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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내 음식을 준비해 오마. 단, 너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너를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혹여 위험할지도 모르니 내가 진을 설치해 놓고 갈 것이다.”
어수룩하게 홀라당 넘어가기는 했지만, 확실히 바보는 아니었다. 사내 나름대로 대비책을 강구한 걸 보니 말이다.
다만 상대가 소천이다 보니 공자 앞에서 문자 자랑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사내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에라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놈아! 꼭 생긴 것같이 소심해서는. 쯧, 그러나 내가 누구냐? 바로 너무 잘나서 고민인 능소천이다! 이 자식아!’
불행히도 맞는 말이었다.
“진이요? 진이 무엇입니까?”
“하하, 무공에 대해 전혀 모르는구나. 진이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너를 보호할 수 있는 일종의 보호막 같은 것이다.”
“아! 대협! 저를 이리도 생각해 주시다니, 감개무량하옵니다.”
“하하하~ 별거 아니다. 아, 그렇지. 거리도 멀고 아마도 늦은 밤에나 돌아오지 싶구나. 내 다녀올 동안 배가 고플 터이니 이거라도 먹고 있어라.”
소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태도에 사내는 소천이 진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진에 대해 모르면 당연히 도망치지 못할 것이고, 더불어 환하게 웃으며 안겨 오니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졌다.
그런 소천에게 품에서 꺼낸 건량과 물을 내밀며 미련이 남는 얼굴로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내 다녀오마.”
“대협! 너무 서두르시다 혹여 상처라도 입으실까 걱정됩니다.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아! 그, 그래. 고맙구나. 내 되도록 정성스럽게 준비해 오마.”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머뭇머뭇 돌아서 나가려는 사내를 다시 불러 세우고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며 사내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는 소천.
그런 소천의 얼굴이 복사꽃이라도 핀 듯 살풋 붉어지고, 사내는 헤벌쭉 풀어진 얼굴로 조금 남아 있었던 불안감까지 멀찌감치 떨쳐 버린다.
마치 연인을 송별(送別)이라도 하는 듯 걱정스럽게 웃으며 손까지 흔드는 소천을 보며 사내는 당연하게도 일말의 의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내가 동굴을 나가고 소천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다가 인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게 되자 완벽하게 일그러졌다.
“씨팍, 기분 더럽네. 이거 주둥이 썩는 거 아니야? 헉! 들을라. 그래서 죽을라.”
* * *
“이 정도면 의심 없이 사라졌겠지? 좋았어. 이제 움직여 볼까나.”
소천은 사내가 혹시라도 의심을 품고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식경을 기다리고야 천천히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동굴 입구를 넘기도 전에 소천은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바로 사내가 펼쳐놓은 진 때문이었다.
“개색! 진짜 진을 쳐 놨네? 흥! 그런다고 내가 못 나갈 줄 알고?!”
내공을 쌓거나 무공만 못 익힐 뿐이지 기문둔갑(奇門遁甲)을 다룬 진식지학(陣式之學)에 한해서는 소천의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천 년간 이어져 내려오며 도화문의 서고에는 수만 권의 책이 소장돼 있었고, 학문, 의서, 진식지학, 하물며 무공서적까지 총망라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게 몇 대에 걸쳐 한 번 태어나는 태음빙한지체의 천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선조들의 피땀 흘린 노력의 결과였다.
실제 태음빙한지체의 두뇌는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어 책의 내용만으로도 무공의 장단점까지 파악하고 더 나아가 마음만 먹는다면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다.
만약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소천의 앞날도 도화문의 미래도 혼란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만큼 소천의 잠재력은 엄청났다.
“어디 보자. 여기가 중궁(中宮)이겠고, 그럼 동쪽이 진방(震方), 태(兌)는 왼쪽, 감(坎)은 앞쪽, 뒤쪽은 이(離)니까. 그렇군. 진방과 이방 사이인 손(巽)이 다르고, 태방하고 감방 사이인 건(乾)을 뒤틀어 놨군. 쳇, 뭐가 이렇게 시시해 빠졌어? 미친놈, 이것도 진이라고 지금쯤 신 났겠군.”
소천이 가소롭다는 듯 투덜거리며 몇 발짝 앞뒤로 움직이고 다시 옆으로 움직여 순식간에 진을 통과해 동굴을 빠져나갔다.
이제 꽁지가 빠져라, 도망만 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막 한 발을 떼려던 소천이 순간 멈칫거리고 씨익 웃으며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돌멩이 몇 개를 들고 와 다시 진 안으로 들어가는 소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흥얼거리며 나온 소천은 발걸음도 가볍게 그 자리를 떠났다.
사내가 쳐놓은 간단한 진에다 몇 가지를 더 섞어 누구든지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어도 나오기는 어려운, 난해 무쌍한 진을 쳐 놓고 말이다.
“나도 참,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만약 능천화가 들었다면 당장에라도 무덤을 뛰쳐나올 극악무도한 말을 태연하게 늘어놓으며 소천은 관도를 따라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누가 쫓아올세라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달리다가 지치면 수풀에 들어가 몸을 숨기기를 반복하는 걸 보니 불안하긴 어지간히 불안한가 보다.
그렇게 약 한 시진 반을 움직였을까. 조금씩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에 소천이 난감한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인가 하나 없이 나무가 빼곡한 산이 전부다.
그렇다고 위험한 밤에 움직일 수도 없고 어찌해야 할지 잠시 고민할 때였다. 무언가 하늘 위로 쏘아 올려져 펑 터지는 소리에 소천은 화들짝 놀라 수풀 속으로 파고들었다.
“저게 뭐지? 헤에~ 예쁘다.”
소천은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해 무심코 벌떡 일어났다. 찰나간 공중에서 환한 빛을 내뿜었다가 사라지는 건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천리화통(千里火筒)이었다.
천리화통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추적할 때나 위치를 알려 줄 때 연락대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런 걸 알 리 없는 소천은 마냥 신기해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고, 그 바람에 누군가 다급하게 튀어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바로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따돌렸다고 생각한 황서랑을 닮은 사내였다. 정말이지 재수도 지지리도 없었다.
“너? 너 어찌……!”
‘으에엑! 왜, 왜 황서랑이 벌써 온 거야?!!’
기겁하기는 소천이나 사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진 안에 갇혀 있어야 할 소천이 버젓이 눈앞에 있는 것인지 사내의 두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순간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그 와중에도 소천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은 이 위기를 모면해야 할 게 아닌가.
“아! 대협! 이제야 만났군요!”
“으윽! 너…… 네가 어찌…….”
소천은 순식간에 놀란 표정을 갈무리하며 사내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와 같은 표정으로.
그런 소천을 얼떨결에 품에 안은 사내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시선 안에 들어온 사내의 모습에 소천은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으엑! 이 상처는 뭐야? 이 미친놈, 누구 하나 죽이고 온 거 아니야?’
사내의 가슴팍을 흥건히 적신 붉은 핏자국 때문이었다.
“맙소사! 이 상처는 무엇입니까? 아니, 빨리 치료부터 해야겠습니다. 악! 대협…… 어찌 이러십니까?”
“너, 도망친 것이냐?”
사내의 당황한 얼굴이 이내 흉악하게 일그러지며 소천의 얇디얇은 손목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잡는다.
이에 무심결에 욕설이 튀어 나갈 뻔한 소천은 간신히 목구멍 안으로 삼키고 지극히 애처로움에 떠는 여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흑, 저를 이리도 못 믿으시다니. 결코, 도망친 게 아닙니다. 제가 도망을 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단지 대협을 찾아 내려오던 길이었습니다.”
“그 말을 믿으란 말이냐?!”
바보가 아닌 이상은 당연히 못 믿을 말이다.
‘아, 씨발 놈, 의심도 더럽게 많네! 그냥 처믿어, 새꺄!’
그렇게 퍼붓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고. 이내 처연한 눈물이 맺힌 채로 서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동굴에 있는데 갑자기 백발노인이 들어와서 무작정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노인이 나타나 싸우는 틈에 대협을 찾아 도망친 것입니다. 흑, 너무 무서웠습니다.”
“백발노인? 가만, 혹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치고 있지 않더냐?”
‘엥? 그런 미친놈이 진짜 있었어?’
“어찌 아십니까? 예, 맞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제길! 그 미친 노인네까지 나선 건가?”
“예?”
“아, 아니다. 그보다 우선 자리를 피해야겠다.”
황당하게도 소천이 다급하게 만들어 낸 변명이 사내가 걱정하던 우환거리와 우연히 맞아떨어져 사내는 곧 의심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런 걸 알 리 없는 소천은 사내를 보며 비록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난생처음으로 지극히 측은한 마음을 품었다.
‘에? 먹힌 거야? 진짜? 야야, 이놈 걱정이네? 그 띨띨한 머리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고? 쯧쯧, 불쌍한 놈.’
걱정도 팔자다. 언제부터 남 걱정하고 살았다고. 비록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내를 보는 소천의 눈에 측은한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소천의 얼굴은 눈에 띄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겨우 도망쳐 왔는데 재수 없게 또 잡히다니.
이번에 끌려가면 백이면 백, 황서랑하고 첫 밤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에 소천은 울컥해지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다스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사내가 부상을 당했다는 점이지만, 자신의 외모를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는 소천은 결코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을 찾아 협박성 서러움을 토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우연이 겹친다고 이번에도 행운은 소천의 손을 들어주려는 것 같이 찾아 왔다.
“저기 있다! 잡아라―!!”
“쳇, 늦었군. 비비야, 잠시만 참아라.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면 내 설명해 주마.”
“예? 아앗!”
갑자기 숲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온 무리에 놀랄 틈도 없이 자신의 가녀린 목을 움켜쥐는 사내의 손길에 소천은 순간 황당함에 기가 막혔다.
난데없이 무슨 상황인지. 찰나간 분위기를 살피던 소천은 그제야 사내가 부상당한 이유와 자신을 인질로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만 왜 자신이 인질이 돼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상황이 참 더럽게 돌아간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비겁한 놈! 인질을 삼다니 무슨 짓이냐?!”
“흥! 비겁하기로 치자면 너희 남궁세가가 더 하다는 걸 모르나 보지? 이유 없이 사람을 핍박한 건 바로 네놈들이지 않으냐?!”
‘남궁세가? 그럼, 저놈들이 육대세가 중 하나라는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지금 펼친 게 그 유명한 검진이군. 하지만 그 검진을 펼치기에는 인원이 적은데?’
소천은 이 급박한 와중에도 어릴 때 서고에서 읽었던 육대세가(六大世家) 중 남궁세가(南宮世家)에 관한 내용을 빠르게 떠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지금 남궁세가 무사들이 아무렇게나 압박하며 다가오는 것 같아도 하나의 검진을 이루고 있었고, 그 검진의 형태는 대창궁무애검진(大蒼穹無涯劍陣)을 닮았다.
단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 검진을 펼치기에는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찰나간 고민하던 소천은 이내 의문이 풀렸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대창궁무애검진을 변형시켜 적은 인원으로 소수의 적을 상대할 수 있게 소규모의 진을 형성한 것이다. 문제는 인질이 된 자신이 과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였다.
“이놈! 네놈이 한 짓을 네놈이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
“하! 분명히 말하지만, 남궁세가는 건드린 적이 없다!”
“웃기지 마라! 네놈이 아니면 그런 천벌 받을 짓을 누가 한단 말이냐?!”
“제길! 말귀 더럽게 못 알아듣네. 이봐! 잘난 남궁세가 양반, 무고한 사람이 다치는 건 볼 수 없겠지? 더러운 소문이라도 나면 골치 아프잖아? 그러니 당장 길을 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서로 자기주장을 펼치느라 이후로도 한참이나 옥신각신하는 양쪽을 보며 소천은 긴장은커녕 맥이 탁 풀렸다.
집 나오고 나서 왜 이렇게 기가 막힐 일이 많이 생기는지. 소천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아 조용하다 못해 절간 같은 집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자신이 인질이 된 상황이라지만 뭔가 상당히 어설픈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유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을 움켜쥐고도 손에 힘을 주지 않는 사내나 상황에 맞지 않게 소천을 힐끔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남궁세가 무사들이나 소천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아, 이러다 날 새겠네. 이 빌어먹을 것들아! 나 다리 아프거든? 대충 좀 구해 봐! 씨불, 앓느니 죽지! 이렇게 되면 내가 나서고 만다. 썅!’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더 이상 멍청하게 있을 수도 없어 소천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다소 큰 신음 소리를 내며 힘없이 비틀거렸다.
그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경기라도 하는 듯 화들짝 놀라는 무리.
“아!”
“왜 그러는 것이냐?!”
“소저!!”
‘이 새끼들이, 소저 아니야! 인마!’
통했다. 그것도 완벽하게. 하긴, 선천요기에다가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보호해 주고 싶은 충동을 팍팍 일게 하는 이가 비틀거리는데 어떤 간 큰 인간이 대담하게 반응하겠는가.
당연히 사내는 경악하며 목을 움켜쥔 손을 풀어 쓰러지는 소천을 받쳐 들었고, 남궁세가 무사들은 안쓰러움, 질투가 한데 뒤섞인 표정으로 일제히 손을 뻗으며 튀어 나갔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사내는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날아드는 날카로운 검기(劍氣)에 어깨가 뚫렸고, 그와 동시에 팔에 힘이 빠져 아차 하는 사이에 품 안에서 소천을 놓친 것이다.
그 와중에도 남궁세가 무사들 중 하나가 쓰러지는 소천을 끌어당겨 천만다행으로 무사히 구출. 눈 한 번 깜빡한 사이에 상황은 역전을 달리고 있었다.
“크윽! 이 비겁한 새끼들…….”
“드디어 네놈을 잡았군. 네놈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렸는지 아느냐?!”
“단주! 더 볼 것도 없습니다. 그냥 쳐 죽이십시오.”
“우, 웃기지 마라! 나는 남궁세가를 건드린 적이 없다!”
“하! 상관없다. 네놈은 이미 무림공적으로 살생부에 오른 놈이니 지금 죽는다고 해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천은 난감한 상황을 피해 계속 혼절한 척 숨소리를 죽이고 귀는 쫑긋 세웠다. 혹여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생길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사내가 소천을 부른 것이다. 그에 따라 일제히 따가운 시선이 소천을 향해 꽂혔다.
“비비…….”
‘저 씨발 놈! 거기서 나를 아는 척하면 안 되지! 아, 저 띨띨한 새끼!’
소천은 속으로 오만 짜증을 다 부리며 마지못해 깨어나는 척 미간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또 한 번 웅성웅성.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소천은 몇 번에 걸쳐 눈을 깜빡이다가 그제야 상황이 이해 간다는 듯 벌떡 일어나며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순진무구하게 보이는지, 찰나간 상황도 잊고 저마다 풀어진 얼굴로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 이게…….”
“아! 소저, 너무 겁먹지 마시오.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도대체 누가 겁을 먹었다는 건지.
‘겁먹기는 지랄! 내가 미쳤냐? 이따위 상황에 겁먹게? 쳇! 어차피 이리된 거 또 내 본성을 드러내는 수밖에.’
정정하자. 본성은 아니고 위선을 드러내는 게 맞는 말이다.
“아앗! 다치셨습니까?!”
“소저! 다가가지 마시오! 저놈은 위험한 놈이요.”
소천의 시선이 무릎이 꿇린 채 목에 몇 개의 검날로 위협당하고 있는 사내에게로 향하고 이내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런 소천을 사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고, 걱정스럽게 다가가려는 소천을 단주라는 사내가 다급하게 막아섰다.
“하지만 저분은 많이 다치신 것 같습니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은데.”
정말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소저가 몰라서 그렇지, 저놈은 채화음적(採花淫賊)으로 통하는 위험한 놈이요. 수많은 여자들을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단죄를 해야 하오.”
소천은 진짜 놀랐다. 물론 놀란 의미는 다른 데 있었다.
‘엥? 그러니까 이놈이 채화음적이라고? 씨바, 진작 알았으면 그냥 이 악물고 한 번 줄 걸 그랬나? 내 음기로 꽁꽁 얼어 뒈지게.’
사내의 정체가 채화음적이라는 말에 소천의 얼굴에 아쉬움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곧 지극히 가련하다는 표정으로 애원하는 소천의 모습에 저마다 난감하면서도 확연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내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뭉클! 하는 감정을 느꼈고, 남궁세가 무사들은 소천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을 느낀 것이다.
“공총자(孔叢子)에 이런 말이 있지요. 고지청언공(古之淸言公), 오기의불오기인(惡其意不惡其人)이라 했듯 본시 죄를 범한 그 마음은 미워해도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했습니다. 하물며 깊은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까? 말 못 하는 짐승도 다치면 가련히 여기는 법이거늘 그는 사람입니다. 부디 상처를 치료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옥음 같은 맑은 목소리는 차마 거부하기에는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렇다고 오랜 추적 끝에 겨우 잡은 사내를 놓칠 수도 없는 노릇.
남궁세가 무사들은 난감함에 일제히 단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걸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에 소천의 시선까지 향하자 단주라는 사내는 눈에 띄게 움찔거리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그건…… 저기…… 후우, 그건 안 됩니다. 저놈이 그동안 한 짓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짓입니다. 저런 놈을 버젓이 살려 보내 줄 수는 없습니다.”
“대협, 제발.”
단주라는 사내가 하는 말에 은근히 수긍하면서도 소천은 애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평소 이기적인 잘난 맛에 사는 소천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간단했다.
이대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사내가 죽는다면 왠지 속 시끄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집 나온 지 이제 겨우 첫날,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죽음을 본다는 건 여간 찝찝한 게 아니다.
다만 그런 소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사내는 소천의 손이 단주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자존심도 세우고 호기 있게 큰소리라도 쳐 보자는 생각이었다.
“비비, 나를 위해 그런 놈한테 애원할 것 없다! 이놈!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당장 죽여라!”
그러면서도 사내는 자신이 소천에게 이렇게까지 쉽게 빠져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건 소천의 모습만을 뚫어지게 지켜보는 남궁세가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외모상으로는 아직은 앳된 모습인데도 왠지 모르게 함부로 할 수 없는 기품이나 묘하게 성숙해 보이는 아름다움은 이들로 하여금 일말의 거부감도 가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자극적인 이 향이라니.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일이지만, 그 모든 건 소천이 타고난 순음지기와 선천요기가 합혀진 선천지기(先天之氣) 때문이라는 걸 이들이 알 리가 없었다.
‘미친놈! 뭐가 너를 위해서냐? 지랄! 꼴에 자존심을 세워 보겠다는 건가? 쳇, 누군 구해 주고 싶어서 그러나. 나중에 죽어서 원귀로 들러붙을까 봐 그러지!’
눈을 형형하게 빛내는 사내의 모습에 소천은 기가 막혔다. 기껏 다른 데 가서 죽든지 말든지 일단은 살려 주려고 하는데 찬물을 끼얹다니.
답답한 마음에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애써 억누르고 다시 말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빠르게 날아온 손길에 소천의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그런 소천을 단주가 다급하게 안아 올렸다. 소천이 애원한다면 또다시 난감해질 건 뻔하고 한발 앞서 단주가 소천의 수혈을 짚은 것이다.
“내려간다! 처리해!”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