기 시작했다.
없다. 테렌스 아델이.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지만, 그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영상과 자료로 몇 번이고 봐서 알고 있다. 잿빛의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흔하지 않은 외모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이라도 비슷한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수님이 내 어깨를 앞으로 살짝 밀었다.
“이 학생이 우리학교 수석입니다. 입학 시험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놓친 적이 없죠.”
그 외에는 식상한 말들이 오고 갔다. 대단하다는 둥,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는 둥. 이 사람들도 만나기 힘든 사람들이라는 것쯤은 안다. 이들은 체르시엘 제3, 4함대장들이다. 하지만, 가장 만나고 싶은 그가 없다니. 김샌다. 아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럴 때만큼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대화가 끝났을 때에는 이미 수업이 끝난 시간이었다. 나는 강의실로 향하지 않고 곧장 기숙사로 향했다. 희미하게 푸른 등만 켜진 복도는 어두웠다. 잠시 멈춰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새카만 우주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보이진 않지만 저 수많은 행성 사이에서 지구가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어거스트의 수석이 되면, 지구에 갈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 어려운 입학 시험을 뭣 하러 치렀는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들어오려 했던가. 그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니, 나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지구에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창밖에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걸으려던 찰나 발을 흠칫 멈추고 말았다.
“흠흠, 흠.”
발랄한 허밍이다. 하지만, 잘 부른다고는 차마 말해 주지 못하겠다. 아니,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나오는 대로 부르는 듯한 노래. 음정도 박자도 엉망이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인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망설일 것도 없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여기가 감히 어떤 곳인데.
“저기요. 여기에 낙서하시면 안 됩니다만.”
오색의 크레파스가 찍찍 그어진다. 그것이 그리고 있는 것은 무지개였다. 그것도 아주 엉성한 무지개. 초등학생이 그려도 저것보단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상대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엉터리 허밍을 하며 엉터리 그림을 계속 그릴 뿐이다.
참다못한 나는 결국 그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이봐요, 여기는 낙서하는 곳이 아닙니다.”
“으응? 안 돼?”
“하면 안 되는 거야?”하면서 그가 훌쩍거렸다. 맑은 눈망울에 눈물이 빠르게 고이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몸이 흠칫 굳었다. 그것은 다 큰 사내가 훌쩍거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모양새에 기가 차서도 아니었다. 사람을 울렸다는 당혹감 때문도 아니었다.
푸른 조명이 비추는 잿빛 머리카락, 그리고 붉은 눈동자. 낯이 익다.
“저, 저기.”
여태까지 죽인 적군의 수가 셀 수조차 없다고 하는 그. 자비라고는 없는 잔인한 성품으로, 피바람을 몰고 다닌다는 그. 희대의 천재라 불리며 체르시엘의 야수라고도 불리는 그. 체르시엘군 참모총장 테렌스 아델.
“시러어! 테렌스 그림 그릴 거야!!”
이게?!
천천히 손목을 놓았다. 그러자 “무지개! 무지개!”하면서, 다시 낙서를 시작한다. 꼬불꼬불, 흐물흐물한 무지개다. 그런 주제에 크기는 아주 크다. 긴 팔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뻗어 가며 잘도 그린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훑어보았다. 어린애가 아니다. 완벽한 성인의 모습이다. 그것도, 매스컴으로 자주 보았던 테렌스 아델이다.
나는 슬쩍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저어, 테렌스 아델 님?”
“응? 내 이름 알아?”
방긋방긋 잘도 웃는다. 저 날카로운 눈을 귀엽게 접어 가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참 잘 웃는다. 일순, 몸이 휘청였다. 그리고 그 순진한 긍정에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아, 이게 정녕 테렌스 아델이란 말인가. 정녕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란 말인가. 결코 건드려선 안 될 무언가를 건드린 것처럼, 시야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테렌스 아델을 만나고 싶어 하던 내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