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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칼 1



단칼 1(1화)
서(序)


“상대를 단칼에 베는 게 무인의 도리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1.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 덕분에(1)


호걸주가(豪傑酒家).
사천성 성도 시장통 어귀에 자리한 작은 주가. 대로변에 자리한 엄청난 규모의 객잔에 비하면 그야말로 눈곱만큼 작은 주가지만 그래도 시장통 어귀에 자리한 덕분에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어 제법 장사가 잘되는 곳이다.
특히 이곳 주인, 왕평상이 만드는 오리 요리는 성도는 물론 사천성에서도 이름이 자자해 성도의 유명 인사는 물론 외지인들도 일부러 들를 정도다.
한 중년 사내가 주방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손에 든 무언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사내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휴우!”
땅이 꺼질 것 같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사내의 얼굴에 드리운 수심 역시 더욱 짙어졌다.
한숨을 내쉬는 것은 이곳 호걸주가의 주인 왕평상이다. 그리고 그가 한숨까지 내쉬면서 보고 있는 것은 작은 장부다.

불한당잡배명부(不汗黨雜輩名簿).

장부의 겉장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불한당잡배명부?
글자만 따진다면 떼지어 다니며 행패 부리는 놈들과 잡스러운 놈들의 이름을 기록한 장부라는 말이다.
그러나 왕평상의 장부에 기록된 불한당잡배명부는 의미가 그것이 아니다. 왕평상의 그것은 외상으로 술을 처먹은 자들 가운데 돈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화상들을 따로 적어 놓은 외상 장부다.
한마디로 악덕 외상 장부라는 말이다.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하던 왕평상이 천천히 장부를 넘겼다.
이치돈, 고유발, 정초후, 주병천…….
한 장에 한 사람의 이름. 이름 밑에는 그들이 외상술을 먹은 일자와 금액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적게는 닷 냥에서 많게는 수십 냥이 넘었다.
그 속에 기록된 자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치돈은 성도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판관이요, 정초후는 조정에서 제법 높은 관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다른 이들 역시 그 위명이 성도는 물론 사천성 전역에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에게 외상값을 받을 수는 없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아야 하는 일. 그렇다고 외상을 거절할 수도 없다. 그것 역시 왕평상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외상을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없으니 왕평상으로서는 그야말로 원수나 다름없는 처치 곤란의 인물들…….
“개자식들, 내 돈이 없어서 못 갚는 것 같으면 차라리 이해를 하겠다.”
팍!
왕평상이 오만상을 쓰며 들고 있던 장부를 주방 바닥에 팽개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발을 들어 올리더니 바닥에 떨어진 장부를 발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팍팍팍!
장부를 마치 그 속에 적힌 인물들의 면상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며 짓밟았다.
그렇게 한동안 짓밟고 나니 조금은 기분이 풀렸다.
“이 개새끼들아, 내 더러워서 안 받는다. 그래, 거지 똥구멍에서 시금치 빼먹으면서 네놈들이 언제까지 잘사나 한 번 보자. 에이― 퉤!”
장부에 침을 뱉고는 너덜너덜한 장부를 집어 들었다. 찢어 버릴 시간이었다.
어차피 받을 수 없는 돈. 그것들을 보며 오늘처럼 한숨만 내쉬느니 차라리 장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이 일은 왕평상이 이곳 성도 시장통에 호걸주가를 시작한 이후 매년 반복된 연례 행사였다.
왕평상은 이것을 잡배차열식(雜輩車裂式)이라고 불렀다.
차열이란 죄인의 머리와 사지를 각각 마차에 묶어 찢어 죽이는 무시무시한 형벌, 왕평상은 외상 장부를 통해 놈들을 벌주는 것이다.
장부를 찢기 위해 양손에 바짝 힘을 주었던 왕평상이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주가의 문이 열리며 그림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헉!”
왕평상이 놀란 듯 외마디를 토하며 재빨리 몸을 숙였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들어오는 자가 외상 장부에 적혀 있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씨 아저씨!”
주가로 들어선 사내가 왕평상을 보자마자 반가운 듯 불렀다.
오 척 정도의 아담한 키에 조금 마른 듯한 사내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왕평상을 재미있다는 듯 마주보고 있었다. 말라서 그런지 대충 보면 스물은 넘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면 그게 아니다.
초롱초롱한 눈빛, 입가에 보이는 순진무구한 미소. 거기에 뽀송뽀송한 솜털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목소리도 조금은 이상했다.
맑고 높은 목소리.
목소리만으로 보면 사내는 아무리 많아야 열다섯을 넘기지 않은 소년임이 분명했다.
“휴우―!”
사내, 아니, 소년을 본 왕평상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잰걸음으로 달려오더니 방금 주가로 들어온 녀석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이고, 유심이 죽네―!”
소년이 악다구니를 쓰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더니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왜 때려? 아파 죽는 줄 알았잖아.”
“뭐 아파?”
“그럼 아프지 안 아파? 아저씨 주먹이 어디 보통 주먹이야. 십 년도 넘게 부엌칼로 단련된 주먹인데 안 아프면 그게 이상한 거지.”
“뭐? 그런 놈이 매품팔이를 해? 에라, 이 자식아. 시장 한복판에서 길을 막고 물어봐라. 사천전충 장유심이 늙은 숙수 왕평상의 꿀밤을 아파한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거다.”
“개가 웃는 소리하고 계시네. 다른 놈한테 맞는 것하고 왕씨 아저씨한테 맞는 것 하고 같은 줄 알아?”
“그럼 달라?”
“당연하지. 다른 놈한테 맞는 거야 돈 받고 하는 일이잖아. 아저씨가 언제 돈 내고 꿀밤 때린 적 있어?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료로 맞아주는 사람은 아저씨뿐이라고. 영광인 줄 알아.”
“뭐?”
왕평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듯 입을 벌리며 장유심을 보았다.
조금 전 악다구니를 쓰던 때의 붉으락푸르락하던 모습과는 달리 유심은 생글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야말로 귀엽고 천진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의 실상은 외모와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장유심(張幽心).
성도에서 이 인물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제로 그를 직접 만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적어도 장유심이라는 이름은 다 안다. 아니, 이름은 몰라도 사천전충(四川錢蟲), 즉 ‘사천성 돈벌레’라는 그의 별호는 사천성 성주, 주명악이라는 이름보다 더 유명한 별호다.
돈벌레.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결코 좋은 별호는 아니다. 돈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는 그야말로 잡놈들. 그런 사람을 좋게 생각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장유심의 앞에 붙는 사천전충은 다르다. 그를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다르게 생각한다. 그것은 장유심에게는 다른 돈벌레와 달리 ‘받을 돈만 받는다.’라는 나름대로의 원칙과 소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장유심을 직접 겪어 본 사람들은 사천전충이라는 별호를 지옥의 나찰보다 더 무섭고 징그럽게 생각하게 된다.
이유 없이 남의 돈을 탐하지는 않지만 정당하게 돈을 버는 일이라면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염라대왕의 수염이라도 뽑아 버리고 말 그런 인물이다.

한참 동안 왕평상을 빤히 들여다보던 유심이 손을 앞으로 쏙 내밀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그거 나한테 넘겨!”
“그거라니 뭐?”
왕평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든 녀석이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유심은 그런 왕평상을 여전히 바라보며 앞으로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서, 설마?”
왕평상의 눈이 동그래졌다.
유심이 말한 그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왕평상이 신주 단지 모시듯 가슴에 품고 있는 불한당잡배명부를 조심스럽게 왼손으로 가리켰다.
유심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뭐에 쓰려고?”
“그건 알 것 없어. 한 냥!”
“뭐? 겨우 한 냥. 이놈아, 오백 냥이 넘는 외상 장부를 한 냥에 넘기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럼 찢어 버리시던지.”
획!
유심이 몸을 번개처럼 돌리며 문으로 향했다.
유심의 모습에 다급해진 것은 왕평상이었다. 살며시 가슴속에 묻어 있는 장부를 보았다.
어차피 한 냥도 받지 못하고 찢어 버릴 장부였다. 한 냥이라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나마 이익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묘한 것이다. 분명 한 냥이라도 건지는 것이 이익이건만 그래도 왠지 한 냥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흥정이라도 해 보자.’
계산을 마친 왕평상이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유심은 벌써 문 앞까지 걸어가 있었다.
“두두두…… 두 냥!”
다급한 외침. 그러나 결과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찢어 버리라니까.”
드르륵!
유심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그대로 문을 열었다.
‘젠장, 사천전충에게 흥정을 하려던 내가 미친놈이지.’
당황한 왕평상이 벌써 한 발을 밖으로 내딛은 유심의 뒤통수를 향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하하하…… 한 냥!”
유심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이미 지금과 같은 결론을 짐작하고 있었다. 한 푼도 받지 못할 휴지 조각으로 한 냥을 벌 수 있는데 그것을 거부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유심이 입가에 미소를 거두며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는 왕평상을 향해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며 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냈다.
“여기. 다음부터 여기에 적힌 인간들이 외상으로 뭘 처먹을 염려는 없게 할게. 그럼 아저씨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잖아. 안 그래?”
“뭐? 그게 정말이냐?”
“내가 언제 헛소리하는 것 봤어?”
유심이 환한 웃음을 보이며 은자를 건네고 외상 장부를 빼앗듯 낚아채며 문을 향해 달려갔다. 왕평상은 그런 유심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장부에 적힌 인물들은 그야말로 보통 사람이 아니다. 잘못해서 유심에게 무슨 변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걱정을 거두었다.
자신의 장부를 가져간 사람은 사천성에 소문이 자자한 사천전충이다.
“내가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그나저나 저놈도 아비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구먼. 허허허허!”
왕평상이 언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넉넉한 너털웃음을 토하며 은자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 * *

“형! 그게 뭐야?”
밖으로 나온 유심에게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육 척에 가까운 제법 큰 키였지만 몸뚱이는 인간의 뼈다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앙상하기 그지없다. 얼굴에 검은 수염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는 유심보다 적어도 두세 살은 많은 것 같은데 그는 유심을 형이라고 불렀다.
사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유심이 왕평상에게 거금 은자 한 냥을 들여 구입한 불한당잡배명부였다.
“돈.”
“돈?”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갑자기 장부를 들고 나타나 돈이라니 유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심이 그런 사내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꺽다리, 머리 굴리지 마! 넌 머리 쓰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내가 말했지. 너는 이 형님이 말씀하면 그대로 믿으면 돼!”
“그야 물론이지. 내가 형 말을 안 믿으면 누구 말을 믿겠어. 그나저나 애들 부를까?”
“일단 그래 봐.”
“알았어.”
휘리릭!
대답과 동시에 꺽다리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몸을 돌렸나 싶었는데 벌써 오 장여 앞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저 마구잡이로 달리는 것에 불과함에도 그 속도가 엄청났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삼류 경공술을 익힌 뜨내기 무인에게 뒤지지 않아 보였다.
“새끼! 진짜 걸음 하나는 타고 났다니까.”
그런 꺽다리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는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