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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4화)
제1장 범양의 인연[范陽之緣](3)
삐거덕!
연호는 부엌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마솥이 걸린 부뚜막의 한쪽 구석에 놓인 대바구니에 하얀 보자기가 덮여 있었다. 대바구니에는 시커먼 귀리밥 한 덩어리가 담긴 놋그릇 하나와 삶은 감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그의 몫으로 남겨 둔 것 같았다.
연호는 부뚜막에 걸터앉아 삶은 감자를 한 개를 들고서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누런 감자는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나 연호는 감자를 보자 괜스레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밭일을 하고는 이 감자 몇 개를 얻어 왔었다. 그것으로 갓난아기인 운호를 비롯해 삼형제가 끼니를 때웠다. 당신은 주린 배를 물로 채워 가며 자식들을 먹여 살리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이 굶어도, 어머니가 땡볕에서 허리가 부러져라 일을 해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동네 사람들 제사에 제문을 써 주거나 성내의 상갓집이나 잔칫집을 떠돌며 비문이나 축수연에 같잖은 글들을 몇 글자 끼적거리고는 술 한 잔 얻어먹는 것 외엔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하는 것이 있다면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 타령을 하며 술주정을 부리는 일뿐이었다.
연호는 감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 식은 감자의 타박한 질감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연호는 늘 먹던 감자의 맛이 오늘따라 유난히 타박하게 느껴졌다. 마치 감자가 그의 목을 꽉 메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따라 늘 먹던 감자마저도 그의 신경을 거슬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재수 없게 왕치에게 걸렸어도 바보 같은 평로군의 장수 때문에 별 탈 없이 달아날 수 있었고, 전낭에 든 돈은 기대했던 은자는 아니었지만 최근에 벌인 일 가운데 가장 돈이 많이 들어 있었다. 왕치 개자식한테 몇 번 밟히고 뺨 한대 두들겨 맞은 것 외에는 딱히 기분 나쁠 일이 없는 하루였던 것이다.
비록 집에 와서 형인 윤호와 말다툼을 벌이긴 했지만, 그도 가끔 있는 일이어서 그다지 그의 신경을 건드릴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꽤나 운이 좋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기분이 나쁜 연호였다.
남아 있는 감자와 귀리밥을 우걱우걱 입에 억지로 쑤셔 넣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던 연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물바가지를 든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이 예민해진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평로군이라는 존재였다.
비록 망해 버린 나라의 후예였지만, 그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황실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도 이회옥이란 장수는 당당하였다. 범양성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막 노야의 심복인 왕치를 때려잡고, 고구려의 후예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외치던 그 모습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연호의 눈에 비쳐진 이회옥의 모습은 고구려라는 미지의 이름이 현실로 나타난 것과 같았다.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아버지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고구려라는 나라의 존재. 그 실체를 처음으로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이다.
연호는 갈증을 느꼈다. 그 갈증은 타박한 감자를 먹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에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나라, 고구려의 작은 파편을 보고 생겨난 궁금증과 호기심에서 오는 갈증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동안 애써 눌러 왔던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나려는 일탈의 마음을 강하게 자극하는 독초를 삼키고 생겨난 갈증이기도 하였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부엌문을 닫고 밖으로 나선 연호는 툇마루의 끝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는 기둥 아래를 손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속에 묻힌 자그마한 단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지를 밖으로 꺼낸 연호는 고의춤에 차고 있던 전낭을 풀어 단지 안에 쏟아 부었다. 단지에는 그동안 연호가 시전에서 훔쳤던 돈이 들어 있었다.
단지의 뚜껑을 닫은 연호는 한참 동안 멍하니 단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단지를 옆구리에 끼고는 벌떡 일어났다.
단지를 들고 밖으로 나온 뒤, 잠시 마당을 서성이던 연호는 곳간 옆의 방으로 향하였다.
조용히 방문을 열자 잠들어 있는 동생 운호와 형 윤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형제들이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연호는 들고 있던 단지를 형 윤호의 머리맡에 놓고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은 연호는 까치발로 소리를 죽여 뒷걸음질 쳤다.
잠시 후 조용히 마당 한가운데 이른 연호는 한동안 묵묵히 큰방의 방문을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천천히 싸리문을 나섰다.
연호는 집 밖으로 나선 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유난히 습하게 느껴지는 초여름의 서늘한 공기가 폐 한가득 들어찼다.
머금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뱉은 연호는 고개를 돌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둠 속에 잠긴 고호촌을 가로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연호는 범양으로 진군한 평로군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떠난 것이다.
때는 서기 761년 당 숙종(肅宗) 6년, 상원(上元) 2년 5월이었고, 고연호는 열네 살이었다.
제2장 평로군(平盧軍)(1)
“뭐냐, 이 애새끼는?”
사시에 번초 교대를 하기 위해 진영의 입구로 다가온 강진남은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연호를 힐긋 쳐다보고는 앞 조의 조장인 황기천에게 물었다.
황기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몰라! 미친놈이 아침부터 찾아와서 이회옥 장군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는데……. 완전 꼴통이야. 안 된다고 해도 꼼짝도 안 하네.”
“흠……. 이거 어디서 본 물건인데……. 어라? 이거 어제 그 자식 아냐!”
강진남의 말을 들은 연호는 반색했다. 자신을 알아보는 걸 보니 어제 시전에 있던 병사들 중의 한 명인 모양이었다.
연호가 벌떡 일어나며 말을 건넸다.
“아저씨! 어제 그 이회옥 장군님을 좀 만나게 해 줘요!”
“뭐야! 아저씨? 이 자식이 누굴 늙다리 취급하는 거야! 이 형님이 어디로 봐서 아저씨로 보이냐! 응?”
“형님! 그러니까 장군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햐! 요 자식 보게! 그새 형님이냐. 헛소리하지 말고 돌아가거라. 여긴 너 같은 애들이 노닥거리는 곳이 아니야!”
강진남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 호통을 치자, 연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강진남을 노려보았다.
연호가 자신을 노려보자 강진남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주먹으로 연호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으며 말했다.
“요거, 요거 성질머리 보게! 어따 대고 인상을 쓰냐! 썩 물러가거라!”
“에이, 시발!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왜 사람을 치고 그래! 시발!”
“뭐, 뭐야! 이놈의 새끼가 환장을 했나!”
연호가 욕설을 하며 악다구니를 쓰자 강진남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을 뱉으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연호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강진남에게 눈을 부라리며 다시 악다구니를 썼다.
“에이, 시발! 쳐 봐! 때려 보라고. 돼지같이 살만 뒤룩뒤룩 쪄 가지고, 시파! 나이 많으면 아무나 쳐도 돼?!”
“허! 이 개놈의 새끼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강진남이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을 날리자, 황기천이 얼른 그의 팔을 잡으며 만류했다.
“어허, 진남이. 자네가 참게. 이 자식이 성깔이 보통이 아니라네.”
“뭐 이딴 자식이 다 있어! 쥐방울만 한 새끼가 죽을라고!”
강진남은 황기천의 만류에도 노기를 추스르지 못하고 고함을 치며 연호를 향해 발길질했다.
“뭐하는 짓들이냐!”
날카로운 호통에 강진남과 황기천 등이 돌아보았다. 영준하게 생긴 젊은 군관이 냉랭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회옥의 부관인 설영이었다.
강진남과 황기천이 얼른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조아리자 설영이 다시 냉랭한 어투로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진영의 번초를 서는 놈들이 소란을 피우다니 감히 죽고 싶은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옵고, 저 어린놈의 새끼가 찾아와서 악다구니를 써 대는 바람에…….”
황기천이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설영은 고개를 돌려 씩씩대고 있는 연호를 슬쩍 쳐다보았다.
연호를 본 설영은 의아한 눈빛을 한 채 이번에는 강진남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
“그게……이회옥 장군님을 뵙게 해 달라고 합니다.”
“장군님을?”
“그렇습니다. 안 된다고 돌아가라고 했는데도 저 아이가 무조건 만나게 해 달라고 하면서 악다구니를 써 가지고…….”
강진남의 대답을 들으면서 설영은 잠시 연호를 쳐다보았다.
연호는 어제 본 설영의 무공이 생각났는지 다소 두려운 얼굴로 설영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설영이 연호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무슨 일로 장군님을 만나러 왔느냐?”
“그, 그러니까……. 그게, 저도 평로군의 군사가 되고 싶어서요.”
연호가 쭈뼛거리며 대답하자, 설영을 비롯해서 모두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군사가 되기에는 연호가 터무니없이 어려 보였던 것이다.
설영이 다시 물었다.
“아마, 고연호라고 했지. 너 지금 몇 살이냐?”
“여, 열일곱이요!”
연호는 머뭇거리다 큰소리로 대답하고는 설영의 눈치를 봤다. 연호는 제 나이를 말하면 어리다고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세 살이나 올려서 말을 한 것이다.
황기천이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이놈의 자식이 어디서 거짓부렁이냐! 네놈이 무슨 열일곱이야. 이제 겨우 열서넛 되어 보이는구먼!”
“아니에요! 열일곱이에요.”
연호가 소리치며 대꾸하자 설영은 묘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진짜 네 나이가 열일곱이냐?”
“그, 그렇다니까요!”
“열일곱이라……. 보기보다 나이가 제법 많다만, 어쨌든 돌아가거라. 여기는 병정놀이를 하는 곳이 아니다.”
연호를 잠시 쳐다보던 설영이 냉랭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연호가 다급하게 다시 소리쳤다.
“저도 병정놀이 따위를 하러 온 거 아니에요. 저도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평로군이 되고 싶어서 왔단 말이에요!”
설영이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연호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을 건넸다.
“검이나 창을 잡아 보기는 했느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활쏘기는 자신 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연호는 설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검이나 창을 제대로 구경도 못 해 본 연호였지만 활쏘기는 달랐다. 비록 대나무로 대충 얽어서 만든 조잡한 활이었지만 어쨌든 고호촌의 아이들 가운데서 가장 활을 잘 쏘는 것은 사실이었다.
묘한 눈빛으로 연호를 쳐다보던 설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활쏘기라……. 좋다. 만일 네가 이들 중에 하나와 활쏘기 시합을 하여 이긴다면 너를 평로군의 군사로 받아 주마.”
“저, 정말이죠?”
“그렇다. 진남! 저 아이에게 활을 주어라.”
“예? 아, 예. 근데 제 것은 해궁(解弓)도 안 했는데요?”
강진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동그랗게 말려 있는 맥궁을 허리에서 끌렀다.
고구려의 한 부족인 속맥족들이 만든 데서 이름이 유래된 맥궁은 물소 뿔과 나무 등의 갖은 재료를 써서 만든 합성궁으로, 그 탄성이 좋아 활줄을 걸어 놓지 않으면 평소에는 둥그렇게 말려 있었다. 해궁이란 둥그렇게 말려 있는 활을 펴고 활줄을 걸어 바로 화살을 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설영은 연호를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혼자서 해궁을 하기에는 힘들어 보이니 네가 해궁을 하여 건네주어라.”
“예, 근데 시위를 당길 수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제 입으로 활을 잘 쏜다고 하였으니 시위 정도는 당기겠지.”
“쩝, 이거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