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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3화)
제1장 범양의 인연[范陽之緣](2)
거의 반 시진가량을 정신없이 달려가던 연호는 숨을 헐떡거리며 멈추어 서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의 뒤를 따라오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연호는 허리를 숙여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계획대로라면 홍복이 기다리고 있을 노루바위 쪽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연호는 왠지 집으로 가고 싶었다. 이회옥이라는 장수와 설영이라는 군관이 고구려의 후예 운운할 때부터 왠지 그의 부친 얼굴이 자꾸 떠올랐던 탓인지도 몰랐다.
연호는 냇가에 이르자 손으로 물을 떠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는 잠시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눈초리가 위로 살짝 올라간 눈매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성깔이 사나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연호는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으로 물을 헤집어 버리자 자신의 얼굴이 사라졌다.
잠시 동안 멍하니 냇가에 앉아 있던 연호는 집이 있는 고호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집에 도착하자 동생인 운호가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연호가 다가가자 운호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황급히 달려왔다.
운호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건넸다.
“형아! 어디 갔다 왔어?”
“어, 그냥 홍복이랑 어디 갔다 왔어. 뭐하냐, 들어가자.”
“안 돼! 지금 들어가면 큰일 나!”
“그게 무슨 소리…….”
의아한 표정으로 묻던 연호는 집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오자 차갑게 눈빛을 바꾸며 말끝을 흐렸다. 그가 들은 고함 소리는 부친의 것이었다.
잠시 집을 노려보던 연호는 시선을 돌려 운호에게 물었다.
“아버지 또 술 드셨냐?”
“응…….”
“형은?”
“안에…….”
연호는 시선을 돌려 집 쪽을 노려보았다. 동생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형인 윤호를 나무라는 부친의 호통이 들려오고 있었다.
연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한 채 싸리로 엮은 울타리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과 같은 일은 그의 아버지인 고준남이 술을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일상이었다. 이럴 때는 그저 잠잠해질 때까지 집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버지가 설교를 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어야 상황이 끝이 나는 것이다.
운호가 옆에 쭈그리고 앉자 연호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건넸다.
“배 안 고프냐?”
“응, 약간 고프긴 한데, 아까 아까 감자 먹어서 괜찮아.”
“감자?”
“그게, 형 주려고 남겨 두려고 했는데…….”
“괜찮아, 자식! 형은 홍복이랑 많이 먹고 왔다.”
미안해하는 운호의 표정을 보고는 고연호가 피식 실소를 흘리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운호는 그제야 씨익 웃음을 보였다.
연호를 쳐다보던 운호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어, 형아 얼굴이 왜 그래? 누구한테 맞은 거야?”
“맞기는 뭘 맞아. 임마! 이 형아가 누구한테 맞고 다니는 거 봤냐? 그냥 산에서 홍복이랑 놀다가 넘어져서 그런 거야.”
“그렇지? 형아가 우리 마을에서 제일 세잖아!”
“그래, 임마! 그러니까 너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면 안 돼!”
“응! 지난번에 형아가 박치기 가르쳐 줘서 홍박이도 이겼잖아.”
“그렇지.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어, 근데 형아 있잖아. 어머니가 그러는데 옛날에 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동쪽에서 되게 큰 나라의 황제였대. 활도 무지 잘 쏘고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았대!”
운호가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을 하자 연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를 하였다.
“그래서 뭐?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도 아니고,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랬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
“아니, 그냥 어머니가 그렇다고 해서…….”
“그래서 뭐? 아버지가 저러는 거 다 할아버지가 그리워서 그러는 거라고 이해해 줘야 한다고 그러시던?”
“그냥 아버지 미워하면 안 된다고…….”
“관두자. 어린 니가 뭘 알겠냐.”
연호는 굳어진 얼굴로 말을 하려다가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운호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치이! 형아도 어리잖아!”
“뭐야! 쪼그만 게…….”
“안 들어오고 뭐하냐?”
운호의 머리를 쥐어박으려던 연호는 형인 윤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윤호가 문 앞에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연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들어가야지…….”
“운호야, 빨리 들어가 봐라. 어머니가 저녁상 차려 놓으셨다.”
“응! 형아들도 빨리 와!”
운호가 쪼르르 집안으로 달려들어가자 연호도 천천히 뒤따르며 윤호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어째 빨리 끝났네.”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윤호가 나직하게 호통치자 연호는 걸음을 멈추고는 윤호를 쳐다보았다. 세 살 위의 형인 윤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연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윤호를 쳐다보던 연호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었다.
“관두자! 어쨌거나 형은 참 대단해. 그 지겨운 술주정을 매일 들으면서도 잘 참는 거 보면 말이야. 큭큭.”
“연호야! 우리 아버지시잖아. 자식인 우리가 이해해 드리지 않으면 누가 이해해 드리겠냐.”
“그래서 ‘망국의 황손께서 비루한 화전민으로 떠도시게 되셨으니 참으로 비통하시겠습니다’하고 말씀드리면 되는 거야? 아니면 뭐 다른 말…….”
짝!
“너 이 자식!”
비아냥거리는 연호의 말에 윤호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뺨을 올려붙이며 나직하게 호통을 내질렀다.
고개가 돌아간 연호가 뺨을 감싼 채 노려보자 윤호는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건넸다.
“손찌검을 한 것은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이기 이전에 대고구려의 마지막 황손이신 분이다.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큭! 마지막 황손? 그게 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냥 날마다 술에 쩔어서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우리를 다리에 쥐가 나도록 꿇어앉힌 채 귀신이 되어서도 이미 늙어 죽었을 할아버지 타령만 하는 아버지가 싫으니까, 형이나 많이 받들어 모시세요!”
“너, 이 자식!”
윤호는 노기가 어린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연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눈을 부라리며 윤호의 손을 뿌리치려던 연호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마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 형제의 어머니인 연씨 부인이 노기 띤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너희들 이게 무슨 짓들이야!”
윤호가 멱살을 놓자 연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연씨 부인은 윤호와 연호를 번갈아 보며 다시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이제야 막 아버지께서 잠이 드셨는데, 너희들까지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야!”
“죄송해요, 어머니…….”
윤호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리자 연씨 부인은 달래듯이 말을 건넸다.
“무슨 오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형제들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 알았지!”
“예, 안 그럴게요. 그만 들어가세요.”
“같이 들어가자꾸나. 연호 너도……. 아니, 연호 너는 또 어디 가니?”
윤호와 함께 신형을 돌리던 연씨 부인은 연호가 고개를 돌린 채 집 밖으로 향하자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연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걸어가며 대꾸했다.
“전 밥 먹었어요. 홍복이한테 갔다 올게요.”
“연호야!”
연씨 부인이 다시 불러 보았지만 연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 걸어갔다.
윤호가 연씨 부인의 손을 끌며 말을 건넸다.
“그만 들어가세요, 어머니. 홍복이한테 가서 잘 자고 오잖아요.”
“휴…….”
윤호가 다독거리며 손을 잡아끌자 연씨 부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는 신형을 돌렸다. 그녀는 도통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연호가 안쓰러운 것이다.
연씨 부인이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향하자 윤호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 서서 어둠 속으로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연호의 등을 쳐다보았다. 윤호는 뒤늦게 동생의 얼굴이 잔뜩 부어 있던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워낙에 성질이 사나운 연호인지라 얼굴에 상처가 생기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오늘은 예전과 달리 유난히 많이 부어 있는 것 같았다.
연호의 자그마한 등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쳐다보던 윤호는 착잡한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연호의 부은 얼굴이 유난히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
툭! 툭!
돌멩이 두 개가 날아들어 봉창을 두드리자 홍복은 재빨리 방문을 열고는 고개를 길게 빼내 밖을 보았다. 연호가 달빛 아래에서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급히 밖으로 달려 나온 홍복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뭘 어떻게 돼, 임마! 이렇게 멀쩡하잖아.”
“네놈이 잡혀간 줄 알고 다시 가 보니 시전에 난리가 났던데…….”
“어떻게 되었대?”
“뭐? 너도 잘 모르냐?”
“잘 모르지. 나야 그 장군님이 가 보라고 해서 그냥 냅다 달렸으니까. 왕치 그 개자식이 잡혀갔대?”
“응. 그 평로군의 군사들이 개처럼 끌고 갔다던데. 시전의 상인들이 희희낙락거리며 말들 하더라.”
“그래? 잘 됐네! 아우……. 개자식, 아직도 턱이 얼얼하네! 시발.”
“그 새끼한테 많이 맞았냐?”
턱을 매만지던 연호는 홍복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짐짓 정색을 하고는 대꾸했다.
“맞기는 시발! 그냥 뺨 한 대 스쳤어. 그래도 이 형님이 그냥 당하고 있을 사람이냐. 그 개자식의 면상을 대가리로 박아 버렸지. 크크크!”
“헤헤, 그러냐. 근데 전낭은 털었어?”
“어? 근데 시발 새끼가! 설마 내가 네 몫 안 줄까 봐 그러냐?”
“아니, 뭐 그냥 궁금해서…….”
홍복이 머쓱한 표정을 짓자 연호는 고의춤에서 주섬주섬 전낭을 꺼내 들고는 안에 손을 넣었다. 쇠붙이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갑자기 연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뱉었다.
“에이, 시발! 이거 엽전이네!”
“뭐? 은자 아냐?”
“아냐, 시발! 그냥 엽전들이야.”
말을 하면서 연호는 전낭에서 손을 빼서 펴 보였다.
연호의 손바닥 위에는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엽전들이 놓여 있었다. 돈이 많아 보이는 상인이라 당연히 은자를 지니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전낭에서 엽전이 나오자 연호와 홍복의 얼굴에는 실망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엽전과 은자의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이다.
연호가 손에 쥐고 있던 엽전들을 홍복에게 건네주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시발! 이거 가지고 당과나 사 먹으면 딱이겠다.”
“쩝, 그래도 이게 어디냐…….”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면서도 홍복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지고 있었다.
연호가 손에 쥐고 있던 한 움큼의 엽전을 모두 건네주자 홍복은 꽤나 기분이 좋은 것이다. 둘이서 일을 벌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연호가 위험한 역할을 하기에 그에게 돌아오는 몫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연호가 생각보다 많이 건네준 것이다.
연호가 전낭을 품에 갈무리하면서 다시 말을 건넸다.
“근데 시발, 평로군이란 게 무슨 말이냐?”
“그거 나도 아까 만두 가게 장씨 아저씨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거 평로에서 온 군사들이래.”
“평로?”
“어. 원래는 북쪽 어디인가 있는 곳의 군사들인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왔다던데.”
“북쪽? 동쪽이 아니고?”
“북쪽이라고 하던데. 그리고 장씨 아저씨 말이 그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같은 고구려 유민 출신이라던데.”
“유민은 무슨, 시발! 좋게 말해서 고구려 유민이지, 그냥 망한 나라의 거지들이지…….”
연호가 심드렁하게 말을 하자 홍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그게 유민이잖아. 나라를 잃었으니까 유민이라고 하는 거 아냐?”
“몰라, 시발!”
연호는 짜증스럽게 말을 뱉었다. 좀 전에 집 앞에서 형인 윤호와 다투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그래도, 그 평로군이라는 사람들은 좋겠다. 그렇게 다니면 고구려 개 종자라고 지랄하는 새끼들도 없을 거 아냐. 왕치 같은 개자식도 때려잡고……. 시발, 나도 평로군이나 들어갈까?”
홍복이 손에 쥐고 있던 엽전들을 고의춤에 쑤셔 넣으며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홍복의 말에 눈에 이채를 띠던 연호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받았다.
“지랄! 너같이 꼬치에 털도 안 난 비리비리한 애새끼를 누가 병사로 받아 주냐?”
“뭐야! 시발, 나도 꼬치에 털 났다니까!”
“지랄! 꺼내 봐! 코밑에 솜털도 안 난 새끼가 어디서 거짓부렁을 하냐?”
“됐어, 시발! 야밤에 바지 내리고 지랄 염병할 일 있냐. 그냥 시발, 찾아가서 나도 평로군 되고 싶으니 받아 달라고 하면 되잖아.”
“지랄하네.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아가냐?”
“모르긴 왜 몰라. 장씨 아저씨가 그러는데 그 사람들 저기 강변의 월하평에 진을 치고 있다더라.”
홍복이 핏대를 세우며 대꾸하자 잠시 눈빛이 흔들렸던 연호는 곧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헛소리하지 말고 먹을 거나 좀 가져와라. 배고파 뒤지겠다.”
“지랄! 이 밤에 먹을 게 어디 있냐?”
“감자 같은 거라도 없냐?”
“나도 집에 오니까 홍박이 새끼가 다 처먹고 하나도 없더라. 시발!”
“에이, 시발. 배고파 뒤지겠네. 어디 닭이라도 잡아먹을 데 없냐?”
“닭 같은 소리하네. 새벽에 꼬끼오 소리 안 들은 지가 몇 년은 된 거 같은데, 우리 마을에 닭이 있겠냐?”
“시발……. 거지 같은 동네. 니미 간다!”
“어디 가냐?”
“어디 가기는 시발! 배고파 뒤지겠는데 집에 가서 귀리밥이라도 있는지 봐야지.”
연호는 심드렁하게 대꾸를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