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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24화)
제9장 봉래항(蓬萊港)(2)


챙!
곰보 사내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연호를 보고 있었다. 섬광이 번쩍이는 것만 느꼈는데 어느새 연호의 검이 그의 목 바로 옆에 멈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연호도 놀란 표정으로 곰보 사내의 뒤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태산파의 노도사가 날린 검이 정확하게 그의 검을 막아 내고는 다시 날아가 노도사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태산파의 노도사는 연호에게 다가와 천천히 말을 건넸다.
“빈도는 태산의 광허라고 하네. 검을 거두게.”
“연호! 당장 검을 거두어라!”
설영이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연호는 노도사를 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광허라고 자신을 밝힌 노도사가 다시 말을 건넸다.
“한두 번 사람을 베어 본 솜씨가 아닌데, 사문이 어디인가?”
“우리는 군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설영이 급히 나서며 대답했다. 무림인의 생리를 전혀 모르는 연호가 함부로 대꾸를 하여 또다시 그들을 자극할까 싶어 걱정이 된 것이다.
광허 도장은 눈에 이채를 띠고 설영과 연호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군문이라……. 사람을 베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것이 이해가 되는군. 그러나 그 정도의 쾌검이라면 단순히 군문의 사람은 아닌 것 같네만.”
“군문의 일이라 더 이상 밝힐 수는 없으니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설영이 정중하게 말을 건네고는 연호와 함께 걸음을 옮기려 하자 이번에는 광허 도장과 함께 있던 청년이 그들을 막아서며 말을 건넸다.
“남자치고는 너무 예쁘게 생긴 것 같은데. 정말 군문의 사람이오?”
“문인!”
광허 도장이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문인이라고 불린 청년은 여전히 설영을 유심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사부님! 음적도 이자와 같이 대단히 예쁘게 생긴 얼굴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요! 이자처럼 여자가 남장을 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라고 했어요.”
청년의 옆에 있던 여인도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설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무림인들과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애써 참고 있었지만, 그들을 막아선 두 남녀는 너무 안하무인이었다.
“말이 지나치군.”
“쌍으로 지랄들을 하네!”
설영과 연호가 거의 동시에 말을 뱉으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연호의 허리춤에 말려 있는 맥궁을 본 광허 도장의 안색이 급변하였다. 얼핏 보기에 요대와 같이 보이는 맥궁은 최근 산동의 지배자로 부상한 평로군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설영과 연호의 신분을 짐작한 광허 도장이 두 남녀를 보며 다급하게 호통을 쳤다.
“어찌 그리 경망되게 말들을 하느냐!”
삐익!
갑작스레 날카로운 소성이 앞쪽에서 들리자 광허 도장과 태산파 일행의 안색이 급변했다. 아마도 소성은 그들이 사용하는 신호였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철이 없어 결례를 하였소이다.”
광허 도장이 설영과 연호를 돌아보며 급히 말을 건네고는 앞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나머지 태산파의 사람들도 광허 도장의 뒤를 허겁지겁 따랐다.
태산파의 사람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연호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무림인은 원래 다들 저렇게 싸가지가 없어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다 그렇기야 하겠느냐. 그 광허 도장만 하더라도 예의를 차리지 않더냐?”
“그건 그렇지만……. 도를 닦아서 그런가?”
“무슨 소리냐?”
“그 광허라고 하는 노도사 말이에요. 분명히 내 검이 빨랐는데…….”
“태산파의 장로면 흑 노사께서도 쉽게 상대하지 못할 것이다.”
“설마? 우리 사부님이 얼마나 무지막지한데요.”
설영의 말에 연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영이 정색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비록 흑 노사께서 그 무위가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건 사실이지만, 무림이라는 곳은 수많은 기인이사들이 있는 곳이다. 무림이 달리 무림이겠느냐. 그러니 너도 행여 무림인들을 만나게 되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너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들은 길바닥에 깔린 돌처럼 널렸으니까. 그 성질을 죽이지 않으면 제명대로 살기는 힘들 거다.”
“쩝, 그런가? 하긴 뭐 이제 겨우 사 년 배웠으니……. 아, 그나저나 사부님은 도대체 어딜 가서 안 오는 거야.”
“그만 가자.”
설영이 걸음을 옮기자 혼자 투덜거리고 있던 연호도 얼른 뒤를 따랐다.

***

연호와 설영이 산동객잔 안으로 들어서자 열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그들을 창가 쪽의 자리로 안내했다.
연호가 자리에 앉아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봉래항이 훤하게 내려다보였다.
설영도 자리가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점소이에게 은자 한 푼을 쥐어 주면서 말을 건넸다.
“자리가 마음에 드는구나. 묵고 갈 터이니 객방을 두 개 준비하고 요기를 할 만한 것을 좀 가져오너라.”
“저기 객방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밖에 없는데요.”
“그래? 그럼 그 방을 다오.”
“예, 요리는 뭘 준비할까요?”
“너희 집이 뭐가 맛있느냐?”
“저야 다 맛있죠, 헤헤. 그래도 다들 오리 구이가 맛있다고들 하세요.”
“그래, 그러면 오리 구이 한 마리하고 소면을 다오.”
“예! 금방 차를 내어 올게요.”
“어이!”
“예?”
“검남춘 있냐?”
“당연히 있죠.”
“그럼 그거 한 병 가져와라!”
“예!”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갔다.
설영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연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검남춘이 뭔지나 아냐?”
“뭐긴요! 이태백이 즐겨 마신다는 그 술 아닙니까?”
“호! 네가 어찌 취선옹 이백을 아느냐?”
“이백이 아니라 이태백이라니까요!”
“네 녀석이 그러면 그렇지! 이백이나 이태백이나.”
“엥? 둘이 같은 사람이에요? 만구 형님은 이태백이라던데.”
“한만구가 네 녀석한테 바람을 넣었구나.”
“뭐, 어쨌든 처음으로 오붓하게 한잔하는데 분주나 화주 이딴 거보다는 좋잖아요. 검남춘! 벌써 이름부터가 있어 보이잖아요!”
“오붓하게는 무슨. 그러고 보면 너도 진짜 많이 컸다. 처음 네 녀석을 봤을 때 딱 조금 전의 그 점소이만 했는데 말이다.”
“무슨 소리예요. 그보단 컸다고요!”
“그게 그거지, 이 녀석아. 하여튼 얼굴은 새까맣고 눈은 쭉 찢어진 게 독기만 있어 가지고 말도 더럽게 안 듣더니만…….”
“이 자식은 왜 빨리 차를 안 가져오는 거야!”
설영이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을 하자 연호는 쑥스러운 생각이 드는지 애꿎은 점소이를 원망하며 주방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때 연호의 눈에 빠르게 이채가 스쳤다. 객잔의 입구로 여섯 명의 덩치 큰 장정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장정들은 모두 검은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봐서는 무사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라? 어디서 본 듯한 면상인데…….’
연호가 눈에 이채를 띠었던 것은 여섯 명의 장정들 중에 키가 가장 작아 보이는 자의 얼굴이 왠지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누구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연호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설영도 고개를 돌려 장정들을 힐긋 쳐다보고는 연호에게 말을 건넸다.
“표정이 왜 그러냐?”
“아뇨. 왠지 낯익은 자가 한 명 있는 것 같아서…….”
연호가 중얼거리며 대답하는 사이 점소이가 차를 내왔다.
연호는 점소이가 차를 탁자에 내려놓자 나직하게 물었다.
“저치들은 뭐하는 자들이냐?”
“쉿! 말조심해요. 해천방의 사람들인데요. 잘못 보이면 맞아 죽어요.”
“해천방? 그게 뭐하는 곳인데?”
“뭐하긴요. 교역도 하고, 고리채도 하고, 그런 곳이죠.”
“뭐야? 그럼 한마디로 돈벌레 부하 새끼들이라는 말이네.”
연호는 어렸을 때 왕치에게 당했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점소이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런 말 하다가는 큰일 나요!”
“알았으니까 그만 가 봐라.”
“예!”
점소이가 다시 주방으로 달려가자 연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찻물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자신이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아는 사람 중에, 그것도 이곳 등주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을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점소이가 요리와 검남춘을 내어 오자 연호는 반색하며 말을 건넸다.
“햐! 이 술이 그 검남춘이란 말이네요. 형님 한잔해요. 우리도 이태백인지 이백인지 하는 그 사람처럼 멋들어지게 마셔 봅시다.”
“이백처럼 멋들어지게 마시다가 가는 수가 있으니 조금씩 마셔!”
“어? 이태백이 죽었어요?”
“그래, 삼 년 전인가 죽었다고 하더라!”
“뭐, 살 만큼 살았으니 죽었겠죠. 설마하니 검남춘 때문에 죽었겠어요.”
말을 하던 연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입구 쪽에 앉아 있는 해천방도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갖 음담패설을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연호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 그 새끼들 더럽게 시끄럽네!”
“쓸데없이 사고치지 말고 술이나 마셔라.”
설영이 정색하며 말을 건넸다. 괜한 분란을 일으켜 등주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설영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연호는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떠들어 대던 해천방도들이 모두 입을 닫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연호는 곧 그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봉래항에서 만났던 태산파의 사람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태산파 일행은 싸가지 없던 두 남녀와 다른 사내 두 명이었는데 광허 도장과 곰보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연호가 턱짓을 하자 설영이 나직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니 신경 쓰지 마라.”
“쩝!”
연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술잔을 드는 순간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어딜 쳐다보는 거냐!”
광허 도장의 여제자가 해천방도들이 있는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해천방도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이는 대머리의 장한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건넸다.
“소저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그만 노여움을 푸십시오.”
“오해? 저놈이 음흉한 눈으로 나를 힐끔거리는 것을 똑똑히 봤거늘 어디서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녀가 가리킨 해천방도는 바로 연호가 얼굴이 낯익다고 생각했던 그자였다.
지목을 당한 해천방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요. 음흉한 눈으로 보다니요. 전 다만 소저께서 너무 아름다우시기에…….”
짝!
광허 도장의 제자들과 함께 있던 태산파의 사람들 가운데 맨끝에 앉아 있던 자가 변명하던 해천방도의 뺨을 후려갈겨 버렸다.
“컥!”
“그 더러운 입으로 감히 누구를 희롱하려는 것이냐!”
태산파의 사내는 호통을 치며 다가갔고, 곧 뺨을 맞고 나가떨어진 해천방도를 발로 짓밟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연호는 나직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동료가 당하고 있는데도 구경만 하고 있다니 쥐새끼들만도 못한 놈들이네…….”
“그만큼 무림인이 두려운 거겠지.”
“홍복?”
자신의 대꾸를 들으며 술을 들이키던 연호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중얼거리자 설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연호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자 설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뭘 하는 거냐!”
“저놈, 저 새끼 홍복이에요!”
“홍복? 그게 누구…….”
설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 사이, 연호는 이미 태산파와 해천방도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어이! 이제 그만 좀 하지!”
나직한 호통이 연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연호는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쓰러져 있는 해천방도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연호는 얼굴에 묘한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유홍복. 너 이 새끼, 홍복이 맞지?”
“여, 연호? 저, 정말 연호냐?”
“그래, 이 새꺄! 형님이시다!”
“연호야!”
유홍복은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누런 이를 훤히 드러내며 반갑게 외쳤다.
유홍복을 안아 일으키려던 연호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태산파의 사내가 여전히 유홍복의 가슴을 발로 밟고 있었던 것이다.
연호가 싸늘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어이! 그 발 좀 치우지!”
“어이?”
태산파의 사내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연호를 노려보더니 느닷없이 연호의 얼굴을 향해 발을 내질렀다.
연호는 고개를 슬쩍 틀어 사내의 발을 흘리고는 신형을 튕기듯이 일으키며 어깨로 사내의 허벅지를 들어 올려 버렸다.
태산파의 사내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연호가 더욱 안으로 파고들며 오른발 뒤꿈치로 상대의 왼쪽 오금을 찍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