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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25화)
제9장 봉래항(蓬萊港)(3)
콰직!
“커헉!”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태산파의 사내는 신음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차앙!
다른 한 명의 태산파 사내가 검을 뽑아 들자 다급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만!”
호통을 친 사람은 문인이라고 불렸던 광허 도장의 제자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연호에게 포권하며 말을 건넸다.
“다시 보는군요. 혹시 청주에서 오셨습니까?”
“그렇소.”
“하하하! 역시 사부님의 말씀이 맞았군요. 반갑소이다. 제남 곽가장의 곽문인이라고 하외다.”
광허 도장의 제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연호는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온 설영은 안색이 가볍게 변하였다. 제남 곽가장은 산동 최고의 부호로 알려진 곽여기의 장원으로 산동제일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곽문인이 다시 말을 건넸다.
“하하하! 이거 청주에서 오신 분들이신지 모르고 실례가 많았소. 이 아이는 동생인 곽소화라고 하외다.”
“곽소화예요. 좀 전에는 실례했어요.”
“모르고 한 일이니 개의치 마시오.”
“그러지 마시고 저희와 합석을 하십시다.”
곽문인의 말에 난색을 표하던 설영은 유홍복을 일으키고 있는 연호를 흘깃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건넸다.
“일행이 지인을 오랜만에 만난 것 같아 곤란할 것 같소. 지금은 다친 이를 먼저 돌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호야, 그 사람을 객방으로 옮겨라!”
“꼬마야! 객방이 어디냐?”
유홍복을 부축하고 있던 연호는 슬쩍 태산파 일행을 쳐다보고는 점소이를 불렀다.
연호가 황급히 달려온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객방으로 향하자 설영은 포권을 하며 곽가 남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뵙지요.”
“하하하! 이거 아쉽군요. 그럼!”
곽문인이 포권하며 인사를 건네자 설영은 신형을 돌려 연호의 뒤를 따랐다.
***
“괜찮냐?”
“어, 견딜 만하다. 근데 어떻게 된 거냐?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그냥 군에 들어가 있었다.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냐? 그 해천방도는 뭐냐?”
“아, 그, 그냥…….”
유홍복이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리자 연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유홍복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설영이 굳어진 표정으로 객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연호가 급히 일어나며 말을 건넸다.
“형님, 죄송합니다.”
“됐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 것 같으니 할 수 없지 않느냐?”
“홍복! 인사 드려라. 내가 모시고 있는 형님, 아니 상관이시다.”
“유홍복입니다.”
“고향 친구예요. 불알친구.”
“그렇구나. 다친 곳은 괜찮으냐?”
“예, 어릴 때부터 맞는 데는 이골이 난 놈이니 괜찮아요. 근데 그 태산파의 싸가지가 왜 갑자기 그런데요?”
“뭘 말이냐?”
“갑자기 친한 척하면서 실실거렸잖아요.”
“우리 신분을 짐작한 모양이더구나. 아마 광허 도장이 눈치채고는 말을 해 준 것 같다.”
연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설영과 자신이 평로군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태산파라고 해도 산동의 지배 세력으로 떠오른 평로군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설영이 다시 말을 건넸다.
“나는 잠시 돌아보고 올 터이니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라.”
“어디 가시게요?”
“태산파가 왜 이곳 봉래현에서 소란을 피우는지 좀 알아봐야겠다.”
“예, 다녀오세요.”
연호는 설영이 밖으로 나가자 다시 유홍복을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말해 봐라. 어떻게 된 거냐? 너 혼자 이리로 온 거냐?”
“오기는 다 왔지. 근데 너도 참 대단하다.”
“뭐가?”
“안 궁금하냐?”
유홍복의 말에 연호는 잠시 침묵하였다. 그도 집 소식이 너무 궁금하였다. 그러나 혹시나 안 좋은 소식을 들을까 봐 선뜻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호가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잘 계시지?”
“휴……. 네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 노야가 고호촌 일대의 땅을 사들여서 모두 쫓아냈다. 덕분에 나랑 우리 가족도 이곳 봉래까지 흘러들어 온 거다. 너희 집은 그때 북쪽으로 간다고 들었다.”
“북쪽으로?”
“그래, 우리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쪽에 유민들이 많으니 살기 좋지 않겠냐고 했는데, 네 어머니가 오히려 유민들이 많아서 싫다고 하신 모양이더라.”
“그랬구나. 혹시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
“으응, 미안하다. 그 이후로 소식은 못 들었다. 윤호 형이 진짜 너 많이 찾았는데…….”
“형이…….”
“그래, 네 아버님도 상심이 크셨는지, 결국…….”
유홍복이 말끝을 흐리자 연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버렸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결국이라니? 무슨 소리야!”
“휴……. 네가 떠나고 두 달 후에 돌아가셨다.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술병이 나신 거라고 하더라.”
“아버지가…….”
연호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심장의 박동은 급격히 빨라지고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려왔다. 통곡을 하고 싶은데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나도 많은 죽음들을 보았기 때문에 사부인 흑 노사의 말대로 죽음에 익숙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부친의 죽음은 그 죽음들과는 달랐다. 처음 접해 보는 혈육의 죽음이었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늘 애증이 겹치는 존재였다. 술에 취해서 가족들을 괴롭힐 때면 차라리 아버지가 세상에 없었으면 하는 철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것을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사랑하던 아버지이기에 말이다.
“호야…….”
유홍복이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에 연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붉게 젖어 있었다.
유홍복이 침통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건넸다.
“우리 아버지랑 동네 사람들이 뒷산 비룡소 부근에 묘를 썼다고 하시더라.”
“그랬구나. 아저씨께 고맙다고 전해라. 참, 어디 사시냐? 나중에 한 번 찾아뵈어야지.”
“동문 밖에 있는 저자에서 장사하신다.”
“장사?”
“어, 교자랑 전병이랑 파는 조그만 가게인데, 어머니 솜씨가 좋은지 제법 잘 된다.”
“그렇구나. 네 어머니가 원래 음식 솜씨는 좋았지. 홍박이가 신나겠구나.”
“안 그래도 그 녀석 너무 살이 쪄서 돼지가 되어 간다.”
“어릴 때부터 먹을 것을 어지간히 좋아하더니…….”
말을 하던 연호는 다시 목이 메어 왔다. 동생 운호가 생각난 것이다. 삶은 감자를 하나 더 먹었다고 미안해하던 녀석이었다. 이제는 제법 많이 컸을 건데 하는 생각이 들자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유홍복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지냈냐? 군에 있었다면 혹시 그 평로군에 있었던 거냐?”
“그래. 평로군에 있다.”
“역시 그랬구나. 네가 사라지고 나서 혹시나 네가 평로군을 따라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 그 사람들이 널 구해 줬었잖아. 뭐, 어린 네가 군에 들어갈 리가 없다는 생각에 말은 안 했지만 말이다.”
“그래, 평로군에 넣어 달라고 떼를 썼지. 그래서 그냥 평로군을 따라다니며 지냈다. 그런데 너 혹시 왕치처럼 그런 일 하냐?”
“그, 그게……. 왕치처럼 사람들 막 괴롭히고 그런 거는 아니고 그냥 해천방에서 일한다.”
연호의 물음에 유홍복이 살짝 난색을 표하며 대답했다.
잠시 유홍복의 표정을 살피던 연호가 다시 물었다.
“해천방이란 곳이 뭐하는 곳인데?”
“그냥 교역 상단이야. 신라나 발해와 교역을 하는 곳이지. 부업으로 다른 일도 조금 하기는 하지만 주로 하는 일은 교역이야.”
“그럼 너는 거기서 뭐하는데?”
“그냥 일꾼이지. 짐도 나르고 하면서 시키는 일도 이것저것 하고 그러지 뭐.”
“고리채 못 갚은 사람들 찾아가서 깽판치고 하는 그런 짓은 아니지?”
“야! 나 같은 놈이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런 일을 하냐. 그런 일이나 염전 관리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어.”
유홍복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연호가 눈에 이채를 띠고는 다시 물었다.
“교역 상단이라면서 염전도 관리하냐?”
“그럼, 당연하지! 염전이 얼마나 돈이 되는데. 나도 잘은 모르는데, 사람들이 염전은 소금밭이 아니라 금 밭이라고 하더라. 무지하게 돈이 되는가 봐. 아까 그 싸가지 없는 년놈들 있잖아.”
“누구? 태산파의 그 싸가지 없는 년놈들?”
“그래, 그 곽가장 새끼들 말이야. 그 곽가장이 왜 산동에서 제일 부호인 줄 아냐? 곽가장이 염전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다더라. 사실 우리 해천방도 그 곽가장 하부 조직이란 말도 있던데. 뭐, 진짜인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염전이 큰돈이 되는 건 분명하다니까.”
유홍복은 열을 내며 이야기를 하였지만 연호는 다소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렸을 때에는 유홍복과 마찬가지로 어지간히 돈에 욕심이 많았던 그였지만, 이젠 별로 흥미가 없는 것이다.
유홍복은 한참 동안 연호에게 돈이 되는 교역 사업과 염전 등에 관해 이야기한 후에 다시 보기로 하고 돌아갔다.
유홍복은 어렸을 때를 떠올리고는 다시 연호와 함께 뭔가 돈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덜컹!
문이 열리면서 설영이 들어서자 멍하니 앉아 있던 연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다. 술이나 마저 마시자.”
“어? 이거 아까 먹던 검남춘이네요.”
“그래, 비싼 술인데 마저 먹어야지.”
설영이 검남춘과 함께 구운 오리 구이를 바닥에 펼쳐 놓자 연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설영은 먹다 남은 것이라고 했지만 오리 구이는 온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아마도 새로 사 온 모양이었다.
연호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내가 술 먹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오는 길에 네 친구를 만났다.”
설영은 무덤덤하게 대답하면서 연호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연호와 설영은 그 이후로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셨다.
술이 떨어지자 연호가 내려가서 술을 더 사 왔다. 연호는 그냥 술이 마시고 싶었다.
설영도 그 심정을 짐작하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새로 사 온 술마저 떨어지자 연호가 다시 일어섰다.
설영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던 연호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앉아 있는 설영의 표정이 이상했던 것이다.
연호가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대고 살펴보니 설영은 앉은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연호는 피식하고 실소를 흘리며 설영의 뒤로 돌아가서 그를 안아 들었다. 설영은 취해서 완전히 잠이 든 것 같았다.
설영을 침상에 눕힌 뒤 이불을 덮어 준 연호는 설영을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치고는 너무 예쁘게 생긴 설영의 얼굴은 술에 취해 홍조가 어린 탓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예뻐 보였다.
연호는 심장의 박동이 빨라짐을 느꼈다. 설영의 작고 도톰한 입술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연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설영의 얼굴 가까이로 입을 가져갔다. 왠지 설영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아 보였다.
“고마워요. 위로해 줘서…….”
설영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인 연호는 일어나서 조용히 객방을 빠져나왔다.
바닷가에 인접해서 그런지 아직 여름이 채 끝나지 않았음에도 밤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가볍게 몸을 부르르 떨며 이층의 난간으로 다가간 연호는 군데군데 횃불을 밝히고 있는 봉래항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기지개를 켰다.
창! 창! 창!
병장기가 부딪치는 격렬한 소리에 기지개를 켜고 있던 연호는 의아한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측의 선착장 앞 공터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연호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군의 전투만 겪어 온 그는 갑자기 무림인들의 싸움이 궁금해진 것이다.
연호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선착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대륙풍』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