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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삵과의 동거 1권(3화)
2. 구애하는 삵(1)
“……!”
차마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눈앞에 휙, 휙,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나는 그저 눈만 휘둥그레 뜬 채 얼어 있었다.
‘너, 내 아이를 낳아라.’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나를 옆구리에 끼고 날아오르듯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친 바람에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
그 뒤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정신을 차린 뒤에도 여전히 내가 거의 허공 위를 날듯이 지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발아래에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공포, 그 자체였다. 떨어지면 죽는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허리를 감고 있는 남자의 팔을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땅에 발을 디딘 뒤에야 도망이든 뭐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악!”
하지만 아프다. 나뭇잎이 볼을 스치면서 낸 상처 탓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남자가 내가 비명을 지른 것을 알아차렸는지 속도를 늦추더니 천천히 땅에 발을 디뎠다.
“우욱!”
그리고 나는 땅에 발이 닿는 순간, 곧바로 남자를 뿌리치고 전봇대 밑으로 달려갔다. 헛구역질이 계속 나왔다. 머리도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게 아무래도 멀미인 듯싶었다.
“허약하군. 내 아이를 낳기에는 좀 부족해.”
“……대,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헛구역질을 하다 말고 머리 위에서 내리꽂히듯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탓에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 뭔데요. 왜 그렇게 보는 건데요. 나는 잔뜩 겁을 먹은 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게다가 덜렁대기까지……. 내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모자라.”
“그, 그게, 아니, 그러니까 제가 왜…….”
“네가 사는 곳이 여기인가 보지? 동네도 마음에 안 들어. 내 아이가 자라기에는 너무 오염되어 있어.”
남자는 내 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할 말만 계속 이어 나갔다. 나는 남자에게 항의를 하려다가 문득 남자의 말을 다시 되새기고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여기는…….
“……집 앞이야?”
《옹달샘 빌라》라는 저 투박한 궁서체 글씨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다니! 나는 붉은 벽돌집 벽에 빌라 주인이신 옹(邕)달샘 회장님께서 친히 하얀색 페인트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써 놓으셨던 바로 그 《옹달샘 빌라》의 익숙한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어쨌든 집에 도착한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전봇대는 우리 옹달샘 빌라 사람들이 매주 목요일마다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는, 바로 그 소중한 자리로구나. 나는 새삼 전봇대가 반가워서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도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혀를 차고 있는 남자의 존재 덕분에 간신히 그 충동을 누를 수 있었다.
“하여간 들어가서 얘기하지. 자, 안내해.”
“……예?”
“안내하라고.”
“어, 어디로 안내를…….”
나는 남자의 말을 들었으면서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엉덩방아를 찧은 그 자세 그대로 주저앉은 채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다른 건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귀까지 먹어서야. 내 아이의 양육에 문제가 생길 텐데.”
“잠깐, ……잠깐만요!”
나는 그제야 정신을 조금 차리고는 남자의 말 속에서 자꾸만 걸리던 것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왜 자꾸 저한테 아이가 어쩌고, 하면서 아이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당연하죠!”
“……흠. 머리도 나쁘고. 아이가 엄마 머리를 닮으면 곤란하단 말이야.”
“저기요! 대체 아이라니, 그게 무슨…….”
“말했잖아.”
“예?”
“내 아이를 낳으라고.”
헉. 나는 말 그대로 ‘헉’ 하고 입을 벌린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내 귀가 미친 건가?
“그런가 봐. 그래, 미쳤지…….”
준석 씨의 일부터 시작해서 전부 내가 미쳐서 만들어 낸, 그런 망상일 거야. 그래. 그런가 보다. 내가 계속 넋 나간 채 중얼거리고 있는데, 남자가 다시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내 턱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정신 차려. 나는 내 아이의 엄마가 될 여자가 미치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으니까.”
“……어, 으악!”
나는 멍하니 남자의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뒤늦게 내 턱을 감싸고 있는 남자의 손을 알아차리고는 후다닥 그에게서 더 뒤로 물러났다. 옷이 엉망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지금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미친놈이다!’
그것도, 아주 멀쩡하게, 아니, 멀쩡한 걸 넘어서서 심하게 잘생긴 미친놈이 내 눈앞에 있었다. 게다가 이 미친놈은 고양이 귀와 꼬리까지 달고 있었다. 나는 또 눈앞에 보이는 고양이 귀와 꼬리에 홀린 사람처럼 남자의 귀와 꼬리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눈을 굴렸다. 그러자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또 보이는군. 그렇지?”
“……예?”
“내 귀랑 꼬리, 지금도 또 보이는 거지?”
“그거, 진짜예요?”
나는 멍청하게도 남자에게 질문을 했다. 아니, 여기서 그런 질문을 왜 하냐고! 그냥 모르는 척, 보이지 않는 척, 그렇게 해서 남자의 관심을 끊은 뒤에 집에 들어가야지! 어쨌든 남자가 지금 이렇게 내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저 고양이 귀와 꼬리 때문인 것 같은데!
“만져 볼래?”
“……그, 그래도 돼요?”
하지만 저 북슬북슬한 털의 감촉을 느껴 보고 싶어! 쫑긋거리는 저 귀는 또 어떤 느낌일까! 나는 마치 여우에게, 혹은 귀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말이 이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만졌을 것이다.
“응. 내 성감대이기는 하지만, 넌 내 아이를 낳을 거니까 괜찮아.”
“으앗! 아, 안 만져요!”
손끝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꼬리에 막 닿으려던 순간, 내 귓속에 인식된 남자의 말 때문에 나는 황급히 손가락을 오므렸다. 남자의 표정이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진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뭐야? 감히 나를 거부하는 거야? 하여간 너는 정말 보는 눈도 없고…….”
남자가 불쾌하다는 듯 다시 일어서며 혀를 찼다. 나는 주저앉은 채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보여서는 안 될 것들이 여전히 보였다. 쫑긋거리는 귀도 살랑대는 꼬리도 모두 다 보여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악몽이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마치 환상 속의 세계에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어두운 골목, 가로등 불빛, 그리고 고양이 귀와 꼬리를 가지고 있는 남자.
“정체가 대체…… 뭐예요?”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물었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건가? 나는 잠시 주저하며 남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길고 가늘게 뻗은 손가락은 마치 피아니스트의 그것 같았다. 혹은 그림을 그린다거나 글을 써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남자의 손은 따뜻했다. 남자가 손을 잡고는 그다지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았는데 가볍게 나를 일으켰다. 마치 이곳까지 거의 허공을 날듯이 왔던 것처럼, 그와 비슷하게.
* * *
그런데 그건 그렇고,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야! 여호랑! 너, 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는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응? 이 지지배야, 막차 시간도 훨씬 지났는데 오지도 않고. 전화는 또 왜 꺼져 있는데!”
탁미의 존재였다. 나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귀에 내리꽂히는 탁미의 잔소리에 목을 집어넣고 움츠러들었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택시 탔어. 그리고 전화는 배터리가 나가 버려서…….”
“웃기네. 네가 택시를 탔다고? 차라리 나더러 우리 추동숙 여사가 신상 구두를 포기했다는 말을 믿으라고 해라.”
“진짜인데…….”
나는 말끝을 흐리며 대꾸했다. 좀 자신 있게 대답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탁미의 앞에서는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워낙 탁미의 성격이 걸걸한 면이 있기도 하고, 아까 탁미와 통화를 하면서 울었던 것도 생각나서 창피하기도 한 탓이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탁미가 눈을 부릅뜨고 다시 잔소리를 퍼부으려다가 뒤늦게 내 등 너머를 바라보더니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응? 왜 그러지?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입을 벌렸다.
아니, 이 사람이 진짜!
그냥 가라고, 제발 그냥 가시라고, 그렇게 애원하다시피 해서 골목길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했는데, 남자는 어느새 내 등 뒤에 와 있었다. 왜 다시 돌아온 거야? 게다가 언제부터 내 뒤에 있었던 건데? 남자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다시 탁미 쪽을 쳐다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예? 어…… 예에.”
탁미가 괄괄한 성격을 어디에 다 감춰 버리고는 순식간에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대꾸를 하더니 내게 마구 눈짓을 보냈다. 굳이 눈짓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아도 저절로 음성 지원이 되어 귓속에 탁미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가 마구 들어왔다.
누구야?
저 남자, 누구야?
누구인데 이 밤중에 남자를 집에 끌고 와?
이 되바라진 년, 같으니라고……. 오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나는 고개를 마구 흔들고는 아니라고 부정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남자가 나보다 먼저 말을 이었다.
“여호랑 씨……와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않았지만, 그런데요?”
“…….”
남자의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다. 나는 남자의 눈을 마주하다가 저절로 그의 머리 쪽을 바라보았다. 또 나왔어, 저게! 남자의 머리 위에서 쫑긋거리는 고양이 귀를 손가락질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스치며 남자의 뒤쪽에서 북슬북슬한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애써 못 본 척했다.
“열심히 구애 중입니다.”
“구애…… 예에? 뭐라고요?”
“……!”
탁미가 무심코 남자의 말을 따라하다가 경악해서 목소리를 높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나도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나는 탁미를 쳐다보다가 말을 잇지도 못한 채 고개를 마구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