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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변태행 1권
목차
序章
一章. 무슨 이런 뭣 같은 팔자가
二章. 세상 밖으로
三章. 인연을 맺고 소문은 고난을 부른다
四章. 신의 능소천
五章. 첫 번째 인연
六章. 암운저미(暗雲低迷)
七章. 한 번만 하겠다는데
八章. 암운은 시작을 알리고
九章. 소원성취까지는 좋았는데
十章. 혼란의 시작. 두 번째 인연
/(1)/
序章
“어허어엉! 엉엉! 나 혼자 어쩌라고, 어찌 이리도 무정하십니까?! 허어엉!”
뭐가 그리도 구슬픈지. 서러운 통곡 소리가 화북평야를 병풍처럼 가로지르는 산동성 태산으로 불리는 제일의 명산 한 자락에 울려 퍼지고 있다.
제일봉인 장인봉을 비롯해 칠십이 봉 중의 한곳인 깊은 산속 절지에 위치한 장원 하나. 인적이 없어 마치 수려한 풍광 속에 둘러싸인 것 같은 형상이다.
그러한 곳에서 심금을 울리는 통곡 소리는 한참을 이어졌고, 그보다 더 특이한 점은 이곳만 유독 도화꽃이 만발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도화를 상징하는 도화문(桃華門). 세상에는 이미 오래전에 망문이 되어 사라졌다고 여기는 그 가문이었다.
“허어엉! 할아버지! 엉엉.”
일다경 전부터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한 소년. 작은 얼굴에 검은 눈썹, 길고 숱이 많은 속눈썹 안의 새까만 눈동자는 명경지수처럼 맑아 물기가 어려 있다.
투명할 정도로 백옥 같은 피부와 오뚝한 콧날을 지나 홍서화(紅瑞花)를 머금은 듯한 붉은 입술은 통곡을 멈추지 않았고, 그런 소년의 앞에는 주름진 창백한 표정의 한 노인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아무리 봐도 소년의 할아버지라는 노인이 생사를 달리한 모습이다. 그렇기에 이렇듯 슬퍼하는 것이리라.
“허엉! 할아버지!”
“하아, 나 아직 안 죽었다, 손자야.”
그렇다. 그건 순전히 소년의 착각이었다.
“엥? 아직 안 가셨어요?”
“끄응, 나도 할 말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니냐?”
“그럼, 빨리 하든가. 괜히 눈물만 쏟았네!”
언제 울었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삐죽거리는 소년을 보는 노인의 눈동자에 찰나간 황당함이 어린다. 그러나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내젓고 소년이 그렇게도 바라는 마지막 유언을 시작하고 있었다.
“잘 들어라. 너는 아직 어려 우리 도화문에 대해 모르겠지만, 우리 도화문의 역사는 천 년을 이어져 왔다.”
“에엑?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우리가 뭐 볼 게 있다고 천 년을 이어 옵니까?”
“말 된다. 그리고 자꾸 말 좀 끊지 마라. 나 힘들다.”
“아, 뭐 그러죠. 계속하세요.”
소년은 이해가 안 갔다. 태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 심산유곡에 위치한 도화문이 어떻게 천 년의 역사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마음 편히 유언 좀 하겠다는데 더 따지고 들 수도 없고 곧 입을 다무는 소년의 얼굴에는 못내 지우지 못한 의문과 심통이 가시지 않는다.
“우리 도화문은 간혹 제자를 들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직계 가족으로 이어 왔다. 또한, 도화문에는 도화극락밀전(桃華極樂密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건 나중에 조사전에 들어가 보면 알 것이야. 네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도화문의 비사이다. 우리 혈족은 천형을 타고나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무림공적으로 몰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무림공적? 대체 천형이 뭔데 무림공적으로 몰려요?”
“그건, 그것도 나중에 조사전에 들어가 보면 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 또한 그 천형을 타고나는 바람에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미친년 술 취해서 개나발 부는 소리야? 그러니까 지금 영감 말은 내가 그 천형을 타고났고, 그것 때문에 죽는다고? 이런 염병 맞아 뒈질 영감탱이!!’
“속으로 내 욕할 거 없고,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주마.”
“에?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해야죠!”
“끄응, 잘 들어라. 네가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양기가 성한 남자를 찾아 방사를 해야 하느니라.”
‘……뭐래? 지금 나보고 남자하고 방사하라고? 그게 자기 손자한테 하는 유언이라고? 이 노인네가 갈 때가 되더니 드디어 정신줄 놓았군.’
“그러니까, 저보고 남자를 덮치라는 말입니까?”
“덮침을 당하라는 말이다.”
‘미친 거 아니야? 정말? 나보고 남자한테 덮침을 당하라고? 진정?’
“어디로요?”
“남자한테 구멍이 하나뿐이지 않느냐?”
‘가만, 남자한테 구멍이 하나뿐이라고? 왜? 콧구멍도 있고 귓구멍도 있고 입도 있고 또…… 거기? 설마, 거시기 나오는 거기?’
“똥……구멍?”
“크흠, 비문(秘門) 내지 밀지(密址)라는 좋은 말도 있다만?”
‘그거나 그거나! 엎어치나 메치나!! 그럼, 뭐야? 앞으로 살려면 똥구멍 열어 놓고 나 좀 잡아 잡수셔! 해야 한단 말이야? 오, 빌어먹을 열성조시여!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옵니까?’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마라. 양기를 취하지 못하면 두 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야.”
‘엑! 내 생명이 고작 2년이라고? 뭐야? 그럼, 내 목숨이 지금 경각에 처해 있단 말이야? 오! 쓰벌!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이 영감탱이야! 이런, 빌어 처먹을!’
“씨바! 좋아요. 좋아! 다 좋은데 어떻게 꾀죠? 아무나 붙잡고 덮칠 수는 없잖아요?”
“그건,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들 꼬일 것이야.”
“예?”
‘가만히 있는데 꼬인다니? 그건 또 뭔 말인데?’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손자야, 내 말 허투루 듣지 말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알았어요. 열심히 노력해 볼게요.”
‘그래야죠. 살기 위해서인데. 설사 변태로 몰려 끝내 무림공적으로 죽게 되더라도 일단은 열심히 살아 볼게요.’
“손자야, 아무래도 갈 때가 된 것 같구나. 혹시 내게 궁금한 거라도 있느냐?”
“예? 아, 있어요! 만약, 양기를 흡수하면 무공도 익힐 수 있는 겁니까?”
“그건…….”
‘씨불, 안 된다는 말이군.’
“말짱 황입니까?”
“아니다. 극양지체나 태극음양지체, 태양신맥을 만나 그 양기를 꾸준히 흡수해서 천형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너도 얼마든지 무공을 익힐 수 있을 것이야.”
“그래요?!”
‘다행이다! 난 또 죽자 사자 오만 개잡놈들하고 그 짓만 해야 하는 줄 알았네.’
“다만 네가 타고난 천형만큼이나 그쪽도 희귀한 체질이라 과연 만날 수 있을지가 의문이구나. 만약, 무림에 나가 음양을 한데 품은 놈이나 음의 기운으로 양을 다스리는 놈을 만나면 무조건 자빠트려라.”
‘하아? 자빠트리라고? 맙소사, 세상천지에 나 같은 유언을 듣는 손자가 또 있을까?’
“그래도 뭐 자빠트려야 내가 사니까. 그 정도면 됐어요. 이제 그만 편히 가세요.”
“오냐. 그만 가마. 이제 네가 도화문의 문주라는 걸 한시도 잊지 말고 잘 살아라, 손자야.”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안녕히 가시라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지만, 미약한 생기가 빠져나가는 듯 스르르 눈을 감는 노인의 찌푸려진 얼굴에 비로소 평안함이 어린다.
다행히 살아생전 천수를 누리며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던 듯 노인의 평온한 얼굴에는 생에 대한 조금의 미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참, 손자야.”
정정하자. 아직 미련은 남은 것 같다.
“헉! 깜짝이야! 뭐예요? 아직 안 가셨어요?”
“끙, 미안하구나. 이곳을 떠나면 하남성 개봉에 있는 진가장으로 찾아가거라. 이미 모든 걸 준비해 놓고 있을 것이야.”
‘준비라니? 아니, 언제 영감이 집을 나간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알고?’
“거기 진가장은 어떻게 알아요?”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도 무림공적이 되고 싶지 않으면 그 얼굴은 좀 가리고 다니는 게 좋을 것이야.”
‘에? 얼굴을 가리라고? 하기야 내가 인물이 또 워낙 출중하니 개떼처럼 꼬일 수도 있겠네? 그래도 그렇지, 계집처럼 면사를 뒤집어쓰고 다니라고? 아니면, 차라리 복면을 하고 아무나 덮쳐?’
“저기 할아버지. 어라? 진짜 가셨네. 흑…… 아이고! 할아버지!! 별 괴상망측한 유언만 남기고 가면 어쩐대요?! 허어어엉!!”
一章. 무슨 이런 뭣 같은 팔자가
연구세심(年久歲深)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화문의 삼십칠 대 문주 능천화의 장례식이 문상객 하나 없이 조용히 치러졌다.
제법 큰 장원에 쥐죽은 듯 조용한 침묵이 맴돌고 오직 상주인 능천화의 손자 능소천만이 상복을 갖추고 제단 앞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사흘간의 장례 절차가 끝이 나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능소천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어리고 있었다.
“그래, 깊게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살고 봐야지. 조개 구멍에 빠지든 고추밭에 뒹굴든 아까운 목숨 일부러 끊을 필요는 없지.”
지금까지 유언에 대해 생각했던 듯 섬섬옥수 같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다시 한 번 다짐을 거듭한다.
능소천, 이제 갓 십육 세의 나이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해 기예와 서풍에 능하고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무서운 기억력의 소유자.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터득하고 하나를 알면 열을 깨닫는 생이지지(生而知之) 일문십지(一門十知)의 천재는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타고난 천형이 있어 남들 다 배우는 무공은커녕 저잣거리에 나도는 흔한 삼류 토납법 하나 익힐 수 없는 몸으로 두뇌만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다.
또한, 외모는 꽃다운 얼굴과 달 같은 자태를 지닌 화용월태(花容月態). 흔한 말로 나라를 뒤흔들 미모라는 경국지색에 버금가는 외모이다.
하지만 타고난 천형 외에도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의 유별나다 못해 영악해 빠진 더러운 성격이었다.
“씨불, 영감탱이 갈려면 곱게 처가지! 왜 사람 심란하게 악담을 퍼붓고 가냐고?! 나하고 철천지원수라도 졌어? 도대체가 말이야, 노망난 것도 아니고 허구한 날 왜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데?!”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멈칫거린 소천이 능천화의 제단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린다. 정확히는 제단 위로 길게 늘어진 족자에 살아생전 모습 그대로인 능천화를 향해서다.
소천이 고작 십이 세에 그려 줬던 초상화. 마음 같아서는 저 초상화까지 확 불 싸지르고 싶을 정도다. 무슨 그런 유언이 다 있는지, 소천은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당연하지 않은가. 숨길 게 따로 있지! 진작 말했다면 하다못해 그에 대한 방법을 모색할 기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걸 기껏 죽어가면서 유언으로 하다니!
“에라이! 빌어먹을 영감탱이야! 그곳에서 혼자 잘 먹고 잘살아라! 흥!”
소천은 도저히 분이 안 풀리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런 소천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것 같은 능천화의 제단만이 외로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오만 짜증을 다 부리며 나간 소천이 빠른 걸음으로 향한 곳은 장원 가장 안쪽에 있는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조사전이다. 소천은 이곳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짜증은 사라지고, 소천의 얼굴에는 얼핏 기대와 흥분이 어렸지만, 선뜻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일 년에 한 번 제를 모시는 일에도 소천은 이곳을 출입할 수 없었다. 오직 문주인 능천화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능천화가 생을 달리한 이상 이제 도화문의 문주는 자신이다. 고작 십육 세의 어린 나이지만, 한 가문의 수장인 것이다.
물론 문도라고는 쥐뿔도 없는 초라한 처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수장은 수장이다.
“흠, 뭐가 있을까? 뭐가 있어서 영감이 근처도 못 가게 한 거지? 에고, 별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떨리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소천은 조심스럽게 조사전의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일순 코끝에 확 풍겨오는 강렬한 향.
머리를 어지럽히는 미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들이 차고 다니는 향낭에서 나는 향도 아닌 마치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도화향 같으면서도 더 자극적인 느낌.
어떻게 문 하나 사이에 두고 이렇듯 강한 향이 갇혀 있었는지 의문이 들 만큼 처음에는 가볍게 코끝을 간질이던 향이 이내 몸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헤에~ 기가 막힌 향이네? 이게 뭐지?”
처음 맡아 보는 향인데도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자 소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또 한 번 놀라움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분명히 작은 건물에 지나지 않았는데 밖에서 볼 때와는 달리 길게 통로식으로 연결된 길은 한참을 걸어야 했고, 엄청난 고가인 야명주가 긴 통로에 빼곡하게 박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겉껍질만 화려한, 궁핍한 도화문 살림살이에 조사전은 어떻게 이리도 금칠해 놓을 수 있는지. 소천은 황당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투덜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한참 걷다 보니 드디어 길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한 것도 잠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유일하게 아홉 송이 도화꽃이 새겨진 거대한 석문을 보고 소천은 입을 떡 벌려야 했다.
“이걸 나더러 열라고? 내공이라고는 쥐뿔도 없는데? 하아, 우리 조상이라는 양반들이 하나같이 미쳤구먼. 가만, 그런데 우리 영감은 어떻게 열었대?”
소천이 알기로도 능천화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석문을 열었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천의 눈동자가 일순 반짝이더니 주변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린다. 뭔가 문을 열 수 있는 장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소천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도화문의 상징인 아홉 송이 도화꽃이 그 해답으로 그건 하늘을 아홉 방위로 나눈 구중천(九重天)을 뜻하고 있었다.
가장 높은 하늘이라는 구천을 이용해 일종의 진을 설치해 놓은 것이다. 그걸 알아차리자 소천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어디 보자. 무조건 해 놓지는 않았을 거고, 차례를 정해 놓은 건가? 그렇다면 중앙에 있는 균천, 동방 창천, 서방 호천, 남방 염천, 북방 현천, 동북방 변천…….”
그그그그긍―
“좋았어! 그러면 그렇지. 내가 못하는 게 어딨어. 움하하하하~!”
소천의 손이 차례로 도화꽃을 눌러갔고 그걸 끝마쳤을 때는 거대한 석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모습에 한껏 자찬을 늘어놓으며 웃음을 터트리는 소천이다.
그리고 한 발을 떼자마자 처음 조사전 문을 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향이면서 좀 더 강렬해진 향이 소천의 몸을 감싸듯 모공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헤에~ 역시 기가 막힌 향이야. 그런데 뭐가 있…… 헉! 이, 이게 뭐야?”
소천은 기가 막혔다. 정말 기가 막히다 못해 뒷목 잡고 넘어갈 수도 있다는 걸 소천은 지금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색이 조사전인데. 도화문의 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사전인데. 그런 조사전이 어째서?
코딱지만 한 크기에 위패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있는 거라고는 덜렁 한 통의 서찰이 전부다.
이럴 거면 조사전은 왜 만들어 놓은 건지. 그동안 위패도 없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는 또 어떻게 지냈단 말인가.
통로에는 그 비싼 야명주를 빼곡하게 박아 놨으면서 정작 조사전 안에는 쥐뿔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 말이다.
“하아, 어이가 가출할 지경이네. 그러면 그렇지. 기대한 내가 미친놈이지.”
소천은 맥이 탁 풀렸다. 금은보화는커녕 하다못해 조상님들 위패라도 있으면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능천화가 꼬박꼬박 제사를 지냈다는 게 더 기가 막혔다. 위패는 어따 팔아먹고 아무것도 없는 벽 보고 제사를 지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황당함에 고개를 내젓던 소천이 그제야 서찰을 들어 올리고 못마땅한 기색으로 읽어 내려간다.
소천, 보아라. 네가 이곳에 들었다면 내가 유명을 달리한 것이리라.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을 터인데 막상 아무것도 없어 실망도 많이 했겠지?
“잘 아네. 빌어먹을 영감탱이!”
실망하지 마라. 본론은 지금부터니. 우리 도화문은 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온 가문으로 대대로 직계혈족이 문주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과거 우리 도화문은 무림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도 많이 세웠느니라.
“이 영감이 어디서 개뻥을 치고 그래? 무림공적이라며?!”
그러나 너무 잘난 것도 문제라고 하늘이 시기해 우리 도화문에 천형을 내렸으니…….
“뭐라? 하늘이 시기해? 하! 가만 보니 진작 노망이 났었군. 그래, 아주 잡아먹을 듯이 닦달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 천형이 무엇인고 하니 세상은 모르고 우리 가문만이 타고나는 태음빙한지체(太陰氷瀚肢體)가 그것이다. 너도 극음지체는 들어 봤을 것이다. 태음빙한지체 또한 극음지체와 마찬가지로 음기만을 타고나 두뇌가 명석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이지만, 극음지체와 다른 것은 어떤 무공도 익힐 수가 없다는 점이다.
“역시, 염병!”
또한, 열여덟 해를 넘기지 못하는 병으로 이걸 다스리기 위해서는 오직 사내의 강성한 양기를 흡수하는 방법밖에는 없느니라.
“무슨 놈의 팔자가 이리 더러울꼬. 가만, 영감은 천수를 누렸잖아? 그것만 있어? 징글맞게도 장수했지.”
물론 나는 다행스럽게도 태음빙한지체가 아니다.
“이 영감탱이가 귀신이 들렸나?”
태음빙한지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같은 천형을 타고난 극양지체나 태양신맥, 아니면 음양의 조화를 이룬 태극음양지체를 만나는 방법뿐이다. 우리 선조들 중 이 같은 신체를 타고난 선조가 일곱 분이 계셨고, 태양신맥을 만난 한 분을 제외하고 다른 여섯 분은 임시방편으로 양기를 섭취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으셨다. 그 결과 본의 아니게 마녀나 색마로 오인받아 무림공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너만은 그분들의 고충을 이해해야 한다.
“내 팔자도 똑같으니까?”
그분들이 비록 무림공적으로 몰렸다고 하나 실상은 인간들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이다. 그건 우리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이 방사를 치를수록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상대의 내공까지 늘려 주며 정순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해서 그 상대들은 그분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고, 그게 들통 날 위기에 처하자 끝내 무림공적이라는 오명을 씌워 죽인 것이다.
“개새끼들!”
소천아, 너는 어릴 때부터 영악해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겠지만, 네 관상에 도화살이 끼어 있으니 자나 깨나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염병! 그러니까 뭐야? 나는 평생 그 짓거리를 해야 하는 데다 오만 것들이 다 꼬일 팔자라는 거잖아? 오, 맙소사!”
마지막으로 네가 이곳에 들어올 때 두 번의 향을 맡았을 것이다. 그건 선조들의 몸에서 빼낸 원정(元精) 같은 향으로 일반 사람에게는 흡수되지 않으며 오직 태음빙한지체만을 위한 향이다. 일반 사람들이 그 향을 맡으면 자신도 모르게 양기가 들끓게 되며, 양기가 강한 상대일수록 그 향도 짙어진다. 또한, 도화문의 비전인 도화극락밀전을 닦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뭔 이름이 이따위야?”
도화극락밀전은 총 오 단계로 이 조사전 안 어딘가에 숨어 있는 내실로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럼, 그만 각설하고 너를 믿는다. 너라면 끈질기게 살아남아 도화극락밀전을 대성할 수 있을 것이야.
“뭐야? 내실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줘야지!”
참, 이 서찰은 태우도록 하고 조사전을 나갈 때 간단한 진이 설치돼 있을 것이다. 너라면 충분히 해체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장원을 떠날 때 장원 전체에 펼쳐진 진을 가동시켜야 한다. 혹여라도 우리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또다시 불운이 닥칠지도 모르고 앞으로 네가 배울 도화극락밀전이 그만큼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면, 이제 진짜 간다. 열심히 살아남아라, 손자야.
“이, 이! 뭘 가르쳐 주려면 제대로 가르쳐 주든가! 그놈의 신비한 척하는 병은 곧 죽어도 못 고치는구먼. 아욱! 씨바, 짜증 나!”
목차
序章
一章. 무슨 이런 뭣 같은 팔자가
二章. 세상 밖으로
三章. 인연을 맺고 소문은 고난을 부른다
四章. 신의 능소천
五章. 첫 번째 인연
六章. 암운저미(暗雲低迷)
七章. 한 번만 하겠다는데
八章. 암운은 시작을 알리고
九章. 소원성취까지는 좋았는데
十章. 혼란의 시작. 두 번째 인연
/(1)/
序章
“어허어엉! 엉엉! 나 혼자 어쩌라고, 어찌 이리도 무정하십니까?! 허어엉!”
뭐가 그리도 구슬픈지. 서러운 통곡 소리가 화북평야를 병풍처럼 가로지르는 산동성 태산으로 불리는 제일의 명산 한 자락에 울려 퍼지고 있다.
제일봉인 장인봉을 비롯해 칠십이 봉 중의 한곳인 깊은 산속 절지에 위치한 장원 하나. 인적이 없어 마치 수려한 풍광 속에 둘러싸인 것 같은 형상이다.
그러한 곳에서 심금을 울리는 통곡 소리는 한참을 이어졌고, 그보다 더 특이한 점은 이곳만 유독 도화꽃이 만발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도화를 상징하는 도화문(桃華門). 세상에는 이미 오래전에 망문이 되어 사라졌다고 여기는 그 가문이었다.
“허어엉! 할아버지! 엉엉.”
일다경 전부터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한 소년. 작은 얼굴에 검은 눈썹, 길고 숱이 많은 속눈썹 안의 새까만 눈동자는 명경지수처럼 맑아 물기가 어려 있다.
투명할 정도로 백옥 같은 피부와 오뚝한 콧날을 지나 홍서화(紅瑞花)를 머금은 듯한 붉은 입술은 통곡을 멈추지 않았고, 그런 소년의 앞에는 주름진 창백한 표정의 한 노인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아무리 봐도 소년의 할아버지라는 노인이 생사를 달리한 모습이다. 그렇기에 이렇듯 슬퍼하는 것이리라.
“허엉! 할아버지!”
“하아, 나 아직 안 죽었다, 손자야.”
그렇다. 그건 순전히 소년의 착각이었다.
“엥? 아직 안 가셨어요?”
“끄응, 나도 할 말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니냐?”
“그럼, 빨리 하든가. 괜히 눈물만 쏟았네!”
언제 울었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삐죽거리는 소년을 보는 노인의 눈동자에 찰나간 황당함이 어린다. 그러나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내젓고 소년이 그렇게도 바라는 마지막 유언을 시작하고 있었다.
“잘 들어라. 너는 아직 어려 우리 도화문에 대해 모르겠지만, 우리 도화문의 역사는 천 년을 이어져 왔다.”
“에엑?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우리가 뭐 볼 게 있다고 천 년을 이어 옵니까?”
“말 된다. 그리고 자꾸 말 좀 끊지 마라. 나 힘들다.”
“아, 뭐 그러죠. 계속하세요.”
소년은 이해가 안 갔다. 태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 심산유곡에 위치한 도화문이 어떻게 천 년의 역사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마음 편히 유언 좀 하겠다는데 더 따지고 들 수도 없고 곧 입을 다무는 소년의 얼굴에는 못내 지우지 못한 의문과 심통이 가시지 않는다.
“우리 도화문은 간혹 제자를 들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직계 가족으로 이어 왔다. 또한, 도화문에는 도화극락밀전(桃華極樂密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건 나중에 조사전에 들어가 보면 알 것이야. 네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도화문의 비사이다. 우리 혈족은 천형을 타고나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무림공적으로 몰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무림공적? 대체 천형이 뭔데 무림공적으로 몰려요?”
“그건, 그것도 나중에 조사전에 들어가 보면 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 또한 그 천형을 타고나는 바람에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미친년 술 취해서 개나발 부는 소리야? 그러니까 지금 영감 말은 내가 그 천형을 타고났고, 그것 때문에 죽는다고? 이런 염병 맞아 뒈질 영감탱이!!’
“속으로 내 욕할 거 없고,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주마.”
“에?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해야죠!”
“끄응, 잘 들어라. 네가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양기가 성한 남자를 찾아 방사를 해야 하느니라.”
‘……뭐래? 지금 나보고 남자하고 방사하라고? 그게 자기 손자한테 하는 유언이라고? 이 노인네가 갈 때가 되더니 드디어 정신줄 놓았군.’
“그러니까, 저보고 남자를 덮치라는 말입니까?”
“덮침을 당하라는 말이다.”
‘미친 거 아니야? 정말? 나보고 남자한테 덮침을 당하라고? 진정?’
“어디로요?”
“남자한테 구멍이 하나뿐이지 않느냐?”
‘가만, 남자한테 구멍이 하나뿐이라고? 왜? 콧구멍도 있고 귓구멍도 있고 입도 있고 또…… 거기? 설마, 거시기 나오는 거기?’
“똥……구멍?”
“크흠, 비문(秘門) 내지 밀지(密址)라는 좋은 말도 있다만?”
‘그거나 그거나! 엎어치나 메치나!! 그럼, 뭐야? 앞으로 살려면 똥구멍 열어 놓고 나 좀 잡아 잡수셔! 해야 한단 말이야? 오, 빌어먹을 열성조시여!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옵니까?’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마라. 양기를 취하지 못하면 두 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야.”
‘엑! 내 생명이 고작 2년이라고? 뭐야? 그럼, 내 목숨이 지금 경각에 처해 있단 말이야? 오! 쓰벌!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이 영감탱이야! 이런, 빌어 처먹을!’
“씨바! 좋아요. 좋아! 다 좋은데 어떻게 꾀죠? 아무나 붙잡고 덮칠 수는 없잖아요?”
“그건,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들 꼬일 것이야.”
“예?”
‘가만히 있는데 꼬인다니? 그건 또 뭔 말인데?’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손자야, 내 말 허투루 듣지 말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알았어요. 열심히 노력해 볼게요.”
‘그래야죠. 살기 위해서인데. 설사 변태로 몰려 끝내 무림공적으로 죽게 되더라도 일단은 열심히 살아 볼게요.’
“손자야, 아무래도 갈 때가 된 것 같구나. 혹시 내게 궁금한 거라도 있느냐?”
“예? 아, 있어요! 만약, 양기를 흡수하면 무공도 익힐 수 있는 겁니까?”
“그건…….”
‘씨불, 안 된다는 말이군.’
“말짱 황입니까?”
“아니다. 극양지체나 태극음양지체, 태양신맥을 만나 그 양기를 꾸준히 흡수해서 천형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너도 얼마든지 무공을 익힐 수 있을 것이야.”
“그래요?!”
‘다행이다! 난 또 죽자 사자 오만 개잡놈들하고 그 짓만 해야 하는 줄 알았네.’
“다만 네가 타고난 천형만큼이나 그쪽도 희귀한 체질이라 과연 만날 수 있을지가 의문이구나. 만약, 무림에 나가 음양을 한데 품은 놈이나 음의 기운으로 양을 다스리는 놈을 만나면 무조건 자빠트려라.”
‘하아? 자빠트리라고? 맙소사, 세상천지에 나 같은 유언을 듣는 손자가 또 있을까?’
“그래도 뭐 자빠트려야 내가 사니까. 그 정도면 됐어요. 이제 그만 편히 가세요.”
“오냐. 그만 가마. 이제 네가 도화문의 문주라는 걸 한시도 잊지 말고 잘 살아라, 손자야.”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안녕히 가시라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지만, 미약한 생기가 빠져나가는 듯 스르르 눈을 감는 노인의 찌푸려진 얼굴에 비로소 평안함이 어린다.
다행히 살아생전 천수를 누리며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던 듯 노인의 평온한 얼굴에는 생에 대한 조금의 미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참, 손자야.”
정정하자. 아직 미련은 남은 것 같다.
“헉! 깜짝이야! 뭐예요? 아직 안 가셨어요?”
“끙, 미안하구나. 이곳을 떠나면 하남성 개봉에 있는 진가장으로 찾아가거라. 이미 모든 걸 준비해 놓고 있을 것이야.”
‘준비라니? 아니, 언제 영감이 집을 나간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알고?’
“거기 진가장은 어떻게 알아요?”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도 무림공적이 되고 싶지 않으면 그 얼굴은 좀 가리고 다니는 게 좋을 것이야.”
‘에? 얼굴을 가리라고? 하기야 내가 인물이 또 워낙 출중하니 개떼처럼 꼬일 수도 있겠네? 그래도 그렇지, 계집처럼 면사를 뒤집어쓰고 다니라고? 아니면, 차라리 복면을 하고 아무나 덮쳐?’
“저기 할아버지. 어라? 진짜 가셨네. 흑…… 아이고! 할아버지!! 별 괴상망측한 유언만 남기고 가면 어쩐대요?! 허어어엉!!”
一章. 무슨 이런 뭣 같은 팔자가
연구세심(年久歲深)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화문의 삼십칠 대 문주 능천화의 장례식이 문상객 하나 없이 조용히 치러졌다.
제법 큰 장원에 쥐죽은 듯 조용한 침묵이 맴돌고 오직 상주인 능천화의 손자 능소천만이 상복을 갖추고 제단 앞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사흘간의 장례 절차가 끝이 나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능소천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어리고 있었다.
“그래, 깊게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살고 봐야지. 조개 구멍에 빠지든 고추밭에 뒹굴든 아까운 목숨 일부러 끊을 필요는 없지.”
지금까지 유언에 대해 생각했던 듯 섬섬옥수 같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다시 한 번 다짐을 거듭한다.
능소천, 이제 갓 십육 세의 나이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해 기예와 서풍에 능하고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무서운 기억력의 소유자.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터득하고 하나를 알면 열을 깨닫는 생이지지(生而知之) 일문십지(一門十知)의 천재는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타고난 천형이 있어 남들 다 배우는 무공은커녕 저잣거리에 나도는 흔한 삼류 토납법 하나 익힐 수 없는 몸으로 두뇌만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다.
또한, 외모는 꽃다운 얼굴과 달 같은 자태를 지닌 화용월태(花容月態). 흔한 말로 나라를 뒤흔들 미모라는 경국지색에 버금가는 외모이다.
하지만 타고난 천형 외에도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의 유별나다 못해 영악해 빠진 더러운 성격이었다.
“씨불, 영감탱이 갈려면 곱게 처가지! 왜 사람 심란하게 악담을 퍼붓고 가냐고?! 나하고 철천지원수라도 졌어? 도대체가 말이야, 노망난 것도 아니고 허구한 날 왜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데?!”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멈칫거린 소천이 능천화의 제단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린다. 정확히는 제단 위로 길게 늘어진 족자에 살아생전 모습 그대로인 능천화를 향해서다.
소천이 고작 십이 세에 그려 줬던 초상화. 마음 같아서는 저 초상화까지 확 불 싸지르고 싶을 정도다. 무슨 그런 유언이 다 있는지, 소천은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당연하지 않은가. 숨길 게 따로 있지! 진작 말했다면 하다못해 그에 대한 방법을 모색할 기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걸 기껏 죽어가면서 유언으로 하다니!
“에라이! 빌어먹을 영감탱이야! 그곳에서 혼자 잘 먹고 잘살아라! 흥!”
소천은 도저히 분이 안 풀리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런 소천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것 같은 능천화의 제단만이 외로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오만 짜증을 다 부리며 나간 소천이 빠른 걸음으로 향한 곳은 장원 가장 안쪽에 있는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조사전이다. 소천은 이곳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짜증은 사라지고, 소천의 얼굴에는 얼핏 기대와 흥분이 어렸지만, 선뜻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일 년에 한 번 제를 모시는 일에도 소천은 이곳을 출입할 수 없었다. 오직 문주인 능천화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능천화가 생을 달리한 이상 이제 도화문의 문주는 자신이다. 고작 십육 세의 어린 나이지만, 한 가문의 수장인 것이다.
물론 문도라고는 쥐뿔도 없는 초라한 처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수장은 수장이다.
“흠, 뭐가 있을까? 뭐가 있어서 영감이 근처도 못 가게 한 거지? 에고, 별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떨리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소천은 조심스럽게 조사전의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일순 코끝에 확 풍겨오는 강렬한 향.
머리를 어지럽히는 미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들이 차고 다니는 향낭에서 나는 향도 아닌 마치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도화향 같으면서도 더 자극적인 느낌.
어떻게 문 하나 사이에 두고 이렇듯 강한 향이 갇혀 있었는지 의문이 들 만큼 처음에는 가볍게 코끝을 간질이던 향이 이내 몸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헤에~ 기가 막힌 향이네? 이게 뭐지?”
처음 맡아 보는 향인데도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자 소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또 한 번 놀라움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분명히 작은 건물에 지나지 않았는데 밖에서 볼 때와는 달리 길게 통로식으로 연결된 길은 한참을 걸어야 했고, 엄청난 고가인 야명주가 긴 통로에 빼곡하게 박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겉껍질만 화려한, 궁핍한 도화문 살림살이에 조사전은 어떻게 이리도 금칠해 놓을 수 있는지. 소천은 황당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투덜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한참 걷다 보니 드디어 길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한 것도 잠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유일하게 아홉 송이 도화꽃이 새겨진 거대한 석문을 보고 소천은 입을 떡 벌려야 했다.
“이걸 나더러 열라고? 내공이라고는 쥐뿔도 없는데? 하아, 우리 조상이라는 양반들이 하나같이 미쳤구먼. 가만, 그런데 우리 영감은 어떻게 열었대?”
소천이 알기로도 능천화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석문을 열었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천의 눈동자가 일순 반짝이더니 주변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린다. 뭔가 문을 열 수 있는 장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소천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도화문의 상징인 아홉 송이 도화꽃이 그 해답으로 그건 하늘을 아홉 방위로 나눈 구중천(九重天)을 뜻하고 있었다.
가장 높은 하늘이라는 구천을 이용해 일종의 진을 설치해 놓은 것이다. 그걸 알아차리자 소천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어디 보자. 무조건 해 놓지는 않았을 거고, 차례를 정해 놓은 건가? 그렇다면 중앙에 있는 균천, 동방 창천, 서방 호천, 남방 염천, 북방 현천, 동북방 변천…….”
그그그그긍―
“좋았어! 그러면 그렇지. 내가 못하는 게 어딨어. 움하하하하~!”
소천의 손이 차례로 도화꽃을 눌러갔고 그걸 끝마쳤을 때는 거대한 석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모습에 한껏 자찬을 늘어놓으며 웃음을 터트리는 소천이다.
그리고 한 발을 떼자마자 처음 조사전 문을 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향이면서 좀 더 강렬해진 향이 소천의 몸을 감싸듯 모공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헤에~ 역시 기가 막힌 향이야. 그런데 뭐가 있…… 헉! 이, 이게 뭐야?”
소천은 기가 막혔다. 정말 기가 막히다 못해 뒷목 잡고 넘어갈 수도 있다는 걸 소천은 지금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색이 조사전인데. 도화문의 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사전인데. 그런 조사전이 어째서?
코딱지만 한 크기에 위패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있는 거라고는 덜렁 한 통의 서찰이 전부다.
이럴 거면 조사전은 왜 만들어 놓은 건지. 그동안 위패도 없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는 또 어떻게 지냈단 말인가.
통로에는 그 비싼 야명주를 빼곡하게 박아 놨으면서 정작 조사전 안에는 쥐뿔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 말이다.
“하아, 어이가 가출할 지경이네. 그러면 그렇지. 기대한 내가 미친놈이지.”
소천은 맥이 탁 풀렸다. 금은보화는커녕 하다못해 조상님들 위패라도 있으면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능천화가 꼬박꼬박 제사를 지냈다는 게 더 기가 막혔다. 위패는 어따 팔아먹고 아무것도 없는 벽 보고 제사를 지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황당함에 고개를 내젓던 소천이 그제야 서찰을 들어 올리고 못마땅한 기색으로 읽어 내려간다.
소천, 보아라. 네가 이곳에 들었다면 내가 유명을 달리한 것이리라.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을 터인데 막상 아무것도 없어 실망도 많이 했겠지?
“잘 아네. 빌어먹을 영감탱이!”
실망하지 마라. 본론은 지금부터니. 우리 도화문은 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온 가문으로 대대로 직계혈족이 문주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과거 우리 도화문은 무림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도 많이 세웠느니라.
“이 영감이 어디서 개뻥을 치고 그래? 무림공적이라며?!”
그러나 너무 잘난 것도 문제라고 하늘이 시기해 우리 도화문에 천형을 내렸으니…….
“뭐라? 하늘이 시기해? 하! 가만 보니 진작 노망이 났었군. 그래, 아주 잡아먹을 듯이 닦달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 천형이 무엇인고 하니 세상은 모르고 우리 가문만이 타고나는 태음빙한지체(太陰氷瀚肢體)가 그것이다. 너도 극음지체는 들어 봤을 것이다. 태음빙한지체 또한 극음지체와 마찬가지로 음기만을 타고나 두뇌가 명석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이지만, 극음지체와 다른 것은 어떤 무공도 익힐 수가 없다는 점이다.
“역시, 염병!”
또한, 열여덟 해를 넘기지 못하는 병으로 이걸 다스리기 위해서는 오직 사내의 강성한 양기를 흡수하는 방법밖에는 없느니라.
“무슨 놈의 팔자가 이리 더러울꼬. 가만, 영감은 천수를 누렸잖아? 그것만 있어? 징글맞게도 장수했지.”
물론 나는 다행스럽게도 태음빙한지체가 아니다.
“이 영감탱이가 귀신이 들렸나?”
태음빙한지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같은 천형을 타고난 극양지체나 태양신맥, 아니면 음양의 조화를 이룬 태극음양지체를 만나는 방법뿐이다. 우리 선조들 중 이 같은 신체를 타고난 선조가 일곱 분이 계셨고, 태양신맥을 만난 한 분을 제외하고 다른 여섯 분은 임시방편으로 양기를 섭취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으셨다. 그 결과 본의 아니게 마녀나 색마로 오인받아 무림공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너만은 그분들의 고충을 이해해야 한다.
“내 팔자도 똑같으니까?”
그분들이 비록 무림공적으로 몰렸다고 하나 실상은 인간들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이다. 그건 우리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이 방사를 치를수록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상대의 내공까지 늘려 주며 정순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해서 그 상대들은 그분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고, 그게 들통 날 위기에 처하자 끝내 무림공적이라는 오명을 씌워 죽인 것이다.
“개새끼들!”
소천아, 너는 어릴 때부터 영악해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겠지만, 네 관상에 도화살이 끼어 있으니 자나 깨나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염병! 그러니까 뭐야? 나는 평생 그 짓거리를 해야 하는 데다 오만 것들이 다 꼬일 팔자라는 거잖아? 오, 맙소사!”
마지막으로 네가 이곳에 들어올 때 두 번의 향을 맡았을 것이다. 그건 선조들의 몸에서 빼낸 원정(元精) 같은 향으로 일반 사람에게는 흡수되지 않으며 오직 태음빙한지체만을 위한 향이다. 일반 사람들이 그 향을 맡으면 자신도 모르게 양기가 들끓게 되며, 양기가 강한 상대일수록 그 향도 짙어진다. 또한, 도화문의 비전인 도화극락밀전을 닦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뭔 이름이 이따위야?”
도화극락밀전은 총 오 단계로 이 조사전 안 어딘가에 숨어 있는 내실로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럼, 그만 각설하고 너를 믿는다. 너라면 끈질기게 살아남아 도화극락밀전을 대성할 수 있을 것이야.
“뭐야? 내실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줘야지!”
참, 이 서찰은 태우도록 하고 조사전을 나갈 때 간단한 진이 설치돼 있을 것이다. 너라면 충분히 해체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장원을 떠날 때 장원 전체에 펼쳐진 진을 가동시켜야 한다. 혹여라도 우리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또다시 불운이 닥칠지도 모르고 앞으로 네가 배울 도화극락밀전이 그만큼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면, 이제 진짜 간다. 열심히 살아남아라, 손자야.
“이, 이! 뭘 가르쳐 주려면 제대로 가르쳐 주든가! 그놈의 신비한 척하는 병은 곧 죽어도 못 고치는구먼. 아욱! 씨바, 짜증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