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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5화)
제2장 평로군(平盧軍)(2)


강진남은 아끼는 맥궁을 연호에게 건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설영의 명이라 할 수 없이 입맛을 다시면서 활의 가운데 부분인 줌통을 잡고 맥궁을 역으로 굽혀 활줄을 거는 부분인 도고자에 활줄을 걸었다.
강진남이 해궁하여 활줄을 걸자 맥궁은 두 개의 봉우리가 굽어 있는 만궁(彎弓)의 형태를 이루었다.
잠시 자신의 맥궁을 살펴보던 강진남은 활에 시위가 당겨지지 않도록 하는 둥근 고리이며 삼지라고도 불리는 깔지를 슬쩍 끼워 넣은 뒤 연호에게 건넸다. 그는 어린 연호가 맥궁을 써 본 적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놀리려고 깔지를 끼워 넣은 것이다.
강진남의 맥궁을 받아 든 연호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당황해하는 것 같았고, 또 다르게 보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맥궁을 보는 연호의 속내는 그의 표정처럼 미묘하였다. 맥궁을 만져 보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늘 술에 취해 사는 아버지가 유일하게 아끼는 물건이 바로 할아버지의 유품이라는 맥궁이었다. 그리고 그 맥궁은 연호에게 미묘한 감정을 갖게 하는 물건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형과 그를 꿇어앉힌 채 설교를 할 때면 어김없이 꺼내 놓는 물건이 바로 맥궁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유품인 맥궁을 꺼내 놓고 망해 버린 나라 고구려의 후예 타령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맥궁은 연호에게는 짜증 나는 물건이었다.
한편으로 맥궁은 유일하게 부친에 대한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아주 가끔씩 기분이 좋을 때면 맥궁을 들고 직접 시범을 보여 주며 형과 그에게 활쏘기를 가르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활쏘기를 가르칠 때면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연호가 엉터리 대나무 활이지만 고호촌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아이가 되었던 것도 그렇게 아버지에게서 배웠던 활 쏘는 법 덕택이었다.
연호의 복잡한 표정을 보고 있던 설영은 입가에 살짝 조소를 띠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맥궁은 본시 대충 쏘아도 화살이 백 장은 날아가니, 저기 강가에 매어 둔 거룻배를 과녁으로 하마. 다섯 발을 쏘아서 많이 맞추면 이기는 것으로 하겠다.”
“…….”
연호는 아무 말 없이 설영이 말한 거룻배를 쳐다보았다. 백 장 가까이 떨어져 있는 강가에 매어 둔 거룻배가 손바닥만 하게 보였다.
비록 활쏘기는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도저히 그가 맞출 수 있는 과녁이 아니었다.
연호의 표정에 근심이 어리는 것을 본 황기천이 맥궁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저 녀석이 조금 전 저에게 함부로 말한 것도 있고 하니 상대는 제가 하지요.”
“그래. 진남, 전통도 건네주어라.”
“예!”
강진남이 대답하고는 전통을 건네주자 연호는 전통에 든 화살을 만져 보았다. 화살은 그가 가지고 놀던 대나무로 만든 조잡한 죽시(竹矢)가 아니라 아버지가 쓰던 광대싸리 나무로 만든 호시(┯矢)였다.
쉬익!
연호가 착잡한 표정으로 화살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황기천이 먼저 한 발을 쏘아 설영이 말한 거룻배에 정확하게 박아 넣고 있었다.
설영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연호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좌측 발을 과녁인 거룻배를 향하여 두고 섰다.
잠시 앞쪽을 쳐다보던 연호가 깔지를 빼어 왼손의 아래쪽 세 손가락에 걸자 강진남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뜻밖에도 연호가 깔지의 사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진남의 표정에는 곧 호기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연호가 과연 맥궁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 진 것이다.
천천히 화살을 살펴보며 사위에 화살을 거는 살매김을 한 뒤, 단전에 숨을 가득 담은 연호는 활을 높이 들어 올려 거궁을 하고는, 줌통을 쥐고 있던 왼 손목을 바깥쪽으로 비틀면서 등을 활짝 폈다. 그러자 맥궁이 부러질 듯 휘어지며 활시위가 최대한 당겨진 만작이 이루어졌다.
활시위가 끝까지 당겨졌음에도 연호는 곧바로 화살을 날리지 않고 천천히 속으로 셋까지를 헤아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버지가 말한, 최대한 활시위를 당긴 상태에서 목표를 노려보며 호흡을 가다듬는 유전의 법을 행한 것이다.
쉭!
연호의 손에 들린 맥궁을 떠난 화살이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날아갔다.
“아……!”
구경하던 병사들 가운데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연호가 날린 화살이 아쉽게도 거룻배를 빗나가 강물 위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비단 탄성을 지른 병사뿐만이 아니라 연호와 상대하고 있는 황기천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가득하였다. 고구려의 자랑인 맥궁은 다루기가 까다로워 그 사용법을 제대로 모르면 시위조차 당기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어린아이로 보이는 연호가 맥궁을 제대로 다루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연호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설영은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활 쏘는 법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아버지께 배웠습니다.”
“역시 고씨의 후손이라는 건가…….”
“……?”
설영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연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설영이 다시 말을 건넸다.
“맥궁과 전통은 진남에게 돌려주고,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그, 그럼 저를 평로군에 뽑아 주시는 것입니까?”
“일단은 장군님을 만나 보자.”
설영이 냉랭하게 말하고는 신형을 돌렸다.
연호는 얼굴 가득 희색을 띠었다. 이회옥을 만나기만 하면 왠지 자신을 평로군의 군사로 뽑아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추웅!”
군막 안에 널브러져 시시덕거리고 있던 명안대의 대원들은 갑작스러운 군호에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좌우로 시립하였다.
군막의 휘장이 걷히며 평로군의 척후 부대의 대장인 군후(軍候)로 있는 절충장군 이회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회옥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군막의 제일 안쪽으로 향하였다. 그의 뒤를 연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따르고 있었다.
이회옥은 군막의 맨끝에서 허리를 꾸부정하게 구부리고 있는 늙수그레한 초로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초로인은 흑 영감이라고 불리는 가장 나이가 많은 명안대의 대원이었다.
“흑 노사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회옥이 가볍게 목례하며 말을 건네자 연호는 놀란 표정으로 흑 노사를 쳐다보았다. 장군인 이회옥이 비루하게 보이는 병사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말을 건넨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회옥의 모습을 흑 노사나 다른 명안대원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흑 노사는 호기심이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연호의 시선과 마주치자 머쓱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며 이회옥에게 물었다.
“장군께서 이 늙은이에게 무슨 부탁을……?”
“잠시 이 아이를 맡아 주십시오.”
이회옥의 부탁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흑 노사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는 이마를 살짝 찌푸린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장군께서 명하신다면 당연히 따라야겠지만, 아직 어린아이 같은데 어찌하여 내게 맡기는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비정비팔(非丁非八)의 법을 알고 있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의 성이 고씨인 것이오?”
“그렇습니다. 고연호라고 합니다.”
“흠…….”
흑 노사는 연호를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회옥이 말한 비정비팔의 법은 고구려 황족인 고씨들만의 맥궁을 다루는 비법이었다. 고연호가 그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그가 고구려 황족의 후예라는 말이었다.
흑 노사는 이회옥이 자신에게 고연호를 맡기려는 진정한 의도가 궁금하였다.
흑 노사가 다시 물었다.
“장군께서도 알다시피 명안대는 이 아이가 있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오. 무슨 뜻으로 내게 이 아이를 맡기려는 것이오?”
“이 아이가 평로군의 군사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아직은 어리나 정기가 남다른 아이입니다. 노사께서 보살펴 주신다면 이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기가 남다르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연호를 살펴보던 흑 노사는 잠시 후 눈에 이채를 띠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흠. 알겠소이다. 이 아이를 곁에 두지요.”
“감사합니다.”
이회옥이 고개를 조아리자 흑 노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회옥이 몸을 돌려 연호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이제부터 노사는 너에게 스승이 되시는 것이니 배사지례를 하고 가르침에 절대복종을 하여야 할 것이다.”
“예…….”
연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이회옥은 다시 흑 노사에게 목례를 건넨 뒤 몸을 돌려 군막을 빠져나갔다.
연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흑 노사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근데, 할아버지. 배사지례가 뭐예요?”
“엉? 커험. 그, 그게…….”
흑 노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여기저기서 말들이 들려왔다.
“호! 고놈 당차네! 배사지례가 뭐냐고 묻는데?”
“배사지례는 얼어 죽을! 그냥 엉덩이나 한 번 내밀어 줘라!”
“지랄! 흑 영감이 그게 서냐!”
“그럼 대신 나한테 주던가!”
“망할 놈의 새끼가 고향에 두고 온 자식 생각도 안 나냐?”
“니미, 왜 또 고향 이야기는 꺼내고 지랄이야!”
“시발, 애새끼를 여기 데려다 놓으면 어떻게 하냐!”
“뭘 어떻게 해! 네가 젖동냥 다니면 되지!”
“염병! 젖탱이 큰 네놈이 젖 물리면 되겠네.”
“뭐냐, 이 새끼야! 시팔 새끼가 내 젖통을 네놈이 빨아 봤냐!”
“그냥, 나에게 아홉 번 절을 하면 되는 거란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말들에 놀라 멍하니 서 있던 연호는 흑 노사의 말에 의아한 눈으로 노사를 쳐다보았다.
별의별 해괴한 소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흑 노사의 인자한 목소리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는 해도 나직하게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흑 노사의 목소리가 그토록 정확하게 들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어리둥절해하던 연호는 흑 노사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퍼뜩 정신을 추스르고는 황망하게 흑 노사를 향해 구배했다.
그사이 엉덩이가 자그마한 것이 예쁘다는 둥 다시 해괴한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흑 노사에게 구배를 마친 연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군막 내에 있는 명안대의 대원들은 여기저기 널브러진 채로 자신을 보고 온갖 해괴한 소리들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옆으로 다가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흑 노사가 의아해하는 연호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나직하게 누군가를 불렀다.
“검 대주!”
“나 불렀수?”
한쪽 구석에서 졸고 있던 덩치가 큰 삼십대 초반의 장한이 벌떡 일어나 다가오며 대답했다. 그가 명안대의 대주인 검우곤이었다.
흑 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당분간 이 아이도 명안대와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으니 이것저것 좀 챙겨 주게.”
“알겠수.”
검우곤은 별다른 말없이 뚱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연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연호가 놀란 표정으로 흑 노사를 쳐다보자, 흑 노사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명안대의 군막에 모습을 드러낸 연호는 가슴에 명(明) 자가 새겨진 흑의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옷이 커서 헐렁한 자루를 뒤집어 씌워 놓은 것 같았다. 아무리 작은 무복을 입어도 아직 오 척이 되지 않는 연호에게 맞는 옷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허리에 걸린 짧은 검은 연호의 작은 체구와 제법 어울렸다. 아마도 명안대의 대원들이 대부분 짧은 검을 선호하는 탓에 준비된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연호는 무복과 검을 지급받자 진짜 평로군이 되었다는 생각에 꽤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연호가 다가오자 흑 노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평로군의 군사가 된 것이 그리 좋으냐?”
“예!”
연호가 헤벌쭉 웃으며 대답하자 또다시 여기저기서 말들이 들려왔다.
“헐! 군대가 좋다고 하네!”
“저거 미친 애새끼 아냐?”
“시박 새꺄! 나도 자원해서 군대 왔는데 그럼 나도 미친 거냐!”
“당연하지, 미친놈아! 그럼 네 정신이 제정신이냐?”
“뭐야, 씨앙! 내가 미친놈이라고!”
정신없이 해괴한 말들이 오가는 속에 흑 노사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여기 애들이 말들은 험하게 해도 다들 좋은 녀석들이니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라. 그래 아침은 먹었느냐?”
“아, 아뇨. 아직…….”
“그럼 얼굴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니 밥부터 먹자꾸나. 가자!”
“예!”
흑 노사가 걸음을 옮기자 연호는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