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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의 론도 1권 2화
1. 크레파스 (2)
나는 그의 앞에 천천히 쪼그리고 앉았다. 천재라면서 무지개를 왜 이렇게 못 그리는 걸까. 정말 테렌스 아델이 맞나? 다시 한 번 들여다봐도 이런 외모는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괜히 확인사살만 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때 그가 내게 크레파스 하나를 건넸다.
“너도 그려!”
“네?”
“너도 그리는 거다! 커다아란 무지개를!”
그는 “커다아란.”을 강조하듯,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나는 얼떨결에 쥐어진 크레파스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어지럽게 변해 가는 바닥에 힐끔 시선을 주었다. 그는 막 파란색을 그어 대고 있었다. 그가 그린 무지개 색은 여러 가지였다. 우리가 흔히 아는 빨주노초파남보가 아니다. 검은색도 있고 금색도 있고. 심지어 갈색도 있다. 이건 무슨 무지개인가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나는 그가 건넨 초록색을 힐끔 바라보다 말했다.
“빨간색은 없나요?”
“있어 있어! 테렌스, 크레파스 많이 있어!”
네네, 그렇군요. 그는 빨간색을 집어 내게 건넸다.
이윽고 나 또한 그를 따라 무지개를 그리기 시작했다. 예쁘게 휜 포물선과 그 아래에 자리 잡은 구름들. 빨간색 밑에는 주황색, 그 밑에는 노란색. 천천히 긋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 위를 검은색의 선들이 덮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움에 손을 물렸다. 그 선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그였다.
“이게 뭐야! 무지개가 너무 작아! 좀 더 크게 그려야지! 크게! 크게!”
“무지개에 검은색은 안 들어가는데요?”
내 말에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가 든 검은색 크레파스를 바라본 것이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보다 한 뼘은 더 넓은 어깨가 옆으로 기운다. 차가운 잿빛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왜 들어가면 안 돼?”
“네?”
“무지개는 색이 정해진 거야?”
정해져 있긴 하다. 하늘에 뜨는 무지개가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리는 거야 자기 마음이고……. 딱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그가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오색찬란한 무지개에 검은색은 좀 아니지 않아? 그러나 그는 곧 당차게 외쳤다. 소풍을 가는 어린 소년마냥 들뜬 목소리로.
“테렌스는 검은색이 좋으니까, 검은색으로 그릴 거야!”
네, 그러세요. 마음대로 그리세요.
이윽고 그와 나는 다시금 무지개를 그리기 시작했다. 복도를 가득 채우는 무지개는 여전히 오색찬란했다. 가끔 내 손은 규칙을 떠올리며 머뭇거렸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그의 손은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양손과 옷에는 크레파스를 묻혀 가며, 큰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처럼 눈을 빛냈다.
얼마 만이었을까.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려 본 것이. 아니, 그림이라는 것을 그려 본 것이.
어느새 그림을 다 그렸을 무렵, 나는 다리를 펴고 앉았다. 힘들다. 그는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는지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었다. 무지개는 아니었다. 별표를 그리는 걸 보아하니, 우주를 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별표 색깔 또한 다양했다. 분홍색, 파란색, 보라색. 흔히 볼 수 있는 노란색 별은 없다. 웃기는 조합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무지개와 별이라니. 우주를 그리는 건지, 밤하늘을 그리는 건지. 하지만 그 부조화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동시에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해맑은 얼굴로 소리쳤다.
“웃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싱글거리는 그 얼굴을 빤히 보고 있자니, 그가 또다시 소리친다. “웃어!”하고.
“무지개 커졌잖아! 이렇게 넓어졌어!”
그리 말하며, 그가 또 양팔을 벌렸다. 너른 팔은 충분히 무지개의 크기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꾸 적응이 안 됐다.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한 사내가, 그것도 세간에서 두려움을 사는 사내가 눈앞에서 이러고 있다니.
나는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 이만큼 그린 것일까. 복도의 한 면을 거의 다 채울 기세였다. 문득, 생각났다.
“혹시, 저한테 뭔가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건가요?”
“응? 뭐가?”
착각인가. 하긴, 저 순진한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겠냐마는.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가장 궁금했던 것. 그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말이다.
“전쟁을 하면 어떤 느낌입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을까. 적들을 눈앞에 두면 어떤 느낌이지? 전투 실기를 배우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것은 눈앞의 적들이 진짜 적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현실감이 너무도 없으니까. 군에 들어가면 혹시 그것을 알게 될까.
그때, 크레파스가 내게로 또르륵 굴러 왔다.
“……전, 쟁.”
“총장님?”
그가 떨어트린 크레파스를 주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 좋아하던 크레파스를 갑자기 왜 떨어트리는 건가. 그는 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척까지 다가갔을 때, 그의 입꼬리가 돌연 스르륵 말려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그가 그리도 잘 짓던 미소였지만, 어딘가가 달랐다. 천진하기만 했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뭘까. 무엇이 달라진 걸까. 단정 짓지는 못하겠지만, 그를 감싸는 공기가 돌연 색을 달리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알겠다.
나는 다시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채 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눈매가, 나와 시선을 맞춘다. 순진하게 풀어져 있던 눈매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갑작스레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 모습은……, 이 느낌은.
그는 손을 뻗더니,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검은색.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야.”
내가 줄곧 알고 살아왔던 테렌스 아델, 그 자체다. 내가 줄곧 상상해 왔고 언론에서 줄곧 보아 왔던 그의 모습이었다. 느닷없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눈만 빠르게 굴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순진한 테렌스 아델은 환상이기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바닥에 그려진 그림들은 진짜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가늘게 뜬 속눈썹 아래에서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저기…….”
“그림, 못 그리는군.”
당신이 그런 말 할 처지야?!
그때였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눈앞으로 뻗어 왔다. 그러더니 내 턱을 스치듯 어루만지곤 이내 붙잡는다. 부드럽게 잡아당겨진 턱은 이끌리듯이 그에게 끌려갔다. 강압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행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입술이 맞물리고 난 후였다.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부드럽게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끝이 그 위를 덧그리듯 어루만진다. 아이에게 하듯 간지럽고 달콤한 키스였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정해진 대로 따라가는 건 너무 피곤하지 않나?”
“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앉아 있을 땐 그다지 차이를 못 느꼈는데 이렇게 보니 장신이었다. 제복이 부드럽게 감싼 다리는 길고 단단했다. 묵직한 군화를 따라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나를 보며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얼굴에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지, 지금 내가 테렌스 아델과…….
하지만 내가 혼란스러워 하든 말든 그는 떨어져 있는 자신의 재킷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멋들어지게 어깨에 걸쳤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그림 같아서, 작은 동작마저도 모든 게 테렌스 아델이라고 말하는 듯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발걸음을 옮기기 전 나를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전쟁?”
피식 웃음을 내뱉은 그가 입을 열었다.
묵직한 군화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그는 곧 등을 돌렸지만, 나는 그를 쫓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의 자취가 사라질 때까지 그 등을 바라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가 한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허스키한 바리톤의 목소리. 하이톤으로 소리를 질러 대던 좀 전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건 게임이야.”라고.
전쟁이 게임이라고 한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거칠면서도 매끄러운 느낌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나의 아래에는 여전히 엉터리 그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멍한 눈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복도를 걷는 걸음에 힘이 없었다. 지나가는 자들이 한마디씩 내던졌다. “좋은 아침!”이라는 흔한 인사부터 시작해서, “어디 아파?”라는 생소한 걱정, “병결 내는 게 좋지 않겠어?”라는 심각한 걱정까지. 그만큼 내 상태는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빳빳한 여벌 제복의 깃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크레파스를 묻힌 채로 강의실에 갈 뻔하였으니. 어제의 피곤함을 애써 잊으려 눈가를 꾹꾹 눌러 지압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모두가 웅성거리며 한곳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수업이 바쁜 데에도 무언가는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고,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그 근원지를 눈에 담은 나 또한, 당연하게도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등골이 싸해진다.
“저걸 누가 그린 거지?”
“완전, 엉터리 그림.”
“걸리면 징계감 아냐?”
우주인지 밤하늘인지 모를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아찔한 그림에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옷, 갈아입어서 다행이다.’라고.
나는 관심도 없다는 듯 그곳을 무심히 지났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움직임으로 학생카드를 찍고 강의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창가 맨 끝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눈을 깜짝이자 크렌스보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최대한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행동하려 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이었다. 어떤 정신으로 강의실까지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평소보다 걸음이 빨랐다는 것만을 느꼈다.
하아, 하고 얼굴을 감싸려는 순간 때마침 옆에 앉은 옌이 나를 보며 기함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내 얼굴이 정말 많이 망가진 모양이다. 다들 한마디씩 던져 올 정도이니. 나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밤새, 한숨도 못 잤다. 대체 내가 본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혹시 꿈을 꾸었던 건 아닌지. 환상이라고 믿고 싶지만 증거는 확실했다. 크레파스가 묻은 제복, 그리고 복도의 그림까지. 어제 있었던 일들은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어린애 같던 테렌스도, 그 키스도 모조리 진짜라는 뜻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는 대신 짧게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니야.”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내 생애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워진 적이 있었을까. 너무도 충격적인 걸 보면 혼이 나간다더니, 딱 그 짝이다. 이러다가 성적에 영향이라도 가면 큰일이거늘. 정신 차리자, 리오엘 리오. 그렇게 다짐하듯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물론, 만나고 싶었던 테렌스 아델의 실제 모습은 충격적이지만 그렇다고 동경의 마음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금할 따름이다. 내가 본 두 모습의 테렌스 아델은 대체 무엇인지.
그때, 교수님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교수님이 아니었다. 잿빛 머리카락이 환상처럼 이지러진다. 눈앞에 있는 걸 인식하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그가 우리 쪽으로 돌아섰다. 붉은 눈이 잠시 나를 스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곧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전투 실기를 가르칠, 테렌스 아델이다.”
뭐?
시간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그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멈추는 것처럼 보였다. 우주를 떠다니는 작은 먼지들도 환호하는 학생들도. 모조리 다 멈춘 줄로만 알았다.
나는 벌어지려던 입술을 앙다물었다. 너무 놀라서 흔한 감탄사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옌이 내 허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러 왔다.
“잘됐다, 그치?”
“…….”
“리오엘?”
처음 봤을 때의 그 모습이 아니다. 생기발랄하고 어린애 같던 테렌스 아델도 아니고, 내게 입을 맞췄던 농밀한 테렌스 아델도 아니다.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언 듯한 붉은색의 눈동자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그는 교탁을 한 번 내려쳤다. 커다란 굉음이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해라. 난 시끄러운 걸 싫어한다.”
조금만 입을 열었다간 죽여 버릴 기세다. 아니, 정말로 죽일 것이다. 그는 그런 성격이다. 그러니 너무하다며 비판할 일도, 놀랄 일도 없었다. 이게 매스컴으로만 봐 왔던 그의 성격.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자비를 모르는, 테렌스 아델이었다.
그럼, 내가 어젯밤에 봤던 건?
의문이 떠오르기 무섭게 그는 낮은 목소리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학생번호순으로 천천히 부르고 빠른 대답이 지나간다. 기계적인 흐름이었다.
“리오엘 리오.”
“학생번호 3674, 리오엘 리오. 체르시엘의 영광과 함께!”
나는 거수경례를 했던 손을 절도 있게 내렸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학생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를 스치는 눈빛은 무심했다. 어제 그런 키스를 한 사람이라곤 생각지도 못할 만큼. 아니, 거기까지 거슬러 갈 필요 없이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마주쳤던 눈빛과도 판이하게 달랐다. 티끌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시선이었다. 설마, 어제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출석을 다 부른 후 그는 출석부를 거칠게 내던졌다.
얼굴에는 귀찮음이 역력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가 생각할 것이다. 우리를 상대하는 것이 귀찮은 걸까.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다.
“햇병아리들을 맡기다니. 짜증나게.”
들리라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중얼거리는 소리가 큰 것인지. 내 생각엔 전자인 것 같다. 나는 다시 한 번, 어제의 그를 떠올렸다. 그 귀여운 모습의 참모였다면 아마 등장부터가 달랐을 것이다. 어린이 방송마냥 “모두들 안녕!”하면서 들어왔을지도 모르지.
풉 하고 터질 뻔한 웃음을 틀어막았다. 그런 나를 보았는지 옌이 다시금 허리를 쿡쿡 찔러 왔다.
“너 왜 그래?”
“아무것도.”
표정을 다시금 갈무리했다. 그렇게 겨우 웃음을 억누르려 하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테렌스와 또 한 번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뭐지. 뭐였지, 방금 그건. 눈이 마주쳤던 건가? 아니면, 단순한 우연?
머릿속이 일순 어지러워졌지만, 그 이후 그와 내가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첫 수업은 이론이었다. 다 필요 없고 몸으로 배우라 말할 것 같던 성격치고는, 꽤 얌전한 출발이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 같은 것들에겐 이론이 필요하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 이론이라는 것이 참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적이 오면 노려봐라.”
정말로 적을 노려보듯, 그가 표정을 굳혔다. 그 시선을 꼼짝없이 받아 내야만 하는 것은 우리였다. 꼭 우리가 그의 적이 된 것만 같았다.
“발돋움과 동시에 앞까지 날아가. 쉭 하고!”
크게 휘젓는 팔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듯한 생동감을 보여 주었다.
“능력을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한 끌어 올린다. 파바박, 하고!”
손을 들어 아래에서부터 무언가를 끌어 올리듯 제스처를 취했다. 모두가 말이 없었다. 그는 이내 자세를 바로 하더니 우리를 둘러보았다. 붉은 눈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훑고 지나간다. 열린 입은 뻔뻔한 말을 잘도 내뱉어 왔다.
“이해되나?”
되긴 뭐가 돼. 뭐라고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쉭 날아가는 건 뭐고, 파바박 끌어 올리는 건 무엇인가. 나는 이 순간, 그림을 그리던 테렌스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때처럼 순진무구한 표정은 아니지만 하는 말이라거나, 표현력이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닮았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릴 정도로. 아, 어젯밤의 그는 역시 테렌스 아델이구나, 납득할 정도로 말이다.
천재에 관해서는 꽤 여러 말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그들이 4차원이라는 말도 있다. 이론이든 설명이든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지금 그 말들을 수긍했다.
펜을 빙글빙글 돌리던 옌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래는 거야, 대체.”
“넌 이해돼?”하며 나를 돌아본다. 그러자 주위에 앉아 있던 놈들의 시선까지 내게 몰렸다. 테렌스의 강의가 아니라 나의 강의가 된 것만 같았다. 그 시선들이 안타까워서라도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귀엽기까지 한 표현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대충 이런 게 아닐까.
“한마디로 눈빛으로 기선 제압을 한 뒤에.”
모두가 고개를 세차게 주억거렸다.
“빠른 시간 안에 적을 쓰러트리라는 말이 아닐까 하는데?”
‘아, 그런 거구나.’하는 표정이 그들에게 머물렀다.
그 뒤를 이은 감상은 간단했다.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듯, 옌이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뭐, 그런 말을 저렇게 장황하게 하냐.”
장황하게 하는 게 아니라, 표현을 그렇게밖에 못 하는 것 같은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자, 쾅! 쾅! 하고 큰 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그에 모두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다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그가 교탁을 또다시 내려친 것이었다.
“집중해!”
분위기 하나는 끝내주게 잘 잡는다.
그 이후로도 엉터리 수업은 계속되었다. 크렌스보드에는 여러 글자와 그림들이 떠올랐지만,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업 도중 내가 놀랐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의 그림 실력이다. 어제와 같은 엉터리 그림이 아니었다. 사람의 인체와 무기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제대로 표현했다. 실물 같은 그림에 모두가 탄성을 내지를 정도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고민했다. 정말로 동일 인물인가, 하고.
그렇게, 우리의 수업시간은 얻은 것 하나 없이 끝났다. 따로 질문을 할 시간도 없었다. 그가 종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강의실을 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몸으로 수업하는 게 나을 뻔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그의 동작을 보기라도 했을 텐데.
그때 어깨 위로 옌이 고개를 뉘었다. 툭 하는 소리가 났다.
“리오엘. 배고프지 않냐?”
“그다지.”
“매점 갔다 오자아.”
“갔다 오든가.”
난 다음 강의 준비할 거니까. 차가운 대꾸에 옌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상체를 일으킨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이 꼭 시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요즘은 다 큰 놈들이 저러는 게 유행이란 말인가. 어제 보았던 테렌스 아델이 떠오를 것 같아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나, 빵 먹고 싶어.”
“사 먹어.”
모니터를 손끝으로 한 번 스쳤다. 책상 위 모니터에는 나의 사진, 그리고 학생번호, 시간표가 떠 있다. 다음 강의는 제국의 역사다. 필수과목도 아니고, 굳이 들어야 할 필요도 없는 과목이지만 그래도 출석 점수라는 것이 있으니 들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다음 수업을 준비하려던 찰나.
“리오엘 리오. 있나?”
강의실 문 앞에는 낯이 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만난 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틀림없이 언론을 통해 몇 번이고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언제나 테렌스의 옆에 서 있던, 그 남자가 분명하다. 그는 평범한 갈색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훑었다. 그러더니 곧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나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과 의자 틈을 빠져나가려는 내게, 옌이 한마디 했다.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퉁퉁 부은 듯 들려왔다.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불만이라는 듯.
“너 어제부터 호출이 좀 많지 않냐?”
“두 번밖에 안 불렸어.”
“그래도.”하고 중얼거리는 놈을 내버려 두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교수실로 가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원수실로 가는 방향도 아니었다. 날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내 의문이 그에게 들리기라도 한 걸까. 그는 씨익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어디 가는지 궁금하지 않아?”
“가 보면 알겠죠.”
이 사람이 나를 유괴할 리도 없고. 그는 “흐음.”하는 소리를 내더니,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만은 계속해서 내 얼굴을 살폈다. 관찰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 시선이 불편하여 곁눈질을 하니 눈이 마주친 그가 빙긋 웃는다. 왜 저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흥미로운 걸 눈앞에 둔 것처럼.
우리가 향한 곳은 3층이었다. 이곳은 어거스트의 상층부다. 학생들은 물론, 평범한 교수조차도 이곳에는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한다. 딱히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3층으로 가는 계단은 은연중에 모두가 피하고 있었다. 결코 발을 옮겨서는 안 된다는 세뇌와도 같은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나 또한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려 3층의 복도를 둘러보았다. 특별히 다른 복도와 차이점은 없었다.
그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내게 야수가 덤벼들었다.
“리오엘!!”
“으앗!”
느닷없이 끌어안긴 몸이 숨 막히고, 부비적거리는 머리카락이 간지럽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밀칠 뻔한 손을 어색하게 거두어들였다. 허공에서 멈춘 손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를 끌어안은 자가 누구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의실에서 모두를 떨게 만들었던, 테렌스 아델이다.
당황스러움에 입을 뻐끔거렸다. 그렇다. 모두를 떨게 만들었던 그 사람이긴 한데. 테렌스 아델이긴 한데…….
그는 몸을 떨어트리며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꽃이었다. 그것도 학교 화단에 가장 많이 피어 있는 꽃, 분홍색의 시네라리아였다.
“리오엘에게 주는 선물!”
이걸 왜 나한테. 아니 그것보다도 왜 또 어린애 성격으로 돌아와 있는 건가.
설명을 바란다는 듯 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그의 측근, 메티안 실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의 따가운 시선에도 밝게 웃으며 말했다.
“테렌스가 널 보고 싶다고 그러더라고.”
“어찌나 생떼를 쓰던지.”하고 말끝을 맺었지만 내가 원한 답은 그런 게 아니다. 그는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체르시엘군의 참모총장이다. 그의 정체가 이런 모습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한 건 군이 아니던가. 헌데 이런 모습을 일개 학생에게 보여도 되는 것일까.
그는 담담한 내 얼굴을 보더니 입꼬리를 사르륵 말아 올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알고 있었구나.”
“어제 봤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 하고도 한 뼘 정도나 더 큰 테렌스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같이 그림 그리자! 그림, 그림!”하는 목소리가 완벽한 어린애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리다 만 종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크레파스는 물론 색연필, 사인펜, 파스텔까지. 그런데 어쩐지 쓴 건 크레파스밖에 없는 듯했다.
“이상하네. 테렌스가 그 모습으로 밖으로 나갔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장담하죠?”
이, 어린 뇌로 그런 생각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제만 해도 그렇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도 복도 한복판에서. 나는 테렌스의 어깨를 슬쩍 밀어냈다. 하지만, 문어 빨판이라도 되는 듯 그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꼭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 같았다.
그때, 메티안이 또다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몰라? 테렌스는 천재야.”
“……무슨 뜻입니까.”
그가 천재라는 사실과 이 유아퇴행 같은 모습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이해할 수 없음에 눈살을 찌푸리자 메티안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해도, 생각은 하고 살지. 그 녀석은 자신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만들지 않아.”
이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이득이 되는 것이 없다. 메티안의 말에 따르자면 그는 그날 나오지 않았어야 했다고 한다. 기숙사제 학교인 어거스트. 그 복도의 한복판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이 오가는 통로이지 않은가. 어지간히도 눈에 띄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네 얘기를 조금 했는데, 만나고 싶었던 모양이네.”
만나고 싶었다면 불렀으면 그만이지 않나. 왜 거기서 무지개나 그리고 앉아 있었던 거야. 빤히 내려다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테렌스가 고개를 빼꼼 들어 올렸다. 그러곤 해맑게 웃는다.
“그럼, 본래의 모습은 매스컴에 나오던 그 모습이라는 겁니까?”
이 모든 것이 계산된 것이라면 그것이 본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본모습 같은 건 없어. 테렌스는 이미지 메이킹이 뛰어나거든.”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 봐. 그에게는 야수와 천재라는 별명이 뒤따르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모습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군은 존경하고, 적은 두려워하겠죠.”
“그렇지. 그리고 테렌스의 방식에 반발하는 원로들은 어떨까?”
“반발하지 못하겠죠.”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곤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바로 그거야.”
“네?”
“그는 상대에 맞춰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꾼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도 본모습은 본 적 없어.”하면서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없었다. 내가 천재가 아니기 때문인 걸까? 천재의 사고방식이란 참으로 감탄스러우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뭐하러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