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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의 론도 2부 1권 2화
1. 라이폴호 (2)
그때였다.
돌연 그가 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테렌스는 나의 왼손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대번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분명히 반지 줬었지?”
반지? 무슨 반지?
나의 의문 어린 얼굴을 알아차렸는지, 그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어째 화가 난 것 같다. 왜지. 뭐 때문에…….
“분명히 줬었어. 어거스트 가면무도회 때.”
정말 기억 안 나? 그의 눈은 그리 묻고 있었다.
어거스트 가면무도회? 눈을 데구르르 굴리던 나는 그제야 그가 말하는 반지를 떠올릴 수가 있었다. 여장을 위해서 그가 내게 끼워 주었던 반지. 그걸 말하는 거다. 그때 분명, 모두의 앞에서 테렌스의 약혼녀라는 거짓말을 했으니 말이다. 헌데 그건 왜.
“예. 빌렸던 것이니 그대로 두고 왔습니다만.”
나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렌스는 아니었나 보다.
“뭐?!”
처음으로 테렌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보았다. 그 얼굴을 본 순간에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큰일 났다. 테렌스가 정말로 화났다. 하지만 어째서인 건가. 그 반지는 애초에 약혼녀로 위장하기 위해 껴야 했던 게 아니었나?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뭐, 이건 내 잘못도 있군.”
“테렌스?”
그는 이마를 짚던 손으로 제 얼굴을 한차례 쓸어내렸다. 어쩐지 그의 눈가에 피곤함이 묻어 있는 듯 보였다. 밤새도록 일을 해도 지치지 않는 사람이 말이다. 혹시 착각인가 싶어 그 얼굴을 살폈지만, 지쳐 보이는 건 여전했다. 테렌스는 정말로 피곤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기함을 느끼기도 잠시, 그가 대뜸 입을 열었다.
“반지 맞추러 가자, 고양아.”
거부권은 없었다. 반드시 가야 한다. 그의 눈이 그리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지라니. 언제? 지금? 왜?
물음표가 파도처럼 머릿속을 때렸지만 물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제가 말해 놓고도 만족스러운지 그는 한결 후련해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의 머릿속에서는 디자인은 어떻고, 가격은 또 어떠하며, 그걸 또 어디에서 살지 모든 것들이 차례차례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저 얼굴에 대고 찬물을 끼얹을 정도로 용기가 있진 않았다.
나는 웅얼거리듯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마지막 남은 반발심이었다.
“반지를 사긴 어디서 산다는 겁니까.”
여긴 우주인데 말이다. 궤도를 갑자기 수정할 수도 없는 일이고.
돌연 테렌스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구 가서 사면 되지.”
그제야 나는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현재 우리의 함대는 지구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반지 하나쯤이야. 나쁜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니. 지금은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 시계를 다시금 쳐다보곤 그의 가슴을 슬쩍 밀어냈다. 갑작스레 밀쳐진 것이 기분 나쁜지 그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떨어지지 않는 팔은 아쉬움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건 다 봐줘도, 이건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5분 지났습니다. 일하시죠.”
“……내게 최대 난관이 있다면 그건 네 성격을 고치는 거야.”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나는 혀를 차는 그를 두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책상으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의자가 끼릭 하며 짧게 울었다.
“안 고치셔도 됩니다.”
난 지금 성격에 딱히 불만이 없으니까.
자동으로 꺼져 버린 스크린을 다시 켰다. 새하얗게 비어 있는 문서창이 저절로 나타났다. 나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가는 테렌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재킷을 벗어 두는 폼을 보아하니 일을 시작할 모양이다. 시키면 참 잘하는데. 그리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톡, 톡.
키보드를 손끝으로 두들겼다. 딱히 뭘 쓰는 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뭐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벌써 스물아홉 번이나 거절당했다. 이쯤 되면 상대방에겐 아예 응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내가 무언가 말을 잘못 썼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똑같은 말을 쓰면 성의 없어 보일 테고.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쓸 말이 생각나지도 않고. 이걸 어쩐다.
“고양아.”
느닷없이 귓가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며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 뒤에 보인 것은 테렌스의 얼굴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붉은 눈동자, 그 속에 가득 비친 나만이 보였다.
밀어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입술이 맞물렸다. 부드럽게 입술을 짓누르고 혀끝이 그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붙잡힌 턱이 뻣뻣했다. 세게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조심스런 손길에 나는 더욱 궁지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자 녹녹한 소리가 났다. 츄읍― 하는 소리에 괜히 온몸이 간질간질해졌다. 점점 숨이 가빠질 무렵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갑자기 무슨…….”
숨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듯 툭툭 두들겨 왔다. 목 언저리가 조금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일부러 그 감각을 감추기 위해 그를 샐쭉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테렌스는 빙긋 웃는 얼굴로 내 앞에 무언가를 놓아 줄 뿐이었다. 어제 내가 그에게 넘겨준 서류 중 하나였다. 그는 종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여기, 숫자 틀렸으니까 확인해.”
그러더니 다시 제자리로 가 버렸다. 마치 목적은 그것뿐이었다는 듯.
“이, 이런 건 그냥 말해도 알아듣습니다.”
“알아. 그런 건 그냥 구실이잖아?”
그제야 알아들었다. 이 서류는 그저 키스할 빌미였다는 것을. 뒷목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 났다. 하여간 기회를 안 놓친다, 저 사람은.
나는 키득거리는 소리로부터 신경을 돌리기 위해, 괜히 키보드만 세게 두들겼다. 낮은 웃음소리가 신경을 은근히 자극해 왔다. 발끝에서부터 간지러움을 태우듯이. 그렇게 심장까지 전이되도록.
숨을 흡 들이쉬고서 엔터를 눌렀다. 하지만 이미 내 얼굴은 귓불까지 빨개진 후였다.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진 탓일까. 나는 빈 문서를 채워 버린 글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글을 보낼 순 없다. 그리 생각하며 삭제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나는 손을 멈추었다.
아니, 잠깐만.
또다시 같은 건으로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지겨우실 거라는 걸 알지만……. (중략)……님의 흔적은 설령 라엘느와호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 뜻을 이어 라이폴호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정말로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두 눈으로 그것을 확인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조금 도전적으로 보이는 문장들이고, 어쩌면 실례되는 말들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테렌스를 다시 한 번 힐끗 돌아보았다. 그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렌스가 인정하고 있는 사람. 테렌스는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은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내 추측대로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라면, 혹시 통하지 않을까?
또 한 번 눈치를 보듯 테렌스를 봤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전송 버튼을 눌렀다. 모 아니면 도다. 이제는 호소할 말도, 회유할 말도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써 보는 수밖에.
그때였다. 돌연 스크린의 오른쪽 구석에서 무언가가 깜빡였다. 회신이 들어온 것이었다. 눌러 보니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보안 회선이었다. 발신인은 리건 알프리드. 그 이름을 보자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하긴, 보내자마자 답장이 올 리가 없지.
20자의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곧바로 목소리가 울렸다. 음성은 일을 하던 테렌스가 돌아볼 정도로 컸다.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으니 말 다 한 거다.
[꼬맹아! 니 지금 뭐 하노?]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나 싶었다. 지금 시간이라면, 모두가 업무를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의 질문이 우습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우습다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의 평소 성정을 생각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업무 중입니다.”
함선 내에서 굳이 보안 회선으로 연결해 온 거라면,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회선 안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퍽!]
정정. 목소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휘둘러 치는 소리였다. 그 후에 이어진 건 익숙한 음성이었다.
[쓸데없이 일일이 보안회선으로 연결하지 말랬잖아.]
[크으으, 아프구로 왜 때리노?! 내 대갈빡이 니 북이가?! 니가 보안으로 해라 했다 아이가!]
[그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하라고 했잖아!]
[그럼 이게 안 중요한 거믄, 중요한 건 또 뭐꼬?]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회선이 아닌, 두 사람의 콩트가 될 것만 같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어, 무슨 일이십니까?”
그제야 저를 방치한 채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메티안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멋쩍은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은근히 말문을 뗐다. 보기 드문 망설임에 가장 먼저 의문이 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리도 뜸을 들이는 걸까.
[일하는 중에 미안해, 리오엘. 조금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부탁? 이건 또 생소한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그들에게 나도 조금은 의지가 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괜히 가슴만 빠르게 뛰었다.
테렌스는 그런 나를 보더니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더니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이쪽 일에는 이미 흥미를 잃은 것만 같았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럼 미안하지만, 잠시 내 집무실로 와 줄래?]
회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 오늘은 진득하게 책상에 붙어 있기가 좀 어려운 것 같다.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말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모니터를 한번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의자를 밀어 넣다 말고 테렌스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회선을 들은 그는 굳이 어디를 가냐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꼭 앞일을 기대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테렌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영문 모를 표정에 불안함이 일어 입을 뗐다.
“저 없다고 노시면 안 됩니다.”
“우리 고양이는 걱정도 많군.”
그럼 걱정 안 하게 해 보든가.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뗐다. 마지막으로 다녀오겠다는 당부 아닌 당부를 한 후에야, 총장실을 나올 수가 있었다. 테렌스라면 저 많은 일을 몇 시간 안에 해치우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그가 빈둥거리는 모습보다는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런 말을 하기엔 좀 부끄럽지만, 테렌스는 일을 할 때가 제일 멋있으니까.
가끔씩 내비치는 그의 진지한 얼굴을 떠올리며 설핏 미소 지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내가 동경하는 모습 그대로, 아니 그보다도 더 아름답게 빛이 나는 사람이다.
한 층을 내려가 오른쪽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참모차장실’이라는 팻말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문을 열기 전,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매만졌다. 상대는 메티안이니 그리 긴장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게 마음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다른 참모들의 집무실에 들어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똑똑똑.
세 번의 노크를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다시 한 번 두드리려는 순간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거칠게 열린 문 앞에는 리건이 서 있었다.
“뭘 또 닌 노크까지 하고 서 있노. 그냥 후딱 들어올 것이지.”
“그거야―”
참모차장님의 집무실이니 당연한 게 아닙니까,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너무 당연한지라, 오히려 말로 내뱉기 민망했다.
나는 대답을 하기보다 메티안의 모습을 찾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테렌스와는 퍽이나 다른 모습이었다. 빠르게 글자를 읽어 내리고, 두 손은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들긴다.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었기에 그의 진지한 표정은 제법 진귀했다. 그 탓에 말없이 그 얼굴만 뚫어지게 한참을 보고 있자 옆에서 지켜보던 리건이 혀를 찼다.
“마, 저노마 얼굴 뚫어지겠네. 그리 신기하나?”
“예. 조금.”
메티안은 일을 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굳게 다물린 입술이 굳건해서 섣불리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흐른다.
그때였다. 그제야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표정이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차갑고 단단했던 껍질이 깨어지듯 그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마치 자연스레 그림이 그려지는 듯하여 신기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내가 알고 있는 메티안 특유의 부들부들한 음성이었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그의 모습은 마치 착각인 것만 같았다.
“왔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너무 집중하고 있기에 분위기를 깨기가 미안했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리건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노마는 집중하면 마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아이가. 별걸 다 닮는다카이.”
누굴 두고 하는 말인지는 뻔했다. 테렌스도 한번 집중을 하면 아무것도 듣지 못하니 말이다. 친구끼리 닮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메티안과 테렌스는 전혀 다른 듯하면서도 닮은 부분이 많았다.
나는 관찰하던 시선을 거두곤 한 발자국 다가갔다.
“부탁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기다렸다는 듯 메티안이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무엇이냐는 듯 보았지만 그는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걸 메이비스에게 전해 줄래? 물론 안은 절대 보지 마.”
도대체 무엇이 들었기에.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지만, 외관은 평범한 흰 봉투였다. 딱히 위험한 게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무게도 가볍고. 느낌상 안에 있는 것도 종이였다. 하지만 참모차장의 명인지라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해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응. 리건이랑 같이 가면 돼.”
그럴 거면 리건에게 시키면 될 텐데, 라는 생각이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지만,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메티안의 웃는 얼굴이 어쩐지 그 이상 묻는 걸 허락지 않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가늘게 접힌 눈초리가 어딘가 무섭다. 단호한 미소에 결국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둘이서 전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잘 다녀오라는 메티안의 인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차장실을 나왔다. 오늘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간편한 차림을 한 채, 리건은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것이 피곤하긴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다. 그러게 제때제때 잤으면 됐을 것을.
“프라모델이라는 건 다 만드신 겁니까?”
“어엉. 밤 새가 죽겠다, 그냥.”
제복 재킷 안으로 보이는 티셔츠에 눈길을 주었다. 노란색이다. 그려진 것은 어울리지 않는 병아리.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셔츠나 넥타이는 어디 갔으며, 재킷은 왜 제대로 여미지 않는 건가. 하지만 나는 몇 달간의 1함대 생활 끝에 깨달음을 얻었기에 아무 말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말해 봤자 몇 번이고 똑같은 일이 되풀이될 뿐이다. 메티안도 내버려 두는 것을 내가 굳이 무어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뒤를 따라오며 리건이 물었다.
“법무감실은 어데 있는지 아나?”
“예. 구조는 대충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로 건조한 함선이라지만 기본적으로 라엘느와호와 구조가 비슷했다. 물론 세세한 부분은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참모실을 찾아 헤맬 정도로 무언가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우리는 익숙하게 법무감실을 찾아갔다. 참모실은 대부분 같은 층에 위치해 있었다. 테렌스가 있는 총장실만이 홀로 상층부에 있고. 내 집무실도 본래는 이곳이어야 했다. 테렌스의 명으로 총장실에서 함께 집무를 보게 되지만 않았어도, 나는 3층에서 출퇴근을 했을 것이다.
차장실을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법무감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팻말부터가 눈에 띄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문패를 보곤 한숨을 집어 삼켰다. 이 방문을 열면, 분명히 그 광경이 눈에 펼쳐질 것이다.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걱정을 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리건이 옆에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징글징글하다, 마.”
문패를 보고 한 말이었다. 테두리에 둘러진 분홍색의 레이스와 글자 주위에 붙어 있는 하트모양 스티커, 그리고 곰돌이 스티커. 법무감실이란 글자만 아니었다면, 이곳을 군대가 아니라 보육원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심호흡 후에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빠르게도 들려왔다.
“들어와.”
명랑한 목소리에 리건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윽고 서로의 시선에서 오케이 사인을 읽어 낸 후에야, 우리는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숨이 막힐 정도의 핑크, 핑크, 핑크, 핑크…….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인형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억눌린 목소리에 애써 힘을 주었다. 질리는 걸 넘어서 정신이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헬린 참모님.”
“응. 기다리고 있었어, 나비야.”
봉투만 건네주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며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컬렉션이라며 내 눈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번에 새로 들여온 아이 중 하나야. 너무 이쁘지 않니?”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갖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어서 빨리 사용해 보고 싶어.”
헬린 참모는 양 볼을 감싸며 말했지만, 우리는 차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고문 기구를 두고 예쁘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그녀밖에 없을 것이다.
당황하는 나를 리건이 콕콕 찔러 댔다. 그러더니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마 저거 몸뚱이를 마 조이는 걸 기다. 가시 달려 있네.”라고.
……정녕 이게 예쁜 건가. 헬린 참모의 취향대로 분홍색의 리본이 매여 있었지만, 내 눈에는 도저히 예쁘게도, 귀엽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것을 사용하며 즐거워할 그녀의 모습에 오한이 끼쳤을 뿐이었다.
나는 다급히 시범을 보이려는 그녀를 말렸다. 애초에 어디에다 시범을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저 시범을 봤다가는 끝이 없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일전에도 그녀에게 한 번 붙잡혔던 적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그녀의 말을 들어 주고 말았던 적이 있다. 결국 스무 개가 넘는 도구에 대한 연설과 자랑을 들은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질린 얼굴을 했다.
“이, 일단 이것 받으십시오.”
예의 흰 봉투를 그녀에게 넘겼다. 헬린은 기구를 밀어 두더니 봉투를 받았다. 그러더니 어째서인지 펼쳐 보지도 않고 그걸 다시 내게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