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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
사신지연(四神之緣)



대륙풍 1권(1화)
작가서문


역사는 추억입니다.
친구들과의 즐거웠던 학창 시절의 추억, 첫사랑의 설렘에 대한 추억, 실연의 아픔에 뜬 눈을 지새우던 밤들의 추억, 만취해서 거리를 헤매던 추억, 첫 월급을 받고 날아갈 것만 같았던 추억.
그 모든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것이 한 사람의 역사이듯이 우리의 역사도 그렇게 자랑스러운 혹은 부끄러운 사실들이 추억처럼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기에 가끔은 추억이란 말을 잊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억을 떠올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추억이 우리의 가슴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날이면, 파전에 동동주를 앞에 놓고 둘러앉아 이제는 총을 쏘는 법조차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돌려 가며, 모두가 특전사가 되고, 일당백의 용사가 되는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처럼 그저 묻어 두었다가 가끔씩 꺼내 곱씹어 보는 것이 추억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보기 위해 달달 외웠던 옛날 옛적의 이야기들 혹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옛 사람들의 흔적들도 그렇게 우리의 가슴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추억이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일들이 있듯이 우리의 역사임에도 알지 못하는 역사들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불확실성의 학문인 역사가 잊어버렸던 이야기.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의 노력으로 세상에 제법 많이 알려진 이야기.
으스댈 만큼 자랑스럽지도 그러나 결코 부끄럽지도 않은 우리의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작은 조각의 하나인 평로치청 왕국,
대륙에 제나라를 건국하고 당나라를 패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잊고 있었던 추억을 곱씹어 가며 술잔을 나누듯이 같이 나누어 보겠습니다.
끝으로 아직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역사의 조각들이 하루 빨리 세상에 모습을 보여 우리나라의 추억이라는 거대한 퍼즐을 완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장


“무슨 일이냐?”
불그스름한 갑주를 한 무장이 호통을 치며 다가오자 병사들이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섰다.
무장은 병사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노인을 힐긋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병사들에게 물었다.
“양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고 하였거늘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이냐?”
“그것이……. 저 미친 노인네가 막무가내로 강을 건너려고 해서…….”
조장으로 보이는 늙수그레한 병사의 대답에 무장은 노인을 쳐다보았다.
백발의 노인은 칠 척은 넘어 보이는 큰 키에 당당한 체격을 지녔고 특히 현기를 지닌 서늘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잠시 노인을 살펴보던 무장의 안색이 갑작스럽게 급변하였다. 눈앞의 노인은 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무장이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건넸다.
“은공!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은공이라니, 나를 아느냐?”
노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무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장은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는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건넸다.
“소인 장보고, 아니 궁복이옵니다.”
“궁복……. 그럼 십 년 전에 신라에서 건너왔다던 그 아이가 너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친구인 정연이와 함께 은공께 구명지은을 입었지요.”
“그래, 그 눈을 보니 네가 맞구나…….”
노인은 과거를 회상하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잠시 장보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부진 체격과 각진 턱을 지닌 장보고는 지난 십 년의 세월이 평탄치는 않았는지 십 년 전의 앳된 얼굴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난히 반짝이던 그의 눈은 여전히 정광이 어려 있었다.
장보고의 눈을 쳐다보던 노인이 눈에 이채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단지 봉황의 눈을 지녔다고 여겼는데 네가 바로 주작지안의 주인이었더냐?”
“은공의 가르침 덕분에 인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야 하늘의 뜻이거늘 어찌 나의 공이라 하겠느냐. 그런데, 하필이면 무령군의 소장이라…….”
노인은 병사들의 표기와 장보고의 갑주를 보더니 아쉬운 눈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노인의 눈빛을 본 장보고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아쉬워하는 노인의 눈빛 뒤에 숨겨진 살의를 느낀 것이다. 노인은 그가 몸을 담고 있는 무령군과는 적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은연중에 살의를 내비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굳어진 표정으로 잠시 노인을 쳐다보던 장보고는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은공께서는 저를 베시렵니까?”
“제(齊)나라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자들의 선봉에 무령군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를 막아선다면 아무리 네가 나와 인연이 있고, 또한 네가 주작지안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너를 벨 것이다.”
말을 마친 노인이 가볍게 손을 젓자 어느새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검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검을 쥔 노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뿜어져 나와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는 병사들과는 달리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인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노인은 살기를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제외한 병사들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장보고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은공께서 운주성/(?州城)/으로 가고자 하신다면 저를 비롯한 무령군 오만이 모두 막아선다고 하더라도 결코 은공을 막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운주성으로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냐?”
“사흘 전에 운주성에서 제(齊)의 왕 이사도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사도, 그 아이가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전세가 기울자 그의 수하인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유오가 그를 죽이고 당에 투항하였습니다.”
노인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멍한 눈빛으로 장보고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이어진 침묵의 순간은 일각의 십분지 일에도 미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장보고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는 곧 이어질 노인의 분노가 두려운 것이다.
잠시 멍한 눈으로 장보고를 쳐다보던 노인은 다시 냉랭하게 표정을 바꾸고는 장보고를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의 본심이 무엇이냐?”
“…….”
장보고는 노인이 갑작스럽게 물음을 던진 의중을 짐작하였지만 함부로 답을 할 수가 없어 잠시 망설였다.
노인은 자신에게 삼한의 후예인 신라인으로서 어찌하여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고구려 유민이 세운 제나라를 치는 데 앞장섰는지를 묻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존재라 할 수 있는 노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진심이 담겨 있는 대답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장보고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좀 더 일찍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당연히 이정기 장군이나 은공과 함께 당나라를 멸하기 위해 장안으로 출정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신라인이기는 하지만 저 또한 삼한의 후예이니 당을 멸하고 대륙에 삼한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뜻을 세우고자 할 때에는 이미 제나라는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모중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하였느냐?”
노인은 더욱 냉랭해진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장보고는 노인이 언급한 왕모중의 일화를 떠올렸다. 왕모중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 현종인 이융기의 노비에서 시작하여 훗날 당의 재상까지 지냈던 인물이었다.
결국 노인은 자신에게 당나라의 신하가 되어 일신의 영화를 누리고자 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장보고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쳐다보면서 정색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왕모중을 비롯한 고선지나 흑치상지와 같은 삼한의 후예들이 모두 당 황실의 부림을 받다가 결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알진대 어찌 제가 어리석은 꿈을 꾸겠습니까. 다만 저는 이제 망국의 길로 접어든 제나라가 보여 준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할 따름입니다.”
“그 새로운 길이 무엇이더냐?”
“해로(海路)입니다.”
“해로?”
“그렇습니다. 제나라가 한때 당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을 정도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해상 교역을 장악하여 축적한 막대한 부(富)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노인은 장보고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말이 그르지는 않다. 하지만 제나라는 교역 상인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너를 따르겠느냐?”
“비록 제나라가 상인들을 우대하여 그들의 인심을 잃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상인의 무리는 이익을 좇는 자들입니다. 멸망의 길에 접어든 제나라를 대신하여 그들의 이익을 지켜 줄 힘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장보고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노인은 잠시 동안 묵묵히 장보고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노인은 장보고와 병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던 기세를 거두고는 잠시 희미하게 보이는 태산의 봉우리들 저 너머를 쳐다보았다. 그곳에 제나라의 터전인 청주와 당시 해상 교역의 중심지인 등주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등주가 자리한 태산 너머를 바라보던 노인은 고개를 돌려 다소 체념한 표정으로 장보고를 쳐다보며 다시 말을 건넸다.
“흐음……. 하긴 해상 교역을 장악한 등주와 청주의 상인들은 대부분이 신라방이나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 같은 삼한의 후예들이니 어쩌면 주작지안을 얻은 네가 백호의 일족을 대신하여 그들을 이끄는 것도 하늘의 뜻일지 모르지…….”
“제나라의 이씨 일가가 백호의 일족이었습니까?”
“이정기 장군, 그분이 백호지안의 주인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참으로 하늘이 야속하다. 하늘이 너를 조금만 일찍 세상에 내보냈다면, 사신(四神)의 힘이 하나가 되어 삼한의 후예가 대륙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거늘…….”
노인의 말에 장보고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장안 출정 당시에 현무도 함께 하였던 것입니까?”
“그렇다. 발해의 대씨 일가가 현무의 일족이었다. 당시 발해의 황제인 문왕께서 왕자 대영준이 이끄는 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결국 삼신의 힘만으로는 천하의 주인이 될 황룡의 탄생을 이끌어 낼 수가 없었던 것이지.”
“사신지연(四神之緣)…….”
장보고는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각인된 예언을 떠올렸다. 사신의 의지와 힘이 하나가 되면 삼한의 후예들 가운데 황룡이 나와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장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의 힘을 이은 노인과 당나라를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의 힘을 지녔던 백호 이정기의 군대, 그리고 현무인 해동성국 발해의 원군이 힘을 합하고, 거기에 주작의 힘을 지닌 자신이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으로 진군하였다면 대륙의 주인은 삼한의 후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삼신의 힘만으로 천하의 주인이 바뀌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백호 이정기가 당나라의 동쪽 도읍[東都]인 낙양의 함락을 코앞에 두고 악성종양으로 병사하고만 것이다. 결국 사신의 힘이 모이지 않는 한 대륙의 주인을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백호의 기운이 끊어졌고, 발해 또한 불과 이십 년 남짓한 시기에 황제가 일곱 번이나 바뀌는 혼란을 겪으면서 현무의 기운마저 끊어진 것 같으니, 다시 사신지연이 이루어질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아직 삼한의 기운이 쇠하지는 않았으니 주작의 힘을 이은 네가 해로를 장악하여 힘을 키우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구나.”
“송구하오나 은공께서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장보고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건네자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네게 새로이 가야 할 길이 생겼듯이 나 또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생겼구나.”
“사신의 후예들을 찾으실 것입니까?”
“그래, 다행히 내가 죽기 전에 그들을 찾는다면 모두 네게 보낼 것이니 네가 다시 한 번 사신지연을 이루어 보거라.”
“은공! 아직은 제 힘이 너무 미약합니다.”
장보고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네자 노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현무의 주인이셨던 고왕 대조영께서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실 때에도 그 힘은 미약하였고, 내가 백호지안을 지닌 이정기 장군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와 나는 참으로 미약한 존재였지…….”
강물 저 너머로 희미하게 펼쳐진 태산의 봉우리를 쳐다보는 노인의 눈에는 아련한 회상의 그림자로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