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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의 론도 2부 1권 3화
1. 라이폴호 (3)
떨떠름한 얼굴로 받아 든 나에게 그녀는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며 헬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새카만 가죽 원피스는 몸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민망함에 그녀의 얼굴만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내 그녀에게서 나온 말은 나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그거 다시 갖고 가.”
“예?”
도저히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게 뭔지 뜯어나 보든가…….
“하지만 참모님께 갖다 드리라고 들었습니다만.”
“응. 알아. 그러니까 다시 가져가.”
대체 왜!
당황하는 나를 내버려 둔 채 헬린은 제 뺨을 톡톡 손끝으로 두들겼다. 입술 끝에 검지를 갖다 대며 붉은 입술을 싱긋 끌어 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자 굵은 웨이브의 금발이 가슴 아래에서 굽이쳤다.
“아! 아니다. 휴에게 가져다줄래?”
이유는 말해 주지 않는다. 그걸로 용건은 끝이라는 듯, 헬린은 우리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나보다 훨씬 키가 큰 탓일까. 힐을 신고 있는데도 그녀의 힘에 떠밀렸다. 그건 리건도 마찬가지였다. 고문 기구를 다루는 만큼 힘이 대단했다.
결국 얼떨결에 문밖에 선 우리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다급히 돌아보았지만, 보인 것은 아름답게 웃는 헬린의 모습과 빠르게 닫혀 버린 문뿐이었다.
쫓겨났다.
그 생각이 머리를 때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 위의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이게 뭐기에 이런단 말인가. 보지도 않는다는 건 이미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뜻인데.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고 있자니 리건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일단 가 보믄 알겠지. 함 가 보자, 후딱.”
“……예.”
석연치 않은 기분에 법무감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문은 굳건하게 닫힌 모습 그대로였다. 결국 나도 그를 따라 걸음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하라면 해야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리건을 따라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금세 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나는 헌병감실로 향하는 와중, 그를 간간이 힐끔거렸다. 엉망이든 어쨌든 제복을 차려입긴 한 터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얼핏 폭발의 흔적이 엿보였다. 얼굴은 본래 자잘한 상처가 많았지만, 거기에 화상자국까지 생겼다. 왼쪽 턱에서 광대뼈를 조금 넘어서까지 이어진 자국이었다. 그리고 눈썹 아래에는 살이 찢어진 흔적이 있었다. 손에도 당연하지만 화상이 남아 있었다. 새하얗게 벗겨진 피부가 눈에 자꾸만 밟혔다.
솔직히, 지금 이렇게 옆에서 함께 걷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힘없이 의무실에 누워 있었던 사람이니 말이다.
돌연 앞만 보고 걷던 리건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화상자국이 선명한 뺨이 씰룩거리는 게 보였다.
“요사이 인간 관찰에 취미라도 붙인 기가? 내 얼굴 고마 뚫어지겠네.”
그제야 너무 쳐다봤다는 자각이 들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이다. 뭐라 하는 기 아니고 걍 함 물어본 기다. 아까도 메티안 얼굴만 봤다 아이가.”
딱히 그의 말대로 인간 관찰이란 취미가 생긴 건 아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니까 봤을 뿐이고, 생소한 모습들이니 더 보게 되는 것뿐이었다.
툭 까놓고 말해서―
“저는 참모님들과 부장님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아, 하긴 글네. 그래도 메티안은 어거스트에서 함 봤다 아이가?”
“그래도 일하시는 모습은 별로…….”
말끝을 흐렸지만, 알아들었는지 리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곧 다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헌병감실 문 앞에 멈춰 서서는 나를 돌아보았다.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서 거칠게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 동생을 대하듯이. 시원스런 미소는 리건의 장난스런 성격과 잘 어울렸다.
길게 자란 분홍색 앞머리 사이로, 가늘게 휜 그의 눈동자가 얼핏 보였다.
“마, 걱정 안 해도 된다. 내 보기보다 튼튼하니까 이젠 개안타.”
그런 거라면 정말 다행이지만.
머릿속에 새겨진 영상은 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미동조차 하지 않던 몸.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는 오로지 뿌옇게 흐려지는 산소 호흡기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가 다시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상처조차 돌보지 않은 채, 한시도 리건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메티안이 있었다.
두 번 다시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누구보다도 밝았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무너져 버리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운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런 순간이 오게 될까 봐.
“여차하면 우리 막내가 구하러 오면 된다 아이가!”
불안해졌던 감정을 감추려 괜히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막내는 누가 막내입니까.”
그야 물론 제일 어리긴 하지만.
그는 받아치는 내 말이 기쁜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역시 이 사람은, 이렇게 웃는 게 가장 잘 어울린다.
“뭐 어떻노. 막내를 막내라고 부르는 긴데.”
그때였다.
우리가 제법 시끄러웠던 모양인지 돌연 문이 열렸다. 스르륵 열린 문 안쪽으로 멀뚱히 서 있는 키스 참모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나를 한 번, 리건을 한 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라는 뜻인 듯했다.
리건은 들어서며 그에게 씩 웃어 보였다.
“쫌 많이 시끄러벗나? 미안타.”
“아닙니다.”
그도 한창 집무 중이었던 모양인지, 책상 위에는 스크린이 켜져 있었다. 중요한 사무도 있었던 건지 만년필이 잉크통에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수련할 때와는 다르게 내려 묶은 머리카락을 보다가, 나는 품을 뒤적였다.
기본적으로 불필요한 행동이 적어서 그런지, 그의 남색 머리카락은 충분히 긴데도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봉투를 건넸다. 이번에도 내 입에선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메이비스 참모님께서 전달해 달라셨습니다, 참모님.”
키스 참모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더니 봉투를 받아 들고 빤히 내려다본다.
벽에 걸린 시계는 벌써 7시 50분이 넘어 있었다. 빨리 돌아가서 일을 해야 했다. 지금 돌아가면 적어도 업무 시간 안에 절반은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은 건 밤에 방에 들고 가서 따로 하면 될 것이고. 철야를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별수 없었다.
나는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머릿속으로 천천히 오늘의 계획을 그려 넣고, 드디어 문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잠깐.”
“마, 꼬맹아! 뭘 그리 서두르노?!”
느닷없이 붙잡혔다. 그것도 두 사람에게.
나는 붙잡힌 오른쪽 팔뚝을 한 번 쳐다보고, 키스 참모에게 잡힌 왼쪽 소매 끝을 한 번 쳐다보았다. 왜 붙잡는 거지?
키스 참모만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전달한 봉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리건이 날 붙잡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돌아가실 겁니까?”
일 하셔야죠, 라며 말을 이었지만 그는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몸을 완전히 돌려 그들과 마주 섰다. 어째, 뭔가가 수상하다. 하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에도 그 흰 봉투는 다시금 내게 들이밀어졌다.
어째서냐는 듯 바라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헬린과 똑같았다.
“가져가도록.”
대체 왜.
이번에야말로 나는 이 수상쩍은 심부름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일이 밀려 있는 상황에서 오는 초조함과 이 의심스러운 심부름에 대한 답답함이 섞인 탓일까. 목소리가 제법 날카롭게 나갔다.
“죄송하지만 봉투 안을 봐도 되겠습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키스 참모는 봉투를 도로 가져가 버렸다. 진짜 수상하다.
나는 리건에게로 고개를 팩 돌렸다. 하지만 그는 교묘했다. 앞머리에 가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할 셈인지, 그저 빙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방법이 없을 줄 아는가.
“그거 아십니까, 알프리드?”
“무, 뭘?”
“알프리드는 무언가를 숨길 때 검지를 떠십니다.”
그는 당황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내려다봤자, 그의 손이 떨리고 있을 리는 없었다. 왜냐면―
“농담입니다.”
거짓말이니까.
그제야 걸려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는 대번 표정을 굳혔다. 허나 그런다 한들 어차피 늦은 일. 나는 이미 그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깨달은 후였다.
헌병참모실 내부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에게 실수가 있다면, 누군가를 속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두 사람이 같이 있다는 점이었다. 리건은 단순하고, 키스 참모는 너무도 정직했다.
나는 키스 참모의 손에 들린 봉투를 낚아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잠깐!”
리건이 소리쳤지만, 봉투는 빠르게 내 손에서 뜯겨져 나갔다. 봉합 부분을 찢어 내고 그 안에 든 것을 살폈다. 곱게 접힌 종이 하나가 있었다. 중요한 서안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미 이 봉투에 대한 신뢰를 접어 버린 후였다. 그래서였을까. 종이를 펼치는 데에도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팔락― 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종이를 훑어 내렸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도 잘 보이도록 펼친 종이를 들이밀었다.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아, 그기, 그기 있다 아이가. 딱히 장난치려고 한 건 아니고!”
“…….”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건가? 아니면, 착한 사람에게만 보인다거나 뭐 그런 건가?
나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종이를 탁탁 두들겼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기껏 없는 시간을 쪼개서 심부름을 해 주었건만, 돌아온 게 이런 거라니.
거친 한숨이 입 밖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목 안에서 칼칼한 느낌이 났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갑작스레 피곤이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아마, 이 기분 이대로 침대에 누우면 이불을 발로 걷어차지 않을까 싶다.
나는 숫자가 바뀐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내 아까운 시간.
종이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러고는 리건에게 넘겼다.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선 그에게서 재빠르게 등을 돌렸다. 흘러간 시간을 아까워하고 있으면, 시간이 더 흘러갈 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일은 담아두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이번에야말로 문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붙잡힌 팔목을 질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무언가 할 게 남아 있는 건가.
하지만 나를 잡은 것이 의외의 인물인지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팔을 잡고 있는 키스 참모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그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우선은 가 보면 안다.”
“어디를…….”
물을 새도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다른 한쪽 팔을 리건이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나를 연행하기라도 하려는 듯, 팔짱을 꼈다. 아니 정말로 연행이었다.
“지금 이 시점부터 꼬맹이의 신병은 마 우리가 맡는다는 기라. 음, 이리 말하는 기 맞는 기가?”
키스 참모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끌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이라는 제지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목적이 있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걷는다.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보폭이 일치한다는 것이 또 신기했다. 오랜 세월 손발을 맞춰 가며 일을 한 결과인 듯했다. 정말 사소한 것까지 대단한 사람들이다.
아니, 이게 아니라…….
“대체 어딜 가시는 겁니까!”
일하러 가겠다고 했는데. 분명히 돌아가겠다고 말했는데!
한번 힘을 주고 버텨 보았지만 소용은 없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키스 참모는 참모들 중에서도 장신에 속했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속절없이 끌려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분하지만.
리건은 나를 돌아보며 시원스레 웃었다. 나쯤은 가뿐하다는 듯 그들의 표정에는 힘겨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그래도 요즘에는 근육이 조금이나마 붙었는데!
“어데 가기는. 헌병참모님이 내린 명령을 마 벌써 잊었뿟나?”
“예?”
명령이라면……. 딱 하나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키스 참모가 날 한 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봉투 다시 가져가라 안 카드나.”
그럼 지금 이걸 돌려주러 가는 거란 말인가. 그것도 셋이서?
리건이라면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해도 이해할 수 있다. 틈만 나면 내게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라는 사람이니까. 제복을 제대로 입는 날이 손에 꼽는 사람이니까! 지금도 병아리 티셔츠 따위를 입고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키스 참모까지 이런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시간을 함부로 쓰는 것을 싫어하고, 계획적이며, 매사에 진중한 모습을 보여 주던 분이거늘. 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내게 이런단 말인가.
하지만 나의 애타는 시선에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묵묵히 나를 포대자루인 양 질질 끌고 갈 뿐이었다.
같은 층에 위치해 있는 차장실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나를 끌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빨리도 그 앞에 도착하였다.
동시에, 쿠당탕탕, 하는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가 차장실 안쪽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화들짝 떨었다. 섬뜩함이 등골을 타고 찌릿하게 흘렀다. 온몸의 세포가 저절로 경직되었다.
나는 기다릴 것 없이 문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리건이 다시 한 번 붙잡았다. 자신의 상사에게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거늘 그는 느긋했다. 오히려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덥수룩한 분홍 머리카락이 더욱 뻗친 모양새가 되었다.
“저것들 아직도 안 끝난 기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그들과 생각을 맞춰 가고, 그들의 생각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겼는데, 오늘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같이 의문투성이였다. 더군다나 또 나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걱정의 기색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 그리 초조해할 거 없데이. 별일 아이다.”
“별일이 아니라니.”
그럼 아까 그 소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때였다. 돌연 리건의 워치가 날카롭게 울었다. 회선이 들어온 소리였다. 음성 회선은 아니었다. 리건은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꺼 버렸으니 말이다. 그는 씨익 웃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자, 그럼 함 들어가 보자!”
이제 와서? 대체 그 회선이 무엇이기에.
그는 인식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잠금이 한차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레이저가 그의 동공을 인식한다. 2중으로 잠긴 문이 몇 차례의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풀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제일 먼저 귓가를 울린 것은 펑! 하고 터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소음처럼 연이어 터졌다. 색색의 종이가 공중에 흩날렸다. 그 오색찬란한 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어서 와, 나비야!”
헬린 참모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내 귓가에 닿진 않았다. 내 눈은 오로지 한곳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소소하게 꾸며진 플래카드가 차장실에 길게 걸려 있었다. 적힌 말은 단 한 줄이었다.
“이게, 이게 대체 다 뭡니까?”
떨떠름해하는 내 어깨를 리건이 떠밀어 본의 아니게 그 안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바닥에는 조금 전에 흩뿌려진 오색 종이가 흩어져 있었다. 색색의 실을 엮어 놓은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그랬다. 그들이 방금 터트린 것은 폭죽이었다.
메티안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리오엘, 여기 오고 얼마나 흘렀는지 혹시 알아?”
하도 바쁜 일상을 보낸 터라 제대로 세어 보진 않았다. 대략―
“칠 개월 정도 흐른 것 같습니다만.”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내 손을 이끌어 방 중앙에 세웠다. 방 안에는 모두가 모여 있었다. 나는 여전히 큰 존재감을 내고 있는 플래카드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괜히 가슴 한편이 뻐근해지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가 심장을 간질여 오듯이 숨이 떨렸다.
“원래는 더 일찍 해 줬어야 했는데, 그동안 너무 정신이 없었잖아.”
눈을 한차례 깜빡였다. 플랜카드는 여전히 눈앞에 있었다.
―어거스트 수석 리오엘 리오, 라이폴호에 온 걸 환영합니다―
글을 다시 읽어 내리는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따끔한 느낌이 났다. 그 통증이 그대로 눈가로 몰릴 것만 같아, 억지로 눈에 힘을 주었다. 라이폴호 아래에는 ‘라엘느와호 X’라며 썼다가 다시 지운 표시가 있었다. 그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게 대체 뭔가.
나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 있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테렌스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처음부터 메티안의 회선에 아무런 관심도 없더라니.
“알고 계셨던 겁니까?”
“반드시 해야겠다고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니까.”
그는 내게 다가와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두어 번 도닥여 온다. 작은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마음속에 쌓여 있던 짜증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다들 군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자유로운 사람들이고, 덕분에 군기라고는 언제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난 역시 이 사람들이 좋다.
“고맙습니다.”
내 인사에 그제야 다들 뿌듯한 얼굴을 한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던 거다. 새하얀 봉투도, 이리저리 날 돌게 한 것도.
“많이 귀찮았지, 나비야?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어. 함대에 처음 오면 참모실을 다 돌아보는 건 관례거든.”
그럼 처음부터 다 돌라고 하지.
그런 내 생각을 대번 알아차린 모양인지, 리건이 어깨동무를 해 왔다. 묵직한 팔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근데 마 식상한 건 재미가 없다 아이가. 그런 상사님들 맴도 모르고, 어? 꼬맹이가 눈치만 억수로 빨라 가지고!”
그러더니 “벌로 이거 하나 묵으라!”라며 내 손에 무언가를 넘겨주었다. 치즈향이 강하게 풍기는 과자였다. 단 것보단 낫겠지, 싶어 입안에 넣었지만 내 생각은 안일했다. 그가 주는 과자가 안 달 리가 없거늘. 혀가 일순 감각을 잃을 정도의 단맛이었다. 여전히 그는 이런 걸 잘도 먹는다. 심지어 한 움큼씩 집어서.
테렌스의 손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왔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가락의 온기가 느껴졌다.
붉은 시선이 닿았다. 보석 같은 눈동자에 담긴 다정함이 가슴을 아프지 않게 간질여 왔다. 하지만 그 속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워서,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시큰한 감정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지만 그것이 눈물이 되지는 않았다.
“다시 한 번, 1함대에 온 걸 환영한다, 고양아.”
“예.”
오히려 환한 웃음이 되어 가슴속에 번졌다. 이제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미소로 그들에게 웃어 줄 수가 있었다.
아, 정말이지―
나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있는 이곳이, 이 함대가 무엇보다도 좋다.
진심으로 라이폴호에 들어오게 되어 다행이다. 줄곧 이렇게 다 같이 함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오늘 단 하루만 그 바람을 가슴속에 다시 한 번 새겨 본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