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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겠네, 진짜.”
체위는 도합 사십여덟 가지가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가장 흔한 정상위, 후배위를 비롯한 열한 가지를 넘지 않는다.
이같이 체위를 모두 완벽하게 익힌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알고만 있고 굳이 내색하지 않는 게 좋다.
또한, 전희가 중요하듯 단 한 번의 흔한 체위로 방사를 즐기더라도 성적 자극에 얼마만큼의 민감한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상대의 기분도 달라진다.
본시 둔감한 반응보다 애액이 풍부해 뜨겁게 반응할수록 상대는 불타오른다. 그러자면 자세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떨어진 자세가 아니라면 다리는 덩굴에 휘감기듯 상대의 허리에 감고 몸은 유연한 곡선이 지게 휘어지며 열두 호흡마다 괄약근을 조여 줘야 한다.
만약 깊게 파고드는 상대를 만난다면 무릎 위에 마주 앉아 다리로 허리를 휘감아 굳게 껴안아야 하며 두 팔은 상대의 목을 감싸 안아야 열기를 더 확실히 전해 줄 수 있다.
이 자세에서 접구를 통해 구결을 외면 두 사람 다 강렬한 흥분상태에 도취될 수 있다. 또한, 절정은 빨리 식는 것보다 일각에 이르게 하는 것이 좋다.
“나 참, 살아보겠다고 별 거지 같은 꼴을 다 보네.”
석상마다 자세의 장단점과 그에 따라 취해야 할 마음가짐을 비롯한 반응까지 꽤 많은 양의 글이 남겨져 있었지만, 소천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무작정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겼다.
그래도 석상의 자세는 신기했는지 글을 읽어 내릴 때보다 더 뚫어져라, 보기도 하고 때론 묘한 감탄을 내뱉고 때론 입을 틀어막기도 하며 하나하나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마지막 석상 세 개를 남겨 두고 소천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또다시 서서히 벌어지는 입. 한마디로 경악했다. 이건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기가 막혀. 정말로 이게 가능해? 말도 안 돼. 똥구멍 찢어져서 피 볼 일 있어?”
그렇다. 세 개의 석상은 처음엔 세 사람이 함께 방사를 즐기며 앞뒤로 자리를 잡은 형식이고, 두 번째는 역시 세 사람이지만, 아래위로 자리 잡아 한꺼번에 방사를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세 번째를 보는 순간, 소천은 두 번째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지막 거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네 사람이 방사를 즐길 수 있느냐는 뜻이다.
“짐승 새끼도 아니고, 사람이 저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씨바,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지, 이게 멀쩡한 정신으로 가능해?”
비 맞은 중생처럼 투덜거리다가 밑에 글을 읽어 보고는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여러 사람을 상대로 동시에 많은 양기를 취할 수 있다 해도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연방 투덜거리면서도 미련 없이 빠르게 옷을 갖춰 입었다. 어차피 저런 자세를 취할 일을 안 만들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싶은 것이다.
과연 소천의 바람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여기를 나가서 짐을 챙기고 개봉으로 가면 된단 말이지? 좋았어! 드디어 세상으로 나가는 거야! 그래, 까짓것! 이왕지사 세상에 처음 나가는 거 마음껏 휘저어서 내 족적을 확실히 남겨야지!”


二章. 세상 밖으로


“헤에~ 영감탱이가 예쁜 구석도 있었네. 히힛.”
소천은 봇짐 하나만 짊어지고 히죽히죽 웃으며 빠르게 산길을 내려갔다. 집을 떠난 지 채 반각도 되지 않았는데, 도화꽃이 만발한 장원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장원 전체에 펼쳐진 진으로 인해 장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그곳에는 나무들만이 빼곡히 들어차 공기 중에 은은하게 도화향이 떠돌지 않았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했을 것이다.
진으로 시각적인 요소를 바꿨을 뿐 아니라 공격적인 다른 진과는 달리 설사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장원 안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고 자연스럽게 돌아가게 하는 미로진을 펼쳐 놓은 것이다.
소천이 기분이 좋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동안 궁핍한 살림살이라 능천화가 잡아온 사냥감과 약초로 하루 세끼를 해결했고, 그 약초도 대부분 양기를 활성화시키는 것만을 먹었다.
그중에서도 극양의 극독을 품은 독각화룡(毒角火龍)의 내단이나 처음 태음빙한지체를 타고난 선조가 만들어 놓은 양에 속한 진귀한 약초들로 연단한 열화신단(熱火神丹)의 약효는 엄청난 것이다.
소천은 열 개의 열화신단 중 남은 두 개나 흡수했고, 독각화룡 덕분에 어떤 극독도 침범하지 못하는 만독불침이 된 것 하며 실제 소천의 피는 독을 중화시키는 역할까지 한다.
지금은 그 이유를 알지만, 어릴 때는 아무리 귀한 약재라고 해도 질리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대비한 것인지, 능천화는 제법 많은 노잣돈과 패물을 소천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 생각지도 못한 횡재에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절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약 한 시진을 걸었을까, 소천은 다른 곤경에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염병! 여기가 어디야?”
그렇다. 길을 잃은 것이다. 아무리 똑똑한 두뇌를 가졌어도 생전 처음 가 보는 낯선 길까지 알지는 못하는 듯 짜증을 부리며 두리번거리던 소천은 지친 듯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왠지 불길한데. 헉! 혹시, 맹수 같은 거 나타나는 거 아니야?”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두려운 눈으로 울창한 산림을 응시하던 소천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낮이라도 뭔가 으스스한 게 이런 상황에서는 꼭 무슨 일이 터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소천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잔뜩 털이라도 세운 고양이처럼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칫 과민반응처럼 보이겠지만, 소천의 처지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무공은커녕 내공도 쥐뿔도 없는 자신이 맹수를 만난다면 백이면 백, 죽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도 안 통하는 산짐승을 유혹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소천은 기겁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멍하니 있다가 맹수의 한 끼 식사감으로 전락하느니 찾는 데까지는 찾아보자는 생각에서다.
비록 남이야 인정하든 안 하든 자신도 명색이 사내대장부인데 이 정도 고난쯤이야 혼자 헤쳐 나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름대로 씩씩하게 자신을 위안하던 소천은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해야 했다.
“하아…… 하아…… 도대체…… 길이 어딨는 거야?!”
산세가 얼마나 험한지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곳을 걷다 보니 다리가 심하게 당겨 오고 호흡곤란까지 와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어쩌자고 아무 생각 없이 뛰쳐나왔는지. 이제 와 후회한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헤맨 지 이미 한 식경이 지났지만 그래도 힘을 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천의 다리는 휘청휘청 불안하게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한 시진을 넘게 걸었을 때 드디어 기다리던 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안도한 소천은 길옆 바위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넉넉잡아 한 시진 반이면 도착했을 거리를 소천은 여기까지 오는 데만 근 세 시진이 걸린 것이다.
“아이고, 나 죽네.”
저린 다리를 주무르는 소천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난데없이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몸이 비정상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의서에도 나오지 않은 체질을 타고난 거 하며 그 치료방법이 변태의 길이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점점 더 암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타고난 팔자가 아무리 박복하다고 해도 멀쩡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대단히 양심적인 성격도 아니고 이왕지사 태어났으면 한평생 떵떵거리며 사는 게 목표인 이상 곧 고개를 내젓고 불길한 생각은 저만치 떨쳐 버린다.
“쳇, 나 같은 미소년을 먹으면 자기들이 횡재한 거지 뭐.”
그렇다. 변태니 양심이니 해도 그건 잠깐뿐이고 누차 말하지만, 소천은 상당히 이기적이고 뻔뻔한 성격이다.
그리고 영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런 소천이 암울한 생각을 오래할 리도 없다. 그가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였다.
근처 풀숲이 흔들리며 세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며 소천의 앞을 막아섰다.
“우왓! 이게 웬 떡이냐?!”
“헉! 끝내……준다…….”
그럴 줄 알았다. 왜 항상 이 모양인지. 꼭 이런 상황에서는 반갑지 않은 존재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씨바! 뭣 같은 일이!’
자신을 앞을 가로막은 세 사내를 보며 소천은 순간 목구멍까지 차올라오는 욕설을 삼켰다. 어떻게 생전 처음 집 나와 처음 만나는 인간이 왜 하필이면 산적이란 말인가.
재수 없기가 지랄맞은 상황에 소천은 기가 막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소천의 모습을 보고 겁을 먹은 거라 착각한 산적들은 히죽 웃으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봐, 소저. 너무 겁먹지 말라고.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야?”
“그럼, 당연하지! 우리는 이 태산을 수호하는 태호채(太護寨) 어르신들이라고.”
다들 말은 그렇게 한다.
“야야! 나 이런 미인은 처음 봐. 우와! 피부 봐라.”
“냄새도 끝내줘!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헤에~!”
‘놀고 자빠졌네! 미친놈들! 죄다 눈깔이 뼜냐? 내가 어디 봐서 소저야!! 아욱! 씨바, 재수도 더럽게 없어요!’
나름대로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을 늘어놓았지만, 실제 산적들은 지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는 머리털 나고 처음 봤기 때문이다. 하기야 산적질로 표사나 장사치들이나 구경할까, 그 외에는 딱히 만나는 사람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겁먹은 듯 움츠려 파르르 떠는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산적들의 마음과는 달리 소천은 혹여라도 욕설이 튀어 나가 봉변이라도 당할까 봐 필사적으로 입을 꾹 닫고 있는 것뿐이다.
“야, 두목님께 데려가야겠지?”
“그 성질머리에 안 죽으려면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빼돌렸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쳇, 보나 마나 우리한테는 안 돌아올 텐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을 소리란 말인가?
‘산채까지 간다고? 이런 염병! 거기 가면 도망을 못 치잖아!’
소천은 다른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시바삐 세 가지 체질을 찾아도 모자랄 판에 산채까지 끌려간다면 무조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소천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성큼 다가오는 산적들을 보며 다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가진 거 다 드리겠습니다. 보내 주세요, 제발.”
피 같은 돈을 뺏긴다는 생각에 속으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소천은 애처로움을 가득 담아 애원했다.
이 정도면 하다못해 시간은 벌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다만 역효과가 났을 뿐이다.
“모, 목소리가…… 옥구슬이야.”
“제길! 못 참겠다!”
“나도!”
‘이런 씨바! 야, 이 똥물에 튀겨서 구더기로 만들어 버릴 새끼들아! 아무리 내가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도 너희같이 산도적 놈들은 아니거든? 이래 봬도 눈 높아, 이놈들아!’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세 명이 동시에 덤벼드는 통에 얼떨결에 주춤거리며 피한 소천은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힘이 남아돌아서 무식하게 생긴 산적들을 상대로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멍청하게 세 놈한테 동시에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 상황을 모면할 만한 게 없는지 두리번거리던 소천은 곧 흘러나오는 산적의 말에 또 한 번 기가 차는 경험을 해야 했다.
“음, 우리의 금나수(擒拿手)를 피하다니. 한 수 하는 소저였군.”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손만 뻗으면 금나수인가? 소천은 황당함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도대체 뭘 숨기고 뭘 한 수 한다는 말인가? 정확히는 피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고, 숨기고 자시고 할 실력도 없었다.
도화극락밀전이 이 단계로 접어들면서 몸은 한층 더 가벼워졌지만, 내공이 쥐뿔이라도 있어야 뭘 숨기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닌가.
‘무슨 이런 황당한 놈들이 다 있나 그래? 나 참, 어쩌다 삼류 산적들을 만나서 이 고생인지.’
피했다는 사실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좀 전과는 달리 제법 긴장한 티를 내며 무식한 도(刀)까지 들고 다가오는 산적들을 보며 소천은 기가 막히다 못해 헛웃음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다치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반항해 봐야 소용없어. 얌전히 협조하라고.”
협박성 발언을 남기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산적들을 피해 소천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물론 당연하게도 협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 잠깐! 지금 당신들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착각이라니?”
“그러니까 나는 여자가 아닙니다. 남자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잊고 있었던 문제를 드디어 생각해 낸 소천이 다급하게 외쳤다. 남색을 즐기는 놈이 넘쳐 나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이쯤에서 놔줄 거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소천의 바람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엉뚱한 웃음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소천의 발언에 멍청하게 있던 산적들 뒤로 육 척은 넘어 보이는 털북숭이 사내가 나타난 것이다.
“푸하하하하~ 내 생전 그런 귀여운 거짓말은 처음 들어 본다! 큭큭.”
‘이 미친놈은 또 뭐야?! 너 뭐니? 인간이니?’
“두목! 나오셨습니까!!”
“이 새끼들이! 두목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채주라고 불러!”
소천은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산적들이 허리를 꺾으며 하는 말에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어수룩한 세 놈이라면 몰라도 산적 두목까지 있다면 도망치기는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다.
‘이런 염병! 재수도 더럽게 없지. 저 새끼는 산채나 지키지, 뭐 얻어 처먹을 게 있다고 기어 나온 거야?!’
소천이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에 속으로 탄식하고 있을 때 다가온 사내의 털이 숭숭한 솥뚜껑만 한 손이 소천의 얼굴을 들어 올린다.
그러고는 만족한 듯 더할 나위 없이 헤벌쭉 풀어지는 얼굴에 소천은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과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아무리 살기 위해 양기를 취해야 하는 처지라지만, 누런 이빨과 이상하게 삐뚤어진 이목구비만 빼고는 모조리 털로 뒤덮인 원숭이하고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
그것도 처음이 아닌가. 만약 처음을 원숭이에게 뺏긴다면, 두고두고 통탄할 일일 것이다.
‘야야, 정말 직업 하나는 제대로 택했구나. 그 꼴로 산적 두목 외에 뭘 할 수 있을까?’
정말 그랬다.
“어떻습니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요?”
“흠, 그렇군. 그런데 네놈들 설마 내 걸 손댄 건 아니겠지?”
“헉! 아, 아닙니다! 지금 막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래? 큭큭, 이제 나도 진짜 장가갈 수 있겠군.”
소천은 사내의 말에 대경실색(大驚天色)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장가라니!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 미친 원숭이 놈! 내가 너한테 시집갈 거 같아?! 빨리 정신 차려, 이놈아!’
소천은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멍청하게 사내만 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인지.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물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소천의 마음은 아랑곳 없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히죽히죽 웃던 사내는 소천을 달랑 들어 올려 옆구리에 꿰차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끌려가면 백이면 백, 털북숭이 원숭이한테 잡아먹힌다는 생각에 소천은 난생처음으로 신을 찾으며 진심을 다해 빌었다.
‘천지신명이시여! 더러운 팔자를 타고난 것도 서러워 죽고 싶은 마당에 이 무슨 당치않은 재앙입니까? 저한테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제가 빚이라도 졌습니까? 제가 웬만한 놈이면 말을 안 합니다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원숭이라니요! 하다못해 상대가 인간만 돼도 이렇게 서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발, 제가 미운 게 아니라면 제발 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안 그러면 저 막 삐뚤어집니다? 막나갈 거라고요!!’
소천은 열심히 빌었다. 나름대로 조리 있게 진심을 다해서 지금 심정을 들어주십사 하는 마음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그 소원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멈춰라!”

* * *

“멈춰라!”
‘아, 저 한마디가 천상의 소리보다 더 심금을 울리는구나. 어떤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숭이 새끼한테서 구해 주기만 하면 내가 한 번 줄 수도 있어!’
꼼짝없이 잡혀가 졸지에 원숭이한테 시집가나 했던 소천은 만세 삼창이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까지 옆구리에 달랑 끼워져 있는 덕분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짠! 하고 나타나 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웬 놈이냐!”
“보아하니 산적들 같은데 그 소저는 내려놓고 썩 꺼지는 게 좋을 것이다!”
‘한 번 준다는 거 취소다! 저 새끼도 눈깔이 뼜네! 내가 어디 봐서 소저야?!’
소천은 순간 울컥했지만, 자신을 구해 줄 은인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최대한 놈의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숭이의 팔을 쥐어뜯을 기세로 버둥거렸다.
그제야 마지못해 소천을 내려놓고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내려다보는 눈길에 소천은 다시 한 번 움찔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문제가 많은 얼굴이다.
과연 저 은인이 될 사내가 원숭이 두목을 이길 수 있을지, 가늠해 보기 위해 목을 쭈욱 빼고 분위기를 살피던 소천은 순간 눈살을 찌푸리다가 빠르게 표정을 지웠다.
뭔가 사내의 모습이 소천이 생각했던 은인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원숭이를 과연 저 황서랑(黃鼠狼:족제비)이 이길 수 있을까? 여차하면 혼자라도 튀어? 그런데 설마 인간들의 얼굴이 죄다 저런 건 아니겠지? 오, 맙소사! 그 무슨 똥통에 곤두박질치는 끔찍한 소리를!’
차마 입 밖에 꺼내 투덜거리지는 못하고 설마 하면서도 못내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는 듯 소천의 얼굴은 사뭇 굳어져 풀어지지 않았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어떻게 인간이 저렇듯 얍삽한 모사꾼같이 생겼는지.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이건 아니었다.
이에 소천은 한 번 준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때려치울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처음인 이상 입맛은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