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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의 론도 2부 1권 4화
2. 붉은 넝쿨 (1)
지구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들은 건 다음 날, 막 수련을 끝마쳤을 때였다. 맞대고 있던 검을 테렌스가 먼저 물렸다. 무겁게 나를 짓누르던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테렌스의 검을 받아 냈던 단도가 몸을 떨며 울었다. 어깨뼈에서 뻐근한 느낌이 났다.
그는 미련도 없이 자신의 검을 갈무리해 버렸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아쉬운 느낌이 나서 괜스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검날의 중앙에 박힌 돌은 빛을 잃은 까만색이었다. 공명을 하던 갤리스는 이미 그 의지를 꺼트린 후였다. 보고로 인해 집중을 잃은 순간, 바로 이렇게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단도를 허리춤으로 다시 집어넣어 버렸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어 봤자 대련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보고를 알리는 워치는 계속해서 우리 둘의 손목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워치를 한 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다음은 나중에 해야겠군. 데이트 하러 가야지?”
쓸데없는 소릴 하는 그의 얼굴을 게슴츠레 올려다보았다. 가자미눈이 된 나를 보면서도 그는 빙글빙글 웃었다.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인가.
“회담하러 가는 겁니다.”
“반지도 살 거잖아?”
그것 때문에 기분이 좋은 거였군.
연무장 밖으로 나가는 그의 등을 빠르게 쫓았다. 입이 아주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렇게도 좋을까.
손가락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끼워지지 않은 손가락에는 작은 상처 자국 외에는 특별한 건 없었다. 이 손에 무언가가 끼워진다는 건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상상을 하기보다는, 어거스트에서 그가 끼워 주었던 반지를 대신 떠올려 보았다. 작은 다이아가 박혀 있었던 가느다란 반지. 그걸 손에 끼면, 그와 나 사이에 무언가가 바뀌는 걸까. 더 특별한 관계가 되기라도 하는 걸까.
잘은 알 수 없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반지가 끼워졌던 내 손을 떠올리니 오히려 가슴이 더 빠르게 뛰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 나와 같은 반지가 끼워지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고양아? 왜 그래, 얼굴이 빨간데?”
저도 모르게 감춰 버리듯 손을 홱 내렸다. 딱히 감출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그에게 나의 빈손을 보이는 것이 이상하게도 민망했다. 상상을 한 것이 들키기라도 할 것처럼.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랬다. 반지를 낀다는 것.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그가 나의 것이라는 걸, 그 어느 것보다도 확실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증거였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뗐다. 괜히 머쓱함에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어울리는 걸로 하죠.”
말하면서도 생각했다.
테렌스에게 수수한 건 어울리지 않을 텐데. 그럼 엄청 고가의 반지를 사게 되는 건 아닐까.
말을 정정하려고 고개를 드니 어느새 우리 둘의 발은 사령실의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인식기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럼 엄청 화려한 걸로 해야겠네.”
역시. 테렌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테렌스에게는 그런 반지가 어울리니ㄲ…….
“우리 고양이 손엔 그런 게 어울리잖아.”
쿵― 하고 기이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내 심장이 저 끝, 구석까지 처박혀 버리는 그런 소리였다. 기이한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박동이 식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무어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문이 열린 사령실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들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전리층에 진입하였습니다!”
“전파방해로 인해 일시적으로 함 내의 시스템이 다운됩니다!”
등 뒤의 문이 닫히는 순간, 함선이 크게 흔들렸다. 수십 개의 모니터들이 일제히 깜빡거렸다. 모두가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와중, 테렌스가 맨 위층의 사령탑으로 올라가 앉았다.
“전리층 돌파하였습니다. 시스템 재가동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웅― 하고 무언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시스템이 돌아가는 소리였다. 모니터에 차례차례 불이 들어왔다. 제일 마지막에 켜진 것은 전체 모니터. 함선 밖과 시스템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여 주는 메인 모니터였다.
나는 중앙에 띄워져 있는 데이터 맵을 바라보다 팔짱을 꼈다. 파형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지도가 바뀌었다. 산과 바다, 강, 수많은 건물들. 지구의 지도였다. 새카만 우주의 지도와는 색부터가 달랐다. 대부분이 초록색이나 황갈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곧 대류권으로 진입합니다! 지시를!”
조금씩 새하얀 구름을 헤치고 아래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뿌연 안개가 걷히는 것만 같았다. 세찬 바람과 중력은 거대한 함선마저 아래로 끊임없이 잡아당겼다. 모듈에 착륙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점차 대지가 가까워지자 테렌스가 입을 열었다.
“좋아. 하강하라!”
“예!”
그때 사령실의 문이 다시금 열렸다. 들어온 건 참모들이었다.
리건이 끄응 하며 기지개를 켜더니 제일 먼저 메인 모니터에 시선을 던졌다. 이제 구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무수한 건물들과 나무들, 그 위를 지나 함대는 착륙 게이트를 찾고 있었다.
“다 온 기가?”
“예. 이제 곧 내리실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한 건지 메티안은 자신의 어깨를 주물러 댔다. 눈가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지구에 오는 것도 오랜만이네.”
일전에 바르세크의 침략을 저지하러 왔을 때 이후로는 한 번도 오지 않은 곳이었다.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절차 또한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비상시가 아니니 허락을 받아야 할 것도 많았다. 그야 물론 노는 게 아니라, 일로 인한 방문이니 일반 시민에 비해서는 쉽게 허가를 받았지만 말이다.
그 허가 절차를 하나하나 밟아야 했던 테렌스는 아직도 짜증스런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반지만 아니었어도 오고 싶어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다지 지구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자이로크 게이트 A, 정문으로 착륙하겠습니다.”
“시스템 오프(OFF)에 들어갑니다. 일부 시스템을 제외한 다른 시스템은 모두 자동으로 꺼지게 됩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게이트의 통로는 새카맸다. 통로가 아니라 동굴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치형으로 이루어진 통로에서는 함선이 지나갈 때마다 울리는 소리가 났다. 모니터에는 누군가가 커다란 깃발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거기까지, 라는 뜻이었다.
천천히 감속하던 함선은 이윽고 그 깃발 앞에서 멈추어 섰다. 완전히 함선이 멈추자 밖을 비추던 모니터도, 데이터 맵도 자동으로 꺼져 버렸다. 시스템이 꺼진 것이었다.
이제는 내릴 준비를 해야 했다.
와 본 적이 별로 없는 곳이어서 그런지,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고향을 벗어나 낯선 곳에 홀로 던져진 것처럼 벌써부터 심장이 겁을 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런 마음을 진정시키듯 가슴을 두어 번 툭툭 두들겼다.
테렌스도 함께 있는데 뭐가 걱정인 걸까, 난.
때마침 그가 사령탑에서 내려와 우리 앞에 섰다. 테렌스를 마주한 리건이 불퉁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암만 생각해 봐도 내는 어이가 없다. 이게 말이 되는 기가. 우리가 왜 거기를 가야 되는데?”
“어쩔 수 없잖아.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야. 평의회의 발족이 늦어지고 있으니까.”
그런 리건에게 메티안이 핀잔을 줬지만, 그럼에도 리건은 삐죽 내민 입술을 집어넣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지구에서 내린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쉬이 납득이 가진 않았다.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건 알겠지만,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지금, 대표도 평의회도 없는 체르시엘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테렌스. 하지만 그가 군인인 이상 회담장 안에서의 위치는 가장 낮을 게 분명했다. 과연 그들이 그런 테렌스에게 어떤 요구를 해 올지……. 무엇보다도 우주의 일을 내버려 둔 채 지구에 가야 하는 게 못마땅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테렌스는 아무렇지 않은지 평소와 같은 얼굴로 팔짱을 꼈다.
“회담은 내일부터. 오늘은 휴가니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도록.”
그리 말한다 한들, 모두의 마음에 새겨진 불만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테렌스도 우리의 얼굴에 진 그늘을 보았는지 혀를 찼다.
“모처럼 지구에 왔잖아. 얼굴들 펴.”
“그래. 이제 와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딱히 뭐가 일어날 것도 아니잖아. 거기서 뭔 짓을 하는 놈이 미친 거지.”
“그런 미친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친구인 메티안의 말에도 테렌스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부하들은 걱정이 태산 같은데, 여전히 참모총장인 그만이 태연했다. 강함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인 걸까. 그도 아니면 정말로 아무런 걱정이 없는 걸까.
결국 메티안이 거칠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끝에 나오는 말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피곤하고 답답한 한숨. 그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를 쫓아가는 것 외에는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문밖으로 나가는 그를 따라, 다들 오랜만에 함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게이트가 어두워서 그런지 덕분에 나오자마자 눈이 따가울 일은 없었다. 주위에는 여러 대의 자이로크가 서 있었다. 게이트이자 정거장인 이곳에서는 각 나라의 다양한 자이로크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모양도 색도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새카만 라이폴호였다.
라엘느와호 역시 까맸지만, 한층 더 까맣게 된 것 같았다. 지겨우니 다른 색을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테렌스가 묵살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검은색을 좋아하는 건 여전했다. 그 원인이 나라는 건 이제는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까만 내 머리카락 끝을 슬쩍 매만졌다. 염색이라도 해 봐야 하나. 그럼 테렌스 취향도 바뀌지 않을까? 아니다. 염색한다고 했다가는 무슨 수를 써서도 날 말리려 할 것이다.
그때 까만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코가 반질반질한 구두가 눈에 띄었다.
“잘 오셨습니다. 호텔로 안내해 드리죠. 주위에는 편의 시설이 많으니 불편함도 없으실 겁니다. 회담 전까지 관광이라도 하시면서 편히 있어 주십시오.”
나는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생소한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언제나 다른 이에게 악수를 건네기만 했던 테렌스가 악수를 받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우주에서는 날고 기는 테렌스라고 하더라도 지구와 모듈의 권력 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뒤집을 수는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구는 테렌스의 위에 있었다.
그때 그들 중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손목에는 군용 워치를 차고 있었다. 그 외에는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일반 경호원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내게 자연스레 악수를 청했다. 새하얀 장갑이 끼워진 손을 맞잡자 그가 입을 뗐다.
“들었습니다, 어거스트 수석이라고. 잘 부탁합니다.”
“지금으로선 아무 소용없는 타이틀일 뿐입니다. 저 또한 잘 부탁드립니다.”
맞잡은 손을 떨어트리니 그는 내게 간단한 주의 사항을 알려 주었다. 관광을 하든 뭘 하든 돌아다니는 건 자유지만, 시내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군복을 벗고 평상복을 입어 달라는 것, 그리고 회담 때에는 정장 차림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군인의 신분으로 회담에 참석하는 것은 우리뿐이므로 모두에게 위압감을 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하나는 회담 참석 시간이었다. 본래 전달된 시간은 내일 아침 10시이지만, 그래도 30분 일찍 와 달라는 것. 참석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을 시에는 불참으로 간주된다는 것이었다. 딱히 문제될 것도 없는 일이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호텔로 안내해 주십시오.”
“예. 따라오시죠.”
먼저 등을 돌리는 지구인들을 따라 게이트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입구로 들어서자 찌르는 듯한 빛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이마 위로 들어 올렸다. 쨍쨍한 조명 빛이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주위에는 면세점이나 환전소가 있었다. 캐리어를 들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공기는 모듈의 공기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가 달랐다.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입안 가득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간다. 시원한 바람이었다.
나는 문득 그들의 뒤를 쫓다 말고 목소리를 냈다.
“저, 바다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말에 앞서가던 경호원 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한들 바다가 보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바다가 보이기라도 하듯 술술 설명을 이어 갔다. 마치 우리가 저기서 저쯤까지에는 무슨 행성이 있고, 거기에서는 전파가 어떻게 된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서로에게 있어서 익숙한 것은 달랐다.
“저쪽으로 차를 타고 내려가셔야 합니다. 여기서는 좀 많이 멀어요. 그리고 지금이 휴가 기간이라 많이 붐빌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바다에 가는 건 포기해야겠다.
아쉬움에 오른팔에 끼워진 팔찌를 매만졌다. 거친 매듭이 손끝에 만져졌다. 하지만 그런 내 손을 금세 테렌스가 잡아 왔다. 함대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구인들에게는 함부로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테렌스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앞을 보고 걷고 있었다.
“총장님.”
작게 불러 봐도 대답은 없었다.
옆얼굴이 너무도 단호했다. 이 이상 부르고 말려도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지구인들이 앞만 보고 걷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그들이 이 모습을 보지 못하길 바랄 뿐이다.
딱히 그와의 관계가 창피한 건 아니었다. 그리 생각했더라면 함대에서도 필사적으로 숨겼을 것이다. 단지, 나와 그를 보고서 다른 이들이 무어라 생각할지가 마음에 걸렸다. 나에 대한 욕이라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나는 테렌스의 모든 것을 지키고 싶었다.
그때 그들이 유리문을 밀며 밖으로 안내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햇볕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눈부신 빛 알갱이들이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아니, 그건 빛 알갱이가 아니었다.
“새벽에 비가 조금 와서 물이 고여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나뭇잎에 매달려 있던 빛 알갱이가, 아니 이슬이 굴러떨어졌다.
말하기 무섭게 뒤쪽에서 찰박 하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지는 건 리건의 혀를 차는 소리였다.
“아, 다 튀었뿟네. 좀 일찍 말해 주든가 하지.”
“군화랑 바짓단에 조금 튀었네. 호텔 가서 갈아입어.”
메티안의 작은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끄덕끄덕 두어 번 끄덕였다. 괜히 긴장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의 평화로움이었다.
그들은 검은 세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차는 인원수와 경호원의 수대로 준비했는지 서너 대 정도가 대기해 있었다. 그중 가운데 차의 문을 손짓하며 그들이 말했다.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타시지요.”
테렌스는 팔짱을 끼더니 우리를 돌아보았다. 흠, 하는 소리가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짧은 시선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나와 리오엘이 함께 타고, 나머지는 뒤차에 타도록.”
그 말에 리건이 작게 투덜거렸다.
“알아서도 마 갈 수 있는데.”
맞는 말이었다. 이미 모두의 워치에 호텔로 향하는 길은 물론이거니와 이 근방의 지도가 입력되어 있으니까. 당연히 그걸 보고 가면 될 터였다. 하지만 그 말을 오해했는지 지구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차로 가시는 게 더 빠를 겁니다.”
리건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그는 모르고 한 말일 것이다. 지구인과 모듈에 사는 인간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체력과 몸의 구조는 특히나 차이가 났다. 모든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도록 만들어진 만큼,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듈, 그리고 우주라는 환경, 그 속에서 버틸 수 있도록 이루어진 우리 몸은 그들과는 조금 달랐다. 더군다나 그중에서도 군사 훈련을 받은 우리의 기초체력은 그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다소 멀긴 해도 운동 삼아 가뿐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리건은 굳이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다.
“리오엘.”
갑작스런 부름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친 테렌스가 턱짓으로 차를 가리켰다.
“타자.”
“예.”
당연히 나는 조수석에 타려 했다. 하지만 문을 여는 날 보더니 그가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해?”
“차에 타는 중입니다만.”
그럼 제가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눈을 깜빡깜빡 여닫았지만, 테렌스는 인상을 풀지 않았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부하인 내가 그와 함께 뒷좌석에 탈 순 없지 않은가. 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테렌스는 완고했다.
“안 돼. 뒤에 타.”
여기서 더 실랑이를 해 봤자 시선만 모으게 될 거다. 테렌스의 고집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말이다. 한번 고집을 피우면 절대 굽히지 않는다. 그걸 잘 아는 나는 쉽게 의견을 굽혀 버렸다.
결국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테렌스가 뒤를 이어 몸을 실었다. 이윽고 다들 차례차례 차에 몸을 싣더니 곧 모든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앞좌석에 손끝을 살며시 가져다 댔다.
네모난 칩이 의자 위에 붙었다.
동시에 내 워치로 여러 정보들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차에 대한 정보였다.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속도도 공기도 모두 안정적이다. 위험한 금속물질이 설치된 것 같지도 않았다.
“어때?”
팔짱을 끼고 앉은 테렌스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모두 정상 수치입니다.”
적어도 차 안에서의 암살 위험은 없을 것이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도 조수석에 앉은 사람도 위협적이진 않았다. 체격으로 보나 어느 모로 보나 위험 시에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적어도 이 안에는 위협이 될 건 없었다.
나는 앞좌석에 붙였던 칩을 다시 떼어 냈다.
창밖으로는 별거 없으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풍경이 이어졌다. 규칙적으로 심은 가로수들과 보라색 꽃이 피어 있는 화단, 새로 페인트칠을 한 파스텔풍의 카페나 옷가게들, 그리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특이한 풍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하루 종일 보고 사는 게 우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인지 뒤인지 모를 새카만 허공을 보는 것보다야 훨씬 더 활력이 넘쳤다.
바람에 날아가는 빨간 풍선에 시선을 던졌다. 손등을 덮어 오는 온기를 애써 무시하며 창밖만 줄곧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신경은 사방을 향했다. 불시에 덮쳐 올 살기를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언제 어디서 기습을 당할지 몰랐다. 지구는 전쟁이 없는 행성이라곤 하나, 안전한 건 아니니까. 특히나 이번처럼 각국의 정상이 모이는 날은 특히나 조심을 해야 했다.
그때 부드럽게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어느새 밖의 풍경도 변해 있었다. 그리 많던 가게나 빌딩은 사라지고 푸른 잔디와 분수가 눈에 보였다. 주차장에 몸을 세운 차는 이내 시동이 꺼졌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뒷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먼저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뒤이어 내리는 테렌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침대 위에 엎어질 것만 같았다.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안내 사항을 전달했다.
“방은 스위트룸으로 총장님 부탁대로 총 다섯 개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금빛이 나는 엘리베이터는 빨리도 위층에 도착하였다. 붉은색의 벨벳 카펫이 복도에 정갈하게 깔려 있었다. 굽이 두꺼운 군화를 신고 걸어도 울림이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