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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풍 1권(23화)
제8장 백호의 꿈[白虎之夢](4)
둥! 둥! 둥!
“와! 와!”
북소리가 울리자 철기대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발을 굴러 댔다. 처음으로 축국 시합에서 명안대를 누른 것이다.
조주한이 터덜터덜 걸어오며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시박! 오골계 새꺄, 너 어제도 술 처먹었냐?”
“술은 시발! 어젯밤에 같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시박 새끼가 그걸 놓쳐서 시합을 망치냐! 만날 발만 쳐올리지 말고 대가리도 쓰라고 했잖아!”
“에이, 시발! 습관적으로 발부터 올라가는데 어떡해요!”
“이 새끼가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꾸야!”
조주한이 버럭 호통을 치자 그의 곁으로 다가온 연호가 말을 건넸다.
“에이, 부대주 형님, 그만하세요. 연추 형도 지려고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대가리가 안 움직이는데 어떡해요. 오죽하면 닭대가리라고 하겠어요.”
“뭐야! 이 새끼가 뒈질래!”
“지랄하고 있네. 네놈이 뭔 재주로 연호를 조지냐? 이 자식이 아직도 연호가 옛날의 꼬맹인 줄 아나…….”
“에이, 시발! 그러니까 내가 전부 잘못했어요. 됐어요?”
“그래, 시박 새꺄! 네가 다 말아먹었으니까, 곰탱이 돈도 네가 책임져!”
조주한의 호통에 연호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잉? 곰탱이가 돈 걸었어요?”
“그래, 시박! 그것도 닷 냥이나 걸었다. 그 짠돌이가 돈 잃은 걸 알면 우리 전부 패 죽이려고 할 거다.”
“킁! 그럼 진작 말씀을 하셔야죠.”
연호가 책망하듯이 말을 하자 강연추가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지랄! 진작 말했으면? 어차피 시합에 졌는데 뭐 뾰족한 수라도 있냐?”
“당연히 있죠. 곰 대주님이 돈 걸은 걸 알았으면 당연히 안 졌죠!”
연호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조주한이 가자미눈을 한 채 연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째 말이 좀 그렇다. 설마 일부러 졌다는 말이냐?”
“그야 뭐, 철기대도 한 번쯤은 이겨야죠.”
“뭐야! 시박, 너 이 자식! 철기대한테 돈 걸었지?”
“그게, 뭐 어쨌든 딴 돈이 닷 냥은 넘어야 할 텐데……. 헤헤!”
연호가 실실거리며 대답하자 조주한이 죽일 듯이 연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강연추를 쳐다보았다.
강연추는 연호가 철기대에게 돈을 걸고서 일부러 졌다는 말을 하는데도 별말을 하지 않고 멀뚱멀뚱 딴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의 강연추라면 당연히 길길이 날뛰어야 했다.
조주한이 강연추를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쳤다.
“오골계 너도 철기대한테 돈 걸었지? 이 자식들이 아주 작정을 했네. 작정을 했어! 몰라, 나는 모르니까 니들이 알아서 곰탱이 돈 돌려줘라잉!”
“나는 연호 이 자식 따라한 것뿐이요.”
“그래서 너도 돈 벌었잖아. 시박!”
“그러니까 내가 번 돈을 왜 곰탱이한테 주냐고요!”
“어라 뭔 일이 있나 본데요. 누가 왔나?”
연호가 소란이 일고 있는 연병장 저쪽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말다툼을 하고 있던 조주한과 강연추도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병장 서쪽 끝에 일단의 행렬이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낯선 행렬을 보고 있던 연호는 마침 양무오가 그들에게 다가오자 반색하며 물었다.
“무오 형님! 무슨 일입니까? 저 행렬은 뭐예요?”
“조정에서 칙사가 왔다.”
“그래요? 조정에서 칙사가 무슨 일로 왔대요?”
“황제가 이 장군님을 정식으로 평로치청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이정기라는 이름까지 내렸다고 하는구나.”
“오! 그렇군요.”
“뭐야? 그럼 이제부터 이정기 장군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조주한의 말에 양무오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렇지는 않을 걸세. 장군님이 어떤 사람인데 당나라 황제가 내리는 이름을 덥석 받아서 쓰겠나?”
“하긴 뭐 당나라 조정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분이시니.”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싫어하시는 거지.”
조주한과 양무오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당나라 조정의 칙사 행렬을 쳐다보고 있던 연호는 얼마 전에 있었던 평로군과 치주군과의 전쟁을 떠올렸다.
평로치청의 실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은 연호의 예상대로 평로군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강진한이 이끄는 평로 우군이 치주성을 점령하자 후희일의 치주군은 사기가 급격하게 저하되었다. 게다가 후희일에게 동조하려던 사주의 군대들도 곧바로 지지를 철회하였다. 후희일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전쟁은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일찍 끝이 났는데, 거기에는 연호의 공이 컸다.
연호는 원세연을 회유하여 반기를 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세연은 치주성을 탈환하겠다는 명분으로 일만의 병사를 이끌고 출정에 나선 뒤 곧바로 투항을 해 버렸다. 그 일이 후희일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원세연의 투항 이후, 이미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져 있던 치주군은 급속도로 와해되었다. 달아나거나 투항하는 자들이 속출하였고, 후희일은 그 일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후희일은 철기대와 명안대마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자 왕이현과 함께 심복 이천 명만을 데리고 남쪽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렇게 내전을 끝내고 평로치청의 지배자로 복귀하게 된 이회옥은 이제 공식적으로 당나라 조정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불과 서른넷의 나이에 이정기라는 이름으로 당나라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때는 서기 765년 당 대종(大宗) 영태(永泰) 원년 7월의 일이었다.
제9장 봉래항(蓬萊港)(1)
“우와! 무슨 배가 저리 커요?”
연호는 봉래항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상선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배라고는 강이나 호수를 건너는 나룻배밖에 보지 못하였던 연호로서는 수백 명을 싣고 다니는 거대한 상선의 크기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호의 옆에서 배를 쳐다보던 설영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표식을 보니 아마도 신라로 가는 배인 것 같구나.”
“신라…….”
연호는 말끝을 흐렸다. 고당전쟁을 이용하여 할아버지의 나라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땅의 일부를 차지한 삼한의 한 나라라고 들었다. 그 때문인지 원래 고구려니 당이니 하는 것 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던 연호였지만 신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거부감이 느껴졌다.
“뭘 그리 생각하느냐? 그만 가자!”
“예? 아, 예. 근데 평복까지 하고 여기 봉래현에는 도대체 왜 온 겁니까?”
연호가 설영의 뒤에 바싹 따라붙으며 물었다.
설영은 고개를 돌려 연호를 힐긋 쳐다보고는 말을 건넸다.
“이번에 장군님께서 평로치청의 절도사가 되시면서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라는 관직을 제수받으셨다.”
“해운압…… 뭐요?”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젠장! 뭔 관직 이름이 그리 어려워요! 근데 그게 뭐하는 관직인데요?”
“해운을 통한 신라, 발해와의 모든 교역과 외교의 업무를 관할하는 직책이라고 들었다.”
“그래요? 근데 그거랑 이곳 봉래현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멍청한 놈! 너는 저기 저 배들이 보이지 않느냐?”
“당연히 보이죠! 좀 많네…….”
연호는 봉래항에 정박하고 있는 수많은 배들을 보면서 질린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설영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연호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 봉래현은 등주에서 가장 큰 교역항이다. 신라나 발해는 물론이고 저 멀리 대식국(大食國: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에 있던 사라센 제국)까지 항해하는 배들이 모두 이곳을 통해 대륙으로 드나드는 곳이란 말이다.”
“아, 그러니까 이곳 봉래현을 포함해서 등주도 이제부터 장군님이 다스리게 된다는 그 말이네요.”
“아직은 등주가 평로치청에 들지 않았으니 딱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설영의 말에 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회옥은 활발하게 외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봉래항을 비롯하여 등주의 정세를 미리 살펴보도록 설영에게 지시를 한 모양이었다.
다시 설영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연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도복을 입은 노인과 무복을 입은 젊은 남녀 한 쌍을 관심 있게 보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검을 지니고 있었다.
“형님! 저자들은 뭡니까?”
연호의 시선을 따라 세 명의 인물들을 쳐다본 설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태산파의 도사와 그 제자들인 모양이군.”
“태산파?”
“태산파는 태산에 자리한 도교를 섬기는 도관이자 검법으로 유명한 무파이다.”
“그러니까 저들이 바로 그 사부님이나 형님들이 말하던 무림인이라는 말이네요. 흠……. 그다지 세 보이지는 않는데.”
“저들 무림인은 우리와는 다른 자들이니 괜한 호기심을 보이지 마라.”
연호가 호기심이 잔뜩 서린 눈으로 태산파의 노도사와 그 제자들을 노려보자 설영은 괜한 시비가 생길까 염려스러운 모양인지 정색하고는 말을 건넸다.
연호는 설영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근데 형님은 어떻게 그런 것을 잘 아세요. 형님도 계속 군문에 있었잖아요.”
“그, 그야 나도 무파의 제자이니 그 정도는 아는 것이다.”
“그럼 형님도 무림인들처럼 사문도 있고 사형제도 있고 그런 거예요?”
“당연히 사문도 있고 사형제도 있다.”
설영의 대답에 연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형님이랑 장군님의 검법이 비슷하던데, 혹시?”
“그래, 장군님이 내게 사형이 되신다.”
“아, 그렇구나. 사문의 이름이 뭔데요?”
“가르쳐 주면 네가 아느냐?”
“그야 뭐, 당연히 모르지만,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나의 사문은 을선문이다.”
“을선문……. 뭔가 현기가 느껴지는 이름이네요. 쩝! 사부님이 돌아오시면 우리도 사문 이름을 짓자고 할까?”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묵을 객잔이나 찾아보자. 왠지 이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구나.”
혼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던 연호는 설영의 말에 걸음을 옮기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영의 말마따나 왠지 주위가 어수선해 보였다. 게다가 다시 보니 노도사의 제자들과 같은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고 있었다.
“잠깐 멈추시오!”
설영과 연호가 몇 걸음 나아갔을 때 갑자기 두 명의 청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그들은 태산파 노도사의 제자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설영과 연호가 쳐다보자 두 명의 사내들 중에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남아 있는 키가 큰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냉랭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우리는 태산파의 제자들로 흉악한 음적을 찾고 있소. 잠시 행랑을 풀어 보여 주시오!”
“…….”
연호는 순간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설영은 이회옥의 부관이었다. 산동을 지배하는 평로치청의 이인자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평로치청의 땅이나 마찬가지인 이곳 등주의 한복판에서 설영의 앞을 막고 행랑을 풀라고 하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연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냉랭하게 말을 뱉었다.
“미친놈이군…….”
“뭣이라!”
차앙! 차앙!
곰보 사내와 그의 동료가 호통과 함께 검을 뽑아 들자 설영이 다급하게 호통을 쳤다.
“연호! 물러서라!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관원이오. 그러니 비켜서시오.”
“관원이라면 관인이 있을 것 아니오. 당장 꺼내 보시오.”
곰보 사내가 여전히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대꾸했다.
순간 설영의 안색이 살짝 변하였다. 생각해 보니 관인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이제껏 갑주와 검으로 모든 것을 말해 왔으니 관내를 벗어나 여행을 할 때는 관인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설영의 표정을 읽었는지 곰보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뱉었다.
“흥! 관인도 없이 관원을 사칭하는가? 당장 행랑을 풀어 보라!”
“관인인지 뭔지 우리는 그딴 것 모르니 꺼져!”
“죽고 싶으냐!”
연호의 냉랭한 대꾸에 곰보 사내가 검을 내미는 순간, 뒤에서 호통이 터져 나오며 섬광이 번쩍였다.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