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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삵과의 동거 1권(2화)
1. 이건 악몽이야!(2)
- 정말 혼자 올 수 있겠어?
“당연하지. 그리고 이제 괜찮아. 실컷 울었더니 정신 말짱해졌어.”
- 말짱하기는. 네가 퍽이나 그렇겠다.
탁미가 못마땅한 듯 뭐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휴대폰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욕설인 듯했다. 나는 내 대신 화를 내고 욕을 하는 탁미의 마음에 고마워서 힘없이 웃었다. 그래도 이럴 때 탁미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서 화를 내 주는 사람이 한 사람 정도는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아주 못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해서.
- 택시 타고 와. 괜히 돈 아낀다고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그러지 말고.
“……어.”
- 너, 지금 버스 정류장 가는 거 아니야?
“……어어, 아니야.”
나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가 끊길 시간이 다 되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줄을 서 있었다. 오히려 막차가 사람이 많은 법이다. 나는 탁미에게 거짓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탁미가 내 거짓말을 진짜로 믿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 전화를 끊고 뭐라고 막 하고 있겠지. 돈 아껴서 어디에 쓰려고 하냐, 하고 말이다.
그래도 아까운 데 어떻게 해.
“…….”
그때, 문득 준석 씨의 목소리가 또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아주 구질구질하다, 진짜.’
준석 씨는 내 이런 점들을 구질구질하다고 느꼈던 걸까. 그래서 마음이 떠나 버린 걸까. 모든 게 내 잘못이었을까.
그 순간, 집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빨리 타야 하는데. 막차를 놓치면 안 되는데. 그런데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했다.
“…….”
그 뒤에도 다양한 번호의 버스들이 정류장에 멈췄다가 출발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탔고, 떠나갔다. 어느새 막차가 전부 가 버린 것인지 정류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버스도 오지 않았다.
“…….”
나는 가만히 도로를 응시했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도로는 한적함마저 풍겼다. 아주 가끔 일반 승용차나 화물차가 지나갔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다들 어딘가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 멈출 이유가 없었다.
“……택시, 그래, 택시를 타 보자.”
나는 코를 훌쩍이며 인도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온몸에 오한이 들어서 덜덜 떨려왔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리려는 것 같았다. 탁미가 또 전화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아……. 방전됐네.”
휴대폰을 4년 넘게 쓰다 보니까 배터리를 100퍼센트 충전해 놓아도 금세 닳아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충전하는 걸 깜빡 잊고 그냥 나왔으니 방전된 게 당연했다. 탁미가 난리를 치고 있겠다. 아마 내가 돌아올 때까지 걱정이 되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탁미가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 집 밖에서 덜덜 떠는 것은 면했다는 점일까.
그때 멀리서 ‘빈 차’라고 빨갛게 불이 들어와 있는 택시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택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곧바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택시 미터기가 제일 무서워요!’ 라고 말이다. 나는 계속 휙휙 올라가는 미터기의 숫자를 보면서 기사 아저씨 몰래 한숨을 내쉬고, 또 손톱을 깨물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중간에 내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버스마저 끊긴 마당에 집까지 갈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미터기만 보면서 가는 중이었다.
제발 멈춰라.
잠깐만이라도 고장이 나서 멈춰 주면 안 될까.
나는 터무니없는 바람을 담아서 미터기의 숫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기사 아저씨가 혀를 차는 것이 들렸다.
“하여간 요새 젊은 새끼들 보라니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외제차 끌고 나와서 저 지랄이지.”
“…….”
기사 아저씨는 뭐가 못마땅한지 거친 욕설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나는 미터기를 쳐다보던 시선을 들어 창밖을 보았다.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어떤 자동차 한 대가 보닛이 열린 채 도로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견인차 한 대가 그 앞에 있었는데, 그 자동차를 지금 막 끌고 가려던 것인지 견인차와 자동차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허이고, 저게 대체 얼마짜리 차야. 저거…… 저거 부가티 아니야? 아가씨, 저거 부가티 맞지? 그렇지?”
“예?”
부가티가 뭐지? 무슨 티 어쩌고 하는 걸 보니까 마시는 차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티셔츠 종류인가. 나는 기사 아저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어쨌든 기사 아저씨는 내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혼자 뭐라고 계속 말하면서 감탄했다.
“내 눈으로 부가티를 보다니……. 저거 견인해 가는 놈은 무슨 배짱으로 달려들었나 모르겠네. 살짝 긁히기만 해도……. 어이쿠,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데.”
“…….”
아하, 자동차 이름이 부가티인가 보구나. 나는 기사 아저씨의 말을 듣다가 뒤늦게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벤츠나 BMW는 들어 봤지만, 부가티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별로 인기가 없는 차종인가 보네. 나는 다시 흥미를 잃고는 내 최대 관심사이자 제일 무서운 대상인 미터기를 보았다.
“……어?”
그런데 미터기가 멈춰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 택시가 멈춰 있었다. 아무래도 기사 아저씨가 외제차 운운하면서 욕을 했을 때부터 차를 세워 놓고는 구경하던 중이었나 보다. 나도 참…… 그것도 모르고.
“저기, 기사님. 저, 출발하셔야…….”
“아, 그래! 사진! 기념으로 부가티를 사진 한 장으로라도 남겨야지!”
기사 아저씨는 언제 욕을 했었나 싶게 잔뜩 들뜬 목소리로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더니, 휴대폰을 꺼내서 견인차에 막 끌려가려는 자동차를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수석 창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어이쿠, 깜짝이야.”
기사 아저씨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조수석 쪽의 창문을 내렸다. 낯선 남자의 손이 창틀을 짚었다. 길고 새하얀 손가락이 꽤 인상적인 손이었다.
“OO동까지 갑니까.”
“음…… 거기는 좀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 뒤에 먼저 탄 아가씨를 내려 주려면요.”
“상관없습니다. 그럼 가능합니까.”
“합승이 불법이라 곤란한데…….”
뭐? 뭐라고? 합승? 불법?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갑자기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에 어리둥절해서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그런 나와는 상관없이 조수석 창틀을 짚고 있던 손의 주인이 피식 웃더니 다시 말했다.
“다섯 배.”
“……기본요금의 다섯 배, 말이오?”
“아니요. 추가 요금까지 전부 합해서.”
그리고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수석 쪽에 잠겼던 문이 열렸다.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기사 아저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기사님. 합승은 곤란…….”
“허허, 아가씨, 인색하게 굴지 말고 인심 좀 써요. 여기, 이 총각이 차도 고장 나서 견인되어 갔는데 어떻게 가라고 그러나. 응? 이쪽은 택시도 별로 안 다니는 길인데.”
“……그, 그렇지만.”
나는 뒷좌석의 등받이에 등을 딱 붙인 채 얼어붙었다. 낯선 사람과 합승이라니. 머릿속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탁미가 늘 경고하면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던 합승을 하게 되다니. 나는 택시가 출발하는 것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응?”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너무 무서워서 미쳐 버린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준석 씨의 일 때문에 과부하가 걸렸던 머릿속이 그대로 망가지기라도 한 것인가 싶기도 했고. 그게 아니고서야…….
고양이 귀……?
나는 눈만 깜빡였다. 조수석에서 고양이의 귀를 닮은 뭔가가 움직였다. 마치 내가 속으로 하는 말을 들은 것처럼 말이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나는 멍한 머리로 생각하면서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꼬리?”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나와 버렸다. 하지만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나는 내가 소리를 내어 말을 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조수석의 의자 밖으로 두툼하고 북슬북슬한 털을 지닌 꼬리가 나와 있었다. 그 꼬리는 연한 황색의 털에 짙은 잿빛 고리 무늬가 섞여 있었다.
꼬리는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에서 좌우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듯하더니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빳빳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조금 전에 합승을 한 남자가 몸을 기울여 뒷좌석에 앉은 나를 돌아보았다.
“헉!”
나는 너무 놀라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남자의 머리 위에 달린 귀가 쫑긋거렸다. 고양이의 귀를 닮았지만, 조금 더 끝부분이 둥근 것도 같았다. 남자가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사르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너, 내가 보이는구나?”
“……!”
이, 이게 무슨 말이지? 그럼 귀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하지만 기사 아저씨와 분명히 대화를 나누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합승까지 했는데! 나는 속으로만 애타게 외칠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막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내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는 듯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내 귀와 꼬리가 보인다는 말이야. 설마 나를 귀신으로 착각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멍청해 보이지는 않는데……. 하긴 다른 인간들보다 멍청해 보이기는 하네.”
남자가 입을 벌려 웃자, 입 속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어두운 택시 내부에서도 그의 송곳니가 비정상적으로 새하얗게 보였다. 사람의 치아라고 하기에는 너무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마치 짐승, 그러니까…… 동물농장 같은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맹수의 것처럼…….
“차 세워.”
남자는 나를 뚫어질 듯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도로를 달리던 택시가 갑자기 멈춰 섰다. 나는 기사 아저씨 쪽을 쳐다보았다. 기사 아저씨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냥 정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입고 있던 겉옷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수표로 보이는 것을 두어 장 꺼내 운전석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후우.”
그제야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치 내 자신이 맹수의 앞에 놓인 먹잇감 같았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이대로 묻어 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운전석 쪽으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기, 기사님. 저, 다시 출발하…… 으앗!”
그 순간, 내 옆쪽의 문이 열리더니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대로 내 팔을 붙잡고는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미처 기사 아저씨에게 말도 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끌려 나가고 말았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준석 씨로부터 비롯되었던 악몽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두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더니 그대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좀처럼 제대로 설 수가 없어서 휘청거리자 남자가 그런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남자의 입술이 다가왔다.
“……흐읍!”
먹힌다고 생각했다. 잡아먹히는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남자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내 입을 찢는 대신 남자의 뜨거운 혀가 내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남자가 다시 입술을 떼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 내 아이를 낳아라.”
악몽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