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편애의 론도 2부 1권


편애의 론도 2부 1권 1화
프롤로그


“스물 넷? 몇 개월 후면 다섯이겠군.”
반듯한 손끝이 스크린에 닿았다. 푸른빛을 띠는 스크린에는 크지 않은 사진과 간단하면서도 무거운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최근 추가된 정보에는 모듈 나인(9)을 차지한 국가 바르세크, 그 나라의 혼원군이었던 크리거하츠의 소속이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리거하츠의 참모총장 아래에 있었다.
빨갛게 표기된 고그(GOG)라는 단어에 그는 흥미를 가졌다.
사진 속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린 채였지만, 눈은 오기로 빛나고 있었다.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에 벽안,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인상적인 외모였다.
체르시엘군 라이폴호 소속. 현재는 참모총장인 테렌스 아델의 부관으로 배속 중.
일순 글을 읽어 내리는 눈이 한차례 가늘어졌다. 하지만 미미한 변화였기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자는 없었다.
이윽고 그가 재킷을 들고 일어섰다.
“재밌겠는데? 이번 회담에는 나도 참가하지. 그렇게 전해 둬.”
“예, 사뮤엘 님.”
짙은 남색의 제복이 바다 물결처럼 펄럭였다. 소매에 팔을 끼워 넣으며 그는 곧 방을 나섰다. 어두운 방 안과는 달리 복도는 눈이 부셨다. 그 빛이 문 안으로 새어 들어온 탓일까. 그의 머리 위로 새하얀 빛이 쏟아지는 듯 보였다.
달칵.
닫혀 버린 방 안에서는 여전히 스크린만 남아 홀로 깜빡였다. 화면에 비춰진 이름은 제법 간단했다.
리오엘 리오.
치지직―
사람의 손이 더는 닿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스크린은 곧 까맣게 변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1. 라이폴호 (1)


“으음…….”
돌연 어깨 위가 묵직해졌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다리 위를 무언가가 짓눌러 왔다. 마치 온몸을 가두어 버릴 듯이 나를 옭아맨다. 뱀이라도 몸에 엉켜 있는 기분이었다. 무겁고 답답했다. 그런 기분이 계속될 즈음, 갑작스레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삐비비비빅!
저도 모르게 화들짝 눈을 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수풀이 아니었고, 몸에 엉겨 붙은 것도 뱀이 아니었다. 마치 가위에라도 눌렸던 것처럼 식은땀이 흘렀다. 원인은 내 옆에 있는 이 때문이었다. 나는 내 몸을 끌어안고 있는 그를 힘겹게 밀어내었다. 그러자 다리며 어깨에 붙어 있던 그가 슬쩍 옆으로 굴러갔다. 무슨 납덩이라도 얹어져 있는 줄 알았다.
뻐근한 눈가를 비비며 알람을 껐다.
하지만 겨우 떼어 낸 것도 잠시, 다시 굴러 온 그의 몸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리를 뻗어 나를 옭아매고, 팔로 내 몸을 감싸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커다란 인형을 끌어안고 자듯이. 갑갑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테렌스.”
흔들흔들 어깨를 흔들어 보았지만 미동도 없다.
“테렌스! 아침입니다!”
다시 한 번 강하게 흔들자 그제야 눈꺼풀이 말려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시각 6시 40분. 틀림없이 6시 반으로 맞춰져 있어야 할 알람은 10분 늦게 맞춰져 있었다. 누구 짓인지는 뻔했다.
나는 눈가를 찡그리는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알람 시간은 대체 왜 바꿔 둔 겁니까.”
지난번에는 7시로 바꿔 두어서 어찌나 놀랐던지. 이번에는 6시 40분이라니 참 끈질기다.
그렇다. 알람 시간이 바뀌어 있는데도 내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머리를 꽉 끌어안더니 뺨을 부비적거렸다. 눈을 떴음에도 여전히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는 사이 시간은 더 흘러갈 텐데.
“그렇게라도 안 하면 네 융통성 없는 성격이 안 고쳐질 것 같잖아.”
“고칠 생각도 없습니다만.”
나는 아직도 꾸무럭거리는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이불이 그의 가슴 아래로 미끄러졌다. 드러난 상체가 눈에 밟혔다. 가슴에서 배로 이어지는 커다란 상처. 몇 바늘이나 꿰맨 것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생사를 오갔을 상처라는 걸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처를 몸에 새기고서도 테렌스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너무도 오래된 것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지난 일을 담아 두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여태껏 저 상처에 대해서 묻지 못했다.
테렌스 또한 묻길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잠든 후, 그가 흘리는 신음성을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걸까. 대체 내가 모르는 테렌스의 과거에는 무엇이 있었던 걸까.
그의 무용담이라면 질릴 정도로 들어왔지만, 단 한 번도 그가 큰 변고를 당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무패를 자랑하는 체르시엘 제1함대. 그가 전하는 것은 하나같이 승전보뿐이었다.
“뭐해? 안 씻어?”
나한텐 일어나라더니, 하며 그가 혀를 찼다.
그제야 내가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부끄러움에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네가? 별일이네.”
등 뒤로 그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애써 모르는 체했다. 아직까지는 그에게 입을 열 때가 아니다. 물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테렌스가 감추고 싶어 한다면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기다려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복도로 나갔을 때에는 예상대로 사람이 꽤나 많았다. 보통 내가 일어나는 시간대였다면, 훨씬 적었을 텐데. 붐비는 식당 문 앞을 보다가 테렌스를 힐끗 노려보았다. 그러자 자신을 죄를 아는 모양인지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쩌실 겁니까. 오늘은 7시 10분부터 업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 그래도 회의는 없잖아.”
말이라도 못하면.
한숨을 푹 내쉬고 있자니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오늘도 테렌스의 주문은 많았다. 시간이 없다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모양인지, 여전히 프런트 앞에서 긴 주문을 읊었다. 언제나 메뉴는 달랐다. 하지만 테렌스와의 오랜 생활로 인해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잼은 땅콩 잼으로.”
아, 역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렌스가 토스트를 자주 먹는 편은 아니지만 먹을 때에는 꼭 빠뜨리지 않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땅콩 잼. 취향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것 외의 다른 잼을 먹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나는 그의 등 뒤를 따라가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가끔은 다른 잼이 드시고 싶진 않으십니까?”
“응? 별로. 난 이게 좋아.”
테렌스의 취향은 일관된 게 없었다. 아니, 취향이 없다고 보는 게 맞다. 물론 검은색은 예외다. 하지만 그 외에 그가 집착하는 것은 없었다. 옷에 대한 관심도, 브랜드에 대한 관심도 없어 보였다. 하물며 음식에 대한 고집을 본 적도 없다. 유일하게 있다면, 이 땅콩 잼뿐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을 이상하다고 여긴 것은 솔직히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테렌스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본인이 좋다고 말하는데 무어라 더 물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자리를 찾으려던 우리를 향해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여 와라, 여! 자리 맡아놨데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제일 먼저 보인 건 그의 손이 아니라 머리카락이었다.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발랄하게 흔들렸다. 거기엔 리건을 비롯한 간부들이 모두 모여 앉아 있었다. 테렌스와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식사는 거의 끝낸 모양인지, 그릇이 대부분 비어 있었다.
“오늘은 쪼매 늦었네. 니 때매 아가 안 좋은 물 들었다 아이가.”
“그게 왜 내 탓이야?”
그럼 누구 탓이냐.
모두가 눈빛으로 그리 물었다. 시선이 따가울 법도 한데 테렌스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맞은편에 앉으며 리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오늘따라 그의 눈 밑이 거멓게 보였다. 혹여 몸이 나빠진 건 아닐까. 아니, 오히려 멀쩡한 것이 더 이상했다. 아무리 이젠 그가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고는 해도, 폭발 속에 몸을 던진 지 몇 개월밖에 흐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알프리드, 괜찮습니까?”
“엉? 뭐가?”
입맛이 없는지 그는 스프를 휘적휘적 저으며 답했다.
역시 몸이 어딘가 안 좋아진 모양이다. 어서 의무실에 가지 않으면…….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옆에 앉아 있던 메티안이 혀를 찼다. 그러더니 제 부하인 리건의 머리를 손으로 꽉꽉 짓눌렀다. 그 행동에는 작게나마 악의가 담겨 있었다.
“신경 쓰지 마, 리오엘. 밤새도록 헛짓하느라 이러는 거니까.”
“……헛짓이라 하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각 음식 코너에 우리의 번호가 떴다. 양도 많고 개수도 많은지라 나는 테렌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가서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런 나를 올려보더니 메티안이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쓸데없는 조립이지 뭐.”
아,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 없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선 리건의 발악 아닌 발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항변에 가까운 소리였지만, 아무도 그 말에 동조해 주진 않았다.
“쓰잘데 없기는! 프라모델이 얼매나 정신적인 고통을 요하는 작업인지 니 아나?!”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해 봐라, 하며 메티안이 핀잔을 주었다. 결국 할 말이 없는 리건이 입을 다물었다. 프라모델은 언제나 리건이 시간이 날 때면 만지고 있는 조립품이었다. 옛 무기 같은 것도 있었고, 로봇도 있었다. 그걸 조립할 때 그가 보이는 기이한 집중력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조립을 하며 밤을 샐 기력이 있는 거라면 이젠 정말 걱정 안 해도 되리라.
쟁반을 들고서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하나둘 슬슬 일어서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이제 곧 업무 시간이니 말이다. 지각을 한 건 우리뿐일 거다.
나는 원망스런 마음에 테렌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뻔뻔하게도 내 앞에 자신의 수저를 내밀었다.
“자, 아 해.”
“제가 먹을 수 있습니다.”
“나도 알아. 내가 먹여 주고 싶어서 그래.”
나는 애가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러니 순순히 입을 열어 줄 수밖에. 내가 입을 열지 않으면 죽어도 손을 거둘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우리를 익숙하게 내려다보며 참모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린 참모가 의자를 밀어 넣으며 싱긋 웃었다.
“그럼 우리는 먼저 갈게, 나비야. 총장님 돌보기 수고해.”
“아, 예. 나중에 뵙겠습니다.”
눈이 마주친 키스 참모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 인사를 받았다.
그의 재킷 한쪽이 힘없이 흔들렸다. 왼쪽 소매는 텅 비어 있었다. 더는 그 자리에 팔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한 팔로 쟁반을 들고 가는 그의 뒷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그런 내 심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테렌스가 말했다.
“저 녀석도 이젠 오른손에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군.”
“예.”
얼마 전까지 그의 식사 시간은 좀 더 길었다. 오른손을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왼손잡이였으니 말이다. 팔을 잃은 이후 줄곧 오른손 핸들링 연습을 해 온 것은 알고 있었다. 의수는 불편하다며 군의관의 끈질긴 제안을 거절한 채. 헌데 벌써 저렇게나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니. 새삼 테렌스 아델의 부하, 1함대의 참모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상기하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잔으로 손을 뻗었다. 손목에 걸린 팔찌가 한차례 흔들렸다. 세 개의 끈을 땋은 모양새의 팔찌였다.
우유를 한 모금 마신 후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식당에 오던 길에 보고를 받았습니다만.”
“무슨?”
바삭― 토스트가 그의 입안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고소한 땅콩 잼의 냄새가 났다.
“그……, 거절했다고 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테렌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딱히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았다. 나는 이번에도 그의 입을 타고 나올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 예상 못 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래? 그럼 또 보내.”
“……예.”
이번에 거절당하면 딱 서른 번째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나 또한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말을 써서 보내야 하는 걸까. 똑같은 내용이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일 텐데. 속으로 한숨을 꾸역꾸역 삼켰다. 하지만 정작 명을 내린 테렌스는 태연해 보였다. 자신의 요청을 거절당한 건데도 그렇다. 천하의 테렌스의 요청을 거절한 ‘그 사람’도 참 대단하다마는.
나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굳이 그분이셔야 합니까? 유능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많습니다만.”
“내가 아는 한 그 녀석이 제일 잘해.”
대답은 너무 간단했다. 간단해서 도리어 할 말이 없었다.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테렌스가 그토록 인정하고 있는 사람.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지금까지의 이미지로는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라는 것밖엔 아는 것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나와 테렌스는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새 함선의 기본적인 디자인은 라엘느와호와 비슷했지만 기묘한 위화감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장소에 있어도 괜히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정이 붙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테렌스는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네가 이름까지 붙였으면서 뭘 그래?”
“……그래도 조금 낯섭니다.”
한 손에 종이컵을 든 채 테렌스는 나를 빤히 내려다 봤다. 그 시선이 불편해져 엘리베이터 문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힐끗 쳐다본 거울에는 귀가 빨개진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라이폴호. 그 이름의 뜻을 괜히 상기하게 되어서였다.
머쓱함에 앞머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는 왜 이렇게 느린 것이며, 테렌스는 또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건지. 시선이 점차 불편해질 즈음 그가 입을 뗐다.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고양이가 꽤 성격이 섬세해졌군.”
느닷없는 말에 잠시 발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곧 그를 다급히 쫓아가며 말을 빠르게 쏟아 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 어렸을 때는 그런 거 신경 안 쓰지 않았어?”
“그러니까 무슨!”
돌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 나 또한 급하게 발을 멈췄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우리 둘 다 총장실 문 앞까지 와 있었다. 그는 인식기에 손을 가져다 대다 말곤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 속에 담긴 열기에 저도 모르게 등골이 흠칫 떨렸다.
“다짜고짜 내게 안겨 들었던 건 어디 사는 누구였지?”
“그, 그건……!”
안겨 든 게 아니라 부딪친 것뿐이다. 설마 정원 뒤쪽에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그 후로는 스스로 테렌스에게 안겼던 적이 많으므로, 나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어릴 적이라고는 하나, 정체도 모르는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마음을 열었다니.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를 따라 총장실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밤 동안 줄곧 비워 두어서 그런지 방 안의 공기는 꽤 시렸다. 나는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난방 켤까요?”
“아니, 됐어. 내버려 둬.”
테렌스는 종이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더니 소파에 털썩 몸을 앉혔다. 그러고는 손을 까딱까딱. 한 팔을 벌리고 웃는 폼이 괜히 음흉해 보였다. 그를 무시한 채 내 책상으로 다가가 컴퓨터를 켰다. 허공 위에 푸른 스크린이 여러 개 떴다. 정중앙의 스크린이 가장 크고 양옆의 것은 반 정도 작은 크기였다. 나는 중앙에 있는 스크린을 손으로 밀어내고, 왼쪽에 있는 스크린을 중앙으로 끌어다 놓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스크린의 크기가 바뀌었다.
그렇게 일을 하기 위해 앉으려는 순간.
“고양아.”
질리지도 않고 불러 댄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는 테렌스를 뚱하게 쳐다보았다. 7시 10분부터 분명히 업무가 있다고 말했거늘 일이라곤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왜 부르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대신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들길 뿐이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 줄 알고. 그리 쏘아붙이려던 순간, 테렌스가 한발 빠르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딱 십 분만, 응? ……아니면 오 분만.”
저렇게 쳐다보면 할 말이 없다.
애원하는 시선에 져 버린 건 결국 나였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 그의 다리 위에 슬쩍 엉덩이를 앉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홱 낚아채 끌어안고는 그대로 소파 위로 드러누웠다.
“아아, 살 것 같다.”
그의 숨이 목 언저리에 닿았다. 미적지근한 공기가 방 안을 흐릿하게 맴돌았다. 최근에는 항상 이랬다. 딱히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평화로운 시간만이 흘렀다. 함선 내에서 하는 것도 평범한 사무 업무. 궤도 이탈의 조짐도 없고 무언가가 일어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평화롭다는 단어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테렌스의 나태함을 나무랄 생각도 그다지 들진 않았다. 나는 그의 품 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러자 어린아이에게 하듯 그의 손이 어깨를 토닥여 왔다. 꼭 이대로 자자는 것처럼 들려와서 괜스레 입을 열었다.
“5분 후에는 업무 하셔야 합니다.”
“알겠다니까 그러네. 아, 고양이 샴푸냄새 나.”
낮게 웃으며 그가 몸을 부비적거려 왔다.
나는 시계를 힐끔 쳐다보곤 몸에서 힘을 뺐다. 자세를 편하게 하고 나니 정말로 잠이 올 것만 같았다. 언뜻 보인 팔찌를 무심코 손끝으로 매만졌다. 세 겹으로 매듭이 지어진 팔찌의 오돌토돌한 느낌이 났다.
몸을 잠시 뒤척였더니 목덜미 쪽에서 무언가가 잘그락거렸다. 목에 줄곧 걸고 있던 펜던트, 아니 메모리 칩의 소리였다.
가만히 팔찌만 매만지고 있자니, 정수리가 따끔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시선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고개를 빼꼼 들어 올렸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얼굴이 조금 퉁퉁 부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은 내 팔찌를 향해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 준 거면서 왜 저리 불만스레 쳐다본단 말인가. 하지만 테렌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 품에 가두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언뜻 머리 위에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고양아, 요즘 뭐 필요한 거 없어?”
“예. 없습니다만.”
그건 뜬금없이 왜 물으시는 거죠.
그리 말할 새도 없었다. 다시 한 번 그의 한숨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답답한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영문을 알 수가 없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 와중에도 테렌스의 뜻 모를 중얼거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좀 필요로 해 봐. 아무거나.”
아무거나 뭐. 대체 뭘 원하는 건가.
나름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정말 갖고 싶은 것도, 부족한 것도 없었다. 애초에 전투 상황은 물론,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물품들이 다 갖춰진 함선 안에서 필요로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무기를 수리할 정비공이 부족하다는 건데, 지금은 무기도 정상적이라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