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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뭐야? 저 느끼한 눈길은? 야야, 웃지 마! 소름 끼치잖아!’
소천이 여차하면 튈 생각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날 때, 마치 화살이라도 쏜 듯 박히는 따가운 시선에 멈칫하고는 시선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소천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으며 지극히 애처로운 시선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어느새 한 방울의 촉촉한 눈물까지 곁들이고.
전혀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황서랑을 닮은 사내의 시선이 집요하도록 소천의 몸을 훑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소천은 진심으로 소름이 끼쳤다.
“너희 같은 놈들이 함부로 할 소저가 아니다. 당장 용서를 빌고 꺼지지 못하겠느냐?!”
도대체 언제 봤다고?
‘얼씨구? 저 미친놈, 낯짝 하나 안 변하고 개뻥질이네? 나 너 몰라, 이 자식아! 알고 싶지도 않고!’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참아야 했기에 소천은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사내의 시선과 마주했다.
“하! 별 웃기는 놈 다 보겠네?”
“킬킬, 꼴에 어쭙잖은 영웅 행세를 하고 싶은 모양이지?”
“생긴 건 꼭 뭣같이 생긴 놈이!”
상황파악 전혀 안 되는 산적들이 사내의 모습을 보고 키득거리며 저마다 한마디씩 늘어놓는 말에 소천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려다 다행히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저 얼굴로 영웅은 아니지.’
산적들의 조롱에 온통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사내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산적들이 잔뜩 경계 태세를 갖추고 도를 들어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에게서 풍겨 나오는 살기는 일반적인 차원에서 한참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네놈은 누구냐?!”
“감히 이 어르신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 주지!”
원숭이 두목의 긴장한 말에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 사내의 몸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짝―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원숭이 두목은 눈앞에서 별이 번쩍이는 것을 봐야만 했다.
조금 전까지도 일정한 거리 이상은 두고 있었는데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사내의 손이 자신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이, 이 빌어먹을 새끼가!”
“원숭이 놈. 그런 꼴로 용케도 살아 있구나. 큭, 비위도 좋은 놈.”
소천이 보기에는 얼굴 가지고 남 말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았지만, 사내는 그래도 자신이 원숭이 두목보다는 더 괜찮다고 생각했나 보다.
분노에 크게 휘두르는 도를 훌쩍 피해 가소롭다는 듯 중얼거리는 사내의 표정이나 말투가 딱 그랬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숭이 두목도 마찬가지인지 난데없이 뺨을 맞았다는 분노보다는 얼굴에 더 중점을 둔 듯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
“이 미친 쥐새끼가! 남 말 하고 있네! 네가 비위 더 좋아! 새끼야!!”
“이, 이! 죽인다.”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며 죽일 듯이 살기를 흘리는 모습에 소천은 어이가 상실하다 못해 맥이 탁 풀렸다.
아무리 봐도 똑같은 동물 수준을 못 벗어날 것 같은데 그걸 모르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꼴이라니. 한 인간을 두고 두 마리 동물의 싸움이라.
소천은 실소라도 흘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꾹꾹 누르고 천천히 눈치채지 않게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백번 생각해 본 결과 도망만이 상책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 원숭이 새끼 죽인다!”
“누가 할 소리!”
사내가 이를 갈며 하는 말에 원숭이 두목도 만만찮게 살기를 흘리며 사내를 향해 덤벼들었다. 한 쪽에는 섭선이고 한 쪽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식한 도의 맞부딪침이었다.
사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섭선을 가지고도 무식한 도를 막아 내며 다른 한 손으로는 내력을 끌어올려 원숭이 두목을 향해 내쏘았다.
마치 공기가 부딪쳐 찢어지는 것 같이 팡― 소리와 함께 원숭이 두목의 큰 몸뚱이가 쿵쿵거리며 몇 발짝 물러나는 것을 본 소천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조금 더 빠르게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펼치는 게 무공일 것이고, 그런 두 사람의 손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산적들도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지금이 적시였다.
“제법 몸뚱이는 단단하구나.”
“닥쳐!”
몇 수 오가고 나서 조금 놀랐다는 듯 사내의 비꼬는 말에 원숭이 두목은 분을 못 이겨 버럭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사내를 향해 덤벼들었다.
딱히 도법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사내의 말마따나 몸뚱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단단해 휘청이면서도 사내의 공격을 전부 무위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소천은 그들과 제법 거리를 벌릴 수 있었고, 곁눈질로 빠르게 상황을 살피고는 재빨리 관도 옆 수풀에 몸을 숨겼다.
‘살았다! 아니지, 일단은 저 무식한 동물들한테서 완전히 벗어나야지 안심할 수 있지!’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여전히 말다툼까지 해 가며 싸우는 두 사람을 살핀 소천은 최대한 몸을 낮춘 채 소리를 죽이며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 죽어라 달리고 싶었지만, 어차피 무공까지 아는 두 사람을 따돌리지는 못할 것이기에 최대한 조심을 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때 눈치 없이 자신의 모습을 본 산적 하나가 외치는 소리에 다섯 명의 시선이 동시에 소천을 향해 쏟아졌다.
“어! 도망친다!!”
‘씨바! 에라이!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뭐!’
이왕지사 들킨 거 소천은 벌떡 일어나 숨이 턱턱 막힐 때까지 달렸다. 내공이라고는 쥐뿔도 없다 보니 죽어라 뜀박질로 위기를 모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소천의 뒤로 여전히 쾅쾅거리며 싸우는 소리와 뭔가 우루루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차마 무서워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거기 서!!”
“당장 멈추지 못해?!!”
서란다고 설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소천도 멈춰 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멈췄다가 원숭이 아니면 황서랑한테 어떤 봉변을 당할지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에 치를 떨며 죽을힘을 다해 뛰기만 하는 소천의 뒤로 세 명의 산적들이 뒤쫓고 있었지만, 그나마 다행히도 제법 거리를 두고 있어 당장 잡히는 빌어먹을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헉헉…… 헉…… 아이고…… 씨불…… 나 죽는다…….”
바쁜 와중에도 관도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숲길로만 한참을 미친 듯이 달리던 소천이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쓸어내린 것은 더 이상 쫓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한 식경이 지나서였다.
거리를 제법 벌렸다고 해도 언제 또다시 나타날지 모르니 애초에 쫓아올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천의 풀어졌던 기분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소천의 귓가에도 뚜렷하게 들릴 정도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설마, 벌써 쫓아온 거야? 오, 쓰벌, 도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절대 그 다섯 명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소천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수풀이 제법 무성하게 자라 있으니 이렇게 하면 들키지 않을 거란 판단이 들어서였다.
바로 그 순간, 한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천이 황서랑이라 똑 닮았다고 생각한 그 사내였다.
“이런, 구해 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너무 야박하군.”
‘설마 눈치챈 건가?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몰라야 해. 절대로 몰라야 한다고!!’
그렇게 아무리 되새겨 봐도 사내의 말은 마치 소천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듯 명확했다. 그에 소천은 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을 뿐 움직이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찔러 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소천의 바람은 낮게 웃으며 난데없이 몸을 달랑 들어 올리는 사내의 손길에 어김없이 깨지고 말았다.
“큭큭, 정말 맛있겠군.”
“사, 살려 주세요.”
맛있겠다니! 그 말을 듣자마자 갖가지 망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고 소천은 목이 콱 졸려 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소천의 심정 따위는 알 리 없는 사내는 번들거리는 눈을 빛내며 소천을 어깨에 들쳐 메고 빠르게 내달렸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경공까지 펼치면서. 그리고 소천은 또다시 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진짜 너무하십니다! 제가 어디 많은 걸 바랍니까? 그저 첫 상대는 인간하고 하고 싶다는 지극히 작은 소원을 품은 것뿐인데. 그것조차도 허락하시지 않는 겁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

* * *

“쳇, 원숭이 놈 때문에 괜히 시간만 낭비했군.”
근 한 식경을 달려 멈춘 곳은 작은 동굴.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며 투덜거리는 사내의 말에 원숭이 두목이 죽었으리라 생각한 소천은 짧게 명복을 빌었다.
부디 내세(來世)에는 말 못 하는 짐승으로 태어나 달라는 작은 소원과 함께 끝내 막아 주지 못한 원망도 곁들여서.
“흐흐, 아름답구나. 이런 기가 막힌 향이라니, 그동안 취한 것 중에 단연 최상품이다.”
정말 장난 아니게 느끼하다.
‘뭐래? 뭐가 최상품이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
조금 좋게 말해 얍삽한 모사꾼같이 생긴 얼굴 때문에 고개가 절로 돌아가려는 마당에 혀로 입술을 축이며 히죽히죽 웃는 모습을 보니 차마 마주하기가 심히 거북스러웠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된 것인지. 소천은 집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시도 때도 없이 울컥 치솟는 서러움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물론 소천의 처지에서는 첫 상대가 하필이면 인간 같지도 않은 동물에 가까운 놈이라는 게 억울해서지만,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다.
“왜 우는 것이냐? 어허! 울지 마라. 내 너를 죽이려는 게 아니다. 다만 기분 좋게 해 주려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소리.
‘미친놈! 너 같은 놈에게 내 처음을 주기는 죽어도 싫다고.’
사내 딴에는 소천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자 적잖이 당황했다.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아니면 어차피 잡은 먹잇감이라 느긋한 여유라도 부리고 싶은 것인지.
사내는 자신의 목적이라도 잊은 듯 소천의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리며 작게 접은 천을 내밀었다.
지금부터 사내가 원하는 것은 정황상 뻔한 일인데도 무슨 마음에서인지 사내는 쉽사리 덤벼들지는 못했다.
더 정확히는 소천의 성숙하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이나 코끝부터 전신을 자극하는 특이한 향에 마음이 뺏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얼빠진 모습을 놓칠 소천이 아니었다.
“저, 대협.”
“왜, 왜 그러느냐?”
“실은 청이 하나 있습니다.”
소천은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과연 이 상황에서 청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소천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마음이 동하지 않아 잔머리라도 굴려 볼 요량인 것이다.
“청이라, 무엇이냐?”
“실은 제가 얼마 전에 한 분뿐인 할아버지의 상을 당했습니다. 살아생전 몸이 약한 저를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보내 드리고 자손으로서 어찌 예를 취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그런 일이 있었느냐?”
‘있었지. 평생을 산속에서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붙잡아 두고, 오만 것을 다 배우라는 어떤 고집불통 영감탱이가 있었지. 내가 오죽했으면 집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잠 한번 늘어져라, 자 보는 게 소원이었을까. 염병!’
“하면, 청이라는 게…….”
“다름이 아니라, 대협이 허락하신다면 하루만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이 꼭 엿새째인데 칠우제(七虞祭)를 지내는 상주로서 마지막 예는 갖추고 싶어 그러합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눈물이 가득 고인 애처로운 눈으로 살며시 사내의 옷자락을 잡고 애원하는 소천을 보며 사내는 진심으로 난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의 목적은 뻔했고, 동굴에 들어와 약 일각을 참고 보낸 것만으로도 사내의 인내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것저것 잴 것도 없이 무조건 덮치고 볼 터인데 이상하게 소천에게만은 함부로 손을 뻗기가 난처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들어주자니 그것 또한 문제다. 만약 도망이라도 치면 자신만 손해가 아닌가.
“대협, 제 마지막 청이옵니다. 부디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 후에는 대협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끙, 그러나 나는 지금…… 기다려 줄 상황이 아니라서.”
그건 맞는 말이었다. 기다릴 게 따로 있지, 쓸데없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상대가 두 번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이가 아닌가. 실상은 덤벼들어도 벌써 수십 번은 더 덤벼들었어야 정상이다.
“대협, 제발.”
“하지만……문제가.”
소천은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연한지 사내의 마음마저 따끔따끔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사내는 당황한 표정으로 소천을 위로하듯 말했다.
“그 무슨 당치 않는 말이냐……우, 우선은 울음을 그치거라.”
그때 아예 쐐기를 박기를 작정한 듯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을 늘어놓으며 언제 꺼냈는지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자신의 목에 겨누었다.
“흐흑, 정녕 제가 죽기를 바라시는 것입니까?”
“너, 너! 무슨 짓이냐? 당장 내려놓거라!”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다가가려던 사내가 칼끝이 살짝 파고들며 새하얀 피부에 얇은 핏줄기를 만들자 작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멈칫거렸다.
“제길, 알았다! 알았으니 일단 그건 내려놓거라.”
“약속은 천금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제가 도망을 칠 거로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도망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 제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아무 곳도 없는 지금. 대협께서 저를 어여삐 여겨 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제가 바라는 것이옵니다. 또한 무공도 익히지 못한, 약하디약한 제가 설마 대협 같은 분을 따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녕 저를 그리 나쁘게 보시옵니까?”
어쩌면 이렇게 구구절절이 불신으로 가득한 마음까지 동하게 늘어놓을 수 있는지. 사내는 어느 순간 소천의 조곤조곤 풀어 놓는 목소리에 홀라당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자신은 외모 때문에 갖은 멸시를 다 당했고, 특히 여자들에게는 올바른 대우 한 번 받아 보지 못했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반감도 생기는 건 당연지사(當然之事).
그런 자신을 보며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저렇듯 사랑스럽게 올려다보는 소천에 사내는 이미 불신으로 가득했던 벽을 조금씩 허물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천의 말이 지나치게 일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불행히도 그 모든 건 사내의 단순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씨파! 별 미친 쥐새끼 같은 놈을 만나서 별짓을 다 해 보네! 에이 썅!’
이런 소천을 알 리 없는 사내는 이윽고 어려운 결정을 내린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알았다. 그러나 하루 동안 이곳을 나가서는 아니 된다. 그 약속만 지킨다면 내 평생을 너를 위해 해 달라는 건 무엇이든 다 해 줄 것이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끔찍한 소리.
‘평생이라니! 이 십창맞아 뒈질 놈! 너 같으면 황서랑하고 평생을 살 수 있겠냐? 쳇! 생각만 해도 소름이 쫙 돋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표현을 할 수는 없고, 소천은 얼굴 가득 행복이 넘친다는 듯 감격을 마구마구 뿌려 대고 있었으니.
“아! 대협~! 흑, 역시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었습니다. 진정 예를 알고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은 대협이 처음입니다.”
“하하, 그만 울거라. 네가 그리 말해 주니 나도 고맙구나.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는군.”
“도(陶)씨 성에 날 비(飛)자 아름다울 비(斐)자를 해서 도비비라 합니다.”
“아, 비비, 예쁘구나. 참으로 네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미친놈! 그 말은 내가 여자 같다는 거냐? 웃기는 소리! 나는 반드시 능소천으로 당당하게 천형을 벗고 천 년의 역사 도화문의 대를 이을 것이다! 그러자면 너 같은 놈이 아니라 그 세 가지 체질을 찾아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내일이 마지막 날이면 오늘은 어찌 산에 있느냐?”
“실은 제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해 놓은 걸 짐승들이 물고 가는 바람에 다시 준비하러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렇군. 하면 집은 어디냐?”
“여기서 오십 리 길인데 도중에 제가 길을 잃어 산적들을 만나는 바람에…… 흑…….”
잘못하다가는 도화문까지 들통 날지도 몰라 소천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그쳤던 눈물을 다시 터트렸다. 자꾸 캐묻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소천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사내는 소천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나름대로 인심을 쓰는 듯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허어, 고약한 일이군. 그렇다고 여기 있을 수도 없고, 내가 데려가 주마.”
무슨 그런 자발떨다 횡액 맞는 소리를!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대협께 의탁하기로 한 몸, 어찌 그런 수고를 하시게 둘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는 제가 편치 않습니다. 다만…….”
“네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곱구나. 네가 그럴진대 나도 무언가를 해 줘야겠지. 그래,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라.”
소천은 지극히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마치 사내를 위해 주는 것처럼 힘없이 중얼거리며 끝에는 의식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런 소천의 의도대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마주 잡아오는 사내의 느끼한 말에 소천은 속으로 다시 한 번 필히 도망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허, 괜찮대도.”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곳에서라도 제를 올릴 수 있게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주실 수 있으시겠는지요?”
사내는 낭패불감(狼狽不堪)했다. 설마하니 이런 부탁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못 들어준다고 한다면 자신이 뭐가 되겠는가.
그렇다고 들어주자니 도망칠 위험성까지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사내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단번에 얼굴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