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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의 론도 1권 3화
1. 크레파스 (3)


돌연 테렌스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소리쳤다.
“릴에게 이상한 말 하지 마!”
릴? 설마, 내 이름인가. 테렌스는 허리를 펴고 바로 섰다. 똑바로 서니 곧바로 내 키를 뛰어넘어 버렸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회오리처럼 빙글빙글한 모양이 그려진 막대사탕이었다. 또 선물인가 보다. 아니, 저 사람 얘기는 듣지 말라고 회유하는 건가. 나는 떨떠름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럼, 왜 지금은 어린애같이 구는 거죠?”
그리고 왜 그때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단 말인가. 상대에 맞춰 이미지를 바꾼다면, 한 사람당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왜 내게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보여 준 거지? 나는 사탕과 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 테렌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앙증맞다. 누군가에게 이것을 보여 주며, “테렌스 아델이 줬어.”라고 말하면 미친놈 취급을 당할 것이다.
메티안은 가볍게 답했다.
“네가 마음에 드나 보지. 테렌스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겐 저러거든.”
대체 나의 어디를 보고. 아니, 그보다 나는 그의 또 다른 모습도 봤단 말이다.
테렌스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내 것과 똑같은 사탕이다. 할짝거리며 먹는 폼이 영락없는 어린애다. 이것도 만들어진 이미지인 건가.
문득 테렌스의 이명이 떠올랐다. 체르시엘의 야수. 그의 뒤를 언제나 따라다니는 그 이름은 그의 이미지를 한층 더 강화해 주곤 했다. 저 이름으로 인해 야차처럼 전쟁터를 누비는 테렌스를 떠올리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할 때는 야차처럼 변하는 건가요?”
하지만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니었다.
메티안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다짜고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안 돼! 그 단어는!”
“네?”
동시에 테렌스의 사탕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달콤한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요란스레 튄 사탕 파편이 발치에 닿았다. 하지만 더 이상 거기에 시선을 줄 틈은 없었다. 불현듯 바뀐 공기에 먼저 반응한 것은 몸이었다. 등골을 스치는 기묘한 소름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끈적거리는 자신의 입술을 핥아 올리며 반쯤 내리뜬 눈은 나를 핥아 내린다. 퇴폐적이라고밖에는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 이미지가 또다시 180도 바뀌었다.
테렌스는 내 손을 살며시 잡아끌었다.
“궁금해? 어떻게 변하는지.”
손끝을 붉은 혀가 스치고 지나갔다. 뜨거운 느낌이 손톱 주위를 맴돈다.
메티안이 이마를 감싸 쥐며 끄응하는 소리를 냈다. 그 신음 아닌 신음소리에 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메티안이 소리쳤던 ‘그 단어’. 생각해 보면 어젯밤에 갑자기 변했던 그 순간에도 나는 그 말을 내뱉었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설마 이게 키워드?
테렌스는 메티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우리 고양이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
뭐, 고양이?
돌연 테렌스가 내 허리를 낚아채 갔다. 거부할 새도 없이 내 몸이 그의 품에 폭삭 안겼다. 넓고 단단한 가슴이었다. 제복 위로 그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굉장히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메티안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고양이라니, 그건 또 무슨…….”
“예쁘잖아. 검은 고양이.”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별것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움직임에 어제 보았던 테렌스의 모습이 기이하게 오버랩되었다. 이제야 안 거지만, 그 어떤 테렌스 아델이든 간에 공통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는 검은색을 좋아한다. 무지개마저도 검은색으로 그릴 정도로. 설마,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가…….
“이 세상의 검은색은 다 내 거야.”
하기 싫은 상상을 해 버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우주 정복을 노리는 것도 혹시, 우주가 검은색이기 때문은 아니겠지. 설마, 그런 쓸데없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나의 바람은 부질없는 것이었으니.
“어련하시겠어. 우주까지 얻고 싶어 하시는데.”
이 순간 나는 생각한다. 4차원은 무슨, 천재는 사이코다.
질린 얼굴로 테렌스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시선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알까. 이 말이 원로들에게 들어간다면 파면감이다.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단순히 검은색이 좋아서라니.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가슴팍을 슬쩍 밀어냈다. 그는 의외로 쉽게 나를 놓아주었다.
손가락을 들어 척 하고 가리켰다. 무엇을? 테렌스 아델을.
“이것도 이미지 메이킹입니까?”
“아, 하하하. 직설적인 친구네.”
내가 진지하다는 걸 아는지 메티안이 곧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곧 턱을 짚으며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뭘 저리 고민할까. 말하기 곤란한 건가. 아니면, 거짓말할 궁리를 하는 건가.
이윽고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닐걸?”
아니면 아닌 거고, 맞으면 맞는 거다. 아닐걸은 또 뭔가.
“그건 아마, 수십 개의 이미지 메이킹을 하면서 생긴 부작용이라고 생각해.”
“부작용?”
“정말로 하나의 인격이 생겨난 거지.”
새삼스레 테렌스 아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다. 본인의 얘기를 하고 있건만, 정작 당사자는 관심 없는 얼굴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오작동이라는 거군요.”
“아, 아하하. 테렌스는 기계가 아니라네, 전우여.”
“오작동이라니.”하면서, 그가 다시 한 번 어색하게 웃었다. 그거나 그거나지 뭐. 하긴,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했다. 강의실에서 교수가 될 때의 모습은 아마 이미지 메이킹일 것이다. 이미지 메이킹이란 단어 그대로, 만들어 냈던 것일 테다. 헌데 지금의 테렌스 아델은 “전쟁”이라는 단어를 듣고 돌연 변하지 않았던가. 마치 스위치가 켜진 로봇처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하면서.
“음, 리오엘? 지금 감탄하는 거지?”
“그렇습니다만. 놀랍네요.”
“전혀, 그런 얼굴이 아닌데…….”
문득, 메티안을 돌아보았다. 그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정보가 하나 있었다. 이미 일파만파 퍼진 정보이지만, 아직까지도 메티안의 이름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테렌스 아델의 친구인 메티안 실 참모차장.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여기저기에서 틈만 나면 그 이름이 거론되고는 했다.
친구……, 친구라. 옌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래서 메티안이 이토록 테렌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가.
“그럼, 어린애 같은 모습은 이미지 메이킹인 겁니까.”
“글쎄.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메티안이 뺨을 긁적였다. 미간을 찌푸리는 모양새가 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친구이면서. 더군다나 저 모습이 새로운 인격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으면서.
“지금 모습이 이미지 메이킹이 아니라는 건 거의 확실한 거지만.”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른 모습들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몰라. 어디서부터 어디서까지가 이미지 메이킹인 건지, 아닌지조차도.”
“그건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라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폼이 나가려는 듯했다. 나 또한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 수업을 들으러 가야겠다. 아니, 가야 하는데…….
나는 목 아래에 둘러진 단단한 팔을 내려다보았다. 등 뒤에 찰싹 달라붙은 이 몸은 뭐란 말인가. 나무늘보가 매달려 있는 것같이 무겁다.
“저기.”
“어딜 가, 고양아. 나랑 놀아야지.”
저 강의 들어야 합니다만. 학점이 달려 있습니다.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자, 더욱더 꽈악 안아 온다. 아니, 그것은 이미 조르고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숨이 막혔다.
도와달라는 듯 메티안을 바라보았지만.
“그럼, 테렌스랑 잘 놀고 있어.”
돌아온 건 얄궂은 미소뿐이었으니.
시선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저, 수업이 남아 있습니다.”
“내가 잘 말해 둘게.”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지만, 돌아온 대답도 저 모양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날 데려온 이유가 그저 테렌스가 보고 싶어 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저 음흉한 미소를 봐라. 슬그머니 닫히는 문을 봐라. 불순한 동기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테렌스를 내게 떠넘기기 위해서 날 데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알아차리면 뭐할까.
“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얼마나 지나야 합니까.”
“나도 몰라, 랜덤이거든.”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쾅! 닫혔다. 도망갔다.
어쩐지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했더니 이런 목적이 있었단 말인가. 나는 한숨을 꾸역꾸역 삼켰다. 테렌스는 내 머리카락에 뺨을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꼭 짐승이 갸르릉거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저기, 머리가 눌릴 것 같습니다.”
“괜찮아. 난 그래도 좋아.”
내가 안 괜찮아!
나는 그의 팔을 슬그머니 풀어냈다. 손가락을 한 개씩 한 개씩 조심스레 떼어 냈다. 그리고 이제 막 새끼손가락을 떼어 내려는 순간, 다시금 네 개의 손가락이 나를 꽉 죄어 왔다. 자석도 아닌 것이 몸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는다.
“숨 막힙니다.”
“왜 이렇게 말을 딱딱하게 써. 귀엽게 ‘숨 막혀요’해야지.”
대꾸할 말도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자니 그는 내게서 팔을 풀었다. 숨 막힌다는 말이 먹힌 모양이다. 그러곤 나를 빙글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만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마치, 눈앞에 금은보화를 잔뜩 둔 상인처럼, 그렇게 번들거린다.
나는 금은보화도 아니고, 그 또한 상인이 아닌데 저 부담스러운 시선은 대체 뭐란 말인가.
“눈동자까지 까만색이었음 좋았을 텐데.”
렌즈라도 낄까요.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랬다간 네 눈을 뽑아 버렸을지도 몰라.”
역시 이 인간은 사이코다. 보통,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잖아?
뭔가 화제를 돌릴 만한 게 필요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최대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림 그리죠.”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으니.
“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 의외로 어린애 같네.”
당신이 좋아하는 거잖아! 테렌스 아델 당신이!
나는 크레파스를 다시 내려놓았다. 진정하자.
잠시 착각을 했다. 이, 테렌스 아델은 그 테렌스 아델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의 턱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표정은 전쟁을 앞둔 전사마냥 심각했다.
“근데, 고양이 너. 안 웃는 게 좋겠다.”
억지로 끌어 올리고 있던 미소 그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가에서 경련이 일어나. 무서워.”
거짓말처럼 미소를 지웠다. 체르시엘의 야수가 나더러 무섭다고 한다. 기껏 웃어 줬더니. 괜히 입가를 주물렀다. 어쩐지 조금 당기더라니,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던 건가.
무엇을 숨기겠는가. 나는 웃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어렸을 때는 어땠을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의 나는 웃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 웃을 일이 없었다.
그러니 작은 미소라 할지라도 어색할 수밖에.
테렌스는 소파에 가서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는데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다. 아무리 테렌스 아델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다지 따르고 싶은 명령이 아니다.
가만히 서 있으니 그는 더 세게 자신의 허벅지를 때렸다.
찰싹, 찰싹 하는 소리에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개 학생이 총장님의 옆에 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릎에 앉으라는 거잖아.”
“그건 더 안 됩니다.”
그리고 저는 애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는 큰 손바닥으로 자신의 무릎을 찰싹찰싹 때렸다. 어서 앉으라는 듯. 탄탄한 허벅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속에 자리 잡은 상처들과 근육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데 저 무릎에 앉으라고?
비록, 나의 상상과는 달리 테렌스 아델의 성격이 사이코에, 유아퇴행에, 검은색을 좋아하는 미친놈이지만 그래도 그는 저 몸으로 전장에 섰고, 적군을 격파했다. 적어도 몸은 내가 동경하는 그가 맞다.
“고양이 넌 날 좋아하면서 왜 망설이지?”
“좋아하는 거 아닙니다.”
어딜 어떻게 보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가.
그가 “그럼?”하면서 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폼이 어린아이 테렌스와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쪽이 좀 더 농후한 것뿐.
“동경하는 겁니다.”
“똑같은 거 아닌가?”
“다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이었다. 붉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다시금 허벅지를 친다. 그런다고 내가 앉을 것 같은가.
테렌스가 짧게 혀를 찼다.
“기술 하나 가르쳐 줄게.”
“기술?”
“학생 정보 봤는데, 고양이 완력이 약하지?”
일순, 뜨끔했다. 학생 기록부에는 분명히 어느 부분이든지 뛰어나다고 적혀 있을 것이다. 대체 뭘 보고 그걸 알았을까. 그의 말대로 나는 완력이 약한 편이다. 보다시피 손목도 다른 놈들에 비해 조금 가늘고, 근육도 잘 붙지 않는 체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약한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수석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근력, 지구력, 순발력, 민첩성, 신체 기록사항 등등. 기본 기록들을 보고 종합해서 낸 결론이다.”
그저 수치로 적혀 있는 기록에 불과하다. 그것만 보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고쳤다. 눈앞의 남자는 천재다. 적군은 물론 아군마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우주의 경외 대상.
그는 협상을 하듯 “응?”하고 웃었다.
결국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무릎 위에 슬쩍 엉덩이를 앉혔다. ‘뭐, 이득이 있으니까.’라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테렌스의 숨결이 목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우리 고양이, 목이 빨개졌네. 부끄러워?”
“어린애 같은 걸 시키니까 그런 거잖습니까.”
“부정은 안 하네.”
“좀 전에도 그렇고.”하면서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짓말 같은 거 못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만일, 거짓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은 성미에 맞지 않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거짓으로 인한 일은 득보다는 해가 더 많거늘.
그는 코를 내 머리카락에 부볐다.
“좋아 좋아. 성격도 아주 마음에 들어.”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라곤 샴푸 냄새밖에 없을 텐데. 꼭 꽃향기를 맡듯이 숨을 들이쉰다. 주위에 흩어진 크레파스들을 바라보다, 물었다.
“검은 머리라면 많지 않습니까?”
“이 나라에서 검은 머리는 희귀하지만 다른 나라에는 많지. 그런데 취향이 아니야.”
똑같은 검은 머리인데도 취향이 있나.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문득 배 언저리가 차가워졌다. 그의 손이 셔츠 속을 파고든 탓이었다. 이걸 밀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직장 내 성추행. 아니, 교내 성추행이다.
“네 머리카락은 바람에 나부끼면 굉장히 예뻐.”
꼭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얘기한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복도였는데. 복도에서 바람이 불었을 리도 없거늘.
“꼭, 검은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 같아. 깃털이 휘날리는 것처럼 예쁘거든.”
천재의 어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모양새가 나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떠올려 봤자 머리 위에 까마귀가 얹어져 있다거나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정말로 깃털이 휘날린다거나. 빈약한 상상력이다. 나는 원래 이런 쪽으론 취약했다.
테렌스의 손이 끈적하게 배를 쓸어 만져 왔다. 서서히 위로 올라오는 손가락은 가슴을 스치고, 은근히 그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현실적인 고민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지금 벌어지는 일. 신고해도 됩니까?”
“음. 신고하면 날 또 만나게 될 텐데?”
지능적인 사이코는 귀찮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손길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섹스를 하듯, 질척한 느낌을 담던 것과는 달랐다. 순수한 손길이다. 처음 보는 생물을 조몰락거리는 것처럼. 설마 하는 생각도 잠시.
그의 손가락이 가슴을 꾸욱 눌렀다. 저도 모르게 “윽.”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등 뒤에서 테렌스가 발랄하게 소리쳤다.
“릴, 젖꼭지 말랑말랑해!”
민망한 단어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여기가 3층이라서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복도를 지나가던 인간들이 모두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에는 부끄러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감촉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콕콕 찔러 왔다. 하는 행동도 말하는 것도 다 달라졌다. 야수 테렌스 아델의 시간이 끝난 것이었다.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손 하나가 더 들어왔다. 반대편의 가슴을 짚으며 똑같이 가슴을 콕콕 찔러 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생물체를 찔러 보는 어린애도 아니고. 아, 어린애는 맞구나, 성격이. 하지만, 내가 그리 석남은 아닌지라.
“어라. 단단해지는 것 같아.”
“그…….”
“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순수한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나는 테렌스의 손목을 빠르게 잡아챘다. 하지만, 이 순수하고 덩치 큰 꼬맹이는 그 와중에도 가슴을 콕 찌른다. 윽.
“그만하십시오.”
“왜?”
왜냐니.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 건가.
짜증스레 아무 말이나 툭 내뱉으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주 잠시나마 궁금해졌다. 이 모습은 이미지 메이킹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리 행동하는 걸까. 어찌 됐든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나머지 한 손도 함께.
“타인의 몸은 함부로 만져도 되는 게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 할 법한 설명을 다 큰 성인에게 하다니. 그것도 야수에게. 하지만, 지금의 테렌스는 순수했다. 순수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괜찮아! 나는 릴을 좋아하니까, 타인 아니야!”
짜증날 정도로, 바보스러울 정도로,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는 뜻이다. 홧김에 고개를 홱 돌리자, 맑은 눈망울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까는 그리도 끈적해 보이던 눈동자가, 이토록 깨끗해 보이다니. 새삼스레 감탄하게 된다. 아무리 이미지 메이킹이라지만 눈빛마저 완벽하게 바꿀 수 있는 건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옷매무새를 고쳤다. 흘러나온 셔츠를 바지 속으로 넣고 흐트러진 재킷의 깃을 바로 잡았다. 하지만, 그는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야. 그게 아냐!”
“네?”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는 긴 팔을 뻗어 내 옷을 부여잡았다. 순간, 멱살을 잡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는 내 옷을 매만지더니 뒤로 물러섰다. 뿌듯한 얼굴이었다. 이를테면 애완동물에게 먹이를 준 꼬맹이 같은 얼굴이다. 하지만, 나는 차마 기뻐할 수 없었다.
“이게 뭡니까.”
“리본!”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이걸 왜 묶었냐는 것이다.
나는 쇄골 주위를 매만졌다. 언제나 단정하게 매었던 넥타이 대신, 가늘고 깜찍한 끈 리본이 매어져 있다. 그것도 검은색으로. 어거스트 제복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지나가다 감시원과 마주친다면, 곧바로 벌점을 받을 것이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리본을 잡아챘다. 그리고 끈을 잡아당기려는 순간.
“풀 거야?”
붉은 눈동자가 눈물로 젖기 시작했다. 잔뜩 일그러뜨린 얼굴은 금세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꼭 맞잡으며 훌쩍였다.
“테렌스가 준 리본 풀 거야?”
“정말, 정말로?”하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니, 저 그렁그렁한 눈은 정말로 그리 묻고 있었다. 풀어 버릴 거냐고.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이 준 것을.
리본을 잡은 손이 그대로 굳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신경 쓰지 않고 풀었을 테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내는 테렌스 아델. 그것이 나의 행동을 잡아챈 것이다. 오랜 시간의 동경이 나를 붙잡는다.
“나, 난, 릴이 매고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흑, 하며 그가 눈물을 닦아냈다. 저것이 정녕 연기인가, 아니면 정말로 우는 건가. 이것도 이미지 메이킹?
나는 리본을 한 번 테렌스를 한 번 바라보았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결국 거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복장 불량으로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테렌스와는 못 만나게 될 거예요.”하니, 그가 눈물을 닦던 손을 멈추었다. 나를 좋다고 말해 대니, 못 만난다는 말은 먹힐 것이다. 자만이 아니다. 이것은 확신이다. 그리고 거짓말도 아니다. 정말로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면,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테렌스는 밝게 웃었다.
“그런 거였어? 괜찮아! 테렌스가 다 말해 둘게!”
잊고 있었다. 이 사람의 지위를.
나는 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걸 매고 나가는 순간, 모두가 뭐라고 물어 올지, 어떤 눈길을 보낼지. 하지만, 그렇다고 풀어 버릴 수도 없고.
그때, 테렌스가 손을 쭉 뻗었다.
“그러니까, 나 조금만 더 만지게 해 줘!”
“……무엇을 말입니까.”
부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길 바라 본다. 지금 이 순간 그것만큼 절실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 맹랑한 테렌스는 나의 바람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말랑말랑한 거!”
“아니, 딱딱한 건가?”하면서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망한 단어에 얼굴이 옅게 달아올랐다가 식길 반복했다.
나는 최후의 수단을 써 보기로 결심했다. 주위에 떨어져 있던 까만 크레파스를 주워 들었다. 그러곤 내밀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림 그릴까요?”
하지만, 테렌스는 깜찍하게 볼을 부풀렸다. 장신의 사내에게 저런 표정이 어울리는 것도 어찌 보면 문제다. 지금 이 모습을 매스컴에 흘려보낸다면 핫이슈가 될 것이 틀림없다.
“싫어! 릴 젖꼭지가 더 좋아!”
그러니까 제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한숨이 속으로 꾸역꾸역 넘어간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피로가 몰려든다. 그냥 쓰러져서 자고 싶다. 이 인간이 없는 곳에서. 나는 테렌스의 말을 못 들은 척 그의 손에 크레파스를 쥐어 주었다.
“총장님이 좋아하는 까만색이잖습니까. 그림 그려요.”
하지만, 놈은 크레파스를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 주인에게 버려진 크레파스는 두 동강이 나서 뒹굴었다. 새카만 자국이 바닥에 남았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그가 빽 소리쳤다.
“크레파스 싫어! 만질 거야!”
지금 떠오른 것은 딱 하나밖에 없다. 미운 네 살, 테렌스. 비록 떼쓰고 있는 것이 성추행에 가까운 발언이지만. 왜 자꾸 내 가슴에 집착하는 건지. 말랑말랑한 게 좋다면, 그것 말고도 다른 게 더 많이 있다.
나는 그가 내던진 크레파스를 주워 들었다. 크레파스가 무슨 잘못이라고 내던지나. 그렇게나 좋아했던 거면서.
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애에겐, 어린애를 대하듯’이라는 문구를 머릿속에 새기며.
“물건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싫습니다.”
징징거림이 멈췄다. 충격을 받은 건지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게 뜨인 눈 아래로 맑은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많이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한다. 이건 뭐, 정말 애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던 전신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아무런 표정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심 많이 놀랐다. 그가 울 거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이건 정말로 이미지 메이킹일까. 아니, 지금은 그딴 거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 큰 어른인데도, 아이라고 생각하니 울린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가 꽤 커서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야만 가능했다.
“화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전 테렌스가 착한 아이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른에게 이런 말을 하려니, 참 기분이 이상하다.
테렌스는 코를 쿨쩍이며 물었다.
“테렌스 나쁜 아이야?”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제 기분을 조금만 생각해 주십시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테렌스 아델, 그는 만난 지 고작 이틀 만에 나를 이상하게 만든다. 나를 나로 있을 수 없게 한다.
손을 조금 내려, 그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축축한 눈물이 손끝에 닿았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럼, 테렌스 안 싫어?”
“제가 당신을 싫어할 일은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동경했던 사람이었고 쫓고 싶었던 사람이다. 나는 테렌스 아델 때문에 이곳에 들어왔다. 줄곧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싫어진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비록 생각했던 모습과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경하던 마음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테렌스는 화색을 띠었다. 활짝 웃는 모습이 순수하기 그지없다.
“나도 릴이 제일 좋아!”
어깨가 꽉 끌어안겼다. 아니, 싫어 할 일이 없다고 했지, 제일 좋다고는 말한 적 없다. 하지만, 나는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쓴 한숨을 내뱉을 뿐. 뭐, 알 게 뭔가.
문득 거울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내 입가에는 작게나마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