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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삵과의 동거 1권(4화)
2. 구애하는 삵(2)


“일단, 가! 가서 자고 날 밝으면 다시 얘기해.”
“어우, 이 지지배……. 알았어. 우리 추 여사님한테 빨리 이 소식을 알려 줘야지.”
“알리기는 뭘 알려!”
“내 마음이지. 흐흐, 갈게.”
현관문 좀 살짝 열어 둬야 하는 거 아니야? 탁미가 짓궂게 눈웃음을 치며 내 귀에 대고 속삭이더니 깔깔대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탁미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현관문을 닫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다가 순간, 멈칫하고는 도어스토퍼를 내려다보았다. 탁미의 말대로 문을 좀 열어 둬야 할…….
“문 닫고 들어와.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마음은 없으니까.”
“예? ……아, 예에.”
아니, 그럼, 지금 당장이 아니면, 뭘 어떻게 하려고요? 나는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을 목구멍 아래로 꾹꾹 눌러 삼키며 조심스럽게 다시 슬리퍼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하나에 주방 겸 거실이 딸려 있는 집은 남자가 한 사람 들어와 있을 뿐인데도 꽉 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탁미와 탁미의 어머니, 이렇게 두 사람이 와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나저나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내 집에 들어와 있는 거고?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혼란스러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여기가 내 아이의 공간이 될 곳이군.”
“저기요……. 왜 자꾸 아이 얘기를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아까 탁미와 대화를 나눌 때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왜 나와 단둘이 있기만 하면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탁미가 남자에게서 명함을 받고 ‘좋은 곳에 다니시네요!’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걸 보면, 직장도 번듯한 곳에 다니는 모양이고. 그런데 왜 내 앞에서만 미친 사람처럼 이러는 건지…….
“앉아. 우선, 제대로 얘기를 해야겠군.”
“…….”
좋아. 일단 얘기부터 들어보자. 나는 남자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서 무릎을 모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편안한 자세로 앉은 채 나를 응시하다가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보이는 건가?”
“예? ……아, 그 고양이 귀요?”
나는 남자의 머리 위에 또 솟아오른 고양이 귀를 보고 무심코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버럭 화를 냈다.
“고양이 귀라니! 어떻게 감히 이 귀를 보고 고양이 귀라고 할 수 있어!”
“예에? 고, 고양이 귀 맞는데……. 아니, ……닮았는데요.”
아닌가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남자가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대꾸하고는 자신의 뒤쪽에 있던 꼬리를 잡아 앞으로 내보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게다가 귀가 헷갈리더라도 이 꼬리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무지한 인간인 거야?”
“아, 그 꼬리도 조금 통통한 고양이 꼬리 같…….”
“삵이다, 삵!”
“……예?”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나는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잔뜩 자존심이 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탕, 탕, 치며 다시 말했다.
“이 땅의 역사 이래, 줄곧 이어져 내려온 삵 가문의 후예가 바로 나란 말이다!”
“…….”
나는 멀뚱히 남자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콧날과 그 아래로 가지런한 일자 입술이 남자를 더욱 냉정하게 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은 매혹적인 빛을 담고 있어서 웬만한 연예인들보다도 더 아우라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왜 내 가슴은 조금도 두근거리지 않는 걸까.
“그런 나를 감히 고양이 따위에 비교하다니!”
“저기, 삵도 고양이과에 속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인가 보다. 고양이라고 했다고 흥분하는 저 바보 같은 모습 때문에. 나는 남자를 계속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문득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손등에 생긴 시커먼 멍이 기억을 되살렸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말이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 게다가 대학 동창에게도 배신을 함께 당했다. 내가 알던 두 사람이 나를 비웃고 조롱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삵이 물론 고양이과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건 인간들이 정해 놓은 기준일 뿐이야. 그러니까 다시는 나를 고양이에 비교하지 말고…… 우는 건가?”
“…….”
미쳤나 보다. 낯선 남자의 앞에서 눈물을 뚝, 뚝, 떨어뜨리고 있는 꼴이라니. 그러나 나는 눈물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남자가 입을 다물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내 뺨을 양손으로 감싸더니 그대로 고개를 들게 했다. 남자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눈이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 건지 알 수 없지만.”
“…….”
“그렇게 참을 것 없다. 인간은 때때로 실컷 울고 나면 정신을 차리기도 하더군.”
“다, 당신이 뭘 안다고…….”
“알지 못할 건 또 뭘까. 내가 삵 가문의 후예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인간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살아온 지도 삼십 년이야.”
“……?”
“어쨌든 지금 당장 내 아이를 낳기는 무리일 것 같으니 일단 내 소개부터 다시 하지. 인간 세상에 맞추어 인간으로서 살아온 내 소개를.”
“…….”
“나는 강현교라고 한다. 너는…… 아, 그래, 아까 네 친구가 너를 부르는 걸 들으니, 여호랑이라는 이름인가 보군.”
“……강, 현교?”
“그래. 너는 그 호랑이라는 이름이 설마, 타이거(tiger)를 뜻하는 건가?”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갑자기 내 뺨을 감싸고 있는 남자의 -그러니까 강현교라는 이름을 지닌- 손바닥이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아까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을 때도 느꼈지만, 남자의 체온은 나보다 높은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해져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뒤로 뺐다. 그러자 남자가 순순히 손을 내리더니 내가 계속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여우 호(狐), 이리 랑(狼)자를 써서 호랑이에요.”
내가 보육원 앞에 버려졌을 때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것이 바로 내 이름 석 자였다고 들었다. 여호랑. 그 이름이 쓰여 있던 작은 메모지가 내가 지녔던 유일한 물건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나쁘지 않은 이름이군. 여우나 이리나 둘 다 개과에 속하지만 그래도 그 성질이 그리 나쁘지는 않으니.”
“……아, 예.”
이럴 때는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는 고맙단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내게서 고맙단 인사를 받을 마음이 없었는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삵 가문의 남자들은 대대로 자신의 암컷, 그러니까…… 자신과 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찾는 데에 딱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
“그게 뭔데요?”
“바로 자신의 귀와 꼬리를 알아보는가, 하는 기준.”
“……예에?”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올려 남자의 머리 위에서 쫑긋대는 귀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데 시선을 거두는 과정에서 그의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나한테 저게 둘 다 왜 보이는 거냐고!
“그래서 결론은…….”
“……결론은?”
“네가 내 암컷이라는 거야.”
“마, 말도 안 돼요!”
나는 경악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내가 경악한 이유를 다르게 생각했는지,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암컷이라고 해서 불쾌했나? 우리들은 ‘암컷’이라고 부르지만, 인간들이 듣기에는 거북한 것도 같더군. 그래. 아까 말했다시피 반려라고 바꿔서 들어도 돼.”
“그,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는 대를 이을 자식을 오로지 그 반려로부터만 얻을 수 있어.”
“……!”
남자의 말을 듣는 내가 미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석 씨와의 일이 너무 충격이었던 탓에, 지금도 정신을 놓아 버린 채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서 꾸고 있는 꿈이고, 지금 이 상황은.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전부 사실이야.”
“꾸, 꿈일 텐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아. 너 역시 그럴 거다.”
“…….”
“열다섯을 넘으면 보통 자신의 암컷을 찾아내는데 나는 늦었어. 그러니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
“내 아이를 낳아라, 가급적 빨리.”
남자는 나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다시 아이를 낳으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남자를 쳐다보다가 가슴속에서 울컥거리는 뭔가를 느꼈다. 눈물이 나오던 것은 어느새 메말라 버린 상태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지금 이 남자가 말한 것에 비하면 준석 씨와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드니 말이다. 너무나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어서일까. 준석 씨가 내게 했던 잔혹한 말들과 폭력마저도 꿈처럼 낯설게 여겨졌다.
“그런데 너는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맞고 돌아다니는 거지?”
그 순간, 남자가 나를 바라보다가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내가 멈칫하며 뒤로 몸을 빼기도 전에 남자의 손가락이 내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이마에서부터 아래로 더듬어가듯 손가락이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코피가 났었는데……. 대충 닦기는 했지만 분명히 흔적이 남아 있을 얼굴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맞고 돌아다니지 마.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야.”
“……제가 뭘 하든지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우물쭈물하며 작게 웅얼거리자 남자가 다시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하더니 말했다.
“말했잖아.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지? 너는 내 반려라고.”
“하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어요.”
나는 남자에게 벌써 했어야 할 말을 뒤늦게 했다. 남자의 한쪽 눈썹이 비틀려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나는 다시 확인하듯 말했다.
“그건 그쪽…… 그러니까 강현교 씨 사정일 뿐이지 제가 거기에 따라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
남자의 머리 위에서 쫑긋거리던 귀가 갑자기 축 늘어졌다. 마, 맙소사. 귀엽잖아! 나는 내 미친 눈을 저주하며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귀가 귀여운 게 뭐냐고! 나는 시선을 피한 채 남자를 달래기 위해 말을 이었다.
“어떻게 제가 강현교 씨의 그…… 귀랑 꼬리를 보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마 뭔가 잘못된 것일 거예요. 강현교 씨의 암…… 아니, 반려라는 분은 따로 있을 테니까. 용기 잃지 마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면 분명히…….”
“내 반려는 너야, 여호랑.”
남자가 내 턱을 잡았던 손을 내리더니 다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사람이 말을 하면 좀 고민이라도 해 보고 대답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차마 뱉어 내지 못한 말을 눌러 참으며 황망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남자의 입이 보였다.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할 것 같지 않은 입이었다.
“…….”
“…….”
그리고 잠시 남자도, 나도, 둘 다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몇 시나 됐을까. 이러다가 날이 밝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제 남자를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려는 순간, 남자가 일어섰다. 나는 얼떨결에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굉장히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밑에서 앉은 채 올려다본 남자는 키가 정말 컸다.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일단 가도록 하지.”
“……예?”
일단, 이라니요. 저기요, 일단, 말고 그냥 아예 가시면 안 될까요?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 제 인생을 왜 휘저어 놓으려고 하시는 건데요! 나는 간절한 바람을 담은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갔다. 알아들었나? 귀랑 꼬리도 막 튀어나오는 사람이니까 내 속마음 같은 건 쉽게 알아듣는 건지도 몰라! 내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자, 남자가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솔직하지 못하구나, 너는.”
“……예?”
“그렇게 가지 말라고 애원해도 오늘은 가 봐야 돼. 네가 내 반려가 되겠단 의사를 표시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나는 지킬 건 지키는 남자라서.”
“그, 그게 무슨…….”
“늦게 나타난 점을 벌할 수도 있겠지만, 네가 귀여우니 봐주도록 하마.”
“…….”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렸다. 도대체 남자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나와 이 남자는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인데 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을까. 내가 황당해서 입만 벙긋거리는 모습을 다시 피식 웃으며 내려다본 남자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문은 잘 잠그고 자도록 해.”
“…….”
“그럼 또 보자.”
남자가 현관문을 열며 고개를 돌려 싱긋 웃었다. 어떻게 보면 차갑고 이지적으로 보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다정하게 변했다. 나는 그 변화에 적응할 틈도 없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몸을 떨었다.
……지금 이게 대체 뭐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