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미스터 삵과의 동거 1권



미스터 삵과의 동거 1권(1화)
1. 이건 악몽이야!(1)


- 너도 참 지극 정성이다. 그런다고 네 남친이 그걸 제대로 알아주기나 하냐? 고맙단 말 한 마디 듣지도 못하는 주제에.
“준석 씨가 무뚝뚝해서 그렇지, 다 알아. 그리고 뭐, 알아주기를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좋아서…….”
- 그래, 그래! 알지, 알고말고. 여호랑이 첫사랑한테 푹 빠져서 벌써 7년째 뒷바라지 중인 거, 누가 모르니? 대학 들어가 처음 만난 뒤에 홀랑 반해서 고백하고, 군대 가 있던 내내 주말마다 음식 만들어서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가고, 취직 준비할 때에는 대신 학원비 낸답시고 낮에는 애들 논술 과외 하고,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식당에서 불판 닦고…….
“탁미야, 그만하자. 응?”
나는 계속 이어질 것 같은 탁미의 잔소리를 끊으며 난처해서 웃었다. 그러자 휴대폰 너머에서 탁미가 입을 다물더니 곧바로 한숨을 쉬는 소리가 이어졌다.
- 속도 없는 년.
“내가 뭘…….”
- 헌신하다가 헌신짝 된다는 말도 몰라? 그 인간, 내가 장담하는데 얼마 못 가. 지금까지는 네가 바보처럼 헌신하는 거 받아먹느라고 사귀었다지만, 이제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당당히 취직도 했겠다, 안 그래도 그 인간 부모도 너 만나는 거 반대한다며? 그걸 핑계로라도 헤어지자고 할걸?
“야, 고탁미. 너, 너무 말이 심하잖아.”
나는 울컥해서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탁미가 조금 찔린 듯 말을 멈췄다가 다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내가 좀 심하게 말한 건 인정하는데…… 어쨌든 정신 차리라고. 이 지지배야.
“…….”
탁미의 말을 들으며 언덕을 올라오다 보니, 어느새 준석 씨의 집 앞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낑낑대며 들고 왔던 곰솥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만 끊자, 탁미야. 나, 이제 다 왔어.”
- 어휴, 그래! 끊자, 끊어! 좋아하는 준석 씨네 가서 실컷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라고! 날씨도 좋다야, 아주 딱 좋네. 식모살이하기에 딱 좋아!
탁미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잠시 눈만 깜빡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탁미, 얘, 성질머리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지금까지 통화를 하느라고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서 휴대폰에 둘둘 감아 크로스 가방 안에 넣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탁미의 잔소리를 들었던 탓에 귓속까지 얼얼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뭐라고 불평할 마음은 없었다. 탁미가 나를 걱정해서 하는 잔소리이니 말이다.
‘그래도 준석 씨를 나쁘게 보는 건 싫은데.’
왜 그런지 탁미는 준석 씨를 처음 봤던 대학 시절 때부터 그를 줄곧 싫어했다. 예전에 한 번은 남산 근처에 용한 점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곧바로 그 점집에 가서 나와 준석 씨가 헤어질 수 있게 해 준다는 부적을 받아다가 나 몰래 내 방 베개에 집어넣은 적도 있었다. 다행히 베개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빳빳한 질감이 느껴져서 곧바로 빼 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탁미가 준석 씨를 좋게 볼 수 있게 도와주는 부적 같은 건 없나…….’
나는 다시 두 손으로 곰솥을 들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사골을 잔뜩 끓여 담은 곰솥이라 무게가 꽤 나갔다. 준석 씨는 이런 건 그냥 사 먹으면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정성이 담긴 것과 그렇지 않은 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나는 낑낑대며 곰솥을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준석 씨가 사는 빌라는 4층짜리 빌라인데 꽤 오래된 빌라라서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래서 준석 씨의 집이 있는 4층까지 계단으로 오르내리면 종종 다리가 후들거리고는 했다. 특히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올라갈 때는 더욱 그랬다.
“……힘내자! 준석 씨의 몸보신을 위해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그치며 다시 힘을 내서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 막 들어간 회사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든 것인지 준석 씨는 요즘 들어서 더욱 연락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전화를 안 받는 건 원래도 잘 안 받았으니 그렇다 치고, 문자를 보내면 몇 시간이 지나서라도 답장을 주고는 했었는데 요새는 그것마저 받는 것이 어려웠다.
얼마나 바쁘면 그럴까 싶어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나마 준석 씨의 어머니께서 오늘 준석 씨가 모처럼 쉬니까 집에 가서 밥이라도 좀 챙기라고 연락을 주신 덕분에, 이렇게 준석 씨를 보러 올 수 있게 되었다. 안 그랬으면 연락도 안 되고 얼굴도 못 보고, 계속 그랬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혹시…… 이제 나를 조금은 받아 주시려는 걸까?’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혼자 좋아서 웃었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인 줄 알겠지만, 그래도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준석 씨의 부모님께서는 나를 못마땅해 하셨다.
그건 당연했다. 보육원 출신, 게다가 한 번 입양을 갔다가 파양되어 돌아왔던 고아라면 당연히 부모로서 반대할 만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준석 씨의 부모님에게 단 한 번도 서운한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런 나를 대신해서 탁미는 펄펄 뛰며 난리를 쳤지만.
‘음…… 탁미 어머니도 그러셨고.’
언젠가 겨울에 준석 씨의 어머니께 물벼락을 맞고 비에 젖은 생쥐 꼴로 돌아왔을 때, 마침 김장 김치를 싸 가지고 찾아왔던 탁미와 탁미의 어머니를 집 앞에서 만났었다. 그때 탁미뿐만 아니라, 아니, 탁미보다도 탁미의 어머니가 더욱 무섭게 화를 내셨었다.
‘어떤 우라질 잡년이야? 어? 어떤 잡것이 우리 호랑이를 이 꼬라지로 만든 거야!’
“……하하.”
갑자기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웃음이 나온다. 나는 곰솥을 4층 복도에 내려놓은 뒤,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나보다 더 나를 생각해 주는 탁미와 탁미의 어머니가 계셔서 참 좋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씩씩한 건지도 모르지.
‘그건 씩씩한 게 아니라 미련한 거야! 이 밥통아!’
자동으로 탁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재생되는 것 같다. 이어폰을 너무 오래 끼고 통화했나 봐.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비비고는 다시 곰솥을 들고 준석 씨의 집 현관 앞으로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거운 곰솥을 들고 걸으니까 저절로 뒤뚱거리게 된다. 아, 준석 씨 앞에서는 조심해야지…….
그 순간, 현관문이 열렸다. 어머나, 준석 씨! 내가 좋아서 소리 내어 그를 부르려는 순간, 준석 씨와 다른 누군가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하읏. 준석 씨. 자기, 또 이런다.”
“페니야, 나, 오늘 진짜 너 보내기 싫은데. 응? 어떻게 안 될까?”
“어머, 지금까지 같이 있었으면서. 너무 밝히는 거 아니야?”
까르르 웃으며 준석 씨의 가슴팍을 장난처럼 가볍게 때리는 여자를, 나는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내가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 거지?
쿵.
나도 모르게 곰솥을 들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나 보다. 곰솥이 복도 바닥과 부딪히면서 둔탁한 소음을 냈다. 다행히 옆으로 쓰러진다거나 하지는 않아서 사골 국물이 복도에 쏟아지지는 않았다.
“……여호랑?”
그리고 그 소음에 먼저 시선을 돌려 나를 본 사람은 여자 쪽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굳은 팔을 로봇처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안녕, 페니야.”
이렇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게 맞는 걸까. 갑자기 인사하는 법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눌러 참으며 페니에게 손을 흔들다가, 그제야 나를 돌아본 준석 씨를 쳐다보았다.
준석 씨, 지금 내가 본 게 뭐예요? 그냥 악몽 같은 거죠?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죠?
“……후우. 너, 뭐야?”
“주, 준석 씨?”
“왜 함부로 찾아오는 거야? 어? 너, 이러는 거 사생활 침해야. 알아?”
“……아니, 나는요……. 그러니까…… 그러니까요……. 이거, 사골 국물인데…….”
여덟 시간을 끓였거든요. 가스레인지 옆에서 내내 여덟 시간을 지키고 서서 끓인 거라서요. 그래서 국물이 뽀얗고 맛있게 된 것 같아서 준석 씨 주려고 그대로 가지고 온 건데……. 나는 그 모든 말들을 하나도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저 덜덜 떨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주 구질구질하다, 진짜.”
준석 씨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바닥에 있는 곰솥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준석 씨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었다.
언제 준석 씨의 손바닥이 내 머리로 날아올지 몰랐다. 준석 씨는 화가 나면 종종 손찌검을 하고는 했다. 요즘은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준석 씨에게 맞을 일도 없었지만, 이렇게 막상 준석 씨가 앞에 서니까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이런 걸 지금까지 내버려 뒀으니……. 진짜 많이 봐줬네.”
준석 씨가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툭, 툭, 때렸다. 나는 준석 씨의 손바닥이 머리를 때릴 때마다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균형을 잃고 복도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 무릎이 까졌나 보다. 복도 바닥을 손으로 짚고 일어나려는데 바닥에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코피가 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히 하자.”
눈앞에 준석 씨의 구두가 보였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구두는 내가 취직 선물로 사 주었던 것이다. 좋은 브랜드가 뭔지 알 수 없어서 안 간다고 짜증을 내던 탁미를 간신히 달래서 같이 백화점에 가서 샀던 -무려 12개월 할부로!- 구두였다. 그 구두가 내 손등을 밟았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덜덜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알았냐? 덜떨어진 게 촌닭 같기는 해도 그 맛에 건드려 보기는 했는데, 이렇게 진드기처럼 붙어 있을 줄 알았으면 안 건드렸어.”
“아…….”
아, 아니, 아니야. 아니잖아요. 그런 거 아니잖아요, 준석 씨. 눈물이 뚝, 뚝, 코피와 함께 떨어졌다. 투명한 눈물과 붉은 핏방울이 복도에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기쁘다고 해 줬었다. 용기를 전부 짜내서 했던 고백에, 사실은 나도 좋아했다고 그렇게 말해 줬었다. 그런데, 왜…….
“여호랑.”
또각또각, 높은 하이힐이 다가왔다. 나는 덜덜 떨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과 코피가 뒤범벅이 되었을 얼굴이 보기 흉했나 보다. 페니가 더러운 것을 본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경멸 어린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정말 몰랐던 거야? 나랑 준석 씨, 이런 사이였던 거?”
몰랐으면 너는 정말 등신이고. 페니는 내게 가까이 얼굴을 대고는 속삭이듯 말하더니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홍페니, 나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 처음 사귀었던 친구인 페니를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아니, 애당초 내게 홍페니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었는지도 자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껏 사랑했던 우준석이라는 남자도, 내가 소중하다고 여겼던 홍페니라는 친구도, 전부 허상이었던 것일까.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계속 전화가 울렸다. 그러나 그것이 내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며 걷는 나를 술에 취한 사람 정도로 여겼는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내 곁을 지나쳐 갔다. 아무도 내게 그저 악몽일 뿐이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다.
“……우욱.”
나는 가로수 아래에 쭈그리고 앉았다. 점심을 먹었던 것이 뒤늦게 체하기라도 했는지 속이 뒤집힐 것처럼 울렁거렸다. 눈물이 콧등을 타고 뚝, 떨어졌다. 나는 손등으로 마구 문질러 닦고는 콧물이 나오는 걸 훌쩍였다.
코피가 나왔던 걸 대충 닦기는 했지만, 붉은 얼룩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아,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 손가락질을 했나 보다. 나는 내 얼굴이 마치 삐에로의 것과 흡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눈물방울을 큼직하게 그려 놓은 삐에로.
그러면서도 입은 커다랗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벌려 웃는 삐에로.
“……흑. 흐흑.”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조차 쉬기가 힘들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마구 때렸다.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마 탁미일 것이다. 집에 갔다가 내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고 걱정이 되어서 전화를 한 것일 거다. 탁미는 내가 준석 씨를 보러 갈 때마다 걱정을 하고는 했다.
나는 정말 바보였을까.
나는 계속 울려 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내가 받을 때까지 계속 전화를 걸겠다는 듯 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응.”
- 야, 여호랑! 너, 어디야? 왜 집에 없어? 아직도 그 자식 집에 있는 거야? 지금까지 청소하고 있냐, 너?
아니, 집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어. 열심히 끓였던 사골 국물은 어떻게 됐을까. 곰솥도 사골 끓인다고 어제 급하게 샀던 건데…… 그것도 거기에 두고 왔어. 버렸을까? ……버렸겠지? 나는 탁미의 목소리를 듣다가 엉엉 울었다.
- 호랑아? 야, 너, 울어? 대체 무슨 일이야? 너, 지금 어디야? 응? 왜 그래?
탁미가 미치겠다는 듯 나를 불러 댔다. 나는 끅끅거리고 울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옳았어. 탁미야, 네가 맞췄어.”
- ……뭐?
“나, 헌신짝 됐다? 네 말대로. 나, 차였어. 아니, 처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었나 봐. 준석 씨는…… 그러니까 전부 거짓말……. 페니도…… 페니도 전부 거짓이었고.”
- 페니? 홍페니? 그년 얘기는 또 여기서 왜 나오는데? 응? 야, 여호랑! 내가 지금 갈 테니까 어디에 있는 건지 말 좀 해! 정신 차리고!
탁미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휴대폰 밖으로 선명하게 들리는 탁미의 목소리에 울다가 웃었다. 손등이 아팠다. 휴대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잡고는 아픈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준석 씨에게 구둣발로 밟혔던 손등에 시커먼 멍이 큼직하게 남아 있었다.
‘아주 구질구질하다, 진짜.’
준석 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몰랐으면 너는 정말 등신이고.’
페니의 속삭이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탁미야, 나, ……정말 어떻게 하지?”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탁미에게, 그리고 내 자신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절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