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대륙풍 1권(2화)
제1장 범양의 인연[范陽之緣](1)
“저자 말이야?”
“그래. 저기 화복을 입은 뚱뚱한 놈 말이다.”
홍복은 연호가 가리킨 화복을 입은 중년 사내를 흘깃 쳐다보았다. 뚱뚱한 체구에 희멀건 얼굴을 한 중년 사내는 외지에서 온 상인으로 보였는데 허리춤이 불쑥 솟아나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제법 두둑한 전낭을 차고 있는 것 같았다.
중년 상인을 살펴보던 홍복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뱉었다.
“에이, 시발! 왕치다.”
“저 개새끼…….”
홍복에 이어 연호도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중년 사내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털보 사내는 막 노야의 부하인 왕치였다.
막 노야는 막가장의 장주로 시전 상인들을 상대로 염왕채를 놓아 상인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전충(錢蟲)이었다.
왕치는 막 노야의 심복으로 평소에는 막 노야가 시킨 수금 일을 하지만, 손버릇이 나빠서 가끔씩 외지인들의 주머니를 털기도 하였다.
지금도 왕치는 중년 사내의 전낭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연호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왕치를 노려보며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가자. 어서 뛰어!”
“뭐? 뭔 소리야! 왕치 새끼가 보고 있잖아! 저 새끼가 우릴 가만둘 거 같아?”
“시발! 잡히지만 않으면 될 거 아냐! 어서 뛰어!”
“그래도…….”
“빨리 뛰어 새끼야! 내가 알아서 한다니깐!”
“에이, 시발!”
왕치가 있는 쪽을 힐끔거리며 망설이던 홍복은 연호의 채근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고는 중년 사내가 있는 쪽을 향해 냅다 달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연호가 잠시 뒤에 홍복을 쫓아가며 고함을 쳤다.
“거기 서! 서란 말이야. 이 자식아!”
“병신 같은 게, 잡아 봐라!”
홍복이 뒤를 돌아보며 놀리자 연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달려가는 속도를 올렸다.
홍복은 연호가 고함을 치며 미친 듯이 달려들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다시 뛰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져 팔이 닿을 만한 거리에 이르자 연호가 발을 구르며 홍복을 덮쳐 갔다.
연호가 목을 낚아채려 하는 순간, 홍복은 허리를 숙였다가 어깨를 슬쩍 들어 올려 연호의 배를 밀어 버렸다.
연호는 공중에서 중심을 잃고는 크게 한 바퀴 회전을 하다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외지에서 온 상인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에게 날아가 처박혔다.
중년 사내는 갑자기 날아든 연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으며 소리를 쳤다.
“어이쿠! 뭐, 뭐냐! 이놈들이!”
“끙! 미안해요, 아저씨! 저 새끼 때문에…….”
연호가 힘겹게 일어나면서 중년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홍복이 실실거리며 다시 말을 뱉었다.
“병신! 늙다리 아저씨와 붙어먹으니까 좋냐?”
“너 이 새끼! 잡히면 죽어!”
“지랄! 잡아 봐라, 병신아!”
“이 새끼가!”
홍복이 욕설을 내뱉고는 신형을 돌려 냅다 달려가자 연호도 버럭 고함을 치며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연호는 앞으로 달려갈 수가 없었다. 털이 숭숭 난 우악스러운 손이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 버렸기 때문이다. 손의 주인은 바로 털보 사내인 왕치였다.
왕치는 달아나려는 연호의 목덜미를 뒤로 끌어당겨 연호를 땅바닥에 패대기치고는 혁피화를 신은 발로 등을 찍어 버렸다.
왕치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채인 연호는 복날에 두들겨 맞은 비루한 개새끼마냥 머리를 감싼 채 온몸을 비틀며 낮은 신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쓰러졌던 중년 사내가 일어나더니 황급히 왕치를 만류하며 말했다.
“아니, 이보시오! 어린애를 그리 패면 어떡하오!”
“거참! 둔한 양반이네. 이 새끼가 당신 전낭을 훔쳤는 데도 그런 소리가 나오쇼?”
“예, 그게 무슨…….”
왕치의 말에 중년 사내는 말끝을 흐리고는 급히 자신의 허리춤을 만져 보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왕치의 말대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전낭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왕치는 연호의 얼굴을 발로 밟은 채 득의에 찬 웃음을 흘리며 다시 말을 뱉었다.
“거 보시오. 내 말이 맞다니깐. 이 새끼가 훔치는 걸 보고 내가 잡은 거요. 그러니 사례비나 두둑이 주시오.”
“허! 그냥 어린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중년 사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연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왕치가 비릿한 조소를 띠고는 허리를 숙여 연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퍽!
그때 갑자기 왕치의 얼굴에 연호의 머리가 박혀 들었다. 달아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연호가 틈이 생기자 머리로 왕치의 얼굴을 냅다 박아 버린 것이다.
그러나 연호는 왕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왕치가 끝까지 그의 멱살을 틀어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호가 달아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자 퍼뜩 정신을 차린 왕치는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솥뚜껑만 한 손으로 연호의 뺨을 냅다 갈겨 버렸다.
연호가 입에서 피 분수를 내뿜으며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왕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며 연호의 배를 발길질로 찍어 대기 시작했다. 연호가 반항도 하지 못하고 새우처럼 몸을 굽은 채로 왕치에게 당했다.
그러자 중년 사내가 급히 왕치를 만류하였다.
“그러다 애 죽이겠소. 돈만 찾으면 되니 그만하시오!”
“비켜! 썅! 이 오랑캐 놈의 종자새끼가! 감히 내 면상에 대가리를 박아! 시파 새끼가!”
왕치는 만류하는 중년 사내를 밀치고는 욕설을 내뱉으며 연호를 향해 다시 발을 뻗었다.
빠악!
“크억!”
갑자기 왕치가 신음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디선가 창대가 하나 날아와 왕치의 발을 찍어 버렸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화들짝 놀란 구경꾼들이 급히 뒤로 물러서자 말을 탄 십여 명의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사들을 이끌고 있는 젊은 장수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왕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가 창을 날린 주인공인 모양이었다.
잠시 냉랭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연호와 왕치 등의 모습을 훑어본 젊은 장수가 왕치를 향해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백주에 어린아이를 폭행하다니 대체 뭐하는 놈이냐!”
“그, 그게 아니옵고……. 저놈이 도적질을 해서…….”
겨우 신형을 일으킨 왕치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젊은 장수는 연호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피범벅이 된 연호는 몸을 웅크리고 있기는 했지만 정신은 있는지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뜨고는 왕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연호의 눈빛을 본 젊은 장수는 눈에 이채를 띠고는 다시 물었다.
“저 어린아이가 도적질을 했단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요. 저놈의 새끼는 종자가 오랑캐 종자라서 그런지 어린놈의 새끼가 간땡이가 부어서 상습적으로 도적질을 하는 놈입지요.”
“오랑캐 종자?”
“예! 독하고 악랄하기로 유명한 고구려 놈의 종자…….”
퍽!
젊은 장수 옆에 있던 날렵하게 생긴 군관 하나가 갑자기 말 위에서 득달같이 신형을 날려 발길질로 왕치의 턱을 날려 버렸다.
부서진 이빨과 함께 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진 왕치가 부들부들 떨며 쳐다보자 군관이 차가운 어조로 말을 뱉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 더러운 입으로 오랑캐 운운하느냐!”
“펴, 평로…….”
왕치는 그제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군사들의 갑주와 말에 새겨진 ‘평로(平盧)’라는 글자를 발견하고는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젊은 장수와 군사들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이곳 범양(范陽)으로 진군한 평로군들이었다. 요동 지역에 자리한 평로의 군사들은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치는 재수 없게도 고구려 유민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는 평로군 앞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오랑캐라고 욕을 한 것이다.
젊은 장수가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설영, 물러서라!”
젊은 장수의 호통에 설영이라고 불린 군관이 신형을 날려 사뿐하게 말 위에 올랐다.
그의 무공에 놀란 구경꾼들은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공에서 신형을 뒤집어 말 위에 내려앉았음에도 말이 전혀 미동하지 않은 것이다.
중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젊은 장수가 냉랭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본관은 평로군의 비장인 이회옥이다. 죄는 그 출신에 따른 것이 아니고, 그 행실에 따르는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지은 죄가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저 아이가 도적질을 한 것을 본 자가 있느냐?”
“…….”
구경꾼들 가운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이회옥이라고 자신을 밝힌 젊은 장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재물을 잃은 자는 누구냐?”
“제, 제가 전낭을 잃어버렸사옵니다.”
중년 사내가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이회옥이 다시 물었다.
“그럼 너는 저 아이가 너의 전낭을 훔치는 것을 봤느냐?”
“그, 그것이 직접 본 것은 아니옵고, 저 사람이 말하기를 저 아이가 제 전낭을 훔쳤다고 하기에…….”
중년 사내가 왕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왕치는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요. 저 녀석이 분명히 훔쳤습지요.”
“안 훔쳤어! 난 안 훔쳤다고!”
웅크리고 있던 연호가 몸을 일으키며 발악하듯이 고함을 쳤다.
왕치가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이놈의 새끼가! 네놈이 장난질을 하는 척하면서 전낭을 훔치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털보 새끼! 네놈이야말로 시장 상인들 등쳐 먹으면서 사는 도적놈이잖아!”
“뭐야! 이 새끼가!”
“그만!”
연호의 악다구니에 왕치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치켜들자 이회옥이 호통을 쳤다.
왕치가 움찔하며 쳐다보자 이회옥이 냉랭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너는 뭐하는 자이냐?”
“저, 저기 막 노야 밑에서 일을 돕고 있습니다만…….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막 노야?”
이회옥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자 설영이라 불렸던 군관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며칠 전 인사를 하겠다고 찾아왔던 그 막가장의 장주를 말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그럼 네가 막가장의 일을 하는 자이더냐?”
“그렇습니다요. 그 막 노야의 심복입지요.”
이회옥의 물음에 왕치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이회옥과 설영의 대화로 보아 그들이 막 노야를 만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 노야는 술수가 좋아 범양을 장악한 저들에게 이미 적당한 금전을 쥐어 주었을 것이고, 저들이 막 노야의 돈을 먹었다면 필시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왕치의 기대와는 달리 이회옥은 더욱 냉랭해진 어투로 말을 뱉었다.
“염왕채로 상인들의 고혈을 짜내는 쓰레기 같은 자의 심복이라니 거머리 같은 놈이군…….”
“예에?”
왕치가 화들짝 놀라며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이회옥을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벌레를 보는 것 같은 경멸의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왕치를 노려보던 이회옥이 다시 연호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너는 고구려의 유민이냐?”
“그, 그렇습니다.”
“좋다. 고구려의 후예는 정정당당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너는 진짜 도적질을 하였느냐?”
“……!”
연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의춤에 감춘 전낭이 살갗에 닿아 거북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당연히 절대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고 잡아 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고구려의 후예 운운하는 이회옥의 말이 왠지 거슬렸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 고민하던 연호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자 고개를 들어 이회옥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저는 도적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새끼가 어디서 거짓부렁을 하느냐! 당장 저놈의 몸을 뒤져 보십시오!”
연호의 말에 왕치가 눈을 뒤집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이회옥은 묘한 눈빛으로 연호를 쳐다볼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움직인 것은 군관인 설영이었다. 그가 다시 신형을 날려 왕치의 아랫배를 발로 찍어 버렸던 것이다.
왕치가 아랫배를 붙잡고 주저앉자 설영이 냉랭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장군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았느냐! 고구려의 후예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끅…… 그, 그런…….”
왕치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뭔가 말을 하려고 하자 설영이 다시 냉랭하게 말을 뱉었다.
“이놈은 염왕채를 놓아 양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의 수하이다. 당장 이놈을 포박하라!”
설영의 지시에 병사 두 명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왕치를 포박했다.
그러자 구경하던 상인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누가 도적인지 의아스럽기도 하였고, 왠지 평로군들이 같은 고구려 유민 출신인 연호의 편을 들어주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평소에 거머리처럼 그들을 괴롭히던 왕치가 개처럼 두들겨 맞고 포박을 당하는 것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병사들이 왕치를 포박하여 뒤로 물러서자 이회옥이 다시 고연호에게 말을 건넸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연호, 고연호입니다.”
“고연호라……. 좋다. 너는 이만 가 보아라! 그리고 고구려의 후예는 늘 정정당당하여야 함을 잊지 말라!”
“…….”
연호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일어나서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연호는 왠지 설영이라는 무서운 군관이 자신을 잡아챌 것 같아서 두려운 마음이 들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일 장, 이 장, 그렇게 팔 장이 넘게 거리가 벌어졌음에도 군사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자 연호는 갑자기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신없이 달리던 연호는 고개를 돌려 힐긋 뒤쪽을 쳐다보았다. 이회옥이라는 장수나 설영이라는 군관은 물론이고 다른 병사들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연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정신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려가는 연호는 사타구니에 전낭이 부딪힐 때마다 왠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